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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의 만남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과 강인한 · 정끝별의 시
강 경 호
19세기 중반의 파리는 여전히 중세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53년에 시작해 1869년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를 놓고 새로운 건축들이 들어섰다. 이후 본격적인 근대미술의 신호탄이랄 수 있는 인상주의들이 나타났다. 이 무렵 인상파 화가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던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on, 1840~1917)의 눈엔 상징주의에 비해 인상주의는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보들레르, 행보, 베를레느 등의 문학가는 암울하고 신비로운 정서로 표현했다. 이 무렵 19세기 말 유럽은 혁신적인 과학발전으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불안과, 퇴폐의 정서가 만연했다. 예술계는 새로운 작품을 내놓아야 했고, 파리의 시민들은 지루한 작품에 대해서 혹평했다. 귀족, 부르주아들은 예술의 새로운 자극과 표현방식을 음미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권태였다.
로댕은 상징주의 작가들을 흠모하고 그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보들레르를 숭상한 나머지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로댕이 인상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상징주의에 깊이 빠진 것은, 인상주의는 자연속의 색채를 그리고 내면의 의미보다 대상이 보여주는 찰라를 포착해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상징주의는 상징을 통해 현실세계를 표현했다. 즉 감성의 세계, 질병, 죽음, 죄악, 정열, 고대 신화와 종교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문명의 발전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큰 변화와 실증주의 세계관의 확대, 종교와 윤리 기반이 흔들리고 니이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 등, 이러한 사회 변화의 흐름에 녹아든 세기 말 정서로 인하여 유럽은 변화에 대한 기대와 미래에 대한 불안, 타락, 세계고(世界苦)적 비관론, 죽음에 대한 유희, 천박과 퇴폐의 문화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렇듯 로댕은 변혁기의 정서와 정신을 조각을 통해 잘 형상화시켰다. 그런 그를 제2의 미켈란젤로라고 칭했을 정도이니 그의 천재적 예술성은 근대 조각의 비조라고 할 만하다.
산업화로 변해가는 파리에 꿈을 좇아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인 로댕의 아버지 장 바티스트 로댕은 수도원 평수사의 옷을 벗고 파리에서 경찰서 하급관리가 되어 마리 셔페르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여 딸을 낳은 2년 후 로댕을 낳는다. 로댕은 윤리와 종교를 중요시하는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며 알렉상드르 기술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근시여서 눈이 안 좋았아 칠판의 글씨가 잘 안 보여 받아쓰기는 물론 라틴어, 수학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리고 말이 없고 운동장 한구석을 홀로 지키는 소년이었다. 그가 살던 동네 잡화상에서 주인은 잡지에서 뜯어낸 종이에 과일을 담아주곤 했는데, 어린 로댕은 구겨진 종이를 펴서 잡지의 사진을 따라 그리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런 그를 아버지는 아들이 공무원이 될 확률이 희박하다고 생각해 양조기술자가 되길 바랐지만 로댕은 오직 미술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1853년, 루이 14세가 각 도시마다 세운 무료미술학교에 등록한 로댕은 여전히 외톨이였다. 혼자 학교를 배회하다가 어느 날 계단을 올라 모르는 방문을 열었는데 이 평범하고 작은 사건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감동과 충격을 로댕은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때 나는 처음 점토라는 것을 보았다.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팔·다리·머리·발과 여러 작은 부분들을 만들어 보고, 다음으로 몸 전체를 만들어 보았다. 나는 이 모든 작업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능숙함은 지금과 견주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희열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낯선 교실 문을 열자 그곳에서 조각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충격을 받고 조각에 입문한 로댕은 그때 조각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부모를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낸다. 이후로 로댕은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 되었어도 이에 굴하지 않고 20여년 동안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돈을 벌기 위해 실내장식업자와 건축업자의 밑에서 일을 할 때 로댕이 엽형환식(葉形環飾)을 만드는 것을 보고 같이 일하는 소조공이 아주 납작하게 하여 늘어놓고 있는 것을 나무랬다.
“자네는 잎을 납작하게 만드는군. 그러니까 제 맛이 안 나지. 그건 부조(浮彫)야. 반대로 첨단을 자네 쪽으로 돌려야 하네. 그렇게 하면 환조(丸彫)가 되거든. 이제부터 조각할 때는 형체를 넓이로 봐선 안 되고 깊이로 봐야 하네. 물체의 표면은 어떤 양(量)의 일단으로 봐야지. 자네 쪽으로 향하고 있는 다소 넓이를 가진 하나의 첨단으로 보란 말일세. 이렇게 하면 살을 붙이는 묘체(妙諦)를 터득할 수 있지.”
이때의 충고를 로댕은 평생 잊지 않았다. ‘깊이와 안까지의 거리, 입체의 양’이라는 요령을 갑자기 알게 된 것 같이 생각된 것이다. 로댕은 기능적인 작업이 계속 되면서 학문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다. 그는 글 읽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도서관에서 빅토르위고, 알퐁스 라마르틴, 쥘 미슐레 등의 문학을 탐독했다. 문학작품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에로 안내했다.
그런데 1861년 22세 때 누나인 마리아가 실연한 후 상처를 받아 정신쇠약증세를 보여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2년 후 세상을 뜨고 마는 사건이 터졌다. 누나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로댕은 슬픔에 빠져 조각을 멀리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수도원에서 얼마간의 위안을 받은 로댕은 수도원을 떠나 일용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때 로댕은 극장 외벽 여신상을 제작하는데 부근 옷가게에서 일하는 어여쁜 처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평생을 같이 한 로즈 뵈레이다.
로댕은 르브링가의 마굿간을 작업실 삼아 작업을 시작했다. 로즈가 처음 모델이 된 「미뇽」이 탄생한다. 그러나 로댕은 포즈 선택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흡족해 하지 않는다. 대신 비비라는 이웃을 모델로 삼은 인간의 비참함을 내면을 표현한 「코가 부러진 사나이」에 대해서는 크게 만족해 한다. 그 작품을 처음으로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비방만 받고 낙선하고 만다.
그러나 조각가이자 상인인 벨뢰즈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되었는데 그의 삶은 점점 나아지기 시작한다. 그가 참여해 제작한 벨뢰즈의 작품들이 비싼 값으로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벨뢰즈의 문하에서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작품에 벨뢰즈가 서명하면 작품이 완성되는 식이었는데 로댕이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사건이 생겨 해고되고 만다.
로댕은 홀로 선 후 라파엘로,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들을 탐구하기 위해 1875년부터 이듬해 까지 이탈리아에 가서 거장들의 작품들을 만나고 돌아온다. 파리로 돌아온 로댕을 반긴 사람은 그를 해고해 버린 벨뢰즈였다.
1877년 로댕은 「청동시대」라는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그런데 자살할려는 모델을 직접 본 떴다는 비평가들의 주장이 제기되어 세상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조각가들들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어 위로가 되었다.
1881년 살롱전에 「세례 요한」이 3위로 입상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세례 요한」을 구입한 데 이어 그가 평생을 바칠 「지옥의 문」을 의례받기에 이른다. 로댕의 명성은 쌓이기 시작했다. 로댕은 「지옥의 문」의 전체 구상을 그가 읽은 단테의 『신곡』,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느낀 우울과 감탄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후 로댕은 「칼레의 시민」, 「빅토르 위고상」 제작 요청도 받는다.
로댕의 <지옥문>. 상단의 중앙에 '생각하는 사람'이 들어있다. (1880~1917)
이 무렵인 1883년 그의 삶 속에 카미유 클로델이 등장한다. 이때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스무 살의 카미유 클로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로즈의 질투를 받으며 9년 동안 동거한다. 로댕의 작품 속에서 카미유 클로델은 「사색」, 「오오라」, 「지옥의 문과 저주받은 여인들」의 모델이 된다. 로댕은 카미유 클로델과의 애정행각 속에서도 로즈와는 끝까지 결별하지 않았다. 53년 동안 로즈와 동거한 로댕은 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실질적으로 혼인관계였다. 로댕은 로즈가 가엾어서일까, 1917년 초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2주 후 2월 로즈가 세상을 떠나고 11월 17일에는 로댕 역시 세상을 떠난다.
로댕은 평생 인체를 조각했다. 특히 누드의 여체를 조각했는데, 그가 여인의 누드를 형상화시킨 것은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나는 자연을 미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 이외에는 대상으로 삼고 싶은 것이 없다. 인체가 만들어내는 형상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압도해 버린다. 나는 나체를 보면 끝없는 찬미와 깊은 경외심을 느낀다.”
고 고백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로댕은 여성의 몸에서 예술적 에너지를 얻었다. 이렇듯 여인의 누드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느낀 로댕은 한 번은 작업이 끝나자마자 사다리에서 내려와 아직도 나체로 누워있는 소녀에게 달려가 배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감고 진실한 표정으로 소녀의 아름다움에 감사를 표하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여인을 숭배했던 로댕은 여인들이 애정어린 눈길만 주어도 마법에 걸린 듯 곧장 여인의 품으로 뛰어들곤 했다. 그런 까닭에 관능적인 자세로 모델로 선 여인들의 은밀한 부위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작품으로 형상화했는데, 「신의 전령 이리스」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쿠르베가 ‘세상의 근원’이라고 말한 그것을 로댕은 ‘영원한 터널’ 혹은 ‘판 신의 재래’라고 불렀다. 이러한 경향은 그가 남긴 수많은 드로잉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여성을 신성시 하여 종교처럼 생각한 로댕을 위해 이사도라 덩컨은 그의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기도 했다 한다.
여성성을 잘 형상화시킨 작품 중 「영원한 우상」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신성화시킨 것으로, 그는 고결한 여성이미지 뿐만 아니라 육욕을 탐하는 여성의 모습도 좋아했다.
입맞춤 (1886년)
로댕은 참으로 천재적인 위대한 예술가이다. 새로운 조각예술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여인을 조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지금껏 납치, 정복, 혹은 함께 죽은 모습 등의 상황을 담고 있었지만 로댕은 사랑을 큰 주제로 삼았다. 남녀의 입맞춤, 낭만적이거나 대담한 자세로 포옹하는 모습을 형상화시켰다. 특히 「입맞춤」, 「달아나는 여인」은 당시 시각으로는 외설스럽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조각에는 강력하게 발언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들은 육신처럼 고동치고 있는데, 부드럽고 차가운 관능적인 온기, 부드러운 덮개 아래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해골의 섬세한 결, 남성의 힘과 여성의 나긋함을 나타내는 뼈와 근육의 절묘한 구조를 감각으로 느끼고 작품으로 형상화시켰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인 관능의 소리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로댕의 조각작품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생각하는 사람」과 「칼레의 시민」, 「발자크」, 「지옥의 문」 등이 있다. 그런데 시인들은 주로 「칼레의 시민」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칼레의 시민」을 시적 모티브로 삼은 것은 그것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칼레시가 처했던 역사적 사건 속의 용기있는 시민들과 광주민중항쟁 때의 시민군들이 칼레, 또는 광주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칼레의 시민 (1885년)
강인한 시인과 정끝별 시인은 모두가 전라도 시인으로 누구보다도 1980년 5월 18일의 상흔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을 터, 로댕의 「칼레의 시민」에서 광주의 시민군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전라도의 오월 하늘입니다
마약처럼 우울합니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울음소리 떼 지어 들려옵니다
한 사람의 눈물이 칼에 찔리고
두 사람의 눈물이 구둣발에 뭉개지고
열 사람, 백 사람의 눈물이
박살난 채 내던져지는
이것은 꿈입니다
벙어리들이 울고 있습니다
멍든 심장에 쇳덩이를 무겁게 매달고
수천수만의 벙어리들이 모여
한 덩어리로 울고 있습니다
벗기어진 알몸인 채
두 손이 묶여 있습니다
어디론가 아스라이
강철의 불길 속으로 끄을려가는
피투성이 울음소리, 울음소리
아닙니다
이것은 꿈입니다
밤이면 밤마다 꽁무니에 불을 단
총알이 날고
유리창 밖에 죽음이 서성이는
오월의 전라도 광주
아카시아 향기가 저주처럼 풍기는
철길엔 열차가 끊어지고
시외전화도 끊겼습니다 아아, 형님
보고 싶은 누님
여기는 지도에 없는 섬입니다
허공에 떠 있는 섬입니다
내려갈 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오는 길도
지워져 버린
오월은 아직 이승의 계절입니까
말 못하는 벙어리들 피 묻은 울음소리를
당신들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별보다 먼 나라에
그리운 당신들의 안부가 있습니다
까마득한 하늘에서는 알 수 없는 삐라가
칼춤 추며 까물까물 내려오는데
쇠사슬에 묶인 칼레의 시민들은
오늘 다시 이 땅에 청동의 발걸음을 내어딛는데
햇볕만이 침묵으로 타는 학교 둘레
돌담에 기대어
장미는 핏방울로 툭툭 피어나도 좋습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꿈입니다 아득한
석기시대 야만의 꿈입니다.
-강인한, 「이것은 꿈입니다 -칼레의 시민들」 전문
로댕은 1885년 초 칼레시에서 「칼레의 시민」 기념비를 제작하여 최고의 조각작품으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칼레시에서는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가 칼레시를 포위하고 나서, 목숨을 걸고 그에게 도시의 열쇠를 줄 희생양을 요구했을 때 제일 먼저 나선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만 한 사람의 기념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로댕은 희생양으로 자원한 여섯 명의 용감한 시민들을 모두 조각으로 형상화하려 했다. 이 때문에 로댕은 칼레시와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로댕은 칼레 시민 6명을 조각한다. 그때까지의 관행으로는 단 한 명의 영웅을 내세우는 것이 관례였지만 로댕은 용감한 여섯 명의 칼레 시민을 영웅으로 형상화시킨다.
화자는 “이것은 꿈입니다”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1980년 군부 독재세력이 짓밟은 광주의 현실을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만 “전라도의 오월 하늘”은 “마약처럼 우울”하고 “울음소리 떼 지어 들려”올 뿐이다. 이 작품은 짧지 않은 것이지만 전라도의 비극을 반추한 후 “이것은 꿈입니다”를 반복하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의 시편이다. “칼에 찔리고”, “구둣발에 뭉개지고” “두 손이 묶여 있”고 “불길 속으로 끄을려가”고 “총알이 날고” “죽음이 서성이는/오월의 전라도 광주”의 현장에선 “수천 수만의 벙어리들이 모여/한 덩어리로 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600여년 전 영국 에드워드 3세에게 짓밟힌 프랑스의 칼레시의 시민들과 견줄 수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칼레시에서 여섯 명의 용기있는 영웅들이 칼레시를 구하겠다고 죽음을 자청한 것처럼 전라도 광주에서도 “오늘 다시 이 땅에 청동의 발걸음을 내어딛는”다. 바로 이 부분이 칼레 시민들과 광주 시민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런데 “햇볕만이 침묵으로 타는 학교 둘레/돌담에 기대어/장미는 핏방울로 툭툭 피어나”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라고 부인한다. “석기시대 야만의 꿈”이라고 광주를 짓밟은 군부독재 세력의 야만성을 고발한다.
광주의 오월을 현장에서 목격한 강인한 시인에게 이 사건은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연약한 학교 교사인 시인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한 빈 손 뿐이어서 유일한 무기랄 수 있는 분노의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5·18 광주민중항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철길엔 열차가 끊기고” “시외전화도 끊”겨 “여기는 지도에 없는 섬”이어서 “허공에 떠 있는 섬”이어서 “내려갈 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오는 길도/지워져 버”려 광주가 얼마나 고립무원의 절해고도 같은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오월은 아직 이승의 계절”인지를 반문하고, “별보다 먼 나라에/그리운 당신들의 안부”를 물으며, “까마득한 하늘에서는 알 수 없는 삐라가/칼춤 추며 까물까물 내려오”는 광주에서 시민들이 공포와 불안 속에 갇혀있었음도 증언한다.
강인한 시인의 「이것은 꿈입니다」는 광주의 비극성을 절규한 피로 쓴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면서도 광주를 지켜낸 광주 시민들의 용기가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만나 용감하고 정의로운 시민들의 모습을 되살리고 있다.
지금껏 살펴보았듯 광주민주항쟁 당시의 광주 시민들의 비극성과 더불어 광주를 지키고자 했던 용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면, 정끝별의 「칼레의 바다」는 주로 칼레의 시민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광주 시민과 칼레의 시민들이 만나는 지점을 마련하고 있어 두 도시의 비극성과 영웅적인 시민들을 노래하고 있다.
1.
나는 밤이면 달팽이,
달이 될까 별이 될까
쑤물쑤물 방 한구석에서 빨래감이 썩어가고
내가 처음 바다를 만난 것은 오월이었고
아이들이 해당화와 함께 뒹굴던
칼레의 해변, 바다가 함성을 지르고 일어나
내 가슴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칼레의 오월, 내 가슴 속에 자라던 바다
나는 그 오월 매일밤 바다를 만나러 갔다
2.
우울한 전진,
목에 밧줄을 걸고 시의 열쇠를 든 맨발의 제1인이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분노하는 제2인이
가야만 한다, 동지를 이끄는 빛나는 제3인이
아직도 결심할 수 없는 제4인이 너무 빠르게
아내와 딸 생각에 머리를 파묻고 5인이
확고한 걸음걸이로 제6인이 걷는다,
3.
가자, 바람 속을 가야만 한다, 가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돌팔매
기름 먹인 솜에 불을 붙여 던지기도 하지만
어떤 외침도 돌도 기름병도
우리를 가두는 총과 방패 앞에
수북히 쌓일 뿐, 다시 새벽이면
새끼 몇 발을 꼬아들고 떠나는 이웃들
4.
시민이여, 무기를 들라,
그때 그리고 그때마다
화해와 용서로 평화를 말했을 때
실은 야합과 기회를 말한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이상적으로
현실을 위해서라고, 그러나 여긴 여전히
무서운 밤 밤마다 또아리를 틀고
내 가슴을 묶는 밧줄이 보였다
5.
해당화, 청어가 많이 나는 칼레,
오월 바다는 청어들의 세상
해마다 바다의 생살을 째고
두 손에 묻어나는 청어의 비린내
그게 참, 안개 젖은 풀밭을 깨우는
햇빛은 아니었을까
내 모래 가슴을 파고드는
해당화는 아니었을까, 몰라
칼레의 해당화는 피처럼 피고
6.
솨솨솨 칼레의 바다가,
짭짜름한 소금기로 밀려왔다
밤이면 심한 어둠이 내리는, 여기의
청어는 아직 작고 비릿하지만
꽃이 될까 새가 될까
청어떼처럼 波紙들이 밀려다니는 웃목
칼레 바다의 길목에 서서
나는 바다 밖에 있었다
수평선이 가슴까지 덮쳐오는 오월에
-정끝별, 「칼레의 바다」 전문
칼레와 광주의 역사적 사실을 따라가며 의미를 되살리고 있는 이 작품 속에 역사에 대해 눈 떠 가는 화자의 자아가 녹아있다. 화자가 “칼레의 오월”로 상징화시킨 광주민중항쟁 때 화자의 가슴 속에 바다가 자라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처음 바다를 만난 것은 오월”이었다는 이 진술에서 보듯 화자는 “바다”로 은유화된 역사의식의 눈뜸이 있었다. 그 바다는 “아이들이 해당화와 함께 뒹굴던” 바다였지만, 시민들이기도 한 “바다가 함성을 지르고 일어나/내 가슴 속에서 자라”시 시작한다. 칼레시를 구하겠다고 일어선 여섯 명의 영웅과 군부독재에 맞서 일어난 광주 시민들의 정신이 화자의 정신을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연에서는 칼레 시민 여섯 명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목에 밧줄을 걸고 시의 열쇠를 든 맨발의 제1인”,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분노하는 제2인”, “동지를 이끄는 빛나는 제3인”, “아직도 결심할 수 없는 제4인”, “아내와 딸 생각에 머리를 파묻고 5인”, “확고한 걸음걸이로 제6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분노하기도 하고, 결심하지 못하고, 가족을 생각하거나, 확고한 결심에 찬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약한 인간의 내면, 또는 분노하는 사람의 내면이 엿보인다. 이는 칼레 시민만이 그러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 앞에 선 평범한 인간의 모습은 광주 시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민들은 “우리를 가두는 총과 방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람 속을 간다. 마침내 시민들이 무기를 들었을 때 그것이 “현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무서운 밤 밤마다 또아리를 틀고/내 가슴을 묶는 밧줄이 보였다” 화자 역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칼레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해협에 위치한 프랑스의 항구도시이다. 오래 전부터 청어를 잡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었다. 칼레의 바다, 그 바다 밖에 화자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크게 싸웠을 그 바다는 화자의 의식 속에 있는 바다로 생명의 바다이기도 하다.
다나이드 1885. 35×72.4×22.5cm, 로댕미술관, 파리
칼레의 바다는 도버해협에 있는 다나이드에서 유린당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일어선 칼레 시민들과 광주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칼레의 바다는 우리가 지켜야 할 청어 떼처럼 팔딱이는 생명이 깃든 바다이기도 하다. 그런데 화자는 “칼레 바다의 길목에 서서/나는 바다 밖에 있었다”고 자신의 용기없음을 솔직히 고백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죽음으로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정신을 이 작품을 통해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시와 사람》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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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호 /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1996년 계간 《시와사람》을 창간하였으며, 시집 『함부로 성호를 긋다』 『휘파람을 부는 개』 외, 문학평론집 및 연구서 『휴머니즘 구현의 미학』 『최석두 시연구』,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 『미술과 문학의 만남』 등.
첫댓글 2월에 '오하라미술관'에서 <칼레의 시민> 조각상을 마주했습니다.
미술관 입구에 서있었어요.
먹먹했습니다. 비는 내리고...
오래 서성거리면서 오래...
지금처럼...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 시내로 들어오려 할 때 탱크 앞에 신부님, 목사님, 스님, 재야 지도자, 대학교수 등이 손잡고 맞서서 "먼저 우리들을 깔아뭉개고 넘어가라."고 의연함을 보인 무서운 장면이 있었지요. 저 칼레의 여섯 시민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