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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수도회] 서둘러 찾아내 더불어 축복을 나누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민수 6,22-27
† 제2독서 칼라 4,4-7
† 복음 루카 2,16-21
(세계 평화의 날)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한다.
오늘 전례
◎ 새해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교회는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을 주님의 모친이신 성모님께
봉헌합니다. 평화의 모후 성모님께 올해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평화의
삶을 돌보아 주시기를 의탁합니다. 오늘 미사성제로 주님의 몸을 모신
우리의 365일 모든 날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한 해가 되게 합시다.
★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 당신 백성을 어떻게 돌보실지를 알리셨다.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와 은혜를 베푸시리라. 그대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고 모세를 통해
전하고 있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주님 영의 현존을 전한다.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제2독서).
★ 예수님의 강생을 기록한 복음은 지상으로 임하신 주님께서 가장 먼저
순박한 목자들의 찬양을 받으셨다고 전한다. 천사의 귀띔에 순종한
마리아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천사가 미리
일러 준 ‘예수’라는 이름은 ‘아빠! 아버지!’의 관계를 암시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찬미 예수님!
새해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어둠 깊은 밤 먼동 터지니 하늘이 열리는구나!
금년 해 오름의 징조가 좋다.
보라! 주님께서 눈부신 불 한 덩어리 솟아 내시어 온 누리를 비추신다.
작년 봄 애써 좋은 씨 뿌리고 김매고 땀 흘렸으되
손에 쥔 것은 깜부기 쭉정이뿐이던가. 어둡고 괴로웠지.
‘원수가 그랬구나!’ 나오너라!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시대에 행패하며 기승하던 위세의 잡귀 잡신 다
나오너라! 우리 임 울며 떨게 하던 어둠의 화살아, 어디 한번 쏘아 보거라.
해 넘어가 버린 서산을 바라보면 무엇 하느냐?
봐라! 몸을 일으켜 동녘 바라보라. 하늘 틈새가 갈라진다.
두 팔 쭉 펴라. 동산에 오르는 붉고 뜨거운 빛을 가슴에 안아라.
새 빛을 보는 자 올해에는 귀인을 만나겠다!
눈 크게 뜨고 들을 귀 열어 두라. 먼 데서 아기 울음소리 들리거든
문을 열고 종려 가지 들고서 달려가 맞으라.
새 역사를 여는 빛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광명 천지 새날이 온다.
평화의 노래를 합창하라!
귀인을 맞으려는 자 와서 아침을 들라!
새해 말씀에는 예수 마리아 요셉, 천사와 목동, 그리고
찬양이 울려 나오는 마구간 공동체를 주목하자.
유다 산골 작은 마을로부터 흐르는 기쁨과 희망의 빛이
그대 가슴에 메아리쳐 오리라.
- 매일 미사 -
◈ [수도회] 만복(萬福)의 근원이신 하느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1일 목요일(뉴튼수도원 52일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민수6,22-27 갈라4,4-7 루카2,16-21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만복(萬福)의 근원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기쁨은 피조물에게, 특히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복을 받고 있기에 존재하는 세상 만물입니다.
사람들 역시 종교의 유무에 상관 없이 복을 좋아합니다.
하여 촌스런 이름이지만 '만복(萬福)', '복자(福子)'는 물론이고
'복(福)'자가 들어가는 이름도 무수합니다.
참 좋은 세상입니다. 카톡으로 무수히 성탄 카드를 전송했고 또 새해를
맞이하여 새해 축하카드도 받았습니다.
"돌아오는 2015년 을미년 福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2015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천재설소 만복운흥(千災雪消 萬福雲興; 천가지 재난, 눈녹듯 사라지고,
만가지 복, 구름 일 듯 일어난다)"
형제자매들을 통해 예쁜 카드 그림과 함께 전송되온 '하느님의 복'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올 한해 당신이 있어 참으로 따뜻했습니다.“
이런 문구는 올 한해 제가 꼭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고백입니다.
"허허, 요셉수도원 수도자들은 강복을 참 좋아해“
예전 시몬 아빠스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수도원을 방문하셨을 때나 떠나실 때는 예외 없이 형제들이 강복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주교님이 방문했을 때는 난데 없이 나타나 무릎을 꿇고 강복을
받는 마르꼬 수사의 모습은 신선한 아름다움이기도 했습니다.
저 또한 강복 주기를 좋아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게 또 자연에 강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요셉수도원 26년 머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산책 중 불암산과 수도원을 강복했고,
여기 뉴튼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역시 매일 산책 때 마다 강복합니다.
고백성사 때 역시 사죄경 후에는 강복까지 얹어 드립니다.
강복을 통해 저 역시 하느님의 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은 딱 둘입니다.
복주시는 일과 용서하시는 일입니다.
사실 이 두 일을 빼면 하느님이 하실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은 특히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여 쌓아 놓았던 복을 일거에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선 강론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에게 오늘 1독서 민수기 주님
말씀으로 강복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길 빕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길
빕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길 빕니다.“
분명 이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형제자매들에게 강복하면 주님은 복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받은 복덩어리
존재들, '복자(福者)'들입니다.
주님께 넘치는 복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복입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 받은 아드님의
영 덕분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하고 외칠 수 있음은 또 얼마나 큰
복인지요.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오늘은 복자(福者)로 살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가난에 감사하고 선택된 가난을 살면 더욱 좋습니다.
돈 많아서 망한 수도원은 있어도 돈 없어 가난해 망한 수도원은 없습니다.
부(富)가 행복을 보장하지도 않고 가난(貧)하다 하여 다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일성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선언입니다.
가난할 때 단순함, 순수함, 겸손함이 줄줄이 따라옵니다.
주님은 예외 없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탄생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은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낸 이는 밤새 깨어 눈이 열려 있었던 가난한
목자들뿐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역시 가난한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오셨고 바오로도 증언합니다.
'형제 여러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친히 우리를 위해 평생 가난하게 사셨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가난의 모범을, 가난이 축복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둘째, 늘 말씀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경의 사람들'에게 말씀은 숨쉬는 공기와 같았습니다.
하여 항구한 렉시오 디비나의 수행을 권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성모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말 그대로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이자 참 관상가입니다.
학식이 많아 렉시오 디비나도 관상도 아닙니다.
열렬한 하느님 사랑에 순수한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 몸이 정결하여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여 마음의 순수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도 이런 순수한 사랑,
순수한 믿음입니다. 목자들이 전한 말에 모두가 충격을 받고 놀라워하는
동안 성모 마리아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진정 지혜로운 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과연 위대하고 고결한 영혼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영혼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바로 이렇게 곰곰이 말씀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이렇게 깊이 말씀을 묵상해야
비로소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reaction)'이 아닌
진심에서 울어난 인격적 '응답(respondonce)'입니다.
셋째, 찬미와 감사가 입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미사시 영어 화답송 후렴이 아름다웠습니다.
"Let the heavens rejoice and the earth be glad(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계속되는 우주적 성탄 축제 시기가 참 감사합니다.
새삼 찬미하는 기쁨으로 사는 수도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Let no tongue to be silent(혀도 침묵하지 못하게 하라)"
영어 성가 한 구절도 재미있었습니다.
찬미하면 저절로 혀도 풀려 소리내어 노래하기 마련입니다.
그 무엇도 찬미하는 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축복을 체험할 때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응답이요,
찬미와 감사로 응답할 때 또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찬미의 샘입니다.
'축복과 찬미'의 영적 삶의 싸이클 속에 깊어가는 우리의 영성입니다.
바로 수도자들이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미사와 성무일도가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요,
우리 모두 영적 부요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보다 참 기쁨, 참 행복을 주는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가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위로하고
치유하며 복된 운명으로 바꿔줍니다.
'그래서' 찬미와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감사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최상, 최고의 영적무기는 하느님 찬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불평스러울수록 최고의 보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바치는 찬미와 감사뿐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 보면 온통 찬미할 것과 감사할 것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가난한 목자들이 찬미의 모범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가난한 목자에서 내적 부요의 '찬미의 사람'으로 바뀐 목자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이젠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가 된
목자들입니다.
주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통해 세계 평화의 날인 오늘 새해
첫날,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고, 차고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요셉수도원의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가
미국 뉴튼수도원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서둘러 찾아내 더불어 축복을 나누자/
기경호(프란치스코)신부님
2015년 나해 1월1일 목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루카 2,16-21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리라.”(민수6,24)
서둘러 찾아내 더불어 축복을 나누자
새해 첫날이다. 지난 한해는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았다. 새해에는 하느님 안에서
고귀한 인간성을 인식하고 존중받을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하기로
다짐했으면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나아가 평화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서로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기를 청하자. 새로운 한해에도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빛이 되어주시고
희망이 되어주실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는 우리가 서로 빌어주어야 할 ‘아론의 축복’이 나온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 6,24-26) 이 축복은 사제들에 의해(신명 21,5) 성소에서 예배 의식에
참석하러 온 이들에게 베풀어지고(시편118,26) 또 참석자들이 나갈 때
행하여졌다(2사무 6,18). 그러나 축복문에서 주님이라는 호칭이 세 번
반복되는 데서 알 수 있듯 사제는 중개자일 뿐이며 하느님이 축복의
근원이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축복의 근원이신 분께서 ‘되돌아보고, 앞을 바라보는’ 새해의 이 첫 시간을
축복해주신다. 시간은 사람이 살아가는 중요한 터다. 시간을 축복해
주심은 곧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심이다. 시간의 축복은
변화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에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의 바램은 각자가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변화란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내 편에서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곧 진정한 성숙과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우리에게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되었으며(갈라 4,5),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주셨기
때문이다(4,6). 우리가 이것을 믿고 그 축복 속에 살아간다 해도 고통과
시련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일상의 삶이 가져다주는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아빠’(Abba)라 부름으로써 그분의 선과 행복과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기에 복된 존재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축복을 사는 이들이 지닐 자세에 대해 가르친다.
목자들은 ‘베틀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고,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을 말을 알려주었으며, 자신들이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2,16-18).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서둘러 가서 찾아내고’, 그
상황을 공유하여 함께 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행한 모든 것에 감사하며 찬미 드려야 한다. 축복이란 그렇게
함께 하고 나누어질 때 참 축복이 된다.
한편 마리아는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2,19). 마리아는 하느님의 길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 모든
일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명의 씨앗으로 간직하였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기도도 생각도 살핌도 없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속절없는 가벼움’을 내려놓고, 축복의 근원이자 주인이신
주님 안에서 ‘영적 숙고와 생명을 간직하는 마음’을 키워가도록 하자! 이
새해를 평화의 어머니의 따뜻한 도움을 받아 희망 속에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작하며 더불어 복된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5년 나해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어제까지만 해도 ‘2014 새벽을 열며’라는 파일을 열어서 묵상 글을 썼지만,
오늘은 워드 프로그램을 클릭 한 뒤에 ‘새 문서’ 하나를 띄운 뒤에 새롭게
저장했습니다. ‘2015 새벽을 열며’라는 파일명으로 말이지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2015년. 을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5년의 첫 번째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작성하기 위해 ‘새 문서’를
띄워서 아무것도 써지지 않은 곳을 보면서 주님께서 ‘이번에도 새 노트를
하나 주셨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새 노트 줬으니까 이번에는 실수하지 마라. 조금 잘 좀 살아보자.”
2014년 12월 31일까지의 과거라는 시간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부터이지요. 그리고 그 지금부터라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음을
기억하면서 개척해야 할 미래를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체중이 130Kg이나 나가게 되자 걱정이 되어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분에게 물었지요.
“지금 130Kg이나 되시는데, 그러면 체중이 제일 적게 나갔을 때는
얼마였죠?”
그러자 이분은 자신 있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3Kg이요.”
하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의 체중이니까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 물은 시간은 먼 과거의 시간인 태어날 때가 아니라 바로
최근의 일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다름
아닌 ‘지금’입니다. 먼 옛날의 일도 아니고, 먼 훗날의 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느끼고 함께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새해인 오늘은 교회력으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즉,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이 한 해를 봉헌하는 마음을 갖는 날이지요. 그래서
올 한 해 잘 돌보아 주시길, 보다 더 주님의 뜻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달라고 청하는 날인 것입니다.
성모님께 전구하면서 과거의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닌, 현재라는 시간에 충실하면서 2015년 을미년이라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 노트’를 잘 작성하시길 바랍니다. 천주의 어머니이시지만 동시에
우리들의 어머니이시기도 한 성모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모든 일에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한창훈).
실패의 벽(‘좋은생각’ 중에서)
미국 신용 보증 회사 던&브래드스트리트에는 ‘실패의 벽’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있다. 이 벽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1. 실패한 순간을 자세히 기록하세요.
2.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쓰세요.
3. 자신의 이름을 적고 사인하세요.
실패의 벽이 만들어진 계기가 있다. 회사 창업자인 제프 스티벨은 어느 밤
사무실로 돌아와 벽에 자신의 실패담을 적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부끄럽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이었다.
그러자 직원들도 실패담을 벽에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언제 실수했는지,
실수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쓰고 그 밑에 이름을 적었다.
이 벽은 어느새 직원들의 실패담으로 빼곡하게 채워졌고 ‘실패의 벽’으로
불렸다. 또한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과거의 실패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지요.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의 실패 그 자체보다는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내 닫힌
마음이 문제인 것이지요. 2015년 을미년 새해는 열린 마음으로 힘차게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실패는 단지 과거의 한 사건일 뿐임을 기억하면서,
내가 더 많은 새로움이 열려 있음에 감사하고 기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주님께서 은총의 주체이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루카2,16-21)
2015년 나해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새해 첫날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과
가정, 이웃,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길 마음 모아 빕니다.
"새양말" 새해가 밝아 양이 오고 말이 간다' 말많은 말해가 가고, 양순함이
넘치는 양해를 기대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고 적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제 오늘, 제야의 타종식과 해맞이 행사가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복을 줍니까? 그 해가 복을 줍니까? 해를 만드신 분,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복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이미 복을 받으셨습니다. 앞으로도 넘치도록 받을 것입니다.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함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복을 전달하는 연장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 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 의 첫째편지 2장 17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은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행복합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기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가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해는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 다시
한 번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천상에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오복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건강한 몸을 가지는 복과 두 번째로, 서로 아끼면서 지내는
배우자를 가지는 복, 세 번째로 자식에게 손을 안 벌려도 될 만큼의 재산을
가지는 복. 네 번째로, 생활의 리듬과 삶의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적당한
일거리를 갖는 복. 다섯 번째로는 나를 알아주는 참된 "친구"를 가지는
복을 현대판 신(新)오복(五福)으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세에 국한된 것입니다. 천상의 복과 연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세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누리는 복은
천상을 차지하는 복입니다.“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에페1,3).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영원생명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한 해 동안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고 했지만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준적도
있고, 돌이켜 보면 내 방식의 사랑으로 부담을 준적도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크신 은총을
허락하셨고 한없는 사랑과 자비로 감싸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덕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너무 큽니다.
그래도 주님의 크신 은혜에 다시 감사를 드리며 ‘사랑에 사랑을 더해도’
부족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 2015년은 “더 큰 사랑으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기억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을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만큼 나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을
이웃을 통해서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두가 주님 안에서
형제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무슨 공로를 세워 더 큰 복을 받으려니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이 주어져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모님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없다
2015년 나해 1월1일 목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복음: 루카 2,16-21
< 성모님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없다 >
오늘은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님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의 삶을 시작하였듯이, 우리 또한
성모님의 대축일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것 같습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머니’라는 말을 들으면 어머니의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까? 나를
잉태하고 계실 때의 모습이나 나를 낳아 주실 때의 모습이 떠오릅니까?
그런 건 사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의 어머니’라 하면 나를
키워주시면서 해 주셨던 그 많은 희생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셔서 어머니이신 것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나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어머니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마치 동물에게 키워진 사람처럼 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자녀
또한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시기에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고 감사해
하지는 못합니다. 가끔은 “엄마가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 어머니로서 해 주신 희생과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그래서
참으로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에 다른 어떤
관계도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남자들은 특별히 군대에 가서 인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창옥 강사의 소탈한 어머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지 못해
글도 못 읽고 나이 어려 청각장애가 있는 남편을 만나 고생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막내인 김창옥은 어렸을 때부터 엄마를 힘들게 하는
개구쟁이였습니다. 못 배운 엄마를 이용해 영어사전 사 달라, 영한사전
사 달라, 한영사전 사 달라, 프라임 사전 사 달라, 에이스 사전 사 달라고
하며 돈을 뜯어내 다른 곳에 쓰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나이키 신발을
안 사줘서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하고 방에 틀어박혀 어머니를
속 썩였던 적도 있었습니다. 글을 모르신다는 이유로 김창옥은 성적표를
위조하기 일쑤였고 그렇게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공부를 못 해
공고에 갔고 그래도 대학에 가고 싶어 시험을 쳤지만 매 번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다른 집 엄마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 창옥이는 돌 머리여!”
라고 하는 것을 듣고는 자살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까지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무시해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일 것입니다.
제주도 탑동 바닷가에서 자살을 생각할 때 어떤 여인이 물에 뛰어드는
환시를 보고서는 겁이 나서 죽겠다는 생각을 접고 해병대에 들어갔습니다.
군대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민지원을 나갔을 때 한 집에 홍시가 유난히도 많이 달린 나무가
보이더랍니다. 어머니가 치아가 안 좋으셔서 홍시를 좋아하시는데 문득
감나무를 보니 어머니가 생각이 났습니다. 선임 병들 몰래 전화부탁을
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마당의 수백 개의
감이 모두 자기가 군대 들어오기 전까지 어머니에게 잘못 했던 일들로
보이더랍니다. 어머니는 말을 못하고 훌쩍이는 창옥이를 단번에 알아보고
먼저 말을 꺼내셨습니다. 왜 말을 안 하느냐고 물을 때 김창옥은 울면서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마 홍시 좋아하잖아... 흑흑...”
그리고는 첫 월급을 모조리 봉투에 넣어 감을 사 드시라고 어머니께
보냈습니다. 제대하고 언젠가 서랍을 열다가 자신의 편지들이 가지런히
정열 되어 있고 돈도 봉투마다 그대로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내어주실 수 있어도 자녀가 힘들게 번 돈은
차마 쓰지 못하고 나중을 대비해서 모아두시는 분인 것입니다.
보통은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부모의
사랑은 크고 깊기 때문에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면 그 깊이를 재어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마음을 알게 될 때에야 참으로 자녀가
되는 것 또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참으로 부모님으로
여기게 될 때에야 참으로 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듣고 성령으로 가득차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인사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주님의
어머니’라 했다면 그 말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성모님이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의인은 될 지언 정 ‘하느님의 어머니’와 같이
칭송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어머니’와 ‘하느님의 어머니’
가 그렇게 큰 차이일까요? 어머니라고 했다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육체적으로 낳아주기만
했다고 해서 성령께서 엘리사벳의 입을 빌려 성모님을 ‘내 주님의
어머니!’라 부르게 하였겠습니까? ‘어머니’란 단어는 낳아주고 길러주고
생명을 주어 자녀를 성장시키는 총체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무어라
다른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어 그냥 어머니라고밖에는 쓸 수 없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라고 하실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을 다 포함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신 것처럼, 어머니라 함은 우리가
믿는 어머니의 모든 면을 포함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께서 당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당신이
그리스도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 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소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주님의 어머니”
로 불리셨다면 그만큼 큰 역할을 해 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존중받아 마땅하신 분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
하느님은 사랑과 같은 분이란 뜻일까요, 아니면 진짜 사랑이시란
뜻일까요?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라 할 때 어머니와 같은 분이란
뜻일까요, 아니면 진짜 어머니란 뜻일까요? 성모님이 어머니라 했다면
진정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것이고 그 어머니로서 해야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 그 어머니를 참으로 당신의 어머니로 여기지
않으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아버지의 아드님이 되시기 위해서
그분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면, 당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도
그러한 자세를 보이지 않으셨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성령을 통하여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했다고 적혀있는 성경의 말씀을 스스로 위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아버지라고 하시는 분을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로 고백한다면, 그분께서 어머니로 여기시는 분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고백하고 공경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일본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서로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양 키워놓고 발생된 상황을 그렸습니다. 낳기만 했다고 아버지가
아니고 키운 정도 무시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아이와 함께 있어준
시간, 그 시간이 낳아 놓기만 하였다고 부모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 또한 그리스도를 낳아놓기만 했다고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불리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당신의 영혼이 동시에 칼로 찔리는 아픔을 겪어 내셔야만
비로소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너무나
힘든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과연
성모님 아니라면 누가 그 일을 겪어 낼 수 있겠습니까? 아드님이 아니면
그 일을 겪어 낼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아드님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어머니의 역할을 성모님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라면
자녀가 살아있는 한 끝까지 어머니입니다. 그렇다면 자녀의 아픔을 똑같이
겪으셨습니다. 그 고통을 함께 겪으며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성모 마리아이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성모님의 자녀입니다. 교회의 일원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도 함께 하시고
영원히 우리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를 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드님으로 두실만큼
완전한 어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합당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우리 또한 자녀로서의
소명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창옥씨처럼 우리가 얼마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는지 깨닫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 또한 좋은 자녀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참으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실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들의 자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자녀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성모님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있을 수 없고, 성모님이
없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우리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다짐의 큰 기류가 2015번째 반복되니
2015년 나해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다짐의 큰 기류가 2015번째 반복되니
새해는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2015년 되는 해라는 것이 감탄스럽습니다.
나의 생일도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19XX년 1월21일이라고 반복해 봅니다.
세계인들 거의가 이 해를 기원으로 쓴다는 게 문화적 기적 같게도 보입니다.
태어난 모두가 예수님과 같은 인간으로 살자는 문화적 의미도 맞지 않나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들은 매해 예수님의 뜻을 대신 펴려 해야겠지요 .
그런 다짐의 큰 기류가 2015번째 반복되니 늦었지만 금년엔 더 펴 봅시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2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2015년 나해 1월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매일미사”가 있습니다. 교우 분들이 미사에 참례하실 때 가지고 다니는
책입니다. 그날의 독서와 복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매일미사의 묵상 글을 읽고 있습니다. 함께 교구에서 일을 하셨던
신부님의 글도 있었고, 연천에서 국화 축제를 열었던 지금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으실 신부님의 글도 있었고, 지난 1년은
문학과 신학을 접목 시켜서 좋은 묵상 글을 써주신 신부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이제 2015년에는 ‘산위의 마을’에 사시는 신부님의 묵상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신부님의 글을 통해서 영적인 비타민을 얻을
것 같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작년 1년 평화신문에 주일 강론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매일 묵상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2015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으로 서로를 감싸주면 좋겠습니다. 비난과
비판보다는 이해와 관용을 먼저 보여 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내가 먼저 해 주면 좋겠습니다.
어제 오후 사무실에서 잠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잠시의 통화에도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이제 80이 되신 어머니이십니다. 새해에는
좀 더 자주 전화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단한 업적이나 능력을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작은 것들이지만 세상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휴지통으로 옮겨 놓으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그만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뜰아래 작은 꽃 한 송이를 심어도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할게요. 미안합니다.’라는 말들은 세상을 그렇게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막강한 군대의 힘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조직에 의해서 이끌어 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와 같은 무서운 법칙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법대로
살던 요셉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마음을 바꾸면서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골의 말구유에서 한 아이가 탄생하면서 구원의 문은
열렸던 것입니다. 양들을 지키던 목동들이 구원의 역사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이면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2015년이라는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 희망, 사랑, 나눔, 희생, 친절, 온유의 물감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때로 고통, 절망, 아픔이라는 얼룩이 질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그림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 분노,
미움, 시기, 질투, 편견이라는 물감으로 볼썽사나운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가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그 그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림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받아 준 손은 목수 요셉의 거친 손이었고,
그분을 처음 맞아들인 장소는 누추한 구유였습니다. 그분께 찬미와 찬양을
드린 첫 번째 사람도 밤을 지새우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강생의 짧은 이야기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곳, 비천한 사람들 안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핵심 진리가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나를
구원할 내 ‘인생의 구유’입니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총과 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창한 행사나 사업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겸손과 순명으로 삶의 모든 파도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귀양살이
끝날 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하소서.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복을 나눕시다.
2015년 나해 1월1일 목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제2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복음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2015년 01월 01일) 복을 나눕시다
저 멀리 동편 산너머에서 어제와 똑같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살이 맑습니다. 어제는, 아니 작년 마지막 날은 길 위에서 거의
보냈습니다. 수도 형제의 모친 백 안나 님(97세)이 돌아가셔서 눈이 오는
궂은 날씨에도 경기도 김포시까지 가서, 장례미사를 주례하고 밤늦게
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네비게이션이 혼잡한 길을 피해
우회길을 안내해서 막히는 데 없이 잘 왔지요. 마지막 날을 장례미사로
마무리하니 느낌이 달랐습니다. 하늘 길 가시는 분의 마지막 길을 잘
가시게 조금이나마 도와드렸다는 생각에 몸은 약간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참 따뜻하고 기쁨이 그득했습니다. 장례미사 강론 때 앞에 앉아있던
초등학생 증손자에게 질문했습니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꿈이
뭐였지?” 이 질문에 아이는 망설임 없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정답이었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늘로 가신
분에게 이제 늘 새 날일 것입니다. 지지않는 빛 자체이신 분과 늘 함께
계시기 때문이지요.
오늘 새해 첫날 우리는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탄
팔일 축제를 마무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베들레헴 목자들의
방문과 그들이 아기 예수에 관하여 전하는 놀라운 말을 듣고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마음의
여인이셨습니다. 이 마음 안에는 오로지 한분 예수님밖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모이었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습니다. 마음에
저녁이 없는 빛이신 분을 간직하고 늘 되새기는 사람이 참 제자입니다.
주님은 올해에도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제자로서 늘 주님을 마음 깊이 간직할 때 우리에게 매일의 삶이
새로운 날, 새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의 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면 참 은혜롭겠지요. 새해 복 많이
나눠주세요!!!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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