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의상대사와 원효 대사가 중국으로 공부를 하려 가는 길에
밤이되어 어느 산골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목이말라 물을 찾던 중 마침
오목한 용기에 물이 있어서 그 물을 맛있게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 나보니 어제 밤에 마셨던 물이
사람의 해골에 담긴 물이었던 것이다
그걸보니 뱃속에 있는것들이 다 토해질 것 같았는데
다시 어제밤 맛나게 마셨던 물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 시키다보니 토할 것같은 속이 진정 되어
그때에 깨달음을 얻어
당나라로 공부하려가던길을 멈추고 돌아 왔다는 일화가 있지요,
"一切惟心造" 란 무슨 뜻인가?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과연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좋은것과 싫은것,
선한 것과 악한 것 등의
모든 분별은 자기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지
물질 그자체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는것임을 깨달았다.
만일 간밤에 마신 구정물이
본래 그자체가 더러운 물체라면 그때 이미 토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을 냉수라고 믿었기 때문에
시원하고 맛 좋은 냉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더러운 송장에서 나온 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장이 뒤집혀지고 구역질이 치미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구정물이 더럽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더러운것이 되고,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깨끗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이 외부의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경에 이른바 마음이 나면 가지 가지 사물이 나고,
마음이 없으면 가지 가지 사물이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주가 오직 마음이오,
만물이 오직 의식이라는 말씀이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
마음 밖에 사물이 있다는 것이 아니니,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원효는 그곳에서 의상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 우주에서 만물은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인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 가운데는
물로부터 나왔다는 자도 잇었고,
또는 불로부터 나왔다
무한정자로부터 나왔다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면 불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우리들 인간 각자의 자신은 물론이오,
이 우주 만물까지도 모두 각자의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나면 가지 가지 사물이 나고",
"마음이 없으면 가지 가지 사물이 없어진다."
라는 것은 이 의미로 말한 것이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부처가 되고 못되는 것도
그 문제의 해결의 근원이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마는
우주와 인간의 근본이 되는 것도 역시 각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요지는
각자의 마음을 해결하는 데 있다.
즉
마음 문제에서 시작하여 마음 문제의 해결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물질에 대립하는 그것이었기 때문에 얹혀오는 물질에 압되어
처음부터 약자의 비명으로 밖에는 들리 않았다.
그것은 도리어 마음을 위축시키고 지나치게
긴장시켰으며 때로는 망상에 젖게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이런 이원적인 마음이 아니라
그것은 물질과 정신의 대립을 초월한 마음으로서,
도리어 물질을 자기속에 포용하고,
지배하는 그 주인이 되고,
그 근기가 되는 것이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가지 가지 인간을 만드나니",
일체의 세상에서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이 세가지는 차별이 없다.
모든 부처님은 다 아시나니,
일체가 마음에서 나온 것인 줄을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이 사람은 참 부처를 보리라."
이러한 화엄경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일체의 사물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 유명한 귀절이다.
중생을 만들어 낸 것도 마음이요,
부처를 만들어 낸 것도 마음이며,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다.
이것을 일러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어떻게 해서 우주 만물이 전개되는가?
우주 만물이라는 것은 현상계에 속하는 것이다.
현상계에 속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완전한 사물을 전개하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 마음도 따라서 완전한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 불완전한 현상계의 사물만을 전개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이 마음이 완전한 부처도 낼 수 있고
결함이 없는 진리의 세계에도 계합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은 완전 무결한 진리의 세계에 돌아갈 수 있는
선행도있는 동시에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는 현 상의 세계를
전개시킬 악성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대승기신론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마음을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으로 나누었다.
즉 우리의 마음은 진리의 세계에 돌아갈 자성 청정의 본질심과
현상의 세계를 전개시킬 번뇌 망상의 현상심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심생멸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이 우주만물의 현상계를 전개하는 방면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활동하여 만물을 산출하는데
마음이 본체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만 물을 산출할 종자를 마음의 밭에 심고,
또 이것을 성숙시켜서 인연이 도래하면 산과 강,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등
일체의 인간과 우주를 전개시켜 내는 것이다.
식에는
안,
이,
비,
설,
신,
의 등 6식이 있고
제 7에 말나식,
제 8 에 아뢰야식 등이 있다.
아뢰야식은 집과 같고,
말나식은 주인과 같으며,
전 6식은 일꾼들과 같아서
각각 그 맡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전 6식은 외부에 향하여 눈은 물 체를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보고,
몸은 춥다, 덥다,
딱딱하다 부드럽다 등 감정작용을 하고
제 6식은은 전 5식을 종합하여 인식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인식작용을 한 것을 한가지라도 빼놓지 않고
낱낱이 제 8 야뢰야식의 밭에 심게 된다.
그러면
제 7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나의 본체라는 집착을 가지게 된다.
즉 다시 말하면,
전 6 식은 외부로부터 우주 만물을 산출할 종자를 벌어들이고
제 8 식은 이 벌어들인 종자 를 하나도 없애지 아니하고 간직하여 둔다.
그러므로 제 8 식을 무몰식 또는 장식이라고 번역하게 된다.
다음에 제 7식은 우주 만물의 종자를 간직하고 있는 아뢰야식을
항상 지키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 현 상계의 사물을 전개할 인연이 성숙한 것이 있으면
그 사물만을 전개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와 같이 현상계를 전개할 세력을 가진 심생멸문의 의의와
또 진여의 본체계에 돌아갈 세력을 가진 심진여문의 두가지 세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는냐 중생이 되느냐 하는 것은
심진여와 심생멸, 즉
자성청정심과
번뇌망상심과의
세력의 승부 여하에 달린 것이다.
만약 선법 인연의 종자가 수승하면 심진연문으로 돌아갈 것이요,
이와 반대로 악법 인연의 종자가 수승하면
심생열문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것을 각각 환멸과 유전이라고 표현한다.
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
모든것이 마음먹기 나름인것같아요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마음먹기 달렸다는말이 쉽고도 어렵겠지요..ㄳ합니다
물질의 욕심때문 때론 괴로와도 보았지요 지천길목에서~일체유심조 맘에 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