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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수도회] 주고받음의 영적 원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1요한 5,14-21
† 복음 요한 3,22-30
★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청한다면 무엇이든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청한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있다. 그것은
형제를 위해 청할 때 더욱 빛난다.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제1독서).
★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세례자 요한과 같은 시대에 중복되었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경쟁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 역사의
성취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그분은 커지셔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본당이나 활동 단체나 수도회나 또는 직장이나 모두 ‘공동체’라 일컫자.
‘나는 공동체에서 어떤 가치를 갖는가?’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는
교회와 세상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아이나 어른이나 하찮은 이가 없다. 아이들도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일하고 돌아온 가족이 갓난아기를 들여다볼 때 평화롭게
자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노동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 준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느끼는 존재감은 참으로 중요하다. 헌신의 힘이 존재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감에서 중요한 국면에 봉착할 때가 있다. 역할의 중복이다.
이를테면 내가 본당 성가대의 소프라노를 맡고 있는데 전공자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보람되고 존재감이 있다. 어느 날 나보다는 실력이 훨씬 뛰어난
이가 성가대에 들어왔다. 나는 뭔가 불편한 긴장을 느끼게 된다.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 나라의 세례 운동이 성과를 거둘 무렵 예수님께서
등장하셨다. 조직이 위축될까 긴장하는 제자에게 요한은 말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존재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본당의 전례나 성가대의
성장이다.
공동체가 성장하려면 내가 물러나야 할 때가 있고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세상에 대한 공동체도 그와 같다. 존재 이유가 없으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을 보는 눈이 ‘하느님의 일’을 아는 것이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아름다운 인생 -충만한 기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뉴튼수도원 61일째),
1요한5,14-21 요한3,22-30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아름다운 인생 -충만한 기쁨-
오늘도 몇몇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가 쓰는 강론은 하루하루 삶의 기록입니다.
특히 안식년 중에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밥값(?)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강론 글을 써서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아버지께 올리는 사랑의 편지이자
형제자매들에게 드리는 사랑의 편지이며 제 사랑의 고백의 일기입니다.
마치 매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론이 '사랑의 강'처럼 느껴지고
모아진 강론들은 흡사 '사랑의 바다'를 연상케 합니다.
왜 다산 정약용이 18년 간의 유배지에서 일기쓰듯 많은 글들을 꼬박 썼는지,
왜 토마스 머튼이 매일 일기와 더불어 무수한 글을 썼는 지,
신영복 선생이 20여년의 옥살이에서
'감옥에서의 사색' 같은 주옥 같은 글들을 남겼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살기위하여' 사랑을 다해 쓴 글들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치열하고 항구했던, 참으로 아름답게 살았던 인생들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인생은
감옥 같기도 합니다. 도저히 탈옥이 불가능한 감옥입니다.
작은 감옥, 큰 감옥의 차이일 뿐입니다.
길게만 느껴졌던 산티야고 순례도 끝이 있었고, 미국 뉴튼수도원에서의
순례도 이제 끝이 보이며, 1년여의 안식년도 끝이 보입니다.
공동체의 사정에 의해 약간 앞당겨 올 2.28일(토) 요셉수도원에 귀원하여
3.1일 주일 미사를 주례로 다시 원내 생활이 시작됩니다.
어제 빠코미오 원장수사님의 이메일 연락을 받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시간의
감옥'을 탈주할 수 없는 '시간의 수인(囚人)'들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요즘은 모두가 가난해 보이고 불쌍해 보입니다. 요셉수도원의
형제들이나 여기 뉴튼수도원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생각나는 모든 이들이
그러합니다. 모두 나름대로 힘겹게 제 십자가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분들이요, 참으로 위로와 격려가, 때로는 실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도반들입니다. 저절로 연민의 마음이 울어납니다.
기쁘게 살 때 아름답습니다.
인생 감옥에서의 해방의 자유를 위해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기쁨보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기쁨에 저절로 따라오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의 사무엘 원장 신부님의 늘 웃음 띈 얼굴로 기쁘게,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사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오후에는 꼭 밖에 나가서 육체노동을 합니다.
선의(善意)의 유모어와 재치도 뛰어나 별명 작명의 대가(?)라 할 만 합니다.
신부님이 작명한 요셉 수도원의 두 형제들의 '나르는 물방개', '불암산
건들 바위'라는 별명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납니다.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 및 은인들에게 발송하는 연말편지 중 저에 관한
내용도 긍정적 시각이 빛납니다.
'신부님은 우리의 연중 피정을 지도했고 많은 면에서 우리를 도와줬다.
신부님은 한국의 그 지역 내에서 꽤 유명한 영적 지도자이고 많은
신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이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신부님을 찾아 온다.
신부님은 여기서도 많은 이들을 돕고 있다.'
과찬이지만 이 또한 신부님이 저에게 준 '기쁨의 선물'입니다.
진정 '영적 지도자'다운 삶을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새로 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인생은 기쁨의 인생입니다.
기쁨의 빛이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기쁨이야 말로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기쁨의 선물이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고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오늘은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할 때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이 우선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샘솟는 기쁨이요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마음 착해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 있어 성인입니다.
사랑만이 허무를 몰아냅니다.
모든 성인들의 우선적 특징도 하느님 사랑에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수도형제들에게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마치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이 서로 경쟁자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인기가 예수님께로 집중되고 있으니 요한에겐 질투심이 끓어 오를 법 한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을 사랑했고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즉시 요한은 즉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은사임을 알아 챈 요한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이런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빛'이 질투심의 어둠을 몰아내고 관대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요한의 넉넉하고 관대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둘째, 자신을 사랑할 때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주님을 알 때 자신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주님을 앎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을 알 때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예전 마르꼬 수사님에게 써드린 자중자애(自重自愛)란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정말 자존감 약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주고 싶은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 다음으로 자중자애의 자기 사랑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할
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요 자중자애의 사람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
자기의 신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겸손한 요한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요한은 상상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없는 우리 또한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자중자애의 겸손이요 참 나의
발견이요 실현입니다. 겸손할 때 아름다운 인생이요 겸손에서 샘솟는
참 기쁨입니다.
셋째, 작아질수록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겸손은 사랑으로 작아지는 것이요 비워가는 것이요 낮아지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진정 사랑의 성장은 겸손의 성장입니다.
살아갈수록 작아질 때, 비워갈 때, 낮아질 때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텅 빈 충만의 아름다움에서 샘솟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신랑(예수님)과 신랑 친구(요한)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피력하는
요한의 모습은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이는지요.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
바로 여기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 기쁨의 삶, 아름다운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신랑 예수님의 친구들인 우리 모두의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은 고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한 기쁨도 이래야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바로 참된 영적여정을 요약하는,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영적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바로 요한 세례자처럼, 우리 교회의
성인들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독서 사도 요한의 말씀처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세상을
이기며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어나신 분,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기쁨 충만한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
(하바3,19).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주고받음의 영적 원리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 요한 3,22-30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주고받음의 영적 원리
‘관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간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어 인간과 ‘사랑의 관계’
곧 계약을 맺으셨고, 관계 속에 현존하신다. 따라서 관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실존방식이자 삶의 질을 좌우하는 본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자신이 아닌 존재와 무엇인가를 주고받는다.
‘영’(靈)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에게 가장 으뜸가는 관계는 ‘영적인
관계’이다. 오늘의 성경 말씀들의 비추임을 받아 영적인 주고받음의
원리에 대해 묵상해보자.
영적인 주고받음의 첫 번째 원리는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영적 관계에서 생명과 선과
사랑을 주시는 분은 일방적으로 하느님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철저히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무상(無償)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
(1요한 5,14)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그저 받는 처지에
있다. 이렇듯 영적인 주고받음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자들을 제멋대로 구는 천박한 ‘갑(甲)질’과는 거리가 멀다.
두 번째 원리는 사랑의 주님께서는 늘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만,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 청하고
받을 때 요구되는 조건은 ‘그분의 뜻에 따라 야 한다’(5,14)는 것이다.
사랑의 동기에서라면 어떤 형제가 불의를 저질렀다 해도 그것이 죽을 죄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아니라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1요한 5,16). 우리가 주님의 뜻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한없는 사랑과
선과 자유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청할 때에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기도 안에서 식별하지 않고 ‘주님께서 알아서
주시겠지!’라고 말하는 ‘무분별한 막연함’에 자신을 내맡기는가! 또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 '사랑으로 겪어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책임지려는 노력 없이, 자신도 모르게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하며 ‘무책임한 의존’을 하는가! 주님께 청하기 전에 그분의
뜻을 찾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기도하며 식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적인 주고받음의 마지막 원리는 인간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되돌려야 할 의무’(reddere)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감사를 드림도 그분의 은사일
뿐이다(연중평일 감사송 4). 생명과 재능, 시간, 재물, 지위, 가족, 인간관계
등 어느 것 하나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렇게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받는 존재’이며 ‘말씀을 듣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善)과 사랑, 동료 인간을 통하여 받은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할’뿐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향하여 흘러 지나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않고, ‘주고받음의 영적
원리’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리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참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할 때입니다. 또한 교만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때
역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할 때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면 비참하게 생각되고,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한 비교를 통해서는 올바른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역시 항상 나쁘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우리 각자 각자는
유일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쌍둥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얼굴이 똑같아 보여도 그 부모는 어떻게든 구분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차이를 느끼지 못해도 구분할 수 있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비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움을
가지고 당신의 일을 해 오셨지요. 오늘과 어제를 비교해보십시오.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라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잘 따지고 보면
비슷해보여도 너무나도 다름을 깨닫게 됩니다. 날씨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도 틀립니다. 일어나고 잠자는 시간도 다르고, 그날 먹은 식사의 내용
역시 다릅니다.
이렇게 늘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하느님의 일에 있어서 비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면 비교의 삶이 아닌,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함을 인정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비교하려는 순간, 예수님의 길을 곧게 내기 위해 오신 세례자 요한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뒤에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시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본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인 요한에게 일러바치지요. 세례는 세례자
요한의 고유한 행동인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따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세례를 베풀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엄청났었지요.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기도 했었으니까요. 인간적인 욕심에서 볼 때,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그냥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존경과 사랑을 받는 편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선택해야 할 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대답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라고 하면서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대신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충실한 것, 주님께서 맡겨주신
고유한 일에 대해 비교 없이 묵묵히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 요한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모든 영광은 자신이 아닌 주님이 받아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만 기억한다면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은 날마다 기쁨이고 기적입니다
(크리스토퍼 디브).
얼굴을 가려라(‘좋은생각’ 중에서)
제갈량의 아내 황 씨는 재능이 뛰어나고 됨됨이가 훌륭해 남편이 승상의
자리에 오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제갈량은 늘 깃털 부채를 들고 다녔는데,
이는 아내의 부탁이었다. 그녀가 부채를 선물한 데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황 씨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친정아버지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당신은 포부가 크고 기개가 드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유비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표정이 환했지요.
하지만 조조에 대해 말할 때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군요. 손권을 언급할
땐 고뇌에 잠긴 듯 보였고요. 큰일을 도모하려면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침착해야 해요. 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세요.”
제갈량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늘 부채를 손에 쥐었다. 부채질을 한 번
하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 황 씨가 말한 ‘얼굴을 가리라.’
라는 말은 침착하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마음이 고요해야 태연함과 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감정에 쉽게
흔들리면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또한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안에서 우리는 고요한 마음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 부채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마지막 때에 환란이 증대되는 이유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마지막 때에 환란이 증대되는 이유
성령 기도회 때 어떤 분들이 안수를 해 주면 신자들이 뒤로 많이
쓰러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신자들을 아예 한꺼번에 쓰러뜨리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 어디에도 선한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 쓰러졌다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을 받아 아드님을 잉태하실 때 뒤로
쓰러지셨을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성령강림 때 뒤로 쓰러졌을까요? 반면
저는 성경에서 마귀 들린 이들이나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이들이 성령의
힘에 의해 뒤로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즉, 성경에서 사람을 뒤흔들어 뒤로 넘어뜨리는 이유는 마귀가 인간의 영
안에 자리 잡고 있다가 성령의 힘에 의해 쫓겨나오면서 그 분노로 영혼도
건들고 육체도 건드려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후퇴할 때
군인들은 그 보복으로 양민들을 많이도 학살합니다. 한국 전쟁에서도
그랬고, 독일 군들도 후퇴하면서 수용소에 남아있는 유태인들을 굳이 다
학살하고 갔습니다. 어차피 자신이 차지하지 못할 바에야 남도 갖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악마의 심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안수 때 쓰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령의 거룩한 기운이
들어가면서 그 안에서 악령이 반응한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은 아닐까요?
명현현상이란 한의학 용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굴이 붉게 되는
까닭에 약을 썼는데 홍반은 그대로 있고 오히려 그 위에 뾰루지 등이 나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좋은 약이면 일주일만 참는다면 독소가 빠져나가
홍조도 사라지고 뾰루지도 사라집니다. 이렇게 좋은 약과 나쁜 것이
동시에 공존할 수 없어서 나쁜 것이 밖으로 빠져나오며 피부를 온통
전쟁터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이 쓰러지는 현상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오시는 날도 이
세상엔 환란과 전쟁, 기근으로 몸살을 앓게 될 것입니다. 이는 거룩한 분과
더러운 것이 함께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거룩한
분이 더러운 것을 빼 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구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지구의 구조는 마치 달걀처럼 되어
있습니다. 가장 깊숙한 곳에 매우 뜨거운 핵이 있고 그 위에 덜 뜨거운
맨틀이 있으며 그 위에 얇게 지각으로 덮여져 있습니다. 지각이 없다면
인간은 그 얇은 지각 밑에 갇혀있는 뜨거움 때문에 살 수 없게 됩니다.
사람도 가장 중심부에 핵이 있는데 그 핵을 ‘영’이라 합니다. 이 영이라고
하는 부분이 하느님이 거하시는 마음이라고도 하는 심장부입니다. 물론
하느님이 거하시지 않으면 나쁜 영의 차지가 될 수도 있는데 가장
중심부에 있기 때문에 그 밖에 있는 영혼과 또 가장 밖에 있는 육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조용하게 숨어있지만 하느님께서
다가오시면 영 안에 있는 악령은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땅을 버려야 할 때는 맨틀인 영혼을 흔들어 사람의 정신을 나가게
하고 또 가장 밖의 육체를 흔들어 화산처럼 사람을 몸부림치게 하며 최대한
피해를 주고 떠나가려 합니다. 이것이 마귀 들린 사람을 쫓을 때 사람이
몸부림치다가 죽은 듯이 쓰러지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그분의
힘이 점점 다가올수록 이 세상 가장 깊은 곳에 숨어서 세상을 통해 인간을
조종하던 사탄은 분노로 들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을 지배하는 것이
주인이 되는데, 이 세상은 사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쫓겨나는 사탄은 자신의 소유인 사람들의 정신을
상하게 만들어 싸우고 전쟁하고 서로 피해를 주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땅
속으로나 들어가 그 뜨거움 속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상이 좋은 것처럼 이 세상에 집착하여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사탄이 조종하는 이 세상을 좋아하는 이들은
사탄과 함께 바다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주님께서 급속도로 우리 세상을 당신 것으로 접수하시기
위해 오시는 기분이 듭니다. 20세기에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전
19세기 동안 순교한 모든 분들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의 저항은 점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칼날을 겨누며
이 세상이 자신의 것임을 철저하게 알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싸움에서
끝까지 견뎌 승리하는 이들만이 구원의 길로 가게 됩니다. 돈도 좋고
주님도 좋다는 식의 정신을 가지고서는 절대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한 주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성공 등에 저항해야 합니다. 지금은 더욱더 우리 영혼구원을 위해 철저한
정신무장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세상이 사탄의 것이고 사탄의 영향 하에
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바로 마지막 때에 바다의
깊은 물속으로 던져질 대탕녀 바빌론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 후 토요일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문화와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테러’가 있었습니다. 한 언론사가
테러의 목표였습니다. 그 언론사는 만평을 통해서 거침없이 세계의
지도자와 종교에 대해서 풍자를 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에게는
그 풍자가 몹시 거슬렸나 봅니다. 풍자를 풍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테러를 강행한 단체나 사람은 분명 잘못한 것입니다.
이념과 신념은 때로 광기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극단주의는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사회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일들이 생기곤 합니다.
‘슈퍼갑질, 마녀사냥, 종북몰이’와 같은 일들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서로
다른 생각도 품어주어야 합니다. 모두 같은 생각과 같은 말을 해야만 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전체주의이며, 독재국가에서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몸에도 다양한 세균들이 있습니다. 세균이 없는
몸이 건강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세균을 품어줄 정도로 면역력을 갖춘
몸이 건강한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국기 강하식’이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모든 시민은 가는 길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존경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국가에서 개인의 두발을 단속했었고, 국가에서 시민이 들어야
할 음악도 선별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가가 개인의 생각과 삶을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지켜주어야
합니다. 국가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제단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 판단하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관용’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잘못을 했을
때 그를 처벌하거나 비판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관용이
통용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쟁, 싸움,
폭력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 관용, 용서,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관용은 오늘 복음에서 본 것처럼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라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용기에서 자라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죽을 것 같았던 일들도, 분노와 미움도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관용을 베푸는 것이 얼마나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관용’의 달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진정한 육화의
신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겸손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 모두를 품어 주시는 관용의 시작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 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 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삶의 내용,삶의 질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보지 못한 길 때문에 힘들어 하지 마세요.
지금 가고 있는 길에서 최선을 찾아야 합니다.'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복음묵상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요한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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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위기감을 감지합니다. 자신들은 스승
요한이 조상 때부터 기다리던 메시아이자 그리스도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승이 그리스도라고
증언했던 예수님이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스승이 아닌 예수님께 몰려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중 하나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분명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 그것도 인생을 걸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요한의 제자들 역시 요한을 따르고자 결단을 내리기에는
많은 포기와 각오 그리고 희망이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 밖의 이야기를 스승으로부터 들었고,
거기에다 스승이 증언한 분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 적지 않은
마음의 동요가 있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더 나아가
열등감에조차 빠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더 없이 나름의
가치와 소명을 가지고 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분명 ‘어떤 길을 걷는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옳지 못한 길의 범주에 들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길은 가치가 있는 좋은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 한다 해도, 그 길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좋은 길은 오히려 불행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삶의 내용, 이른바 삶의 질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질은 복음적인 기준으로 재어야 합니다.
구세사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획을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의 길도
필요했고, 예수님의 길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필요했습니다. 누구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서 가치를 찾는 것을 넘어 소명의식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삶이라 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무엇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마음에
달려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우리의 믿음도 자라는 것이어야!|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얘기는 한 마디로 쿵짝이 잘 맞은 치유 사건입니다.
나환자가 올바른 자세와 신앙으로 치유를 청하니
주님께서 아주 흔쾌히 나환자의 병을 치유해주십니다.
치유청원과 치유 사이에 아무런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이것을 벙어리 영에 사로잡힌 아들을 둔 아버지와
주님 사이에 있었던 작은 실랑이와 비교하면
나환자에 대한 주님의 치유가 얼마나 산뜻한지 알 수 있습니다.
벙어리 영에 사로잡힌 아들의 아버지는 주님께 이렇게 청하지요.
“이제 하실 수 있으시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이에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뜻이냐고 면박을 주십니다.
어찌하여 “하실 수 있으시면”이라는 쓸 데 없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이와 비교하면 “하실 수 있으십니다.”고 나환자가 한 말은
아주 모범적인 믿음의 고백이요, 청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비판적으로 오늘 얘기를 들여다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에 “하고자만 하시면”도 “하실 수 있으십니다.”도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청원에 있어서 다 군더더기입니다.
아니, 군더더기보다 더 나쁘게 평가하면 믿음부족의 표시입니다.
주님께 하실 수 있다고 뭣 하러 말합니까? 요즘 젊은이들에게
“너는 할 수 있어!”라고 하듯 격려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요즘 많은
사람들이 권하는 말이 있지요. 자신 없어 하는 사람에게
"I can do it"을 주문처럼 하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없는 사람, 자신을 참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나는 할 수 있어!”라고 할 필요 없지요.
그런 것인데 주님께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고 뭣 하러 말합니까?
자신감이 없는 주님께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그런 방자한 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 부족한 내게 하는 거겠지요.
“하고자 하시면”이란 말도 군더더기 말이고 믿음 부족의 말입니다.
좋게 이해하면 주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표현이고, 주님의 선의를 믿는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더 완전하게 믿는다면 이런 표현조차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모에게 먹을 것을 청하면서
마음만 있으면 주실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지요.
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자식의 건강을 위해 안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모에게 주실 마음이 있느니, 없느니 말하는 것 자체가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불경한 말인 것처럼 하느님의 선의에 대한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거나 불경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할 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주님, 불쌍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믿음의 상태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환자도
완전히 믿지 못하다가 치유를 체험하고 나서
더 완전한 믿음을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더 완전히 믿는 자 되었기에
주님께서 이 치유의 기적에 대해 함구하라고 하시지만
나환자는 입을 다물 수 없어 구원자 주님을 널리 드러냅니다.
주님을 믿는 자에서 더 나아가 주님의 선포자와 공현자가 된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 [수도회] 하느님과 우리의 기쁨
2015년 나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5,14-21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주님 공현 후 토요일(2015년 01월 10일) 하느님과 우리의 기쁨
주님 세례 축일 전날인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기쁨을 부각시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기회
있을 때마다 ‘기쁨’을 강조하실 정도로 기쁨은 우리 신앙 삶과 수도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하하 웃으며 떠드는 그런 피상적이고 지나가버리는
기쁨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실망만을 안겨주는 거짓 기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이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
목소리를 들으면 크게 기뻐하지요. 내 기쁨도 그렇게 벅차 있소”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랑의 벗’이라고 소개합니다. 혼인잔치의 주인공은 신랑입니다.
신부를 맞아들이는 신랑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신랑의 벗은 단지 신랑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은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는 법이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상대방은 커지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네
속담처럼,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고 또 못먹는 호박에다 말뚝도
박기까지 하는데 말입니다. 남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내가 땅을 사고
내가 그 호박을 먹어야 기쁘고 행복한 줄 압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자세히 살펴보면 부모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하려고 부정적 방법을 쓰기까지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도 이기적인 행복의 추구 때문입니다.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도 이런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정말
이런 것에서 기쁨이 올까요?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골인해야 정말 기쁨이
절로 오는 걸까요?
어느 신부님이 강론글에서 “세례는 강물을 거슬러 사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사는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렇게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 세례의 삶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성공은 하느님의 여러 이름들 중 하나가
아니다”고 단언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성공은 높아지는 것이고 잘 나가는
것이고 남들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당신의 선구자였던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한테도 이 땅에서는 성공은 없었습니다. 실패의 상징인
십자가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에서 철저히 실패하신
이분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내일 막을 내리는 성탄의 신비는 작아짐과 낮추임의 사건입니다. 작아지고
낮아질 때 참으로 성탄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작아지고
낮아짐에 따라 우리 인간은 커지고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우리도 작아지고 낮아짐에 따라 다른 사람이 커지고
높아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규칙서
제7장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인 겸손에는 12단계가 있으며 이
단계를 다 오른 다음에야 하느님의 사랑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겸손의
이 모든 단계를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7,67-69).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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