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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수도회] 나의 변형과 사랑의 응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1,1-6
† 복음 마르 1,14-20
★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늘에 오르시어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사람으로 강생하셨지만 그 신성은 완전하여
천사들도 경배하는 반열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제1독서).
★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제자로 초대하는 부르심으로 출발한다.
부르심에 따라 나서는 어부는 이제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어부가 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돌과 흙으로 된 담장이 고색창연하여 아름답기 그지없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는데 담 구멍 사이에 뱀 허물이 기다랗게 걸려 있다. 뱀은 봄마다
허물을 벗으면서 성장한다. 허물을 벗는 것들은 많다. 기어 다니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면 어쩜 저런 자연의 섭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비 자체다. 아름답고 경탄스럽다. 지상과 천상의
세계는 일체 공간임을 생각하게 된다.
곤충은 자연의 질서로 번신(翻身)하지만 사람은 의식의 각성과
회개로 변신(變身)한다. 어떤 교우는 자수성가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고는
있는데 자신의 가족과 가정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인색하기 그지없었던
자다. 그가 본당의 ‘선종 봉사회’에 가입해 주검을 자주 대하면서 큰 각성을
얻었던가 보다. 어려운 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방도 고쳐 주고 희사도
했다. 밝고 툭 터진 얼굴로 성당에 와서는 교우들에게 웃음을 전염시킨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의 목적이 생겼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살아가는 목표와 이유가 뚜렷해지면 영생의 길을 깨치게 되어 몸도 마음도
변하게 된다. 그것을 ‘회개’라 할 것이다. 내 얼굴도, 이름 석 자도 어제
그대로지만 이제는 예수님 제자의 삶으로 갈아탔다. 어제까지는
절름거림이었지만 이제 껑충거림으로 간다. 직접 경험해 보아야 비로소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 느낄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 내가
어부임은 변함없지만 이제는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간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복(福)된 운명 -신비가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뉴튼수도원 63일째),
히브1,1-6 마르1,14-20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복(福)된 운명 -신비가의 삶-
언젠가 읽은 '재미없는 천국'의 미국, '재미있는 지옥'의 한국이라는 비유를
미국의 광활한 광야에 자립 잡은 뉴튼수도원에 와 있어 보니 실감합니다.
외적 자극과 도전이 없는 변화없고 역동성 부족한 환경에 자칫 안주하다
보면 무기력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막의 영성'에서 간과해선 안 될 점입니다.
한국 같은 끊임없는 자극과 도전에, 외적 변화가 눈부시고 역동성 강한
환경에선 생존 본능만 남고 삶은 천박해질 위험이 있는 반면, 변화와
자극이 없는 사막 같은 광활한 외적 공간의 여기 수도원 환경에선 쉽게
'무기력(akedia;아케디아)의 늪'에 빠질 수 있으니, 양편 다 장단점을
보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재미있는 천국'을 살 수는 없을까요? 방법은 단 하나 어느 환경에서든
깨어, 주님을 찾는 내적초월의 깊이의 여정에 항구한 노력뿐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화입니다. 여기 뉴욕에 계신 사촌 영숙 누님의 주선으로
누님의 아들 내과의사인 스테파노의 집에 초대 받아 여기 뉴욕,
뉴저지주에서 살고 있는 친지들을 모두 만나 오랜만에 축제와 같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 수철 형님, 작은 아버지와 똑 같아요. 이철 형님과도 똑 같구요.“
예전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그러니까 50년 만에 만난 저보다 한 살 적은
예전 경기중고(京畿中高)와 서울공대(工大)를 나온, 이젠 할아버지가 된,
독실한 장로교 신자인 '중철' 사촌 동생의 반가움 가득한 탄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포함된 7남(男)의 형제들과 1녀(女)의 고모에게서 태어난 사촌이
무려 55명이니 참 만나기가 힘든 사촌들입니다.
"얼마 전 면도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아버지 얼굴과 똑 같았어요.“
이어진 사촌동생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습니다. 작년 산티아고 순례
때 보내준 제 사진을 본 후 영희 동생의 반가움 가득 담긴 카톡 답변
메세지도 잊지 못합니다.
"옛날 아버지 사진 보는 것 같네요. 똑같으세요.“
이 모두 역시 신비로운 만남, 복된 만남, 일종의 신비체험 같습니다.
운명적인 만남의 인간 존재임을 실감합니다.
이렇게 얼굴을, 사진을 보면서도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얼굴의 신비'입니다. 아마 나이들어갈수록 아버지를 닮은 얼굴이 되어
가나 봅니다.
예전 젊었을 때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이 내심 못마땅했지만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니 바로 세월이 주는 성숙인것 같습니다.
순간
'아!
그러니까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이들어가면서 하느님
아버지 얼굴을 닮아가겠구나' 하는 은혜로운 깨달음도 마음 깊이 각인
되었습니다. 복된 만남, 복된 운명입니다. 만남의 신비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느님을 향한, 또 이웃을 향한 자기초월의 사랑의
신비가의 삶이, 영적 삶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수님과 '시몬, 안드레아' 형제들, '야고보, 요한' 형제들과의 만남은
운명적입니다.
만일 이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인생 어떠했을까요?
하느님의 섭리 앞에 '만약'이란 가정이 다 부질없는 말이지만, 평생 이
형제들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잡이 하면서 평면적인 반복의 삶을
살다가 평범한 일상에 매몰되어 아까운 인생 마쳤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생각하면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인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저 역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수도사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강론도 올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내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2012년 성삼일 주님 만찬 미사 때 깨달음처럼 스친 고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한 이 형제들!
정말 은총의 기적입니다. 이제 주님은 이들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었습니다.
내가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이들을 부르셨기에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은총의 부르심이 선행했던 것이며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만남의 충격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을
까요. 아마 주님을 찾는 내적 열망을 한눈에 통찰하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 말씀에 즉각적으로 응답한 제자들의 모습이 회개의 모범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향한 자기초월(自己超越)의 자유로운 수직적 비상(飛翔)의
내적여정이 시작됐음을 의미합니다.
밖으로야 평범한 예전 같은 일상 같아 보이지만 내적 상태는 예전과는
판이 합니다. 바로 목표로 하는 분이 분명해 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1,2ㄴ-3).
정말 은혜로운 고백입니다. 복음의 네 형제들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바로
이런 아드님 예수님을 따라 나섰으니 이보다 복된 일이 어디 있겠는지요.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네 어부 형제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전적포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성소의 양상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각자 주님께서 불러주신 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이고 전적인(immediate and total) 응답을 바라실 뿐입니다.
갈림없는 마음으로 항구히 주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내적성장과 성숙이요 주님의 얼굴을 닮아갈 수 있고
소유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신비가가 되어,
당신을 따르는 내적초월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시편34,6).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나의 변형과 사랑의 응답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마르 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나의 변형과 사랑의 응답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해 전하면서 그분이 선포하고자
하시는 기본주제가 “하느님의 복음”(1,14)임을 밝힌다. “하느님의 복음”
(로마 1,1; 2코린 11,7)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쁜 소식만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을 말한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복음에만 나오는 “때가 차서”라는 표현은 완료 수동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시간이 밖에서부터 차게 되었다는 뜻으로 우리가 당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절박하게 촉구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곧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속에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어 그 시간을
완성시켜 주심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구원과
심판을 가름하는 시간’이요 ‘은총의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과 죽음, 수난과 부활, 구원과 심판으로 가는 갈림길, 곧
‘구원의 시간’이 놓여있다.
우리는 구원의 길로 가려면 전존재를 하느님께로 되돌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수락해야 한다. ‘회개’와 ‘믿음’은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그 근본적인 새로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새로운 영적 태도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보이는 것들에
맛들이고 좇다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곤 한다. 그분이
주인이심을 잊고 마치 주인인양 그렇게 살아가는 때가 많다.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제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편할 대로 판단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순간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곧바로' 애착하고 묶여
있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떠남으로써’ 삶의 방향을 그분께로 되돌려야
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를 따라오너라”(1,17)하고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1,18),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을
버려두고(1,20) 따랐다. 그들은 몸과 마음과 생각이 익숙하게 젖어 있는
과거의 삶에서 떠났다. 이제 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었고,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인생의 호숫가에서 나를 부르고
계시고 당신께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들 각자는 그저 공간을 차지하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어 함께하시고 이끌어주심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의 선물을 주고 계신다. 이제 예수님께서 참
기쁨을 주러 오신 우리의 해방자요 구원자임을 믿고 기쁘게 살아가자.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말고, 긍정이시고 의미이신 '하느님의 힘을 믿고'
'그분 때문에' 그 어떤 처지에서도 기쁨의 나라가 실현되리라는 믿음과
긍정적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자!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다운 응답이 아니겠는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너만 늙지 않는구나.”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지난주 9일에는 제 동창신부의 기일이었습니다. 2003년에 뜻밖의 사고로
주님 곁으로 간 지 벌써 12년이나 지났네요. 성직자 묘원에 묻혀있는
동창신부의 무덤 앞에 영정사진을 놓고 그 주위에 동창신부와 몇몇
신자들이 모여서 함께 연도를 바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문득 영정사진
속의 신부는 여전히 30대 초반의 젊은 신부 모습인데, 그의 무덤 옆에서
연도를 바치고 있는 저희 동창신부들은 이제 젊은 신부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머리숱도 많이 없어지고, 흰 머리카락도
많이 생겼습니다. 또한 젊을 때의 날렵한 모습들은 사라지고 대신 배가 참
많이 나왔네요. 그래서 한 신부가 이렇게 말하네요.
“너만 늙지 않는구나.”
시간의 빠름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그 시간의 빠름을 오늘 새벽 또 다시 깨닫게 됩니다.
2010년 6월 17일. 제가 인천교구 성소국장으로 발령을 받고 교구청에
들어간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제 성소국장의 직무를 벗어버리고 1년
동안의 안식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성소국장’이라는 뜻밖의 소임에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이 소임을 충실하게 할까?’, ‘과연 내가 성소국장으로
잘 살 수 있을까?’를 걱정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의 시간을
보내고 떠납니다.
완벽하게 소임을 마쳤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할 수 있을까를 의심하고
걱정했던 것들에 비해서 잘 마칠 수 있음에 주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또 하나 깨닫는 것은 미래에 대해 굳이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 더 큰 희망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소설가가 쓴 글에서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어느 새해, 그 해에 환갑을
맞이하는 선배 소설가를 찾아가 세배를 할 때 이런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60에는 무엇이 있을까. 60에는 무엇이 또 나를 기다릴까. 가슴이 설레!”
미래는 걱정하는 시간이 아닌, 알 수 없기 때문에 설렐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인 것입니다. 저 역시 새로운 1년의 시간을 맞이하면서 걱정하기
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시간을 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성탄시기를 마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묵상하는 연중 시기가 시작합니다. 새로운 전례력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지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과거에 얽매이고 미래를 걱정만하는 어리석은 우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느끼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설레는
마음에 기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랑을 선택 할 수 있다. 미소, 악수, 격려의
말, 친절한 인사, 도움의 손길.... 이 모든 것이 사랑을 향해 내딛는 작은
발걸음이다(헨리 나우웬).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요즘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게임을 합니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온종일 게임을 할 수 있다면 마냥
행복해할까?’
방학인데도 학원에 열심히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에 ‘공부만 잘 한다면
마냥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떤 조사를 보니까, 행복감이 높은 아이일수록 마음속에 희망하는 게
많고, 그 희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고 합니다. 기대와
믿음이 행복감을 갖게 해주고, 그 행복감으로 아이들은 어떤 고통과
불안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한다고 해서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기대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꿈’인 것입니다.
행복하길 원하는 많은 사람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꿈이 없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나의 소중한 꿈을 다시금 간직하는 행복한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인이 더 큰 시련을 당하는 이유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복음: 마르코 1,14-20
< 성인이 더 큰 시련을 당하는 이유 >
성인이 되면 죄의 유혹과의 싸움이 쉬워질까요? 그렇기도 하면서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엄청난 사탄의 유혹과
힘겹게 싸우셨습니다. 이 전쟁은 신앙적으로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더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성향에 있는 사람은 마귀가 굳이 유혹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죄의 성향 때문에 쉽게 죄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커진 신앙인일수록 자아의 유혹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사탄이 직접 나서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씨시의 가시가 없는 장미를 보더라도 성인들이 죄의 유혹과 싸우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기 위해 얼마나
장미 위에서 굴렀으면 그 가시가 다 빠져 지금까지도 가시를 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대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성인들은 사탄들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이 잡고
있던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가니 마귀들이 화가 나서 직접 공격하는
것입니다. 아르스의 성인 마리아 요한 비안네 신부에게는 마귀가 때리기도
하고 심지어 침대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요한 보스코 신부도
마귀와 어떻게 싸워야 이길 수 있는지를 청년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진정 믿음의 길은 끊임없는 싸움의 길인 것 같습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은 인간 역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자신의 영역을 잃어버리는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땅을
더 많이 빼앗는데 도구로 쓰인 성인들에게 더 큰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상속자이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세상에서 죄가 깨끗이
사라졌을까요? 이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도 죄는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깨끗이 없애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말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자신의 땅에 뿌린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땅은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아벨의 피가 그 땅에 떨어집니다. 아벨을
죽인 것은 카인입니다. 하느님은 정의이시기 때문에 카인의 피가 스며든
땅에서 살인자가 계속 살게 하시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카인을 쫓아내기
위해 아벨이 희생당하도록 허락하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영원한
도둑이지만 하느님은 영원한 심판관이십니다. 마귀에게도 함부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고 그에 합당한 죄를 짓도록 유도하십니다. 정의의 심판을
내리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 없는 아벨을 죽인 카인은 하느님께서 정당하게
쫓아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마귀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 안에 있는 뱀,
자아입니다. 모든 인간이 자아의 말을 따를 때는 자신이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뜻대로 예수님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던 베드로에게 바로 ‘사탄’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안의 죄가
깨끗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아가 그리스도를 피 흘리게 했음을
명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하느님은 그
사실을 숨기는 내 안에서 정의를 실행하실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에야 비로소 자아가 죽고 그
땅이 그리스도의 차지가 되는 것입니다.
욥은 벌을 받아야 하는 아무 이유가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사탄을 내쫓으시기 위해 욥이 사탄
때문에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사탄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게 만드는데 도구로 사용된 욥은 그 고통의 대가로 하느님께 더 큰
사랑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성모님,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여 사탄을 내어 쫓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물론
그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만큼 더 큰 자리에 앉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더 커졌다고 해서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하게 직접 공격을 해 옵니다.
그러나 항상 사탄과의 전쟁에서 거룩하게 흘리는 피는 하느님의 영역을
넓히는 보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월요일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예비자 교리를 할 때입니다. 가끔씩 가방에 물건을 가져가서 맞추는
분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습니다. 방법은 ‘스무고개’라는 게임이었습니다.
대게는 4번 정도면 가방 안에 있는 물건을 맞추시곤 하였습니다. ‘성경책,
묵주, 성모상, 신심서적’ 등과 같이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힌트를 드리면 맞출 수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교황이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첫 번째의 힌트에서 정답을 맞혔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3번째 힌트에서 누구인지 확신했을 것입니다. 정답은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베드로’사도입니다.
정부와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것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약속한
것들이 다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기록물들이 시중에
떠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배가 침몰했을 때, 신속하게 구조작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뜬금없이 담뱃값이 2000원이나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정부는 국민에게 잘하고 있다는 것을 상세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통이고, 이것이 대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푸른 지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공기, 물, 들과 산은 보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을 찬미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돌아보면 이 지구에는 하느님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인류의 영적인 스승은 굳이 종교가 없었었어도, 이
지구에서 하느님을 알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정령의 시대입니다.
교만한 인간이, 이 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슴에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측은한 마음, 겸손한 마음, 부끄러운 마음, 선과
악을 느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양심에 따라서 살면 그 안에서 들여 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양심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제도와 문명을 만들었고,
인간은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화의 시대입니다.
완고한 인간들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욕망의 바벨탑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 분노와 전쟁, 미움과 원망의 악취가 진동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로써 종교의
시대, 신학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예언자들은
밝은 빛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눈이 멀어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언자들마서 외면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선물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을 살면서도
영원을 꿈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어디인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주로 불러 주는 분들은 누구인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떤 모임을 좋아하는지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자리, 나에게 이익이 오는 자리, 나의 명예와 나의 자존심이
드러나는 자리, 편안하고 즐거운 자리만 찾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불편하고, 손해 보는 것 같고,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가치 있고,
소중하며, 참된 행복을 주는 그런 자리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였습니다. 분명 광이 나는 자리는 아니었고, 물질적인
이익이 보장되는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2015년의 1월도 많이 지났습니다. 내가 응답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여야
하는지, 최근에 내가 응답했던 자리는 어떤 자리였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하느님 나라의 선포|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마르1,14-20)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하느님 나라 선포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에 의해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
(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 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머뭇거림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자기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취미생활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일, 운동을 하며, 쇼핑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마태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한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중에서.
@@@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 일화
교황님께서 유 신부에게 주교서임을 통보하시자 유 신부는 주교가 될
수없는 3가지 이유를 댔다고 합니다.
1. 저는 나이가 젊습니다.
2. 저는 일을 모릅니다.
3. 저는 덕이 없습니다.
그러자 교황님께서
1.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나이를 먹는다.
2. 일은 로마에서 알고 있다.
3. 주교 중에 덕 있는 사람 본 적이 있나? 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사나이다운 이런 모습
2015년 나해 1월12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예수님의 사나이다운 이런 모습
서품 후 첫 번째 간 본당 신부님이 작고하셨지만 오늘 너무 생각납니다.
‘좋은 일이라 판단되면 즉결 처리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습관 되어, 좋은 일을 많이 처리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소뿔은 단숨에 빼라는 말처럼 앓는 이도 단숨에 빼야 쉽다는 생각입니다.
리더쉽이 강한 예수님의 사나이다운 이런 모습이 역시 보스기질, 맞습니다.
제자들은 어부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즉시 따랐기에 오늘까지 알려지고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코 1,17~18)”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내어드리기
2015년 나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시작입니다. 1,1-6
복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0
연중 제1주간 월요일(2015년 01월 12일)
내어드리기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공생활을 시작하며 예수님이 하신 첫 선포 말씀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기나긴 인내와 기다림의 때(구약)가
지나고 이제는 ‘완성의 때’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표징은 바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염원하는 하느님 나라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이 지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직접 다스리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오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현존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협력이 꽃필 때 더 가까이 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 선포와 제자들의 부르심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이
하느님 나라 선포에 이어 바로 제자들의 부르심을 서술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공자는 “산을 움직이는 자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한다” 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사람을 부르는 작은 일로 위대한
하느님 나라 선포를 시작하십니다. 부르심의 과정은 참으로 단순하고
직관적이고 명료합니다. 그 ‘단순성’에 마음이 저절로 갑니다. ‘보다,
부르다, 버리다(남겨두다), 따랐다.’ 예수님 편에서는 사람들을 보시고
부르시고, 사람들 편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성경에서 ‘보다’ 동사는 ‘앎’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꼴아지, 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 뒤를 따르시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만드시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선언은 곧 말뿐인 것이 아니라 현실이며 사건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의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주님에게서 나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순간 우리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내 욕심과
이기심과 조바심 등 다른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건 잘못된
추종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쓰시는 대로 쓰게 우리 자신을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바보스런 길, 멍청한 길, 우둔한 길, 손해보는 길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성령을 보내실 때까지 주님의 길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들 걸려 넘어졌습니다. 특히 십자가에 완전히
걸려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심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교육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영신수련에서 하신 기도가 마음에 다가옵니다.
이 기도가 우리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의 보호 하에 저의 모든 자유를 가지소서. 저의 기억, 저의
지성, 그리고 저의 의지를 받아들이소서. 제가 가지고 소유한 모든 것들,
당신이 제게 아낌없이 주셨으니 당신의 뜻대로 온전히 다스리기 위하여
당신께 이 모든 것을 돌려드리며 넘겨드리나이다. 저에게는 오직 당신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당신의 은총을 주소서. 그러면 제가 충만하고 더 이상
청할 것이 없나이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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