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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17일 토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수도회] 울타리를 허물고 온전함으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4,12-16
† 복음 마르 2,13-17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 인간의 한계성이 강조되어 구원 불가론에 흔들리는 히브리인 공동체에
대한 메시지는 계속된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똑같은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다의 율법으로 볼 때 구원받을 가망도 없다고
단정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많은 세리와 죄인의 식사 자리에도
참여하신다. 새롭고 놀라운 믿음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들은 친분과 사교에서 유유상종(類類相從)한다. 부유함에 사회적
지위까지 겸한 상류 사회는 주거와 소비의 향유 행태에서 특별한 사회를
구성한다. 가난한 이들이 그들 단체에 출입할 수도 없을뿐더러 곁으로
이사 오는 것도 용인되지 않는다. 재개발 지역에 들어선 호화 고층
아파트에 소형 평수의 임대 주택을 의무화했는데 이용하는 승강기를 따로
만들고 편의 시설 이용도 제약했다. 환경은 사람마다 다르게 되어 있으니
빈부 격차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대상일지 모르나, 사람의 인격이란 모두
같은 무게를 지녔기에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사회라야 진정으로
품격을 지닌 세상이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역 유지로, 또는 지식인으로, 저명인사나 상류층 인사로
대우받기를 전혀 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가난하고 병고에 시달리며
소외에 우는 이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은 늘 무리를 이루며 그분을 따랐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 교회가 사회적 하층민들의 차지가 된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만약에 한국 사회의 상류층은 주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청년 실업자와 빈민, 다문화 가정,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교회로
몰린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축복의 징표가 될 수 있다. 세리까지도
제자로 부르시고 ‘나는 의인과 사귀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 삶과의 동시성에 충실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야말로 유유상종의 공동체다. 사회적 지위나 계층,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예수님 제자의 삶을 공유하는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의
형제자매로서 유유상종하는 것이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예수님과의 우정(friendship with Jesus)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17일 토요일(뉴튼수도원 68일째)
성 안토니오 아빠스(251-356) 기념일, 히브4,12-16 마르2,13-17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예수님과의 우정(friendship with Jesus)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성인보다는 이렇게 105세까지 사신 안토니오 성인을
보면 더 존경스럽습니다. 살아 갈수록 심신도 서서히 무너져내리기
마련인데 이렇게 고령까지 정정했다는 사실이 참 불가사의(不可思議)
합니다.
요즘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깨닫는 사실은
성인들 모두가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감있게 다가 온다는 것입니다. 흡사
하느님처럼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는 성인들처럼 아주 가까이 느껴집니다.
세월이 지나면 대부분 미화되어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리지만,
세상은 언제나 어지럽고 삶은 팍팍했습니다.
순탄한 환경에서 성인이 된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당시에는 말세처럼 나름대로 몹시도 힘들었던 시대를 산 성인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고통이었고
삶은 늘 치열했으며 사후(死後)에야 비로소 휴식을 누린 성인들이셨습니다.
환경이 성인을 만들지 않습니다.
내외적 좋은 환경으로하면 유럽이나 미국보다 더 좋은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쪽의 교회는 날로 쇠퇴해가는 모습이 흡사 가을을 넘어 겨울을
연상케 합니다.
중세기만 해도 성인들의 나라라 해도 좋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가
왜 이렇게 교회들이 고사 직전까지 갔는지 깊은 묵상감입니다.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환경이 아닌 '주님과의 관계'가 성인을 만듭니다. 사실 아무리 좋은 내외적
환경도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과의 관계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됩니다.
성인들의 영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과의 우정
(friendship with Jesus)'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의 관계,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을 빼버리면 성인들에게 남는 것은 완전 공허뿐입니다.
성인들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핵심사항도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의 깊이에 따라 성인도 되고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됩니다.
주님과의 우정이 깊은 거룩한 사람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지만,
주님과의 우정이 빈약한 독한 사람은 괴물(怪物)이,
주님과의 우정이 빈약한 여린 사람은 폐인(廢人)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삶은 언제 대해도 감동입니다.
-어느 것도 너를 혼란케하지 마라. 어느 것도 너를 놀라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간다. 하느님 홀로 변함이 없으시다.
인내만이 모든 것을 획득한다.
그 누구든 하느님을 소유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성녀의 진솔한 고백시가 심금을 울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만으로, 예수님과의 관계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행복합니다.
다 사라져가도 하느님만은, 예수님과의 우정만은 영원히 남습니다.
마지막 주님 대전에 갖고 갈 것도 예수님과의 우정 관계 하나뿐입니다.
세상 온갖 소유를 지니며 살았어도 가지고 갈 예수님과의 우정 관계가
없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망하겠는지요!
성녀의 임종어 역시 감동입니다.
신비가이자 시인인 성녀의 면모가 약여(躍如)합니다.
"결국 나는 교회의 딸로 죽습니다. 오, 나의 주!, 나의 정배시여!
내 갈망하던 시간이 왔습니다. 이제 당신을 만날 시간입니다.“
평생 시련과 고통 중에 주님만 갈망한 삶이었기에 고통 중에도 달게 죽음을
맞이했던 성녀였습니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사람, 교회의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헌신적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의 성소는 은총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은총의 부르심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성인이 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셨듯이
이미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 역시 응답했습니다.
부르심은 순전히 은총입니다. 레위처럼,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레위가 잘 나서, 우리가 잘 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부족했기에, 필요로 했기에 부르신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하느님 눈엔 더욱 그렇습니다.
병과 죄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죄에서 병이요 병에서 죄입니다. 병과 죄의
사슬에 매여있는 불쌍한 사람들이요 바로 이것이 약한 인간의 숙명입니다.
예수님만이 이 숙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과연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지요? 소통의 욕구, 관계의 욕구, 앎의
욕구, 우정의 욕구는 근본적이요 절대적입니다. 수도원 내부 깊이까지
들어 온, 이젠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핸드폰과 인터넷입니다.
갈수록 분별의 지혜가 절박한 시대입니다.
소통중의 소통이, 관계중의 관계가, 앎중의 앎이, 우정중의 우정이,
주님과의 소통이요, 주님과의 관계요, 주님을 앎이요, 주님과의 우정입니다.
믿는 이들에겐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삶의 의미는 예수님과의 우정(friendship with Jesus) 하나뿐입니다.
살아갈수록 주님과의 우정도 깊어져가야 하는 겁니다.
이래야 비로소 사막은 낙원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외적 환경도 주님과 깊은 우정의 관계가 없으면 마음은 삭막한
사막입니다. 도대체 무슨 맛, 무슨 재미, 무슨 기쁨으로 광야같은 인생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 만에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막연한 노력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우정의 심화입니다.
말씀은 영이자 생명이요 빛입니다. 다음 히브리서의 고백 그대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부단히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여 잠재의식내의 괴물들을
무력화시킵니다.
말씀의 공부와 실천 수행, 바로 이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요 이 과제에
충실할 때 비로소 장애물들도 사라져 날로 깊어져 가는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에 낙심하거나 절망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사제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확신을 가지고 대사제 예수님께서 집전하시는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성체성사보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게해 주는 은총의 매개체는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울타리를 허물고 온전함으로
2015년 나해 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 마르 2,13-17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마르 2,16)
울타리를 허물고 온전함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원인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2,14),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2,16).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소명이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음”(2,17)을 분명히 선포하신다. 당시 갈릴래아의 영주는 헤로데
안티파스였는데 관리를 두어 직접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계약을 체결하여 일정 기간 민간인에게 빌려 주었다. 그렇게 세금
징수권을 따낸 사람은 사람을 고용하여 보통세와 관세(지방세)를
거둬들였다. 헤로데 안티파스의 경우에는 통행세도 거둬들였을 것이다.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세금을 터무니없이 많이 매겨
부당이득을 취했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으로 여겨졌다(마태 11,19).
그들은 영적 감각이 무딜 대로 무뎌 있었다. 따라서 그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거나 식사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인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것은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죄를 선(善) 안으로 받아들이시어 다시 시작하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분법적인 사고로 인한
폭력의 함정에 빠져 헤매는가! 선과 악을 가르고, 자연과 초자연을 가르며,
성과 속을 쪼개고, 좋고 나쁨을 가르면서 얼마나 많은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가! 이런 면들은 한 인격체인 ‘나’의 두 얼굴이며 좋지 않고 싫은
부분을 잘라내서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 사이의 소통을 통해
영성적 통합, 곧 하느님께서 주신 순수본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악을 가르면서 ‘영혼의 아픔’인 죄를 늘 ‘선(善)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내몰아버린다. 죄란 나약한 인간이 하느님께 주신 선을
자기 것으로 삼는 소유이며, 스스로를 사랑이신 하느님의 울타리 밖으로
추방해버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덩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세리를 제자로
삼으심으로써 죄를 선으로 바꾸는 복음화를 실행하신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는 세례의
은총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선과 본성을 받아들여 거듭
나도록 초대해주신 것이다.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서로의 죄스런 모습에
분개하지 말자.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못마땅한 말과 행동, 죄와 불의
앞에서 단죄의 울타리를 치지 말고 오히려 울타리를 치우고 헤아리는
마음과 사랑으로 포용하도록 하자.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버리고
‘사랑의 기다림’ 속에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죄와 소통해보았으면 한다.
어찌 폭력과 분열을 부르는 선과 악의 가름만이 문제이겠는가!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재물의 소유 정도나 사회적 지위, 학연, 지연 등에 따라
얼마나 견고한 ‘끼리끼리의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가는가? 교회
신앙공동체 안에서조차도 이런 인간의 차별의식과 이분법적 사고가 만든
분리장벽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를 거스르고 비인간화를 재촉하는
암덩어리와도 같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적인 모든 조건과 처지를 뛰어넘어 오직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소중한
형제자매임을 삶의 유일한 기준이요 행동방식으로 삼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제발 남보다는 낫다는 하찮은 우월감이나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교만을 버리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근본 소명은 홀로
의인이 되는데 있지 않고, 죄인마저도 품으며 함께 선으로 나아가는데
있지 않은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예수님의 열린 마음을 본받고
2015년 나해 1월17일 토요일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어떤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연말이라 너무 바쁜 날들이 계속될 때 한 청년이 신부님께 면담을
청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정말로 미안하지만 요즘 정신없이 바빠서
힘들다며 조금만 여유가 생길 때 면담을 하자고 뒤로 미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청년이 글쎄 갑작스런 불의의 사고로 주님 곁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그때 조금만 시간 내어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면 이렇게 미안해하고 후회하지는 않을 텐데 하고
말이지요.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 때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바로 후회를 남길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나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도 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후회를 남기면서 미안의
감정만을 쌓아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접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내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마음이 먼저 변화되어야 몸 역시 움직여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마음의 움직임을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몸도 움직여질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이 마음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닫힌 마음을 고수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열린 마음을 항상 좋지 않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렇지요. 그들은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에 강한 비판을 던집니다. 율법에 부정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음식까지 함께 나누면서 너무 가까이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의사가 병자를 만난다고 해서 손가락질 받을 일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의사는 병자를 찾아서라도 만나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치유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지요. 따라서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 즉 죄로 물들어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해 주시는 일이 전혀 비난 받을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린 마음을 본받고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의사가
병자를 만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열린 마음을 통해 지금 내가 만날 사람
그리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 삶,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우리가 ‘주여,!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라고 말 할 용기를 절대 잃지 않기를...(프란치스코 교황)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잘 활용합니다(앤 랜더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잘 활용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사고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노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놀이는 변함없는 젊음의 비결입니다.
책 읽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독서는 지혜의 원천이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역경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됩니다.
사랑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줍니다.
우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생활에 향기를 더해줍니다.
웃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웃음은 영혼의 음악입니다.
나누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주는 일은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삶에 활력을 줄 것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네요. 시간을 잘 활용하셔서 이 모든 것들을
잘 실천할 수 있는 의미 있고 행복한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씀의 칼은 영과 영혼을 구분한다
2015년 나해 1월17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복음: 마르코 2,13-17
< 말씀의 칼은 영과 영혼을 구분한다 >
어떤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 속에 묻혀 지내기를 좋아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평가도 받지 못하면서 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있으려고 해도 조용히 있지 못합니다. 마음 안에 꿈틀대는 뜨거움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런 이들이 이끌어갑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물소(버팔로)는 인디언들의 전부였습니다. 식량이자
도구였으며 신발이었고 옷이었고 집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인디언들의
생명과도 같은 버팔로들이 쓰러져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백인들이 들어오고 재미로 혹은 인디언들의 주식을 다
없애버리기 위해 버팔로들을 무작정 죽인 것입니다. 백인들이 들어오고
2년 동안 370만 마리의 물소가 죽었는데 그중 355만 마리가 백인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버팔로 빌’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한 백인 사냥꾼
윌리엄 코디(William Cody)는 인디언들의 주식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며
자그마치 4,280마리의 버팔로를 혼자 죽였습니다. 현재 미국 네브라스카
인근에는 버팔로 빌을 기념하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반항하면 백인들은 무력으로 인디언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가장 악랄했던 미국의 제7기병대가 운디드니(Wounded Knee) 강 부근의
계곡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수우족 2백여 명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래 어떤 인디언도 백인들의 총과 대포 앞에 반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백인들이 만들어놓은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서 만성적인 실업,
알코올중독, 범죄 등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때 미국의 영웅이었던 존 커스터 장군이 이끄는 제7기병대를 대파했던
인디언의 영웅이 있었습니다. 바로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 성난 말)
라 불렸던 ‘타슈가 위트코’였습니다. 땅을 팔라는 백인들의 강요에 “자기가
걸어 다니는 땅을 팔아먹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며 그 무시무시한
제7기병대에 맞서 승리하고 존 커스터 장군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먹을 것이 사라져버린 땅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백인에게 항복하고
처형당하여 운디드니에 묻혔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의 얼굴이 미국 땅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러시모어산에
미국의 영웅들을 조각했던 크자크 지올코브스키는 크레이지 호스의
정신에 감명을 받아 러시모어산과 불과 27km떨어진 돌산에 거의 50년
동안 크레이지 호스의 얼굴을 새겨 넣었습니다. 작업은 다음 세대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크자크는 말합니다.
“나는 인디언 후원자가 아니다. 단지 진실을 전하는 돌 속의 이야기꾼일
뿐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참조: EBS 지식채널 19, Crazy Horse]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돼 있다며 세상에 순응하며 살라고 사람들은
충고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절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 안에 어떤
뜨거운 불이 있어 그냥 그렇게 미지근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불입니다. 성령을 받고 사도들은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은 조용히 있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때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하고 싶어서 하는 선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미지근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머무시는 장소는 내 안의 가장 깊숙한 ‘영’의 자리입니다. 이 영이
평소에는 영혼과 큰 구별이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영이 무엇이고 영혼이
무엇인지 구별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성령께서 그 영 안에 자리를
잡으면 그 영 때문에 영혼이 골치가 아파집니다. 자신은 편하고 싶은데 더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밖으로 솟아나오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입니다. 영은
뛰쳐나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데 영혼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과 영혼이 대치됩니다. 그래서 영과 영혼이 뚜렷이 구분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말씀을 통해 부어주시는
성령 덕분으로 자신의 영혼이 지금까지 영의 작용을 가로막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영혼은 마치 지구 핵의 그 뜨거운 기운이 지구의 맨틀에 막혀
있어서 지각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영과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은 영이고 영은
영혼을 설득하고 영혼은 육체를 설득하여 자신의 뜻을 피려고 하는데 그
반대되는 뜻을 지닌 영혼과 육체의 성향이 뚜렷이 구분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온 친구를 다른 친구들이 사창가로 끌고 갔습니다.
자신들의 친구라 여겼던 그 사람은 자신 안에 말씀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모두 거부했습니다. 몸부림을 치다가 옷도 찢어지고 상처도
났습니다. 자신 안에 말씀을 간직하면 반드시 세상과 구별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구별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구별이 쉽지 않습니까? 말씀의 칼은 성령인데 성령은 모든 이를
명확히 구분되게 합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은 버립시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15년 나해 1월17일 토요일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CCTV'라는 말이 있습니다. 폐쇄회로 텔레비전이라고 합니다. 이는
교육용, 교통통제용, 방범용으로 주로 쓰입니다. 저도 이 cctv 덕분에
범칙금을 낸 적이 있습니다. 도로에 설치된 cctv가 과속으로 달리는 저의
차를 찍었기 때문입니다. 제 차에도 전방에는 블랙박스가 있고, 후방에도
카메라가 있습니다. 블랙박스는 사고가 발생하면 사고의 경위와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것입니다. 후방의 카메라는 후진할 때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인천의 한 어린이 집에서 교사의 폭행 모습이 담긴 cctv가 공개되었습니다.
폭행을 당한 어린이의 마음은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자녀들을
어린이 집에 맡겨야 했던 부모님들의 마음도 아팠을 것입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어린아이를 폭행한 교사는 법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와 같은 행위를 소위 ‘갑질’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항공기안에서, 백화점에서, 어린이 집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디에나 계시다고 믿습니다. 특정한
지역에만 설치된 cctv는 그 지역만을 화면에 담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곳을 다 보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몸과 마음을 늘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 범칙금 고지서를 발송하지 않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기다려 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 하느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을 속이고,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를 짓게 됩니다. 나의 선행과 나의 악행의
무게를 달아보면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 생각해 봅니다.
호주의 원주민이 현대의 문명인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숨을
쉰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숨을 쉰다는 것은 아직 땅에 묻힐
때가 아닌 것입니다. 숨을 쉬면서도 살아 있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데 그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숨을 쉰다는 것도 감사할 일인데 불평과 불만
속에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욕심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고, 소중한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지는 엄격함은
있었지만, 죄인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지만 세상은 다양성 안에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 살아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이 없는 엄격함과, 자비가 없는 정의는 참된 평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참된 평화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죄인이어서 행복합니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17일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마르2,13-17)
2015년 나해 1월17일 토요일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죄인이어서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징수를 위임 받은 사람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는 로마인들의 하청을 받아서
세금을 거두어 바치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 받았고 직책상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민족적인 시각에서는 압제 세력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반역자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이민족인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늘 부정한 상태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그들과 상종조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과의
친교자리를 상징하는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데 죄인들을 그 자리에 불렀다면 결국 그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행위입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우리가 죄인이라면 주님의 사랑은 더 간절하십니다.
한시라도 빨리 서둘러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 이십니다. 용서에로의 부르심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분 안에
2015년 나해 1월17일 토요일 (백)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분 안에
요즈음은 화장, 의상, 성형 등으로 사람을 제대로 보기가 아주 힘듭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처럼 개살구 같은 사람을 우선 선택한다는 거지요.
개살구 같아지려고 모두가 야단들 하니 사회가 개살구 같아지는 거고요.
이런 개살구 세상인데도 성실과 진실로 희생하며 사는 분들은 있습니다.
의정부 아파트 화재 '숨은 의인' 이승선 씨는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이런 분 안에 살아계시며 세상을 구하시려 하신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죄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사랑하라는 것보다 더 큰 법은 없습니다.'
2015년 나해 1월17일 토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복음묵상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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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세상이 말하는 죄와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고, 또 하나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와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과 동석한 이들을 단죄를 하려고
합니다.
그 율법학자들이란 예수님으로부터 회를 칠한 무덤 같은 이들이라는 말을
들었던 대상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어느 사회이든 다양한 법과 규례를
정하고 강제성이나 구속력을 발휘하여 그 구성원들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장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부딪힐 때 그리스도인은 분명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법은 무엇일까요? 교회가 말하는 하느님의 법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교회에는 두 종류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법이라고 신앙공동체가 믿고 있는 자연법
(自然法) 혹은 신정법(神定法)이라는 법입니다.
자연법의 내용은 간단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마태오22,34-40/ 마르코12,28-34 / 루카 10,25-28)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연법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낸
인정법(人定法)이라는 법입니다.
말 그대로 교회가 만든 법이며, 무수한 조항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더 이상 큰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어떤 사건들을 만나더라도, 선과 악, 그리고 죄에 대한
식별 기준으로 이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판단이든 그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법에 합당한 것인가를 신중히
살펴보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코 속은 썩어가는데 겉만
번지르르한 위선 덩어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보통 우리는 남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한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이것 역시 또
다른 우리의 나약함이겠지요. 우리는 양심(良心)이라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 그대로, 양심이란 ‘좋은 마음’을 말합니다.
어느 누구든 하느님께 생명을 부여 받을 때, 그분께서 심어놓으신 좋은
마음을 뜻합니다. 그 양심의 법을 따르는 것,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법이 모든 법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은 한 마디로 살리는 법입니다.
죄인을 죽이는 법이 아니라, 선으로 이끄는 법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죽이는 법이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느님의 법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법임을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푸가 문디(Fuga mundi)
2015년 1월17일 토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2-16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2015년 01월 17일) 푸가 문디(Fuga mundi)
바람이 많이 부는 찬 새벽입니다. 창문 밖 나무가지에 멧비둘기 한 마리가
홀로 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지는 이리저리 흔들리는데도 고요히
앉아 있습니다. 늘 함께 오던 다른 아이들은 없습니다. 이 한 마리 덕분에
나무가 굳건히 서 있는 듯 보입니다. 오늘따라 한 마리의 존재감이 더 크게
와 닿습니다.
오늘 교회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250-356) 아빠스를 기념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홀로 이집트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하셨던 분이십니다.
‘수도승의 아버지’라 일컬어집니다. 한 사람의 존재가 이처럼 교회 전체에
큰 영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분한테는 그리스도 한 분만이 있었습니다. 모든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께만 전적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사막으로 나갔습니다. 이를
라틴어로 ‘fuga mundi’(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떠남은 부정적 의미가 아닙니다. 오리게네스는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나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을 말한다. 길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전진하면서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본질적인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대화됩니다. 성 안토니오가 듣는
것과의 싸움, 말하는 것과의 싸움, 보는 것과의 싸움을 하면서, 점차
그리스도를 듣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를 비롯한 세리와 죄인들 역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전부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든 이들인 자신들을 위해 오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주님 앞에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지금 주님 안에 있음을 깊이 자각하면 나의 어둠은
힘을 잃습니다. 나의 어둠은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만드는 욕심이며
집착이며 탐욕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주님은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지금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 주님을 만나는
사막은 어딥니까?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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