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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수도회] 가장 존귀한 인간 존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6,10-20
† 복음 마르 2,23-28
★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면서 당신 이름을 위하여
헌신하고 사랑한 행위를 잊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는 공동체의 봉사자들에게 그들의 희생이
현실적으로도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 앞에 공덕으로 쌓인다는
것을 알라고 강조한다(제1독서).
★ 진실로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과 헌신으로 사는 사람은 율법에서
자유롭다. 법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빌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은 강도 높은 노동의 연속 속에서 무엇보다
하느님께 선택된 선민으로서의 종교 의식을 금지당하고 숨소리를 죽인 채
가족 예배를 드려야 했다. 반세기에 가까운 그 기나긴 유배 생활의 어둡고
괴로웠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편히 쉬며 마음 놓고
찬양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인간적 소망을 「창세기」 작성에 반영하여
하느님의 이름으로 안식일 규정을 만들었다. 삶의 고난에 지친 이들을
위한 장치로 안식일의 규정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이란 가장 인간다운 환경의 날이자 하느님 백성임에 대한
감사의 날이다. 무엇보다 통치자나 기업주나 종교 지도자를 위한 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배 세력들은 안식일 규정의 위법 사례를
단속하며 자신들의 존재감이 빛나는 날로 삼았다. 진리가 왜곡될 때는
언제나 근본을 보아야 한다. 출발점의 초심을 기억하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안식일은 평화와 자유를 보장하고자 생긴 날이라고
말이다.
“근로 기준법을 지켜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횃불로 만든 청년 전태일을
생각한다. 환풍기 하나 없는 칙칙한 다락방에서 하루 16시간 이상씩
노동해야 했던 개발 독재 시절, 사람은 모자라고 수출 달성과 경제 성장,
총력안보 구호만 나부끼던 비정의 시대였다. 약자인 노동자로서 차마 법을
어길 수는 없고 제 몸을 불살라 법을 지키라고 항의하며 스스로 횃불이
되었던 그의 죽음 앞에 오늘의 봉급생활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제 고용
조건과 보장도 완전해져서 사람 살 만한 세상이 되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성과 중심의 고용에 스스로 자신을 혹사하는 자발적 노예 노동의
시대가 나타났다고 할 것인가?
삶의 안식이 절실한 시대, 창세기적 인간 시대를 갈망한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하느님 중심의 사랑 -하느님이 먼저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뉴튼수도원 71일째),
히브6,10-20 마르2,23-28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하느님 중심의 사랑 -하느님이 먼저다-
하느님 중심의 사랑이 답입니다. 사람 중심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랑에서 저절로 사람 중심의 사랑이 흘러 나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미국시간 1.18 연중 제2주일)의 느낌이 참 각별했습니다.
새삼 호수위를 걸었던(?) 엊그제(미국시간1.17일)의 체험이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요즘은 여름도 겨울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오늘 날씨는 꼭 장마같아요.“
저녁기도 전, 수사님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엊그제는 영하 10도였고 어제는
영상5도, 온도차가 무려 15도였고 하루 종일 장마처럼 비가 내려
수도원 넓은 정원 한복판에는 빗물이 내가 되어 흐를 정도였습니다.
우산을 쓰고 호수와 수도원 묘지를 다녀 오면서 엊그제의 결정적 체험에
감사했습니다.
"아, 하루만 늦었어도 호수위를 못 걸었겠네!"
엊그제의 체험을 많은 이들과 나눔으로 기쁨을 선사했고
저또한 이체험으로 인해 어제 주일은 물론 오늘 지금까지 내내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어느 신부와의 주고 받은 카톡문자입니다.
-앗 신부님 반갑습니다.... 미국에서 선물이 도착했네요 ㅋㅋ.
호수위에서 기적! 중력의 법칙을 거부하는 호수네요.-
"아마 위에서 끌어당기는 하느님 사랑의 힘이 중력보다 컸던(?) 까닭인 듯
합니다.“
덕담을 나누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힘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저절로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에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하느님을 믿을 때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믿는지,
하느님을 희망할 때 하느님이 얼마나 우리를 희망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너를 희망한다.“
이런 하느님의 우리 향한 철석같은 사랑과 신뢰와 희망을 깨달아 안다면
결코 함부로 막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신뢰하시며 희망하십니다. 바로
다윗과 예수님의 대담한 이웃 사랑은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나 잘 깨달아 알았기에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자들에게도 나눠 준
다윗의 대담한 실천적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안식일 법까지 넘어서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확신이 없으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사랑에 의해 안식일도 상대화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랑에서 사람 중심의 사랑이 흘러 나옵니다.
일이, 법이, 돈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입니다.
'사람이 먼저다' 어느 대선 후보의 슬로건이었지만, 사람이 먼저이기
이전에 하느님이 먼저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묵상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릴 때 올바른 분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이자 희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앞에 놓인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주십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 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고'(히브6,18-20참조)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 되시어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대사제이신 주님은 거룩한 지성소와 같은
성전미사를 통해 우리의 부족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북돋아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에페1,17-18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 가장 존귀한 인간 존재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다.”(마르 2,27)
가장 존귀한 인간 존재
예수님께서 5-6월경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는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2,23).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밀이삭을
뜯는 것도 안식일을 어기는 추수작업에 해당된다고 보는 법해석에 따라
(미슈나 샤바트 7,2)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다(2,24). 당시 율법에 따르면,
곡식밭에서 손으로 이삭을 잘라먹을 수는 있으나 낫을 대서는 안 되었다
(신명 23,26).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은 나무꺾기,
잎따기, 추수, 키질, 탈곡, 거친 가루 준비 등 서른아홉 가지나 되었다(탈출
34,21).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항의를 받으시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27) 하고 말씀하시며
안식일법의 본래 정신을 분명히 밝혀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창세 1,26-2,4). 인간이
있어 법과 제도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찍이 랍비 시므온 벤 메나자
(Schimeon ben Menasja, 서기 180년경)도 “너희들이 안식일에 맡겨진
것이 아니다. 안식일이 너희들에게 맡겨졌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바리사이들도 일정한 경우에는 율법의 예외를 인정함으로써 율법을
완화시켜 해석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훨씬 폭을 넓혀 율법을
인간을 위한 사랑의 바탕 위에서 해석하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율법은
상대적인 의미와 가치가 있을 뿐 비인간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었다. 곧
안식일법의 세칙들이 인간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인간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레위 23,3). 그런데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사랑의
가르침이 인간을 살리는 것이지 인간을 도구화 하는 안식일법이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성찰해보자!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학이다.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의 그 사랑의 의지를 실현해나가는 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요 삶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인간을
최우선시 해야 하며,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 사람 위에 사람도 제도나
법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의식, 수직적인 줄세우기를 통해 다른 이들을 종속시키는 행동,
인간을 도구화 하는 자본과 경제논리,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닌 힘 있는
자들의 칼로 변해버린 법 등. 얼마나 많은 인간의 종속화, 도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제 살아가는 일상생활, 평범한 대인관계에서부터 서로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자. 그 어떤 제도나 법도 인간 위에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을
도구화 하지 않도록 다짐하자. 우리 삶에 원칙과 기준, 다양한 법규들이
필요하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의 일치와 화합을
찾아나가려는 넓은 마음을 갖도록 하자!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의 법과
말씀을 인간의 틀 안에 가두려는 시도나 남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하자! 늘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나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저는 요즘에 안식년으로 혼자서 글도 쓰고 강의 준비도 하면서 나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어느
성당의 사제관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월세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지내다보니 해야 할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청소, 빨래, 식사준비 등등,
전에 하지 않던 것들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물론 갑곶성지에 있을 때와
본당에 있을 때 식복사 없이 혼자서 다 했었기 때문에 낯선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제가 살던 공간을 생각하면 정말로 끔찍합니다.
너무나 더러웠거든요. 그래서 이번만큼은 정말로 깨끗하게 그리고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청소도 빨래도 또 식사 후의 설거지도 매일 조금씩
바로 하면 됩니다. 미루었다가 한꺼번에 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제대로
정리가 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하면 시간도 줄어들고 항상
깨끗한 집을 만들 수가 있지요.
어쩌면 우리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피정 한 번으로 자신의 부족한 신앙심을
한꺼번에 다 채울 수 있을까요?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성당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갔다고 주님께 충실한 자녀의 모습을 갖춘 것이
될까요? 레지오 활동 한 번만으로 세상의 모든 봉사활동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주님께 충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특별히 어떤 일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다했다는 어리석은 모습을
갖춰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면서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것이지요.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뭘 이렇게 난리를
피울까 싶지만, 그들은 유추해서 대단한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의 행동이고, 밀의 껍질을 벗겨 먹기 위해서는
비벼야 하는데 이는 타작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추수와 타작이라는 일을
했기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이고, 이렇게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특별한 하나의 행동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 내리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본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뜻에 맞게 평상시에도 살아왔다면 절대로 그렇게 난리를 피우지는
않았겠지요. 한 부분만을 보고 모든 것을 본 것인 양 착각하는 모습에
예수님께 대한 비난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은 어느 한 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준한
나의 모습, 특히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행동하는 나의 모습을 통해서
점점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에게 선행을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증진시킨다(조로 아스터).
복 있는 사람(‘인터넷에서 퍼온 글’)
물고기는 물과 다투지 않습니다. 물이 조금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물이
조금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물살이 조금 빠르면 빠른 대로 물과 같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산에 있는 나무는 산과 다투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좁으면 좁은 대로
자신의 주위가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큰 나무들이 있으면 있는 대로
햇볕이 덜 들면 덜 드는 대로 처지에 맞추며 살아갑니다. 나무는 자신이
산에서 어울려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햇님은 구름과 다투지 않습니다. 구름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잘난척을
해도 조용히 참고 기다렸다가 찡그렸던 하늘을 더 파랗고 맑게 해줍니다.
구름이 비를 몰고 와서 모두를 적셔 버려도 바람과 함께 불평하지 않고
말려 줍니다. 햇님은 자신의 할일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현재에 충실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복 있는 사람은 복스러운 행동을
하기에 복 있는 사람일뿐 복을 주었기에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는 매일 매일 똑같은 양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같은 양의
복을 받고서도 복스럽게 행동하는 사람과 복 없게 행동하는 사람 이렇게
둘로 나눠집니다. 복스러운 사람은 매순간 순간이 감사하고, 복스럽지 못한
사람은 매순간 순간이 불평불만입니다.
이렇듯 복이란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 즉 고마움입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고맙고 감사한 일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희망하는 것을 믿으면 지금의 고생도 감사가 된다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복음: 마르코 2,23-28
< 희망하는 것을 믿으면 지금의 고생도 감사가 된다 >
우리는 같은 환경에서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미래의 무언가를 내다보며
열심히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작은 어려움에도 쓰러져 포기하는 경우를
보기도 합니다. 이런 삶의 자세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과연
우리가 인생에서 지치지 않고 성공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어제 문자로 받은 인터넷에 떠도는 ‘감사의 위력’이란 글입니다.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이 된 뉴욕빈민가 출신
콜린파월 장관의 이야기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장에서 어느 날 그는 다른 인부들과 함께 도랑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서 한 사람은
묵묵히 열심히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몇 해가 지난 후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때 여전히 그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또 여러 해가 흘러 그곳에 다시 갔을 때 삽에 기댄 채 불평만 하던 그
사람은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장애인이 되어 회사에서 쫓겨났지만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그 회사 사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화는 파월의 인생에 큰 교훈이 되었다고 합니다.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그 불평의 열매를 따먹게 마련입니다. 반면 감사는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가져올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을 증가시켜준다.
행복은 결국 감사에 비례합니다.
서양 속담 중에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조심하라. 불평의 문으로 행복이 새나간다.”
“기억하라 감사의 문으로 행복이 들어온다.”
이것이 감사의 힘입니다.
일본 마츠시타 전기의 창업자 마츠시타 고노스케 사장은 일찍이 감사의
마력을 간파했던 사람입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과 고립돼 있다는 점이다. 다른 게 있다면
불평하느냐, 감사하느냐의 차이 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
감사는 희망의 언어입니다. 감사는 역경을 벗어나는 인생의 출구입니다.
그저 감사하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지금의 삶의 전부가 아님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미래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하느님나라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사실을 믿도록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상속을 받게 된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맹세까지 하셨지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한 줄기 빛이었던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더 이상 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망설이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출발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약속을 지키신다는 희망으로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을 넘어섭니다. 이 희망과 믿음이 지금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란 첫째,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고 둘째, 약속을 그냥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이름을 걸고
맹세까지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실이 희망이 되어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주춧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따라서 이 희망이 없다면 현세의 짧은 쾌락에 집착하게 되어 불평불만만
하다가 약속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약속에 희망하고
희망한 것을 믿으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희망하고 있는
곳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고난을 더 적극적으로
극복합니다. 고난에 감사까지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고생이 없으면
즉, 지금의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이르는 길은 가시밭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느님 나라가 앞에 펼쳐졌을 때 자신이 걸어온 고난의
길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다가오는
고난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하느님의 약속에 희망을 걸고
하늘나라 상속자가 되었음을 굳게 믿는다면 그 증거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느냐인 것입니다. 반대로 말해 매 순간 감사할 수 있다면
이미 희망하고 믿고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2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I am hungry.’를 번역하면 ‘나는 배고픕니다.’입니다. 배탈이 나서 밥을
안 먹은 것인지, 단식을 하려고 밥을 안 먹은 것인지, 건강 검진을 받기
위해서 밥을 안 먹은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입니다.
지난 연말에 모 정당이 해산되었습니다. 저는 그 정당이 해산되어야 할
정당인지, 우리나라가 그 정도의 정당 때문에 국가적 위기를 겪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정당 해산 청구 신청을 했고,
헌법 재판소는 8:1이라는 압도적인 의견으로 정당의 해산을 결정하였고,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하였습니다. 저는 헌법
재판소의 결정을 두 번 정도 보았습니다. 한번은 대통령 탄핵 소추에 대한
판결이었고, 다른 하나는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 위헌 여부에 대한
판결이었습니다. 그때도 헌법 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했었고, 지난해의
판결도 존중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정당의 해산은 지나친
판결이었다고 할 것이고, 어떤 분들은 잘 한 판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는 행위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의사에게는 환자가 필요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런
비유의 말씀들은 그 안에 숨은 뜻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말만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하면 자칫 ‘아전인수’의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회는 50년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 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많은 규정과
법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시대에 맞도록 바꾸었습니다. 전례,
신학,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에 대한 해석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와 쇄신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노루를 잡아먹는 늑대를 모두 죽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노루의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생태계는
또 다른 방향으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늑대를
국립공원에 풀어 놓았더니 생태계는 새로운 조화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늑대는 생태계를 위해서 나름 필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도 언젠가는 지나간 것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주님의 기도 33번|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마르2,23-28)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조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합당한
시간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는 관습도 생겼습니다. 사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글도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렵지
않게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곳에서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에서 유래합니다. 신명기에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신명5,12-1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안식일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유익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손희송)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본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를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을 취해야 할 오늘의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 날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서른아홉가지나 되는데 밭 갈기, 파종하기,
추수하기, 두 가닥 실로 길쌈하기, 글자 두자 쓰기, 불 끄기, 물건 옮기기,
병자 고치기등등입니다. 그런데 밀 이삭을 뜯었으니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원의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주일날은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미사성제에
참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의무로써가 아니라 기쁨으로 미사참례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제대로 쉴 줄 알아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제대로 쉴 줄 알아야 합니다.'
2015년 나해 1월20일 화요일 복음묵상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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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편안 할 안(安), 숨쉴 식(息), 날
일(日)이라는 한자들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편안하게 숨쉴 수
있는 날이라는 뜻이지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좀 서글픈
생각도 드는 말입니다. 삶이 그만큼 힘들다는 말 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창세기 1장1절부터 2장4절까지의 창조설화에서 하느님께서
6일간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쉬셨다는 이야기에서 그
기원을 찾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 창세기 1장1절부터 2장4절까지의
내용이 쓰여졌던 시기는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100여 년이 지난 기원전
597년부터 기원전 538년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남아있던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의 왕족과 귀족, 대부분의 주민들이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한 시기입니다. 이를 바빌론 유폐라고 합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고된 강제노역에 지친 이들이 고향의 삶을
그리워하면서 자기 반성과 함께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자신들의 신앙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 부분이 창세기의
1장1절부터 2장4절까지의 창세기 설화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는 쉬셨다는 안식일 개념을 집어넣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노역에 시달리는 고달픔으로부터 휴식에 대한 열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간, 안식일이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노동이 주는 고단함으로부터
쉬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유폐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종교적 의미로 정립화되었고, 그 영향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도 주일이라는 의미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이 생긴 것이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뒤따르는 법들이 사람 위에 선다면 그것은 결국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역행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이해하고 아름답게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주일 미사를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일 미사를 왜
지켜야 하고, 주일 미사를 지키는 이들의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주간의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 뒤돌아보고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맞이하라는 뜻입니다.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날, 정말 기분 좋은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창조된 귀하디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편안한 숨을 위해서
복음은 오늘도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겼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그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어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됨됨이가 되기 위한 것 외엔 다 사족(蛇足)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됨됨이가 되기 위한 것 외엔 다 사족(蛇足)
십인십색이라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예리하고 정확한 분별력이 있어야 되지요.
분별력 또한 취향 직업 욕심 따라 제멋대로면 인생은 어디로 가야하나요.
사람이라면 외모보다 내면을 실력이나 지위보다 됨됨이가 우선 기본이지요.
그리고 하늘까지 통하는 불변하는 진리로 무장한 사람이라야 되고요.
그러니 진리로 무장해 됨됨이가 되기 위한 것 외엔 다 사족(蛇足)일
뿐입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 2,27)”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2015년 나해 1월20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형제 여러분,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히브 6,1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여러분은 봉사를 많이 하시지요?
없는 시간 할애해서, 없는 돈 나누어서, 나보다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작은 희생과 봉사를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때론 나도 어렵고 힘든데 하고 있는 봉사와 나눔을
그만둘까 생각할 때도 있지요?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데, 어떤 때는 괜한 오해도 받는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실망에 빠질 때도 있지요?
걱정마세요. 하느님께서 다 기억하고 계신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라 해도 하느님은 그걸 잊지 않으신답니다.
그러니 오늘도 그 사랑의 봉사를 계속해야겠지요?
오늘도 기쁘게 힘차게 사랑의 봉사를 시작합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틀
2015년 나해 1월21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6,10-20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연중 제2주간 화요일(2015년 01월 20일)
틀
우리는 살면서 모든 것을 세세히 규정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틀을
만들면 우선 안전하고 편하고 잘 돌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좋은
뜻으로 만든 틀이 더 세부적인 틀을 만들고 또 계속 틀이 틀을 만듭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가 만든 틀에 갇히게 됩니다. 옴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틀이 틀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법만이 지배합니다.
내적으로도 우리 자신을 옭아매는 경향이 있습니다. 숨도 못쉴 정도로
스스로를 압박합니다. 자신이 만든 틀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마치
하느님의 기준인 양 여기며 그렇게 합니다. 일종의 세심증적 강박관념적
결벽증적 경향까지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의 머리에는 벌
주시는 하느님, 공포의 하느님, 응징하는 하느님 상만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만든 거짓 하느님일 따름입니다. 또 더 나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런... 거짓 하느님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런 하느님 앞에 어떤 사람이
베겨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만나시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도 틀이 있엇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틀입니다.
이분의 잣대는 사랑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감동하고 이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해방시키는 분이십니다. 자유를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자유는 생명을 더욱
성장시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종과 나태를 사랑과 자유의 허울로 우리
자신을 치장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참으로 솔직할 필요가
있지요.
베네딕도 성인의 일화가 있습니다. 몬떼카시노 수도원 근처 동굴에서 어떤
수도자가 바위에 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고 수행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성인이 전해들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그 수도자에게 찾아가
타이릅니다. “그대 자신을 바위에 사슬로 묶지 말고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묶으시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유와 생명의 법 자체이십니다.
‘묶인 사람’이 아니라 ‘풀린 사람’으로 우리가 살도록 원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도 따뜻해지지 않습니까?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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