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사업으로 남한강의 새로운 명관광지로 부상하는 여주를 찾아 문화와 남한강의 아름다운 가을풍경에
건강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2) 음력 9월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 (지금의 여주시 명성로 71(능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민치록(閔致祿) 1799~1858 추증 영의정, 여성부원군, 시호는 순간(純簡),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의 5대 손으로 자는 원덕(元德)이다. 벼슬은 1830년(순조30) 참봉을 시작으로 과천현감 (종6품), 임피현령(종5품),덕천군수(종4품),장악원 첨정(僉正 종4품)을 거쳐영천 군수(종4품)에 이르렀다. 민치록의 첫 번째 부인은 해령부부인으로 추증된 해주 오씨(1788 ~1833)로 조선말기의 유명한 노학자 노주(老州) 오희상(吳熙常)의 딸 이었는데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었으며, 두 번째 부인 (한산 이씨 1818~ 1874 한창부부인)이 명성황후의 생모로서 훗날 민승호와 함께 죽동궁에서 폭사 당한 바로 그 이다.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쥔 것은 지아비인 왕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청정하면서라던가, 아니면 명문가인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명성황후는 이전의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지아비인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명문가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다. 살아 있는 왕보다도 더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고 생각하여도 매우 특이하고도 경이롭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웠으므로 사람들이 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절이름을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절은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고도 불렸다.
구룡루는 1689년(숙종 15)과 1749년(영조 25), 1860년(철종 11)에 각각 중수된 기록이 있다.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대장각 안에는 대장경과 함께 권희(權僖)가 조성한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과 홍의룡(洪義龍)이 죽은 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한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 그리고 강부인(姜夫人)이 시주를 얻어 조성한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을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배불정책으로 이 절 또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영릉(英陵 :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 2월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金堂)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祖師堂)·명부전·심검당(尋劍堂)·적묵당(寂默堂)·봉향각(奉香閣)·칠성각(七星閣)·종각(鐘閣)·구룡루(九龍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신륵사에는 보물 제225호로 지정된 대리석재의 다층석탑, 국내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탑인 보물 제226호의 다층전탑(多層塼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온 것이 오늘날의 신륵사이다.
요즘 4대강엔 유람선 타는 맛이 인기가 좋아 이고 유람선으로 시원한 강풍경을 즐기며~~~ 값은 인당 6,000원,단체는 5,000원이며
유람선에서 즐건 음악으로 옛 선비들의 노니는 기분도~~~
4대겅 사업을 하면서 신륵사 주위엔 잘 조성된 공원과 휴식공간으로 새로운 관광명소로 여러지방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답니다.
또한 9월 24일 여주까지 전철이 개통되어 더욱 교통이 편리해져서 여주싱[서는 더욱 발전되기를 기대하시네요!!!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조선의 제 4대 왕 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으로, 정식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418년 6월 3일 조선의 제3대 왕인 태종은 세자 이제를 폐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태종실록]을 통해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대소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반면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 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두 달 뒤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까지 군사 문제는 직접 결정하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와 6조, 그리고 상왕이 함께 의논한다는 조건부 양위이긴 했지만 전격적인 결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