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5)
용서와 구원에 대한 극사실주의적 심리 탐사
- 이창동 감독의 네 번째 영화〈密陽〉
<한국 로맨스/멜로, 드라마. 2007. 05. 23. 142분>
스스로를 가두는 판결
이창동 감독의 네 번째 영화인 <밀양>을 보고 처음 떠올린 것은 ‘아, 이 사람도 이제 50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많이 부드러워지고 있구나. 예각과 같았던 현실인식의 날이 부드러워지는 대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의 시선이 보다 심화되고 섬세해져 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첫 영화인〈초록 물고기〉(1997)에서는 근대화라는 상업주의의 세속적 폭력 앞에서 영혼이 마모되어 가는 한 인간의 비극을 통해 가족주의의 비애를 그렸다.〈박하사탕〉(1999)에서는 5 18 광주 민주화운동의 트라우마로 비인간화되어 가는 한 영혼의 세속적 부침(浮沈)을 통해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 이 영화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시제를 통해 한 젊은이의 순수한 영혼이 역사적 격랑 속에서 어떻게 오염되어 가는가를 냉철한 리얼리스트의 시각으로 그렸다.〈오아시스〉(2002)에서는 소외당한 두 젊은이의 순수한 사랑과 교감의 판타지를 통해 정상인의 일그러진 영혼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창동 감독은 비교적 과작의 템포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한 편 한 편을 작가의 개입이 없는 관찰자 시점이라는 리얼리스트의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의 부침 속에서 개인이 겪어야만 했던 정신적 트라우마와 오염되는 영혼을 통해 세속화된 도시 속의 비인간화된 우울한 풍경을 정중동의 영상으로 표현해 왔었다.
그런데 5 년여의 긴 침묵 끝에 내놓은〈밀양〉(2007)에서는 이전까지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현실에 대한 예각적 날 대신에 부드러운 은유와 풍자로 극사실주의적인 인간 탐사를 시도하는 면모를 드러내 보이고 있어 다소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그만큼 역사적 상흔으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한 리얼리스트로서의 냉철한 객관주의적 시각이 깊고 넓어짐을 느낄 수 있다. 시대와 인간에 대한 역설적 풍자와 은유보다는 인간 내면의 탐사 쪽으로 포커스가 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구원과 용서에 대한 근원적 문제에 천착한 이번 영화〈밀양〉을 보면서 두 번째로 떠올린 것은 시인 최정란의 다음과 같은 시였다.
아프리카 어떤 부족은/ 살인사건이 있고 일년이 지나면/ 범인을 강물에 들어가게 한다./ 슬픔의 시간을 보낸/ 피해자 가족은/ 그를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깊이 밀어 넣을 수도 있고/ 그를 용서하고 물 밖으로 나오게 할 수도 있다./ 그를 죽게 내버려두면 평생을 슬픔 속에서 살게 되고/ 그를 용서하면 행복이 온다./ 낮 꿈에도 가위 눌려/ 허우적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나는/ 누구를 용서하지 않은 것일까/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소한 일상의 재판으로/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가두는 판결을 내렸던가.
- 최정란,「강물재판」, 시집『여우장갑』(문학의 전당) 중에서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살인사건이 있은 후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사이에 왜 일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두고 있는가? 피해자 가족에게는 범죄로 인한 슬픔과 상처의 치유 시간도 필요하지만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말미를 주기 위한 것이고, 가해자에게는 자기 성찰을 통한 참회의 시간을 주기 위한 배려 때문일 것임은 자명하다. 피해자 가족은 가해자(범인)를 용서하지 못하면 평생을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하고, 그를 용서하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밀양〉은 바로 이러한 기독교적인 구원과 용서의 문제를 기독교적인 신앙의 은유와 비유로 인본주의 시각에서 성찰하고 있는 영화이다.
여주인공 신애(전도연 분)가 그의 아들 준을 유괴 살해한 범인인 학원 원장(조영진 분)을 교도소로 찾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은, 인용한 시처럼 ‘그를 내버려두면 평생을 슬픔 속에서 살게 되고, 그를 용서하면 행복이 온다.’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용서하기 전에 이미 신이 그를 용서하고 구원함으로, 신앙을 통해 얻은 절대자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쳐 놓쳐버리는 상실감으로 실신해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지루할 정도로 자주 언급되는 기독교 신앙의 문제는 감독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구원과 용서의 문제는 인간관계의 몫이라는 주제의 변주를 위한 은유적 비유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구원과 용서의 관건은 인간의 몫
구원과 용서, 그리고 화해는 ‘하늘’로 상징되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화두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풀어야 할 숙제라는 것을 이 영화는 처음과 마지막의 시퀀스를 통해 상징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첫 시퀀스의 쇼트는 승용차앞 좌석에 앉아 있는 아들 준의 시점으로 소개되고 있다. 맑고 선명한 구름이 떠있는 첫 시퀀스의 ‘파란 하늘’의 쇼트가 바로 절대자로서의 기독교적인 신앙을 은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퀀스의 엔딩 쇼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찬(송강호 분)이 들고 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이며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쇼트는 구원과 용서의 몫은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신애가 자른 머리칼이 바람에 쓸려 도달하는 것은 마당 한켠의 구질구질한 구석 배기이다. 마당 한켠 구석배기는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을 상징화하고 있다. 삶에 대한 낙관적 희망으로서의 신애의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휩쓸려 간 그 곳에 ‘비밀스런 햇볕(밀양)’ 한 자락이 비추고 있는 것으로 이 영화는 끝난다. 여기에서 머리카락 위로 옅게 스며드는 ‘비밀스런 햇볕’은 영화 내내 신애에 대한 종찬의 서성거림과 사람 좋은 넉살로 상징되
고 있는 인간의 온기를 의미하고 있다. 결국 신애의 상실에 대한 고통과 좌절, 그리고 상처를 보듬어 주며 그녀에게 따뜻한 삶의 온기를 건네주는 것은 신과 교회,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인간으로 상징되는 소시민 종찬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쩌면 거부감을 일으키고 특정 종교 집단의 반발을 살지도 모르는 교회 장면이 많은 것은, 인간에 의한 구원과 용서만이 한 인간의 영혼을 포용할 수 있다는 주제의 변주를 위한 은유적 비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역할로서의 신앙과 교회가 매도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애의 남동생이 요즘도 교회를 다니느냐고 종찬에게 묻자, 그는 “안 가면 섭섭하고 가면 뭔가 마음이 편안하고 위안을 받는 것 같다”고 얼버무린다. 그의 이러한 궁색한 변명이 바로 어쩌면 오늘의 교회와 신앙이 담당해야 할 몫이고, 또한 소명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극도의 좌절과 아픔 끝에 처음 도달한 곳이 바로 교회이고 신앙이다. 오열과 절규로 고통의 극단에까지 치달아 있는 신애의 머리 위에 얹어진 목사의 손은 현실적 교회로서의 껴안음이라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마음의 끈을 놓은 채 방황하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포용으로서의 신의 은총인지도 모른다. 또한 약국 주인인 장로(이윤희 분)와 신애가 본능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는 장면에서, “하느님이 보입니까?”라고 냉소적으로 묻는 말에 장로가 ‘하느님이 보고 있다.“며 옷매무새를 추스르는 모습은 신앙의 본질에 다가가 있는 목회자의 신앙적 태도를 희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숲 속의 야외 부흥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는 장면에서 신애가 튼 김추자의 가요 ’거짓말이야‘가 흘러나오는 장면 역시, 구원과 용서라는 기독교 신앙의 현실적 허위의식에 대한 냉소적 표현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섣불리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 했던 신애의 옅은 심리적 풍경에 대한 희화적인 역설적 풍자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심리적 방어기제가 자초한 파국
소설가 출신의 리얼리스트답게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수술에 임하는 냉철한 외과 의사처럼 인간 존재의 양면성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신애의 파국은 그녀 자신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꾸려 나가고자 하는 지방의 소도시 ‘밀양’은 낯선 공간이다. 인간은 낯선 공간이나 낯선 존재에 대해서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발동하여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그러한 방어기제적인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죽은 남편이 분명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음에도 그녀는 그러한 사실을 진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녀의 남동생이 남편의 외도 사실을 밝히고 있음에도 그녀는 그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왜 이곳에 정착하려 하느냐 물으면, 남편의 고향이기 때문이라며 남편과의 금슬이 좋았음을 은근하게 상기시킨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과 남편의 외도 사실을 숨기는 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으로서의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할 수 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부풀려 말한다. 결국 주인공 신애는 타인들이 그녀의 일상을 함부로 넘보는 것이 두려워 자기 과시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발동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옷가게 여주인에게 인테리어를 바꿔보라고 넌지시 얘기를 건네어 자신의 미적 감각을 과시하게 되고, 부동산 중개인에게 대지 매입에 관해 전화를 걸어 자신이 결코 궁색하지 않다는 물질적 풍요를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웅변학원 원장의 일상적 곤궁의 덫에 걸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생명을 내주게 되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자기 과시와 현시적 욕구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질적 조건에 대한 절대적 존재인 신의 시험인지도 모른다. 여기서의 신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그녀가 이러한 현실적 조건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신은 결코 그녀에게 아들을 잃는 절대 절명의 시련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현실적 조건에 순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철저한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자기 과시와 현시의 욕구라는 무리수를 두어 자승자박의 한계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녀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카센터 사장인 종찬의 행동은 그녀에게 현실 순응의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자기 누나와는 지적인 수준이 맞지 않으니 일찌감치 손을 떼라며 그녀 남동생으로부터 수모를 받는 장면, 피아노 학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그럴 듯한 치장이 필요하다며 상장을 벽에 붙여주는 행위 등은 그녀의 진정한 자기 성찰과 인식을 깨우쳐 주는 희화적 풍자의 역설적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인간 구원과 용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계상황 속의 인간조건에 대한 성찰에 관한 보고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간 심리에 대한 냉정하고 치밀한 극사실적 탐사
이창동의 영화〈밀양〉은 인간 심리에 대한 냉정하고 치밀한 극사실주의적(hyper-realism) 인간 탐사의 관찰 보고서에 가깝다. 영화의 구성으로서의 내러티브보다는 신애라는 한 연약한 여자의 인간 심리의 추이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배치되어 있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장면이나, 종찬을 동심원으로 하는 지방 소도시 ‘밀양’에서 벌어지는 일상생활의 여러 장면들은 구원과 용서, 그리고 희망이라는 인간적 삶의 화두라는 주제와 감독의 예각에 가까운 현실인식의 변주를 위해 세심하게 배치된 하나의 예술적 미장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크게 네 부분으로 분할될 수 있다. 첫째는 신애의 밀양 정착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에피소드, 그리고 다음은 아들 준이 유괴 살해당하고 나서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신앙을 통한 구원이고, 세 번째는 인간적 용서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치고 나서 신애의 신앙에 대한 역설적 일탈 행위의 에피소드, 그리고 마지막은 종찬으로 상징되는 인간을 통한 구원과 용서의 발견으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하는 에피소드이다.
이러한 네 개의 메인 플롯은 일상적 시간 순서에 의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드라마틱한 서사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이러한 메인 플롯은 신애와 종찬의 일상을 중심으로 모자이크된 여러 서브플롯의 힘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두 번째 메인 플롯인 아들 준이 유괴 살해당하고 난 뒤의 신애의 좌절과 고통, 그리고 신앙에 의한 구원으로서의 에피소드들은 자칫 잘못하면 목회자를 비롯한 기독교 관계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자아성찰에 의한 믿음의 뿌리가 없이 현실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섣불리 신앙에 의지한 한 연약한 여자의 심리적 풍경을 형상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차용된 전략적 플롯이라고 해석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종교적 의미 훼손에 대한 강한거부감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신의 긍휼과 포용에 의해 인간적 구원과 용서의 기회를 박탈당한 이후에 전개되는 신애의 배교적인 일탈 행위의 에피소드들은 주제와 감독의 현실인식을 위해 전략적으로 차용된 듯한 작위성의 느낌이 짙다고 볼 수 있겠다.
메인 플롯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신애의 자아각성에 의한 인생에의 진정한 개안과 종찬을 통한 인간적 구원으로서의 용서와 화해는, 전체적 서사 분량에서는 비교적 짧지만 아주 큰 무게 비중을 지니고 있다. 신애는 섣불리 신앙에 의지하려 했으나 드디어 바닥이 드러난 자신의 영혼의 황폐함을 감지하고 아연실색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해 행위를 통한 참회와 속죄의식을 통해 거듭나는 열병에 휩싸인다. 그러다가 드디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구원의 안식처(종찬)를 발견하고, 거울(자기반영) 앞에서 머리를 싹둑 싹둑 자르는 일종의 경건한 삶의 의식을 치르며 비극적 효과로서의 자기정화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영화〈밀양〉은 인간 심리에 대한 극사실주의적인 냉철하고 치밀한 일종의 인간 탐사의 심리학적 관찰 보고서에 가깝다.
작가주의 감독인 이창동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 관찰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영화〈밀양〉에서 철저한 인문학적 리얼리스트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는 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는 상징적 장면을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종찬의 견인차에 실려 밀양 시내로 진입하는 타이틀백의 시퀀스에서 드러나는 지방 소도시 밀양의 원경은 하나의 신비주의적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이미지의 시퀀스는 새로운 정착지에 대한 신애의 삶의 열정적 태도를 반영하는 인간적 풍경과, 또한 도시를 감싸고 있는 듯한 파스텔 톤의 신비한 하늘의 이미지를 통한 종교적 구원과 용서라는 이중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신애와 종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낯선 배우들이다. 학원 원장 역의 연희단거리패 출신 조영진을 비롯한 옷가게 여주인 역의 김미경, 노래방에서 가요를 열창하는 주부 역의 김혜정, 약국 주인으로 교회 장로 역을 소화하는 이윤희, 신애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지역 유지 역의 박상규, 유괴 살해 사건을 지휘하는 형사 반장 역의 고인범 등은 모두 부산 지역의 현역 연기자들이다. 감독은 이처럼 극사실주의적인 치밀하고 냉정한 일상 연기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낯선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있으며, 신애와 종찬을 제외한 여타 인물들은 의도적인 연기를 지양하고 일상적인 연기에 충실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신애보다는 종찬이 더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종찬이라는 인물을 소거한 채 신애라는 한 여성만으로 서사구조를 끌고 갔다면 인간 성찰의 프리즘을 통해 번져 나온 다양한 감동을 감지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애라는 인물은 개성적인 유형이지만 종찬이라는 인물은 보편성을 바탕으로 한 유형적 인물형에 속한다. 신애는 개성을 지닌 특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종찬은 어떤 집단(계급)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보편성을 지녀 공감의 폭이 크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기 위해서는 종찬이라는 인물의 배치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종찬이라는 인물을 소화한 송강호의 능청스러운 일상적 연기는 절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머리를 자르기 위해 신애가 미용실에 들렀을 때 학원 원장의 딸을 만나는 장면인데, 상징적인 압축으로서의 간결성보다는 미용실을 뛰쳐나가는 신애의 심리적 풍경을 구체화시켰더라면 하는 점이다.
또한 이 영화에는 타이틀백의 첫 시퀀스와 유괴 살해 현장의 장면, 그리고 엔딩 시퀀스의 주제 음악을 제외하고는 거의 배경 음악을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 인물들이 뿜어내는 삶의 편린이라는 다양한 풍경과 오브제가 인위적인 음악을 대신하고 있다. 퍼스트 씬과 엔딩 씬에서 서로 대비되는 신적인 하늘의 풍경과 일상적 지상의 풍경, 견인차에 끌려가는 씬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밀양시의 신비하면서도 오묘한 톤의 아파트 풍경, 신애 아들의 주검을 바라보는 수사진과 신애의 소리 없는 오열을 냉철하게 묘사한 롱숏 등은 관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 놓는 여백의 미학을 제공하고 있다.
〈밀양〉은 인간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촬영지인 밀양 지역의 특별 시사회를 통해 한 때 밀양 시민들의 심기가 불편했다고들 한다. 이 영화를 통해 밀양 지역이 어린이 유괴 살해, 카섹스, 음담패설, 욕지거리, 부동산 투기 등이 난무하는 천박한 상업주의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비쳐질까 우려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 속에서의 밀양은 극중 인물인 종찬이 ‘사람 사는 데 어데나 다 똑같지예’ 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느 특정한 지역을 지칭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인 심리적 풍경을 담아내는 보편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오히려 한 연약한 인간의 영혼을 담금질해 진정한 삶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연금술의 공간으로 설정되었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영화〈밀양〉은 기독교적 신앙의 용서와 구원의 허위의식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해 생긴 고통과 좌절, 그리고 구원과 용서는 그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닌 우리 인간의 몫이라는 자기반영의 거울을 우리 자신에게 들이대는 참회록에 가깝다. 한 때 이 영화가 개봉되자 기독교 측에서 많은 의견으로 논란이 분분했다. 여주인공 신애가 신앙에 대한 저항으로 장로를 유혹하고 야외 신앙 수련회에서 가요 테이프를 트는 돌출된 행동이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애의 돌출된 행동이라는 표피적인 의미만을 직설적으로 받아들인 데에서 기인되는 그릇된 반응이다. 그러한 돌출된 행동의 심층적 의미는 신앙에 대한 은유적 풍자라기보다는, 신앙의 근원적 의미를 모르는 나약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일종의 연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신앙에 대한 본질적 천착이 없이 자신의 정신적 고통과 외로움을 신앙의 힘에 의해 치유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역설적 풍자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신앙에 대한 진정한 자세와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말처럼 영화〈밀양〉은 신앙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영화이다. 아들의 유괴 살해라는 파국은 결국 신애 자신의 타인에 대한 자기 과시 및 자기 현시라는 심리적 방어기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들의 유괴 살해 범인을 자신이 용서하기 이전에 먼저 신이 용서했다고 좌절하는 것은 일종의 오만이다. 어떻게 보면 신애가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는 행위 역시 범인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사랑이라기보다는, 주위의 타인과 자기 자신, 또는 신에 대한 자기 현시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교회 장로를 유혹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행위, 그리고 신앙 수련회에서 가요 테이프를 트는 반 기독교적 행위는, 기독교 자체와 신앙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감독의 역설적 연민이라고 볼 수 있다.
애초 인간으로 인해 빚어진 반목과 불화, 그리고 고통과 절망은 인간관계에 의해 해결되어야지, 절대적인 신의 존재에 의해 해결될 사안이 아닌 것이다. 결국 그녀는 종찬이 들고 있는 거울에 자신의 나약한 얼굴을 비춰 보임으로서,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인정하고 고통과 절망을 인간관계 속에서 해결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자신에 대한 종찬의 조건 없는 연민과 사랑을 수용하겠다는 의지 표시로 그녀는 옅은 웃음을 내비치는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신애처럼 인간은 어떻게 보면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이다.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문제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위해선 언제라도 〈밀양〉으로 떠나야 하는 삶의 여정에서 서성이는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무크지『동아문학』2007년 >
|
첫댓글 선생님의 작품 해석을 읽으니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