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6)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냉소적 위트와 풍자
- 드니 아르깡의〈몬트리올 예수〉
<캐나다, 프랑스 / 드라마/ 1989/ 119분>
모든 것은 한순간 덧없이 사라진다
배우 겸 연출자인 다니엘(로테어 블뤼토 분)은 야외 연극공연 도중 사고로 긴급 후송된다. 식물인간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는 동료 배우 미리에(카트린느 빌케닝 분)와 콘스탄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적처럼 일어나 몽상적인 독백을 한다.
“우린 행복을 잃어가고 있어. 삶의 의미는 늘 가려지지. 이 높은 빌딩들, 한순간 덧없이 사라지지. 심판의 날이 다가왔을 때.”
그는 미리에와 큰스탄스의 부축을 받으며 몬트리올 시내의 지하철로 내려가 승객들을 붙잡고, 황량한 들판의 예수처럼 다음과 같은 공허한 울림의 독백을 내뱉기 시작한다.
“네가 길에 있다면 집으로 가지 마라.”
“누군가 너에게 구세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그들을 외면하고 유혹되지 마라.”
“언제인지 알 수 없다. 갑자기 다가올 것이니 예비하라.”
그러고 나서 그는 숨을 거둔다. 유태인 병원으로 후송된 그는 뇌사 판정을 받는다. 아직까지 육체가 완벽하다는 의사의 권고로 미리에와 콘스탄스는 장기 적출에 동의한다. 그의 장기는 곳곳으로 보내져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의 눈이 되고 심장이 되어 부활하게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현대 물질문명의 사회와 상업 자본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에 대한 냉소적 위트와 풍자로 가득 차 있다. 1989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캐나다의 거장 드니 아르깡의 여섯 번째 작품인〈몬트리올 예수〉는 몬트리올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연극배우 다니엘이라는 한 사내의 예수의 顯現을 통해 20세기의 말세적 징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1990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의 노미네이트와 같은 해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그리고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 외 9개 부문을 수상한 화려한 경력은 이 영화의 비평적 성공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말세적 징후로 가득 찬 도시, 몬트리올
예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연극배우 다니엘 콜롬은 옛 동료들을 규합하여 연극을 하기 위해 몬트리올 곳곳을 돌아다닌다. CF 오디션 장을 전전하며 상업광고 영화 출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여배우 미리에, 홀로 아이를 키우며 신부와의 성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콘스탄스, 에로영화와 기록영화에 목소리로 출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마틴과 토니가 바로 그의 옛 동료들이다. 이처럼 다니엘이 찾아다니고 있는 옛 동료들은 이 영화에서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현대 물질문명의 상업자본에 의한 순수예술의 오염이며, 다른 하나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에만 탐닉해 있는 20세기 현대사회의 병적 징후에 대한 냉소적 시각이다. 연극은 순수예술이다. 그런데도 현대사회의 상업적 대중성은 그러한 순수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니엘을 제외한 옛 동료 연극배우들이 그들의 본업과는 거리가 먼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비루한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대량 소비를 목표로 한 상업 광고영화, 종교적 구원과 개인의 성적 욕구를 아무 거리낌 없이 오가는 신부의 이단적 행위, 성욕에 탐닉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왜곡된 삶의 모습 등 20세기의 병적 징후들에 대한 은유가 바로 그것이다.
미리에의 CF 오디션 장에서의 다니엘의 난동은 성전을 더럽히는 바리새 상인들에 대한 예수의 분노에 대한 은유이다. 다니엘은 미리에와 함께 맥주 광고의 CF 오디션 장을 찾는다. 의상을 미쳐 준비해 오지 못했다는 미리에에게 주최 측은 알몸으로 연기하라는 주문을 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다니엘은 촬영 기자재를 비롯한 집기들을 부수며 난동을 부린다. 다니엘의 분노는 그들 개개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대중적 기호에 놀아나는 상업 자본주의의 천박함에 대한 저항과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는 현대사회의 병적 징후들에 대한 냉소적 은유와 풍자가 가득하다. 집기 파손 혐의로 몬트리올 시경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는 장면에서 다니엘은 개인적인 변호사 선임을 거부한다. 국선 변호인은 그에게 이번 사건을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글을 쓸 것을 권유한다. 이러한 변호사의 집요한 유혹은 영혼이 없는 대중의 쏠림과 이를 위해 아부하는 상업적 출판의 연쇄 고리를 풍자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종교의 편협한 페쇄적 태도와 성직자의 타락 또한 마찬가지이다. 콘스탄스의 정부인 신부는 다니엘에게 예수의 고행에 대한 연극을 요구한다. 다니엘은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야외에서 연극을 펼치게 된다. 그런데 신부는 그들의 도발적 해석에 반발하여 연극 상연을 중지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에피소드는 성직자의 도덕적 타락과 교리에 얽매여 어떠한 새로운 해석도 거부하는 종교의 왜곡된 태도에 대한 풍자적 은유이다. 결국 연극을 강행하다 이를 중지시키려는 성당 측과 관객들의 실랑이 끝에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다니엘이 넘어지면서 뇌사의 지경에 이르는 큰 사고를 당하기에 이른다. 다니엘의 시신이 성당의 묘역에 안치되는 것과 그를 추모하는 극단을 만들자고 제의하는 변호사의 장면은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묘한 여운을 남긴다.
현대에 부활한 예수의 상징적 의미
이 영화의 결미 부분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반성적 성찰과 함께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다니엘이 처음으로 긴급 후송된 성 마르크 병원의 풍경은 ‘지금 이곳’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의료진과 의료 시설의 부족으로 병원 복도에 꽉 들어찬 환자들의 단말마적인 풍경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외로움과 궁핍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가는 곳마다 다니엘은 거부당하고 만다. 미리에와 큰스탄스가 병실과 의료진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다니엘이 기적처럼 깨어나게 된다. 마치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지하철 장면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과 울림을 주고 있어 충격적이다. 다니엘은 마지막을 대비하라고 영적인 깨달음의 말을 하지만 이미 현대 물질문명에 영혼이 오염된 승객들은 무표정하고 무감각하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왔다고 설파하는 다니엘의 아포리즘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이 장면에서의 다니엘의 얼굴은 바로 예수의 얼굴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의 도래를 위해 반성적 성찰을 일깨우는 그의 경고성 삶의 아포리즘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에 실망한 다니엘의 절망은 또 한 번의 그의 죽음으로 상징되고 있다. 그는 다시 유태인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는 세상 속에서의 외침에 좌절하고 다시 죽음을 맞게 된다. 병원의 의사들은 그의 육체가 완벽하다며 미리에와 큰스탄스에게 장기 적출에 서명할 것을 간청한다. 여기에서 ‘착한 사마리안’의 행적이 실현된다. 그의 건강한 눈을 받은 환자는 밝은 빛에 감사하며 성실한 삶을 살 것을 약속하며, 또 어떤 환자는 그의 심장을 받아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처럼 바르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며 밝게 웃는다. 그는 비록 이 누추하고 비루한 사회와 인간에 절망하고 죽었지만 다시 몇몇 사람의 생명으로 태어나 참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다니엘의 두 번의 죽음은 다분히 역설적이고 상징적이다.
이 영화는 현대사회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절망적인 아포리즘에 해당되지만, 그래도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미리에와 큰스탄스의 엔딩 장면은 그러한 절망 위에 쏟아지는 한 줄기 빛으로 낙관적 희망을 예고하고 있다. 구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켜보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노래한 페르 골레지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애절한 선율이 깔리는 가운데 두 여인이 구걸을 하고 있다. 미리에와 큰스탄스의 삶은 마리아의 삶에 대한 은유적 상징이다. 마리아가 예수의 성령에 감화되어 그의 발을 씻으며 새로운 삶을 살았듯이 그녀들은 다니엘의 고행에 감화되어 현세적 욕망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적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행인들은 무감각한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치기도 하고, 더러는 동전 몇 닢을 그 앞에 던지며 무심한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즉, 그녀들의 복음 전파는 우리 시대에 대한 다니엘의 절망을 대신한 낙관적 희망의 메시지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복합적인 의미망을 지니고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그 죽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서글픈 진혼곡이기도 하며, 병적 징후에 무감각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우회적 질타이기도 하다. 또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잊고 사는 현대인들의 영혼에 쏟아지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이기도 하다.
첫댓글 깊이 있는 영화이네요^^
마지막 장면은 따뜻하게 끝나네요.
두 배우가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하니.
좋은 영화 해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