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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8)
가족사의 부침(浮沈)을 통한 역사적 은유
- 허우 샤오시엔의〈비정성시〉
<홍콩, 대만 / 드라마/ 1989/ 157분>
정치권력의 폭력성과 민중의 핍박 받는 삶
〈비정성시〉는 1989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 대만 영화의 저력을 확인시켜 주고, 아울러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적 역량을 널린 알린 바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45년 일제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북에 수도를 정하기까지의 격동적인 대만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임가라는 한 가족의 굴절과 부침을 그린 영화이다. 임가의 네 아들 중 장남인 문웅과 넷째인 문청을 중심으로 외성인(45년부터 49년 사이에 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과 본성인(45년 이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갈등, 국민당 정부와 반정부 세력 간의 갈등과 투쟁, 고향(본토)에 대한 원초적 향수, 대륙인과 일본인에게 핍박받는 대만인의 비분과 슬픔, 대륙인과 대만인 간의 싸움인 2 8 사건, 사회의 혼란과 격변 속에서의 조국에 대한 사랑 등을 작가의 개입이 없는 객관적 카메라의 시각으로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롱 테이크)의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그려 나가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임가 가족의 인물 설정부터 다분히 상징적이다. 아버지는 일제의 통치 시기에 폭력이라는 힘의 수단으로 저항하지만 같은 민족인 이웃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해 온 인물이다. 그의 지금의 생활신조는 부정에 대한 거의 본능적인 혐오와 의리를 중시하는 것이다. 가족사의 부침에도 의연하게 버티어 나가며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아버지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의연하게 삶을 지탱해 온 대륙인의 기질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장남인 문웅 역시 혈연에 대한 끈끈한 애정으로 가족 공동체의 신산스런 삶을 아우르며 부정에 대한 혐오와 의리를 행동의 가치 척도로 여기고 있는데, 본토에서 이주해 온 외성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다.
행방물명이 된 둘째와 광인(狂人)의 삶을 살고 있는 셋째, 그리고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한 채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는 넷째 문청(양조위 분)의 인물 설정은 대만의 격동적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들로 상징되어 있다. 의사의 본분도 포기한 채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둘째로 상징되는 정치적 미궁 속에 갇혀 있는 대만인의 정체성, 광기의 삶을 살고 있는 셋째 문량으로 대변되는 역사와 정치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의 민중의 신산스러운 삶의 고뇌, 그리고 벙어리인 넷째 문청으로 상징되는 역사 앞에서의 침묵의 강요라는 정치 권력의 폭력성과 그러한 폭력 앞에서도 온전한 발언을 행사하지 못하는 민중의 핍박받는 삶이라는 이중적 의미 층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문청의 직업은 사진사이다. 사진의 기본적 속성은 기록이다. 문청은 그러한 핍박의 삶을 살면서도 역사와 정치사회적인 격동의 모습을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심층적 의미를 지닌다.
동양 산수화 같은 의미의 여백
이 작품의 기록으로서의 연대기적 성격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액자의 틀처럼 규정해 주고 있다. 타이틀백이 나오기 전의 화면은 어둠이다. 이 어둠은 일제의 통치를 의미한다. 어둠 속에서 일본 천황의 떨리는 음성의 항복 방송이 나온다. 항복 방송이 어둠에 완전히 스며들 무렵 임가의 장남인 문웅이 촛불을 켠다. 희미한 촛불의 실루엣 속에서 천황의 목소리와 문웅 아내의 출산의 고통에서 오는 비명소리가 함께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역사의 현장에서 퇴진하는 쇠잔한 지배자와 출산으로 대변되는 해방의 환희와 함께 약동하는 생명력으로서의 대만인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어 전기가 들어오고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화면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51년 간의 일본 통치가 끝나고 해방되었다는 자막이 나오고, 이어 원경의 풍경으로 떨리되면서 타이틀백이 화면을 채우기 시작한다.
마지막 장면 역시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임문웅의 집이다. 롱 쇼트의 장시간 화면 속의 인물의 배치가 다분히 일상적인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편지를 읽고 있는 아설, 서로 모여앉아 도박(마작)을 하고 있는 자식들과 이를 꾸짖고 있는 문웅의 어머니, 아버지와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문량, 화면의 오른쪽 편에서는 켜놓은 불빛이 명멸하고 있다. 이 명멸하는 불빛은 격랑의 역사 속에서 부침하는 가족사를 상징하고 있다. 화면에는 ‘1949년 12월, 대륙은 공산화되고,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철수하고 임시 수도를 대북으로 정했다.’라는 자막이 떠오르며 엔딩 크레딧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158분이라는 현실의 시간(러닝 타임)으로 5년간이라는 격동의 대만 현대사의 연대기적 시간을 아우르고 있다.
이 작품의 몇 가지 특징적인 표현 기법을 살펴보면 허우 샤오시엔의 인간에 대한 관점이 발견되는데, 그 첫 번째가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촬영 기법이다. 2시간 38분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러닝 타임(상영시간)인데도 거기에 소요되는 쇼트 수는 대략 30여 개뿐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에 비추어 본다면 무척 지리할 듯 느껴지지만, 한 가족사의 5년간에 걸친 역사 속에서의 부침이라는 서사 구조는 전혀 그러한 느낌을 주지 않은 채 전개되고 있다. 장시간 화면인데도 지리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이유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 배치된 각 인물들의 사실적인 연기에서 오는 일상성과 인물들의 상호관계에서 비쳐지는 의미 층위의 지속적인 연상 작용, 그리고 장면 전환의 사이마다 끼어드는 롱 쇼트로 잡은 풍경들이라는 연결고리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예를 든다면 감방에 갇혀 있는 문청의 장면으로, 풀려 나가는 문청이 감방 복도를 걸어가는 대목에서는 그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지고도 텅 빈 복도의 그 화면은 한동안 지속된다. 관객들은 이러한 감방 복도의 장시간 화면을 통해 문청의 그 동안의 구속적인 삶에 대한 반추와 그러한 반추를 통한 연민의 감정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하다. 장시간 화면의 밖에서는 다음 장면의 공간과 상황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문웅을 위시한 가족들의 일상적인 소리가 화면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 단적인 예는 감방 장면 바로 앞 장면의 쇼트로서 장면 전환의 여백 채우기와 연결고리의 이중적 기능을 담당하는 교도소 밖의 원경이다. 교도소 밖의 전등불 화면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갑자기 화면 밖에서 육중한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할리우드적인 영화문법에 따른다면 이곳에서 쇼트가 바뀌게 되지만 허우 샤오시엔은 이러한 상업주의적이고 즉물적인 관점을 거부하고 동양 산수화의 여백과 같은 의미 공간을 설정하고 있다.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구두 발자국 소리를 통해 관객들은 다음 장면의 상황에 대한 예측과 기대감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러한 예측과 연상을 통해 장면 전환을 지연스럽게 처리하고 있다.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은 짧은 쇼트의 전환에 따른 이미지의 단절보다는 화면이라는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여 의미의 확대를 시도한다. 고정된 프레임 속으로 드나드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 인물의 행동 연장선상에서 다음 상황을 예측하고, 화면 속으로 들어오는 인물의 움직임을 통해 역시 그 이전의 인물의 행동과 상황을 예측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두 번째 특징은 자막 사용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극대화와 이를 통한 인간 내면에 대한 관찰이다. 자막 사용은 문청과 그의 연인인 관미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호 의사소통은 말을 듣거나 하지 못하는 문청의 신체 조건의 기능 회복이라는 물리적인 의미와 문청의 내면을 관찰한다는 심리적인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인 예가 문청의 집에서의 관미의 오빠인 관영과 그의 친구들이 슬판을 벌이는 장면이다. 그들은 정부의 정책과 사회 문제를 비판한다. 뇌물을 받고 마약의 밀반입을 묵인해 주는 부패 관리, 쌀의 부족, 지식인들의 실업 문제, 진의의 잘못된 정치를 질타한다. 그들의 옆에서 관미와 문청은 독일 민요인 ‘로렐라이’를 들으며 앉아 있다. 관미가 문청에게 그 민요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는 대목에서 자막이 사용된다.
문청이 관미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는 대목에서도 역시 자막이 사용되는데, 자막이 끝나고 나면 플래시백으로 경극의 장면과 그 장면을 흉내내는 교실의 어린이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돌아온 문청과 관미의 대화 부분에서 관미가 오빠 관영의 소식 두절을 염려하는 대화 장면, 플래시백이 된 상태에서의 관영과 함께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문청의 간절한 요구와 관미와 문청의 결혼을 요구하는 관영의 대화 등에서 자막이 사용되고 있다.
대화 장면 이외에도 자막이 더러 사용되고 있다. 병원에서 관미와 일본인 정자(스즈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자막이 사용되는데 두 사람의 플래시백 장면이 바로 그것으로, 붓으로 시를 쓰는 정자의 오빠와 그 곁에서 먹을 가는 관영의 대목에서 자막으로 시의 내용이 소개되는 장면, 감방 동료의 형에게 등생이 죽으면서 들려준 이야기를 전하는 플래시백 화면에서 ‘태어나며 조국을 이별했고 죽어서 조국에 돌아갑니다.’라는 유서 내용이 자막의 사용으로 소개되고 있는 경우이다. 관미와 문청의 상호 관계의 경우에 문청의 대화 내용을 통해 우리는 문청의 심리 상태와 심리 변화의 추이를 확연하게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의 자막은 하나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지막을 통해 우리는 사건이 진전되고 있다는 느낌과 관미와 문청이라는 두 인물의 심리 변화의 추이를 알게 된다. 우리는 숨어 있는 여러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의미 공간 확대의 기능을 담당하는 장면 전환의 기법에 있다. 보통 장면 전환의 표현 기법은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 오버랩과 와이프 등이 있는데, 허우 샤오시엔은 그러한 할리우드의 상업적인 장면 전환의 기법을 거부하고 있다. 그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롱 쇼트에 의한 자연 풍경을 장시간 화면의 기법으로 삽입함으로써 앞 장면에서의 하나의 상황에서 비롯되는 여운의 지속과 다음 장면의 상황을 예고하는 이중적 의미 구조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타이틀백 다음의 롱 쇼트로 잡은 원경의 자연 풍경, 해방 축하연 장면이 끝나고 나서의 롱 쇼트로 잡은 도시의 야경, 구정 민속놀이의 하나인 폭죽을 터뜨리는 장면, 문웅의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도박하러 가면서 자신을 전봇대에 묶었다는 꿈 이야기 다음의 롱 쇼트의 미명의 풍경 쇼트, 원경의 풍경 쇼트에서 대북에서의 대륙인과 대만인의 싸움인 2 8 사건에 대한 라디오 방송의 자막 장면, 오빠의 소식을 문청으로부터 듣고 훌쩍이는 관미의 다음 장면에서의 일몰의 항구 풍경 쇼트, 홍콩인들에게 칼을 맞고 죽음을 당하는 문웅의 다음 장면에서의 안개가 자욱한 산의 롱 쇼트, 임문웅의 장례식 다음의 멀리 바라보이는 항구 풍경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장면 전환의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에는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현실음이 꼭 끼어들고 있는데, 이것은 그러한 현실음을 통해 다음 장면의 상황에 대한 예고와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롱 쇼트의 도시 야경과 ‘유망상부곡’의 노래소리 뒤에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가 삽입되고 있는데, 이는 발광하여 가족에 의해 병원에 강제 입원되는 문량의 병원 장면에 대한 불안한 상황을 예고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자지러지게 우는 문웅의 아기, 미명의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급박한 타악기 소리에 의한 대북의 2 8 사건의 예고, 교도소 밖의 전등 불빛 쇼트에서의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로, 이러한 현실음의 삽입으로 다음 장면의 상황에 대한 예고와 기대감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 기법은 장면 전환에서 생기는 이미지의 단절을 예방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완충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사용되는 표현적 특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롱 쇼트에 의한 장시간 화면의 깊이에서 생기는 의미 공간의 확대, 서사 구조 속에서의 다음 장면의 상황 예고와 이미지의 지속을 꾀한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의 기법 등의 표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표현적 특성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라는 감독의 인본주의적 비전을 표출하기 위한 주제의식의 근거에서 비롯되고 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격동의 대만 현대사 속에서 부침하는 가족사를 통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의연함을 잃지 않에서도만인롯되고역사적 정체성을 탐구하고, 아울러 그 격동의 역사 저 너머에 있는 삶에 대한 낙관적 전망,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공감을 주는 것은 그들의 현대사 속에서의 삶의 질곡과 정치사회적인 상황이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는 연민의 감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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