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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수도회] 열린 마음으로 맡기고 받아들이는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3,1-8
† 복음 마르 7,31-37
★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는 하느님의 금칙에
대해 뱀은 이렇게 꼬드겨 따 먹게 한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된다.” 마침내 사람의 삶은
하느님의 언약을 벗어나 고해(苦海)의 삶으로 변형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에파타!’(열려라!) 하시며
치유하신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며 하나같이 예수님을 칭송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보지 못하는 것과 듣지 못하는 것 중에 어떤 고통이 더 클까? 소외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심으로써
소통시켜 주셨다. 이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고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쁠까.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청력은 좋은데 청각 장애인으로 사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기보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것이다. 미움으로 말미암아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스러운 이도 있고,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 말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전철이나 식당, 심지어 수업 시간까지 휴대 전화에 빠져 있다.
모두 청각 장애인이요 언어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영화나
청소년들의 말에는 외설적이고 폭력적 욕설이 너무 많아 민망스럽다.
‘에파타!’는 진흙에 숨을 불어넣으신 창조를 떠올리게 한다. 소통이 생명인
것이다. 학교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화법에 대해서는 한 과목도
가르치지 않는다. 귀가 있고 입이 있으니 당연히 듣고 말할 수 있다고만
여길 뿐, 대화에도 기술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다투고 갈등하며 상처 받고 원수가 되는 출발점에는 꼭 대화의 충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언이인격’(言而人格)이라는 말도 있다. 말에 인격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평화의 대화는 첫째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겸손한 태도가 바탕이 되는
것이다. 경어와 품위 있는 표현이 교양이다. 둘째는 내 말이 중심이 아니고
먼저 충분히 듣고 이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셋째는 ‘내 생각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원칙만
따르면 대화가 감정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대화의 목적은 통교와
공감에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사랑 예찬 -함께하는 사랑, 사랑의 기적-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성모영보수녀원 피정9일째),
창세3,1-8 마르7,31-37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1-8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사랑 예찬 -함께하는 사랑, 사랑의 기적-
늘 들어도 위로와 힘이 되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 예찬입니다.
"1.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2.사랑은 친절합니다.
3.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4.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5.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6.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7.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8.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9.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10.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1코린13,4-6). 10개 항입니다.
어느 항이 취약합니까? 10점 만점으로 하면 몇점쯤 되겠습니까?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평범한 사랑입니다.
영적성장은 결국 사랑의 성장을 뜻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성장하는 사랑, 깊어가는 사랑인지요.
오늘 피정 마지막날 강론 묵상은 사랑 예찬입니다.
함께하는 사랑이요 함께할 때 사랑의 기적입니다.
아니 사랑한다는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이렇게 피정 중 식사 때마다 수녀님들과 함께 나누는 식사가, 함께 나누는
기도가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도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평범하나 진정한 사랑입니다.
새삼 수도원의 두 중심을 새로이 깨닫습니다. 함께 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나누는 성전이, 함께 식사를 통해 형제적 사랑을 나누는
식당이 공동체의 두 중심입니다. 하여 성전전례 책임자는 하느님 사랑이
뛰어나야 하고, 주방책임자는 형제적 사랑이 뛰어나야 합니다.
피정 중, 매 끼니때 마다 식탁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양 크리스티나 주방책임 수녀의 각별한 배려 덕분입니다.
식탁 음식 색깔의 조화와 균형이 아름다워 아이처럼 카톡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수녀님, 미술을 전공하셨나요?“
미적 감각에 감동되어 묻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아름다움은 감동을 주어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아름다움의 체험에 따른 '깨어있음', '깨끗함', '깨달음'의 귀한
영적 열매들입니다. 아름다움의 체험은 그대로 하느님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 라는 옛 대중가요 그대로입니다. 함께 하는
사랑이 우리를 예쁘게 합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듭니다.
저는 오늘 1독서에서 아담-하와 부부에서도 이런 함께하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다음 대목이 주목됩니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것을 먹었다.-
만약 여러분이 아담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 갈등이겠습니다. 반응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먹지 않음으로 독야청청 죄짓지 않고 혼자 사느냐, 혹은 오늘 말씀에서처럼
함께 먹고 둘이 한 몸이 되어 함께 사느냐 참 어렵습니다.
아담은 부부일치의, 공동운명체의 길을 택했습니다.
좀 과격한 말로 하느님이냐 아내냐 둘 중 아내인 하와를 택했습니다.
혼자 에덴 천국에 살기보다는 세상에서 아내와 함께 사는 의리의 사랑을
택했습니다. 하느님도 이런 아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산티아고 순례중 이와 유사한 체험이 생각납니다.
도반이 길을 잃고 나만이 제길에 있었을 때,
아예 함께 길을 잃는 것이 마음 편했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던 기억입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할 때 사랑의 기적임을 오늘 복음이
분명히 보여 줍니다. 사랑의 기적의 현장 묘사가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의 혼신의 힘을 다한 전인적 사랑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시차에도 불구하고 귀국 즉시 혼신의 사랑을 다해 피정지도에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신 다음, 그에게 "에피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말그대로 '연민의 마음', '사랑의 텃치', '능력의 말씀'이 삼박자 하나가
되어 병자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대로 이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하여 우리는 마음의 귀가 열리고
마음의 혀가 풀려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귀가 열려 있어야 분별력의 지혜로 오늘 창세기 1독서의
하와처럼 악마의 간교한, 감미로운 유혹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에파타!" 우리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를 열어주시어 눈의 유혹, 귀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사도16,14참조).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열린 마음으로 맡기고 받아들이는 삶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 7,31-37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다.”(마르 7,35)
열린 마음으로 맡기고 받아들이는 삶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갖 피조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
나아가 그분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창조 사업을 이어가고자 하시고,
이 순간도 당신의 창조의 얼을 불어넣어 주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일까? 오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류 타락의 원인은 인간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교만에 있다(창세 3,1-4). 자만심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사람들이 기꺼이 서로 나누고 서로 위해 주면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신다. 교만한 인간은 하느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앞세운다. 그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려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함으로써 타인을 노예화하고 자신도 물질과 탐욕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게 창조하신 생명의 낙원은 실낙원
(失樂園)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께 순종하며 서로를 이롭게 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가? 제 잘난 멋에 살고, 마치도 자신이 심판관이나 된 듯이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자기 기준에 모든 것을 꿰어 맞추려 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자유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시 여기며 그분께 온전히 맡기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벙어리는 예수님께 맡기려는 자세로 믿음을 가지고
다가갔다. 이 벙어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치유되기에 앞서, 이미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알고, 또 ‘스스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 또한 그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는 물론,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계심을 알았기에
사람들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늘 깨어있었다. 성인이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죄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우리도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통째로 맡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 가운데서 벙어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7,33)
치유해주신다. 그분은 군중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행해진 신비 그 자체를 보여주신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들의 시선을 피해 그 기적을 행하고자 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하는 봉사나 선행에 대하여,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은근히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은
무엇이나 이미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며, 저절로 드러나 모두에게 흐뭇함을
안겨주고 서로를 살리는 힘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예수께서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병자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7,34). 벙어리의 치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병자든 죄인이든 모두를 조건 없이 사랑으로 받아주셨다.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풀리게 하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재창조의 열쇠이다.
우리 삶의 결정적 중심이요 하나뿐인 방향이신 주님께 우리의 삶을 통째로
내맡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받아들이도록 하자.
받아들임은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며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차별없이 모두를
향하여 여는 것이다. 그것은 남의 죄, 약점, 고통, 허물 등도 기꺼이 함께
지는 것이며,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자기
마음에 드는 면만이 아니라 인격 전부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침묵
안으로 모든 것을 돌려 드리며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주님께 모두를 내맡기고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서로를 살리는 살맛나는 세상’을 이루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서울] 연중 제5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1-8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서품식이 끝나고 ‘평가회’를 가졌습니다. ‘전례, 무대, 디자인, 홍보,
신학생, 성소후원회, 방송’ 담당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평가를
하면서 서품식이 하나의 종합예술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들 맡은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할 때 ‘서품식’은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있지만 사실 우리의
몸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역할을 하는 지체들이 있기 때문에
겉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혈관을 타고 하루 종일 신선한 공기와
양분을 공급해 주는 혈액이 있습니다. 매순간 혈액이 순환하게 해 주는
심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말을 합니다. 어떤 말은 용기와 힘을 주기도 하고,
어떤 말은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한 친구가 버스에다 카메라를 놓고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위로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카메라 다시
사면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버스에 놓고 왔던
친구에게 정말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은 다른 말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카메라를 잃어버렸으니 속상하겠다. 카메라를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었는데, 단순하게 돈 주고
다시 사면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운전기사가 연락을
하였습니다. 버스를 청소하다가 카메라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오면
그 편에 보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2가지의 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사람을 유혹하는 말, 사람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말, 죄를 범하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비록 달콤하고, 아름답게
들리지만 그 말을 따라서 하면 우리는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처음에는
두렵고, 걱정도 되지만 한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두 번째는 첫 번째
보다는 더 쉽게 하게 됩니다. 학생 때, 친구들이 이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담배를 맛있게 피우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도 한번 피워봐!’ 저는
그 말을 듣고 담배를 배웠습니다. 담배를 끊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도 종종 듣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머!, 이렇게
안하면 너만 손해 본다!’ 이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양심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커다란 유혹입니다. 오늘 뱀은 여자를
유혹했습니다. ‘하느님과 같아 질 것’이라는 말로 유혹을 합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 같지만 우리를 가장 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겸손함은 악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기는데 가장 큰 힘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찾아오는 많은 병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을
하십니다. ‘에파타’ 이 말씀은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어둠속에 빛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절망 중에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고독한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 희망을 주는 이야기, 위로를 주는 이야기,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02.1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마르 7,34-35)
외국어를 배워 본 사람은 말분이 안트여서 힘들었던 때를 기억할 겁니다.
이제 좀 알아듣기는 하는데 도대체 말문을 떼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귀멀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치유해 주신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는 유학시절에 귀머거리요 반벙어리였던 때를 떠올리게 됩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은 알아듣는 것에 비례하더라는 겁니다.
정확히 알아들을수록 편하게 귀가 열릴수록
말이 더 쉽게 술술 나오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소신있게 증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잘 못한다명 그건 말재주가 없어서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가 바로 귀머거리요 반벙어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러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말문이 트이도록 치유시켜 주실 겁니다.
자, 귀를 기울여보세요.
"에파타!"
"열려라!"
들리지요? 이제 말해보세요. 잘 될 겁니다.
오늘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좀더 귀 기울여봅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귀를 열어 주시고 혀를 풀어 주십시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마르7,31-37)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1-8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귀를 열어 주시고 혀를 풀어주십시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머거리 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먼저
나를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먼저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는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머거리요,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반벙어리입니다. 그들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고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말씀도 얼마나 예쁘게 잘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듯이 주님과 한적한 곳에서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 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눈먼 이에게 눈이 되어주고, 듣지 못하는 이에게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감곡매괴성모성당의 '수난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 천상을 향해 있을 때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3,2).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입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의 힘을 믿는 자들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1-8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하느님의 힘을 믿는 자들
양의들은 자기 환자가 한방으로 치료받으려 하면 대개는 반대합니다.
검증 안 된 처방이라며 겁도 주고 책임소재를 논하기도 하지요.
더구나 병을 고치겠다고 도사님을 찾아간다면 아예 관계를 끊자할 겁니다.
뭐 그럴 거 있습니까? 사람의 병은 정신이나 마음과도 관련이 큽니다.
이거야말로 검증할 수 없으며 더구나 기적 같은 건 검증도 불가능합니다.
허나 신앙인은 하늘과 땅 영역을 넘나드는 하느님의 힘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코 7,34~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죽음의 언어와 생명의 언어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1-8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죽음의 언어와 생명의 언어
해외 출장을 다니다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IT 인프라 강국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외국 나가서 와이파이를 이용해 업무를 보려하면
반드시 프런트에서 패스워드 번호를 받아야 합니다. 시간도 제한적이고
때로 요금도 지불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숙소를 벗어나면 즉시 SNS
세상과는 단절입니다. 그러나 어디서나 순식간에 접속이 되니 참으로
대단한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나 IT 인프라와 모바일의 대중화가 꼭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교육의 부재가 사이버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SNS 왕따,
악플로 인한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너무나 큰 상처와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게 아예 거기 들어가지 않으면 되지 않냐며 권고를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온라인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고 또 다른 하나의 공동체이기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SNS 세상 안에는 또 다른 형태의 온라인 폭력배들, 인간쓰레기들이
존재하는데 바로 악플러들입니다. 근거도 없는 악의적인 글로 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 표현이 얼마나 난폭하고 저질적인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피해자들의 말에 따르면 마치 총을 맞는 느낌, 망치로 한 대
맞는 느낌이랍니다. 때로 너무나 충격적이고 억울해서 사람을 극단적
선택으로 까지 가게 만듭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죽음의
언어입니다.
말 한마디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 실감하게 되는 세상입니다.
죽음의 언어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우리는 예수님의 언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드러난 예수님의 언어 전체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생명의 언어’요 ‘구원의 언어’입니다.
신체적 장애로 전혀 세상 사람들과 소통이 안 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소란한 군중 속에 파묻혀 있는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에파타!”(마르코 7장 34절)
“열려라!”하신 예수님 말씀에 그의 묶인 혀가 풀렸습니다. 그의 닫힌 귀가
뚫렸습니다. 보십시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막힌 물꼬를 트이게
하시는 분, 꼬이고 묶인 매듭을 풀어주시는 분,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일천한 경험이지만 한 공동체 안에서 생명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오해에서 시작되었는데, 편이 갈라져서
비판과 공격이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의 분위기가 싸늘했습니다.
다들 몸과 마음이 점점 지치고 병들어갔습니다.
구성원들 모두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의기투합했습니다. 언어 습관부터
고치자고. 힘들었지만 격려와 칭찬의 언어, 용서와 화해의 언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어가던
공동체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식탁에서는 웃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 성인(聖人)의 언어습관이 기억납니다. 그는 말이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일단 말을 극도로 아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가지 경우에만
말을 했다고 합니다.
1.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의 영광을 찬미할 때
2.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3. 이웃을 칭찬하고 격려할 때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뱀은 ‘나’인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 뱀이 여자에게 말했다 >
독서: 창세 3,1-8
< 뱀은 ‘나’인가? >
서울에 가면 요즘 중국 사람들 홍수입니다. 이 덕에 경제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관광객들 중 어떤 이들은 한국을
생각하며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나라’로 혀를 내두른다고 합니다. 특별히
여행사들의 횡포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관광지보다는 쇼핑에만
집중하게 해서 커미션을 많이 챙기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손님의 발길을 끊기게 하는 뱀들입니다.
자신만 배부르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들이나 나라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면 자신까지 망하는 줄을 모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나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과의 관계를 끊게 만들어서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시기하여 인간도 자신처럼 지옥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탄이나 마귀, 뱀이나 자아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말을 믿게 해서
인간을 망하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이솝 우화 중에 사이좋은 네 마리의 황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항상
함께 나들이를 했고, 함께 풀을 뜯고 함께 누워 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사자 한 마리가 있었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네 마리를
상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을 흩어놓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자가 풀을 뜯고 있는 소들 중 약간 뒤쳐진 소에게
다가가 다른 소들이 흉을 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다른 소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여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네 마리의 소들은
사자가 노리던 대로 각각으로 흩어져, 마침내 그에게 모두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사자는 분열시켜 죽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소들은
사자의 말만 듣고 마치 자신의 생각처럼 믿어버립니다. 사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버리니 자신에게 도움을 줄 다른 이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와는 그나마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언변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자신이 하와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듯이 인간이 뱀의 유혹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뱀의
말이 자신의 말인 양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뱀이
정말로 나 자신일까요? 예수님은 당신 부활로 자아가 내 자신은 아니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자아를 죽여도 나는 여전히 삽니다. 아니 자아를
죽여야만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뱀이 내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자아와 나도 한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가리옷 유다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자아의 말만 따르다가 결국 자아에게 먹힌
경우입니다. 사탄에게 먹혔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사자가 소를
분열시키는 이유는 먹어치우기 위해서입니다. 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하느님과 떼어놓으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먹혀버리면 이제 자아와 자신이 한 몸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은 따를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아에게 먹히지 않고 하느님 안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아를 나 자신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자아가
말하면 마치 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바로 믿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소와 같은 것입니다. 친구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할 것 아닙니까?
예를 들면 ‘오늘 친구들과 술을 마셔야지’라고 생각했을 때, 바로 ‘그럼
하느님은 그것을 원하시나?’라고 물어볼 수 있어야합니다. 하와가 죄를
지은 이유는 뱀의 말이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뱀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뱀을 나로 착각하더라도 하느님의
생각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둘을 항상 함께 보며 내가 제3자의
입장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어떤 목소리가 뱀의 목소리이고 어떤
목소리가 하느님의 목소리인지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어떤 목소리가
죽음의 길로 부르는 목소리이고, 어떤 목소리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목소리인지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두’ 목소리를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물어보지 않고 내 생각대로만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뱀에게 거의 먹혔다고 보아도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럼 하느님의 뜻은?’이라고 물어보며 내 안에서 참 주인이신
하느님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혜는...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모두 진실 앞에 서야만 합니다.
그것만이 참된 뉘우침과 용서를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마르코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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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 어이 없는 일로 세간을 시끄럽게 했던 모항공사 전 부사장의
공판과정을 이야기 해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녀의 반성문 6통에 대한 요약도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치소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나눈 생활에 대해서도 소회한 듯 합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참으로 심경이 복잡해집니다. 하도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그 어떤 반성들이나 용서를 청하는 말들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들까지 그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는 또 다른 아픔을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는 용서를 받아야 할 자의 문제인지, 용서를 해야 할 자의
문제인지를 식별할 수 없게 하는 혼돈을 안겨줍니다. 하여 참으로 판단하기
쉽지 않은 삶 속에 불신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차라리 모두가 상처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옳은 이해이자 분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실을 듣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우리이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희망하는 자에게만 가능성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의 페이스 북 담벼락에 올린 글이 떠오릅니다.
“진실한 사과는 세 가지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올바로 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sincere apology has three parts:
“I am sorry’.” “It is my fault.” “What can I do to make it right?”)
'미안해 하는 마음',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책임을 지려는 마음'
어떤 뉘우침이든 그 뉘우침이 진실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마음이
무엇보다도 전제 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사과를
하는 인간들은 많지만, 그 사과가 진실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혜는
진실을 듣고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서를 청해야 할 자이든, 용서를 해야 할 자이든
이런 귀와 눈이 없는 한 우리는 결국 거짓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반성과 용서가 가능한 세상을 위해 우리 각자 자신의 삶에서
열심히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주변을
변화시키게 되어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말입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인천] 주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은총의 선물로 바꿔주십니다.
2015년 나해 2월13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1-8
복음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31-37
요즘에는 잘 가지 않지만, 신학생 때만 해도 동아리 산악반 활동을 하면서
등산을 참 많이 갔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한 가지 기억이
나네요. 신학생 동창들과 함께 설악산 등반을 하는데, 출발할 때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것입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서 버스를 타고 힘들게
왔기에 비를 맞으면서 산행을 했습니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동창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기에 즐겁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완전히 탈진을 한 것입니다. 아침을 급하게 먹고 소화가 잘 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를 맞으며 등산을 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정확하게 중간쯤
와서 벌어진 일이라 다시 되돌아가는 것보다 이 친구의 짐을 대신 들어서
원하던 목적지까지 얼른 가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산악반이고 튼튼하다는 이유로 이 친구의 짐을 제가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몸이 불편한 친구를 위해서 짐을 짊어졌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배낭의 무게가 너무나 제게 부담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동창들도 서로 힘들었는지 제 짐을 대신 들어준다는 사람이 없더군요. 이
짐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점점 불평불만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이 되어서 좋은 자리를 찾아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당시만 해도
산에서 취사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부식들이 제 배낭 안에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힘들게 등산을 했기 때문에 배도 너무나 고팠던
우리들은 부식들을 모두 그 자리에서 처리했지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벼운 배낭을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배낭이 무겁다고 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가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우리의 삶, 인생이 힘든 짐처럼 보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짐을 그냥 버리겠습니까? 나중에 고생합니다. 그리고 그 짐이 나뿐이
아니라 내 이웃에게 커다란 만족을 줄 수 있는 커다란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그는
들리지 않는 귀와 말을 더듬는 자신의 모습을 만족했을까요? 들리지 않고
말을 더듬는다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쳤을까요? 불편함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고 그래서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졌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장 큰 짐이라 할 수 있는 귀먹고
말 더듬음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손길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커다란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을 떠올리면서 우리 삶의 짐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버리고 싶은 짐들,
불평불만을 가져오는 짐들. 그러나 그 짐들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짐은 어떤 것입니까? 다시금 용기를 내어서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은총의 선물로 바꿔주십니다.
나만의 행복도 없고 타인의 불행도 없다. 남을 행복하게 해 준 만큼 나도
행복해진다(이케다 다이사쿠).
머리만 있어서 무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무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굴 표정이 좋으니까요. 웃는 얼굴만큼 그를 호감있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웃는 오늘 되세요.
풀린 혀(프루텐티우스 ‘매일찬가’ 중에서)
귀먹어 소리 듣지 못하고
모든 말문 막히고 닫혔으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응답하여
모든 길이 활짝 열리니
기쁨에 겨워
친절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속삭임을 듣는다(마르 7,34-35 참조).
이제 모든 병 물러가고
힘이 샘솟으니(루카 6,18-19 참조)
기쁨에 넘친 중풍 병자
평상을 들고 거리를 지나고
침묵의 사슬에 오래도록
묶여 있던 혀 풀려
올바로 말한다(마르 7,35 참조).
옛 교부의 아름다운 묵상 시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시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렇게 올려 봅니다.
안식년 때에는 어디서 미사 하냐고 많이 물으십니다. 저는 주로 혼자서 벽
보고 미사합니다. ㅋㅋ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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