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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14일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수도회] 내가 있어야 할 자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3,9-24
† 복음 마르 8,1-10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간으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다. 둘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 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중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 창조주의 계명을 저버린 사람은 마침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괴로움 속에서 자식을 낳고 땀 흘리며 노동해야 한다. 인류의 생로병사가
시작된 것이다(제1독서).
★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머물렀던 가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빵의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한
모습을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을 때 사천 명이나 되는 군중이 모여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흘 동안이나 꼼짝하지 않고 배고픔도 잊은 채 당신
말씀을 듣고 있었으니 그렇게도 좋았을까? 주님께서 마련하신 모임은
평화의 공동체다. 군중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빵을 내놓자고 하셨다. 그리고 감사 기도를
바치셨다.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고 나누시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천 명이 먹고도 남을 양식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베푸셨다. 인정이 하느님의 마음이고 곧 기적이다.
주먹밥 하나를 내놓고 나누어 먹은 사람은 ‘이웃 때문에 내 몫이 줄었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몰래 혼자 먹는 사람은 빼앗길까 싶어
불안하다.
밥을 나눌 수 없는 것은 삶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 전통적 마을은 의식주가
열려 있었다. 마을이 공동체여서 홀로 사는 삶이 없었다. 현대인의
아파트와 다가구 주택은 가족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살고 있지만
벽은 두껍고 멀기만 하다. 이웃이 실직했는지 아이들이 굶는지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 구청 복지 담당자의 책임이다. 삶터마저 부촌과 빈촌으로
확연히 갈라져 간다. 인정은 연민의 눈빛에서 나오는데 눈을 마주치지
않으므로 따뜻한 마음이 서로에게 흐르지 못한다.
사도행전은 공동체가 빵의 기적이 체험되는 곳임을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에서 보여 준다(2,42-47; 4,32-37 참조).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4,34). 공동체는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왜 우리
시대의 대안의 삶인지를 드러내는 성사이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감사와 찬미 -제자리에로의 귀환(歸還)-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4일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869)와 성 메토디오 주교(+885) 기념일
창세3,9-24 마르8,1-10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복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감사와 찬미 -제자리에로의 귀환(歸還)-
감사합니다. 보속(補贖)과 정화(淨化), 순례(巡禮)의 안식년도 거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5일 귀국 즉시 성모영보수녀원에서의 연피정(2015.2.5-13일) 지도를
끝내고 안식년 동안의 제자리, 장충동 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2.28일(토)에 안식년을 완전히 끝내고 원래의 제자리 요셉수도원에로
귀환합니다.
시차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강행군의 피정지도기간이었지만
은총 또한 풍성했습니다.
피정을 마치면서 받은 글귀들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1코린13,12). 제비뽑기에서 뽑은 말씀입니다.
지금은 어렴풋이 보이는 순례의 안식년도 세월이 흐를수록 뚜렷이 그
의미가 부각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영보수녀원 선종완 창설자 신부).
불행과 비극의 근원은 하느님 중심을 잃었기 때문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녀님들의 감사편지를 소개합니다.
-'주바라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피정내내 풍성한 말씀과 성찬전례 안에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이)다지도 순수한 마음으로 '주바라기'꽃이 되어 활짝 피어날 수 있을까?
(수)만번 다시 태어난다 한들 '임'향한 그리움 변할 수 있을까?
(철)저히 성실한 '말씀'의 아들이 되어 '주바라기'꽃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시겠지요?
바로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ㄱ) 라고 고백하신
신부님입니다. 기본에 충실한 삶, 항구함이 생명과도 같음을
깊이있는 강의를 쉽고도 신선하게 가르쳐주심 감사드립니다.-
수녀님들의 진정성 가득 담긴 감사의 응답편지가 제 귀국 선물 1호가
되었습니다. 저를 위한 하느님의 치밀한 안식년 일정에 감탄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중심을 잡고 하느님 주신 제자리에서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의 기본임을 깨닫습니다.
"환영합니다! 프란치스코 신부님께서 머무르실 방은 302호실입니다.“
제자리, 제방 장충동 수도원 302호실에로의 반갑고 고마운 귀환입니다.
제방이 상징하는 제자리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제자리를 잃어 제대로,
제정신으로 살지 못해 발생하는 온갖 죄악과 혼란, 무질서의 삶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오늘 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아담에게 묻는 순간, 제자리를 잃은
아담은 떳떳이 나서지 못하고 숨어버립니다. 제자리에 충실하여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곧장 뛰쳐 나갔을 것입니다.
죄의 전염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흡사 암세포가 온몸에 확산되는 모습
같습니다. 하느님도 속수무책, 아름다운 창조세계가 순식간에 악마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책임은 없고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니 모든 관계-하느님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산산조각이 나고
마침내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입니다.
오늘날의 사회현실, 인간현실 같아 섬뜩한 생각도 듭니다.
좀 과장한다면 어찌 손대 볼 수 없는 암말기 현상 같다고 할까요.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담-하와 부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고,
부부는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로의 출입은 불가능해졌지만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좌절함이 없이 묵묵히 흙을 일구며 일상의 삶에
충실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인 하느님의 제자리에로의 '회개의 귀환'이, 그리고 감사와
찬미의 삶이 답입니다. 창세기의 장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오늘
복음입니다. 그대로 낙원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분열됐던 모든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되어 화해와 일치, 풍성한
축복을 누리는 장면입니다.
1독서가 실낙원이라면 복음은 복락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나눔과 일치의 성체성사의 축복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낙원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 삶의 중심인 제자리에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응답을 드리는 일뿐입니다.
모든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당신
말씀과 성체의 생명나무 열매를 나눠주심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내가 있어야 할 자리
2015년 나해 2월14일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 토 마르 8,1-10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사람들은 원하는 곳을 찾지 못해 불안해하거나 길을 잃고 당황해 하곤
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너무나 바빠 정작 자신이 잘 살고
있는지, 나아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의식하지
않은 채 살 때가 많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이
만드신 사람을 축복하시고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다!’고
경탄하셨다(창세 1,28. 31절). 그렇게 인간은 하느님의 순수한 본질,
그분의 사랑과 선을 선물로 받고 지음 받았다.
그런데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망각하고 그분이 주신 선물을 잘 보존하지도 못하고
재창조하지 못한 채 자꾸만 그분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른바
에고(ego)의 작동이 끊임없이 일어나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균형이
깨지면서 순수한 본성, '참 나'를 상실해간다. 창조 때의 순수, 균형과
조화, 온전함에서 멀어지면서 자기 틀 속에 갇히고 분열된 자아를 진짜
자신으로 착각하기도 하면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보기에 참 좋은 존재로 지으시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해주셨고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으나 그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창세 3,3).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였고 자기 뜻에
복종하고 말았다. 남자는 그것을 따먹고도 아내 탓을 하고, 아내는 뱀 탓을
하였다(창세 3,12-13). 그들은 자신들의 어두움과 그림자를 감추려 하였다.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알몸) 있으면 되는데도 결국
순수 본성을 잃고 그것을 포장하려 들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와 발자국을 떨쳐버리려고 점점 더 빨리
달리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상처와 그림자,
영혼의 어두움, 연약함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바라보며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꾸만 더 큰 어두움,
더 두꺼운 가면을 만들 뿐이다. 스스로 만든 어둠과 수치스러움을 감추려는
마음 저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있다. 무시당할까 봐 두렵고, 판단 받을까
봐 두렵고, 잃을까 봐 두려우며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사랑의 결핍이고 신뢰의 결핍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선을 내 것으로 하려는
자기중심주의에서 솟아나온다. 나의 상처, 어두움, 연약함, 그림자는
외면하고 회피할 것이 아니라 선 자체이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반환점일 뿐이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향하여 물으신다. “베드로야! 너 어디 있느냐?
데레사야! 너 어디 있느냐? 프란치스코야! 너 어디 있느냐?” 나의 삶의
자리는 하느님의 눈길 앞 외에 다른 곳일 수 없다. 나는 하느님 앞에
있는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알몸을 가리는 수치심 속으로 도망갔던
에덴동산의 원조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신”(창세 3,21) 하느님의
자비를 마음깊이 새기면서 그분 앞으로 나아가자. 측은히 여기시어 배고픈
이들에게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어 먹이신 예수님의 그 사랑의 마음자리에
머물도록 하자. 이미 내 안에 생명나무를 심어주시고 그것을 사랑 지극한
눈길로 바라보시며 나의 인생길에 동반자가 되어주시는 주님 앞으로
달려가자. 오늘도 나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보았으면 한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서울]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2015년 나해 2월14일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복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좋은 말이죠? 예전에는 손으로 편지를 많이
썼잖아요? 저는 신학생 때, 나환자 마을에 봉사를 갔었습니다. 그곳의 한
여학생이 제게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시작 글은 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이었습니다. 군대에 갔을 때도 편지를 곧잘 보내 주었고, 편지를
읽으면서 군 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수도자가 되셔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지내고 있습니다. 추억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며칠 전 혜화동 성당 앞에서 우연히 한 학생을 만났습니다. 16년 전에 저는
적성 성당에 있었고 그 학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이
된 그 친구를 저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저를
알아보면서 ‘가브리엘 신부님이시죠?’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얼굴은
몰라보았지만 이름을 이야기 하니 알겠더라고요?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새침했던 초등학생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내려오셔서 목장을 하셨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현지입니다. 예쁜 이름만큼 예쁘게 자랐습니다.
주말입니다. 잠시 시간여행을 떠나보시면 어떨까요? 그래서 아름다웠던
추억을 기억의 책장에서 꺼내보시면 좋겠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부끄러움도, 사랑도, 이별도 모두 아름답게 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하나의 추억이 되기에 우리는
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하시는
질문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했기에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질문을 하십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장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두운 곳에 있는지, 잘못된 곳에 있는지,
양심을 속이는 곳에 있는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
있었습니다. "까마귀 디디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희고 흰 깃에 검은 때
무칠세라. 진실로 검은 때 묻히면 씻을 길이 업으리라." 맹자의 어머니도
아들을 위해서 3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처음 묘지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습니다. 그래서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시장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에서 어린 맹자는 글 읽는 놀이를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이사를 할 때, 제일 먼저 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성당이 가까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시는 곳도 성당에서 100미터도
안 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나눔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인생의
나침반입니다. 나눔은 나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02.1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창세 3,9)
가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가끔씩 나를 돌아보며 내가 어디 있는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 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요 우리의 본향입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이 세상에 왔다가 그 본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지요.
지금 나는 그곳으로 향해 가고 있나요?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네요.
"너 어디 있니?"
"예, 저 여기 있어요, 주님!"
그렇게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기적을 낳는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14일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마르8,1-10)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복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기적을 낳는 사람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
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놓을 생각은 않고 머리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물론 자기들이
가진 것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였더니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예수님의 손을 거치면 이렇게 풍요로워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도구로 삼아 일을 하십니다.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제자들의 손을 통해서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믿음으로
성체를 모시면 기적은 매 순간 이루어 집니다.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항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지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먼데서 온 사람들의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풍요롭게 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2015년 나해 2월14일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복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어린 시절 동네 마을 잔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혼례식이나 회갑,
칠순 때가 되면 마당에는 큰 천막이 여기저기 쳐지고 멍석이 깔렸습니다.
동네 어머니들과 살림살이들이 총집합되어 음식 장만에 들어갑니다. 마당
한쪽에는 큰 솥이 걸리고 재수 없게 도살된 소나 돼지를 며칠이고 푹
삶습니다.
잔칫날에 되면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동네 조무래기들, 지나가던
행인들, 걸인들조차 너나할 것 없이 와서 뜨끈한 국밥이며 떡이며 한상씩
받습니다. 없이 살던 시절, 깡통 들고 다니며 구걸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당시 걸인들에게는 이 동네 저 동네 잔칫날이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왠지 마음이 설레어 잔치가 벌어지기 전부터 담 너머를 기웃기웃하던 동네
잔치, 그 누구라도 와서 원 없이 주린 배를 채우던 동네 잔치를 떠올리며
하느님 나라를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과연 어떤 곳인가 묵상해봅니다. 과거 흥겹고 정겹던
동네잔치 분위기 같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육적인 먹거리뿐만 아니라
영적인 먹거리도 흘러넘치는 곳, 지상에서의 모든 결핍과 제한이 원없이
충족되는 곳, 기쁨도 감사도 흘러넘치는 그런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요?
더 이상 차별도 없고 더 이상 그 누구도 풍요로움에서 제외되지 않는 곳,
모두가 하느님 은총을 흘러넘치게 받고 또 받는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군중들이 바로 일시적이나마 풍요로운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에 군중들은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마르코 8장 2~3절)
결국 인간의 결핍, 인간의 고통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측은지심을
불러왔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한계가 따지고 보면 하느님 은총의
첫 출발점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상처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하고
자책하는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 그늘로 인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마르코 8장 8~9절)
하느님 나라, 그리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본성은
바로 풍요로움이었습니다. 그분 가시는 곳 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은총이 흘러 넘쳤습니다. 모든 이의 소망이 충족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제외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사목 현장을 내려다봅니다. 사천 명의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그 풍요로움이 재현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열정 하나만으로
이것저것 덤벼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거의 목숨 걸다시피 뛰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참 좋은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후원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먹을 거리,
입을 거리, 이런 저런 후원물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미처
소화해 내지 못해 틈만 나면 다른 시설로 보내야했습니다. 삶이 참으로
풍요로웠습니다.
따지고 보니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하느님 나라 건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헌신하면 할수록 거기서 풍요로운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고 내 위주로 모든 것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편협된 사고에서 공동체와 함께, 동역자들과 함께
아이들과 함께 걷겠다고 마음을 바꾸어먹는 순간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어느 배에 탄 사람인가?
2015년 나해 2월14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
독서: 창세 2,18-25
< 나는 어느 배에 탄 사람인가? >
운이 나쁜 암탉 한 마리가 족제비에게 잡혔습니다. 족제비는 무엇인가
아주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서 잡아먹을 양으로 암탉에게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너는 한밤중에 울기 때문에 사람의 잠을 방해하는 놈이니까 잡아먹겠다.”
그러니까 암탉은 “아닙니다. 족제비님! 나는 사람을 위하여 일부러 울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깨워서 일터로 보내는 것이 저의 임무란
말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족제비는 다른 이유를 끄집어냈습니다.
“너는 누이도 어미도 분간하지 않고 제멋대로 간통을 하는 못된 놈이니
잡아먹어야겠어!”
암탉은 다시 두 손을 모아 쥐고 말하였습니다.
“그것도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알을 많이
낳거든요.”
족제비는 더 붙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유가 있어서
잡은 닭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 놓고 말하였습니다.
“알았어! 네 이유가 모두 옳다. 그렇다고 내가 배를 곯릴 필요는 없지
않아?”
그러면서 평소처럼 암탉을 잡아먹었습니다.
뱀도 이와 같습니다. 유혹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유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본성이 나쁜 피조물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본성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악 자체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뱀아, 너는 어찌하여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라고 물어봅니까?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렇게
물어보지만 뱀에게는 물어보지 않고 바로 벌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뱀이
그렇게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뱀이
선한 일을 선택할 경우는 제로입니다. 문제는 선택권이 있는 인간이
하느님이 아닌 뱀을 택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뱀을 택한 결과는 뱀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해적선에 탔습니다.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을지라도
그 배에 있으면서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나쁜 짓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라도 최대한 열심히 남들을 도우며 살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배가 임금의 군대에
잡혔을 때 임금은 그 해적선의 모든 이를 사형에 처했습니다. 해적선에
자신해서 탄 이상 더 이상 핑계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단 그 배에
탔다면 그 안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해적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배를 탔다면 그 안에서 아무리
악한 일을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배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뱀과 주님입니다. 나는 어떤 나를 나로 삼고
사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내가 행하는 뜻이 무의식적으로 내 자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면 나는 해적선에 탄 것입니다. 그러나 매 선택의
순간에 하느님의 뜻이 작용한다면 나는 그 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담과 하와와 같은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와 자아를 분리시켜 보아야합니다. 내가 타고 있는 배가 해적선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자아와 한 몸이 되어 있어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은?’ 이라고 묻지 않는다면 나는 뱀의 결정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빛이 오시면 어둠이 구별됩니다.
철새들은 철마다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그 무리에 끼이지 않으면 얼어
죽고 맙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무리에 끼이느냐에 따라
어떤 경향에 휩쓸리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경향의
무리 속에 있으면 아무래도 그 경향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뱀의 뜻을 따르는 경향의 무리 속에 속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휩쓸립니다. 아담이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은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사람은 선이든 악이든 자신이 속한 쪽으로 휩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안전하고 싶거든 뱀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무리
속에 섞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인천] 우리는 부족함을 채우려고만 노력합니다.
2015년 나해 2월14일 토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흙을 일구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24
복음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0
여러 차례 단식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짧게는 삼일, 길게는 보름까지
단식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보름 동안의 단식이 삼일 동안의
단식보다 훨씬 힘들 것 같지만,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거의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단식 삼일 째가 가장 배고프고 많이 지쳐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날만 잘 넘기면 일주일, 보름까지도 단식이 가능하더군요.
단식을 하게 되면 후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냄새를 못 맡던
것인데, 단식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냄새들이 우리 곁에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사람에게서 풍기는 냄새도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쉽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부족한 상태에서 크게 와 닿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단식을 하게 되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평소에 쳐다보지도 않던 음식들도 얼마나 먹고 싶던지요.
그동안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었기에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부족했을 때 감사함을 느낄 수 있으며, 부족했을 때 지금까지의 내 삶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족함의 상태가 어쩌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긴 과거 교부들은 일부러
단식을 했고, 고행을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 이유는 바로
부족함 안에서 주님을 더욱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관한 내용입니다.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서 사천 명 가량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는 기적이지요. 그런데
이 기적의 시작은 바로 사흘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주님 곁에
머물렀을 때라고 전해줍니다. 광야에서 허기지셨던 적 있는 육화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생명의 빵으로 인간을 먹이시는 장면을 보여주지요.
이 모습은 교회가 받을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지요.
거룩한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나누어 먹는 사람은 영적 허기를 느낄 일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함을 채우려고만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부족함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당연히 주님의 은총도 충만하게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거룩한 말씀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고,
그 말씀을 열심히 나누어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아닌, 주님 안에서만이 부족함을 채울 수 있음을 기억할
때 나의 삶은 보다 더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누워서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라.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잠을 못 자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다(데일 카네기).
15년 전 보좌신부로 있을 때의 고등학생이 결혼식 주례를 서달라고 어제
왔네요. 시간의 빠름을 다시 느낍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최천호, 좋은 글 중에서)
아주 옛날 산골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아이는 배가
고파 온 종일 우는 게 일이었다. 아기의 부모는 우는 아이에게 회초리로
울음을 멎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매를 맞았다.
그날도 부모는 우는 아이에게 매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집 앞을 지나던
노스님이 그 광경을 보고 집으로 들어와서 매를 맞고 있는 아이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부모는 의아해서 스님께 물어보았다.
“스님은 어찌하여 하찮은 아이에게 큰절을 하는 것입니까.”
이에 스님은 “예 이 아이는 나중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인 정승이 되실
분입니다. 그러니 곱고 귀하게 키우셔야 합니다.”하며 자리를 떠났고,
아이의 부모는 그 후로 매를 들지 않고 공을 들여 아이를 키웠다.
훗날 아이는 정말로 영의정이 되었다. 부모님은 큰 스님 안목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스님을 찾아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스님을 찾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큰스님을 찾았고. 스님에게
궁금함을 여쭈어 보았다.
“스님 우리 아이가 스님의 말씀처럼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어찌
그리도 용하신지요.”
스님은 웃으시며 차를 한 잔씩 권하며 말문을 여셨다.
“이 돌중이 어찌 미래를 볼 수 있겠습니까 마는 세상의 이치는 하나이지요.
모든 사물을 귀하게 보면 한없이 귀하지만 하찮게 보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법이지요. 아이를 정승같이 귀하게 키우면 정승이 되고. 머슴처럼
키우면 머슴이 되지요.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지요. 세상을 잘 살고 못사는
것은 마음가짐에 있지요.”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마음을
통해서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발렌타인데이죠. 단순히 초콜릿의 나눔을 생각할 것이 아닌, 사랑의
나눔을 생각하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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