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4(금) 고성의 화진포 호숫가에서 시원한 동해의 풍경과 김일성별장을 둘러보며
무료자전거로 라이딩하면서 힐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울창한 소나무숲 데크를 오르며 맑은 동해를 배경으로 한컷!!!
또한 화진포호수가 평화스런 물위에 벌써 철새들이 도래해 헤엄지고 노닐고~~~
화진포호는 서로 연결된 2개의 호수(내호, 외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수의 총면적은 2.37㎢, 둘레 16㎞, 최대 수심은 내호 중심에서 3.7m이다. 화진포의 내호는 상대적으로 폭이 좁은 수로로 외호와 연결되어 있고 외호는 동해와 좁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바다와 연결되는 통로는 평상시는 닫혀 있지만 장마 또는 폭풍에 의해 바다와 일시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화진포콘도와 맑은 흰백사장의 화진포해수욕장이~~~파노라마로~~~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화진포와 바다 사이의 사주가 성장함에 따라 호수와 바다 사이에 형성된 길이 1.7㎞의 백사장으로, 호수의 출구에 의하여 분리된다. 수심이 얕고 경사도 완만하며, 송림도 있어 해수욕장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특히, 백사장이 깨끗하고 주위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화진포해수욕장은 일출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사랑의 포토죤에서 잠시 포오즈를~~~ㅎㅎㅎ
화진포역사안보전시관(김일성·이기붕·이승만 별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과 넓은 호수, 명사십리와 청정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고성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김일성 별장으로~~~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이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화진포를 찾았다. 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북한의 정치가. 1948년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내각수상과 국가주석으로 권력을 독점해 개인숭배체제를 구축했으며, 6ㆍ25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공고화하였다
김일성이와 잠시~~~
화진포의 성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지어져 당시 건축물로는 제법 화려함이 엿보인다. 화진포의 성에는 옛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비롯해 김일성 가족이 사용했던 응접 세트 등 각종 유품이 모형물로 만들어져 전시 되었다
화진포의 성의 절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마주 보이는 금구도라 불리는 바위섬으로 화진포 해변에서 3백여m 떨어진 금구도는 거북 모양을 닮은데다 가을철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에 따른 역사왜곡이 극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05년 광개토대왕릉 설(說)이 제기돼 화제를 모았던 고성 화진포 앞 바다의 금구도(金龜島·사진)에 대해 재조사가 추진되고 있어 주목된다.
고성 화진포 해양박물관과 속초 해변에서 자연사박물관을 운영중인 한광일 대표는 고성 화진포의 금구도가 광개토대왕릉이 묻힌 수릉(水陵)일 가능성이 높다며 고성군 및 문화재청 차원의 본격 발굴 탐사를 추진하기 위해 지난 10∼12일까지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중국 지안시(集安)를 방문, 조사활동을 펼쳤다.
한 대표는 이번 지안 방문에 ‘소설 목민심서’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황인경 작가와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표와 황 작가는 이후 화진포 금구도를 찾아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전설 등을 조사하고, 광개토대왕릉 관련 소설 집필에 들어가 이르면 올 연말이나 내년 상반기에 책을 펴내 금구도에 대한 전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계획이다.
또 금구도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후 본보가 속초시에서 펼치고 있는 발해프로젝트와 연계시켜 스토리텔링화 해 고성∼속초를 고구려, 발해 역사벨트로 조성,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불을 놓겠다는 의도다. 고성군도 도 차원에서 정밀탐사 및 사실 규명을 해줄 것을 건의했다.
한편 고성지역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인 ‘고성문화포럼’은 지난 2005년 7월 각종 고구려 관련 자료를 수집, 연대기를 분석한 결과 광개토대왕 3년(서기 394년) 8월쯤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 화진포의 왕릉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며 ‘금구도가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펴 화제가 됐다. 금구도에는 축성연대와 사용목적을 알 수 없는 길이 60m, 높이 170∼230m의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는 것을 비롯해 건축물의 주초석, 기와조각과 토기파편들이 발견됐다.
김일성별장 옆으로 오르는 데크계단을 올라 해풍을 맞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매로되고~~~
멋진 소나무숲이 감탄에 감탄이라~~~
데크계단의 모습
화진포의 성이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해안 언덕에 위치한 것과 달리 이승만 별장은 바다는 보이지 않고 화진포 호수만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서로 3km 정도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화진포호수
이곳은 이기붕별장을 둘러보며~~~
이기붕집무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만송(晩松). 서울 출생.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17대손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회정(會正)의 손자 낙의(洛儀)이다. 부인 박(朴)마리아와의 사이에 강석(康石)·강욱(康旭) 두 아들을 두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였다. 4·19혁명 이후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景武臺)에 피신해 있다가 당시 육군장교이던 장남 강석(康石)이 권총을 쏘아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한때 화목했던 가족사진과 안방
1915년서울의 보성학교(普成學校)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중퇴, 선교사 무스(Moose, J. R.)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이오와주의 패사디나시 헌팅턴호텔 등에서 일하면서 고학으로 1923년 주립대학인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보 三一申報』 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허정과 충북 영동의 광산에 투자하여 광산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별장 잔디밭 정원에서 잠시 인증샷후
헤변엔 거북이 조형물이 사랑하는 연인과 추억을 담는 포토죤으로~~~
이곳에도 무료자전거대여소가 있어
2인용 즐건 자차를 무료대여받아 재밋게 동심으로 호수길를 달리며 이승만별장으로 출발
호젓한 화진포호수의 전경
풍경 좋고 공기도 맑은 가운데 호수길을 라이딩하며~~~
이승만별장 계단
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승룡(李承龍), 호는 우남(雩男)이다. 세종(世宗)의 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1912)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1833∼1896)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위의 두 아들이 일찍이 사망해 집안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화진포호를 바로 보이는 조용한 숲속의 이승만 별장입니다.
별장 뒤 윗쪽에 기념관이 잘 조성되어 이승만 댜통령에 개한 업적을 전시해 놓았네요!!!
이승만별장 뒤에 새로 지어진 기념관으로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등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친필휘호, 의복과 소품, 관련도서 등이 현대적으로 전시되어있다. 이승만별장은 이와는 좀 다르게 졍겹게 꾸며져있다. 침실과 거실, 집무실, 평소에 끼던 안경과 여권, 편지 등 유품이 흥미롭게 진열되어 있다
이승만의 자필 붓글씨
대한민국의 초대~제3대 대통령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자 독재자, 독립운동가[4], 정치가.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대통령등으로서 독립 운동을 펼쳤다. 8.15 광복 이후 반탁을 내세우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11년 동안 대한민국의 정부 수반[5]이었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한강 인도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사건 및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의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독재 행위로 인하여 4.19 혁명이 일어나자 대통령직을 하야하였다.
"우리는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명언을 되새기고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호는 우남(雩南)이다. 1900년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러한 행적에 따라, '이승만 전 대통령' 이외에도 '우남' 혹은 '이승만 박사' 라 불리기도 한다.
이승만은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 방식에 반발하여 국제연합(UN)군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1954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4사5입이라는 수학적 논리를 내세운 4사5입개헌으로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비록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3ㆍ15부정선거로 인해 반정부항쟁인 4ㆍ19혁명이 발생하면서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하여 생애를 마쳤다.
이승만별장앞 시원한 화진포호가 단풍에 물들고~~~
주변의 풍광이 빼어난 곳에 화진포의 성(구:김일성 별장)이 있고 이승만 초대대통령별장,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과 세계적 희귀 조개, 산호 물고기 화석 등 1,500여종 4만여점을 전시한 화진포 해양박물관이 있으며 지석묘 등 문화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잉어, 숭어, 향어, 붕어, 가물치 등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호수둘레 6.5 km. 오호리(五湖里) ·오봉리(五峰里) ·인정리(仁亭里)에 걸쳐 있는 석호(潟湖)로,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바다와 연이어 있어 도미 ·전어 등의 바닷물고기와 잉어 등의 민물고기가 함께 서식하며, 맑은 호수와 송림이 울창하다.
해변가 모래땅에 곱게 피는 해당화와 겨울이면 날아드는 겨울 철새 고니도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호수 맞은편 죽도(竹島) 일대에는 송지호해수욕장이 4 km에 걸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약 1,500년 전에는 이 호수가 정거재(鄭巨載)라는 구두쇠 영감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므로 거절하자, 쇠절구[鐵臼]를 논 한가운데에 던지고 사라졌다. 그 뒤로 쇠절구에서 물이 솟아나 송지호가 되었다고 한다. 낚시꾼이 많이 찾으며, 백조(천연기념물 201)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속초~고성 국도가 호수의 동안을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송지호의 넓이는 약 20만 평. 호수 둘레 4킬로미터로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그 어느 석호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송지호에 첫발을 디딘 모든 사람들이 이국적인 자작나무와 울창한 갈대숲이 어우러진 고혹적인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는다. 호수는 거울처럼 잔잔하고 자작나무 숲에서 날아온 새소리가 발치에 내려앉는다. 게다가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산책길이 마련되어 있어 한나절 느긋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송호정이 아름답게 기다리네~~~
이곳 송지호에도 무료자전거를 대여해 주네요!!!
동무들 새로워진 화진포를 다시 한번쯤 가 보이소 손해 않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