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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수도회] 생명의 통교를 이루는 가엾은 마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레위 13,1-2.44-46
† 제2독서 1코린 10,31―11,1
† 복음 마르 1,40-45
오늘 전례
◎ 교우 여러분 한 주간 건강하시고 마음 편히 지내셨습니까? 자녀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준비하거나 한 학년의 진급을 앞두고 조금씩
성장하였습니다. 자녀의 진로에 희비가 엇갈리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으로 부르심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미사 중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 당시 치료법이 없었던 악성 피부병, 곧 나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하여
공동체를 보호하게 했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이 기쁘도록 애써야 하며,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며 신앙인의 실천적 삶을 강조한다(제2독서).
★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매달리는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를 치유해
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께서는 치료법이 없던
구약의 전통을 뛰어넘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고백이 처절하다. 마음만 써 주신다면 나병까지도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마침내 하늘의 자비를
이끌어 냈다. 죽음에 이르도록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병임을 아는 이가
어떻게 ‘나 좀 살려 주세요!’ 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
하였을까?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의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처럼, 만사의 주도권이 하늘에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 예사스러운 믿음이
아니다. 모든 문제는 주님의 뜻에 있다. 이를 이슬람교에서는 ‘인샬라’
라고 한다. ‘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뜻이다.
터키 중부의 ‘니데’라는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터키에는 오백 개가
넘는 대안 교육의 공동체 학교가 있는데, 이 운동을 주도하는 지도부가
니데에 있다. 그곳의 한 가정집에서 묵었는데, 자녀들 가운데 고등학교
3학년생의 예쁜 딸이 있었다. 영어 교사가 꿈이라며 준비 과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말끝마다 ‘인샬라! 인샬라!’ 하는 것이었다. 언어 습관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계획도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신앙 고백이다.
‘인샬라!’ 하건 ‘임마누엘!’ 하건, 이슬람교도이건 그리스도인이건 모두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내 믿음과 2천 년 전 나병
환자의 믿음도 다르지 않다. 성체성사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주님을 내 모든 것의 결정자로 모신다는 것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그분의 뜻에 맞추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가난한 순례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레위13,1-2.44-46 1코린10,31-11,1 마르1,40-45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가난한 순례자
'가난한 사람들'로 제목을 했다가 '가난한 순례자'로 바꿨습니다.
'가난'이 물음이라면 답은 '순례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막연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모습입니다.
나이들어갈수록 본질로 들어나는 가난입니다.
하느님 빠진 가난보다 비참한 경우는 없습니다.
안식년 동안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참 많은 가난을 체험합니다.
사막같은 뉴튼수도원에서 수도자의 삶 자체가 가난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가난이다.“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살아갈수록 점차 분명히 깨닫게 되는 가난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동료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compassion)의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가난의 절정은 병이며 죽음입니다. 함께 살면서도 외로움과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이들을 보면 정말 가난한 인간 존재임을 절감합니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
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사람은 섬이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뉴튼수도원이 사막같고 섬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는데 섬같고 사막같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간 본질을 직관하신 주님의 1차 복음 선포
대상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역시 이사야서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아 평생 가난한 이들의 구원을 위해 투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사61,1).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유롭고 부요한자 몇이나 될까요?
바로 가난한 인간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자체가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가난한 순례자로 사는 것이 답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뛰어라.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이사49,13).
새삼 가난한 자들의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상징하는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순례자의 모범입니다.
첫째, 나병환자 그는 참으로 절박했습니다.
완전히 고립단절된 모습이 자기 안에 갇힌 수인을 상징합니다. 비록
나병환자가 아니더라도 자기 안에 갇혀 절망하는 영적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병이 남아 있는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13,46).
참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인간실존을 상징합니다.
천형과도 같은 나병환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고립단절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둘째, 나병환자는 간절히, 절실히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절망에 머물지 않고 희망의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희망의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하느님만이 희망이요 구원의 출구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만이 희망입니다.
사실 가난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기도가, 믿음이 필수입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을 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되이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하는 가난한 나병환자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는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니 비로소 가난으로부터 탈출의
구원입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됨으로 천형(天刑)의 나병은 천복(天福)이
되었습니다.
셋째, 구원에 대한 나병환자의 복음 선포의 응답입니다.
주님께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이래야 완전한 구원의 치유요 영적 나병이 재발되지 않습니다.
활짝 개방하고 복음 선포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알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복음 선포의 삶이 영적 자유와 부요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참 적절합니다.
"형제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1코린10,31.33-11,1)
영적 나병에 대한 최고의 예방이자 처방입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 바로 분도수도회의 모토와 일치합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영광을 두고 복음선포의 삶에 충실할 때 내적 자유와
부요의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절망과 불신의
영적나병을 말끔히 치유하시어
희망과 믿음의 빛 가득한 내적자유와 부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가난한 순례자들인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카6,20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생명의 통교를 이루는 가엾은 마음
2015년 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마르 1,41)
생명의 통교를 이루는 가엾은 마음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일까? 사람이 도구화 하고
사람의 아픔과 소외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것이 아닐까?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말라.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라.”(1코린 10,31-33)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증오와 무관심과 편견 덩어리를 품는 사랑의
길을 보여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하느님과 맺는 계약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야훼의 신앙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은 곧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의 이탈을 뜻하였다. 구약성서가 끊임없이 우상숭배와
투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구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짧은 기간을 빼고는 이스라엘은 늘 주위의 강한 이민족들의
압박을 받아왔다. 따라서 한 민족의 힘과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의 힘을
결부시켜 받아들이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계약공동체를 굳건히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께 속한 것과 이방적인 것을 엄밀히 구별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상적인 것들도 가능한 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였다. 정(淨), 부정(不淨)에 관한 세밀한 규정들은 이렇게
생겨났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악성 피부병자들을 벌하셨으며 그들이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위생상의
동기에 종교적 동기가 더해지면서 악성 피부병자들의 처지는 더
비참해졌다. 악성 피부병자들은 사회와 격리되었으며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치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또한 그들은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13,46). 유대인들에게 이런 병은 ‘죽음의 첫
사자’(욥기 18,13 참조)요,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으로
받아들였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
(민수 12,12)으로 취급되었다.
예수님 시대에도 악성 피부병인 나병은 단지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죽음, 예배로부터의 제외,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치시는 매우 큰 상처이기도 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淨), 부정(不淨)의 구별, 성(聖)과 속(俗)의 엄격한 이분법적 구별을
뛰어넘어 ‘온전함’이신 하느님의 본성을 보여 주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해주신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과 권위를 지닌
대단한 분이시라는 데 초점이 있지 않다.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관심과 배려, 정의와 평화, 행복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표징이다. 구약성서에서 치료법이 없고 격리의
대상이었던 악성 피부병을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심으로써 죽음의 상황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셨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와 해방의 힘을 이끌어낸 것은 나환자의 신심 깊은
태도에 있었다. 나환자는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하고 청하였다. 치료받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음에도 그는 치유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맡겨드렸다.
여기서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란 조건문은 단지 예수님께서
준비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송장’과 같은 존재를
살리시는 신적 능력을 지니셨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치유해주신다. ‘가엾은 마음’은
본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온 것으로 ‘생명이 생겨나는
근원적인 자리’, ‘생명이 사는 곳’을 뜻한다. 곧 가엾은 마음이란 생명을
살리고 생명으로 되돌리는 마음을 말한다. 이 '가엾은 마음'이 바로 편견과
증오의 덩어리를 깨부수고 소외를 회복시켜주는 결정적인 힘이었다.
연민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속되고 부정한 것과 철저히
구별했던 것과는 다른 ‘포용’의 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소외되었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품어 하나가 되도록 해주셨고
형제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갈 길을 열어주셨다. 소외와 격리를 부르는
미움과 증오, 편견의 울타리를 허물 때 진정한 생명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악성 피부병을 치유하는 일은 예언자들의 몫이고, 사제는 치유를 확인하고
선언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악성 피부병은 소외를 부르는 증오와 편견의
덩어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오늘날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권력과 부와 명예를 지닌 기득권자들로부터 소외된
빈곤층, 노동자, 이주민, 죄수들, 동성애자, 고독병에 걸린 이들 등
소외계층이 그들이다. 소외와 격리를 없애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힘 있는 기득권자나 사제가 아니라 삶의 예언자들이 필요하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예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교회, 나의 관심사는
어디에 가 있는가? 과연 나에게 소외와 격리를 무너뜨리고 모두를
포용하여 생명 공동체와 통교를 이루게 하는 ‘가엾은 마음’이 있는가?
프란치스코 교종의 다음 말씀을 깊이 되새기자.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버렸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서울] 연중 제6주일
2015년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돌아오는 화요일에 많은 신부님들이 새로운 임지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돌아보니 저도 많은 곳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보좌 신부로 있으면서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 지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주임신부로 첫 본당은 적성이었습니다. 그 뒤로 사목국,
해외연수, 시흥5동, 중견사제연수, 용문청소년 수련장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교구의 성소국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사이동에 의해서 어느 신부님께서 ‘안식년’을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 한분이 신부님의 손을 잡고서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신부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신부님께서 안식년하고 떠나십니까?’
할머니께서 잘못 알아들으셨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제가 떠나면 신자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독선적이고, 말을 함부로 하고,
고백성사도 잘 안 주고, 강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도를 잘 하지
않고,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신부님이 떠나시면 아마도 ‘이 보다 더 큰
은혜와 사랑이 있으랴!’라는 성가를 부를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따뜻하고, 어른들을 잘 모시고, 미사시간 30분 전에는 꼭 고백성사를
주시고, 강론 준비를 충실하게 하고, 장례가 나면 제일 먼저 가서 연도를
함께 바치고, 늘 웃는 모습을 보여주시던 신부님이 떠나시면 ‘수난기약
다다르니 주 예수 산에 가시어’라는 성가를 부를 것 같습니다.
저의 동창 신부님 중에 한분이 오랫동안 피부 질환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신부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이 없을 정도로 그 신부님은
진실하고, 영성적이며, 신자들을 위한 사목에 충실한 분입니다. 언젠가 그
신부님은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피부에 물집이
생기고 가렵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름에도 긴 팔을 입어야 하고,
사우나에도 가기 힘든 고통입니다. 한방 치료도 받아 보았고, 피부과에서
치료도 받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직 상용화 된 약은
아니지만 그 약으로 치료를 받기로 했다고 합니다. 저는 작년에 다른
친구와 함께 그 친구를 위해서 물이 좋다는 온양온천엘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객실에도 온천수가 나오기 때문에 친구는 객실에서 온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 개발된 약이 친구의 피부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천시를 받았고, 나병환자는 죄를 졌기 때문에 생긴 거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깨끗해진 나병환자는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을까를
생각합니다. 아마 그 나병환자는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얼굴에 있던 점을 뺀 적이 있습니다. 점 하나를 뺐을 뿐인데도 기분이
좋았는데 온 몸이 흉하게 망가지는 나병에서 깨끗하게 치유되었으니 정말
행복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서 아마 꿈도 그렇게 꾼 것 같습니다. 제 몸에 이상한 것들이
생기는 꿈이었습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길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음식을 잘 못 먹은 것도 아니고, 피부병이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꿈에서 보니, 제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할 때, 제
욕심대로 판단할 때, 시기와 질투를 할 때 제 피부에 그런 이상한 것들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약을 발라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온천엘
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비우니까, 욕심을 버리니까,
모든 것을 받아들이니까, 하느님의 뜻에 맡겨 드리니까 그런 상처들이
깨끗하게 없어졌습니다. 사실 꿈속에서 본 것은 제 마음의 피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어쩌면 나병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지고, 갈라지고, 상처로 곪아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꿈도 영성적으로 꾸는 것을 보니 이것도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눈에 보이는 나병은, 눈에 보이는 피부병은 병원에서 의사들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영혼의 나병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엔 병들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전과자로
낙인이 찍혀 사회에로의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누군가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는 방에서 혼자 외로움에 떨고 계시는 우리 주변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지치고 힘든 사람들
나에게 와서 쉬어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가볍다.”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길 합니다. “교우 여러분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02.1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예수회원들은 수도회 모토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ad majorem Dei gloriam!)라고 정하였습니다.
아마도 오늘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하신 권고를
따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보여도
그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면 축복받은 일이 되고
반대로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일을 해도 자신의 욕심이나 영광을 위해
하게 되면 아무런 축복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겠지요.
여러분은 오늘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청소를 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누구를 만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럴 왜, 무엇 때문에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서보다 이웃을 위해서 하는 일이 더 위대한 일이고
그보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마음으로 한다면 가장 위대한 일이 됩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시게 될 일이 모쪼록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멋지고 위대한 일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지금은 사랑할 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마르코1,40-45 )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지금은 사랑할 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으로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당시 나병환자는 사람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를 만지는 사람도 불결해
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외딴 곳,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1열왕5,7).
산송장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하시고 감히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깨끗해진 그에게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우리는 어떤가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나 합니까? 혹 잡아주고는 생색내려고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나요?
좋은 일을 하셨으니 소문이 나서 인정 받고 어깨에 힘을 주셔야 하거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행동에 대해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유명해 지고 싶은 사람, 인기를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정결법을
고수하는 이들의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병환자가 사회로 돌아가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주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마땅히 행할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코 누구에게 인정 받고 칭찬받기
위함이 아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은 인기를 얻고 예쁨을 얻기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기 위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해져서 이제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 들었습니다(마르1,45).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
되어서 외딴 곳에 머무르셨지만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은
그분께 분명한 능력과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향기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어루만진 더러운 손이
더럽지 않게 여겨지는 순간 우리의 손은 예수님의 손이 될 것입니다.
주변의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 못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이
내가 돌보아야 될 사람이라고 받아들여진다면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눈에 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감히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을 뛰어 넘었고 변두리 외딴 곳에서 새 생명의 싹을
틔우셨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부정한 사람들의 한가운데서 그들의 새
삶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활동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5,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사랑하기를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매
순간이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이고 축복의 때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가 탄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기를 그치지 맙시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하늘의 능력이 땅에서 일면
2015년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하늘의 능력이 땅에서 일면
200년 전 사람이 그간 죽어 있다가 지금 다시 살아났다면 어찌 될까요.
아니면 지금의 내가 200년 전 사람들 속에 갑자기 가게 되면 어찌 될까요.
둘 다 확실히 살아 있는 사람들로 같은 나라말을 한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현대인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걸 보면 옛사람은 깜짝 놀라 기절할 겁니다.
그 정도를 갖고 기절하는 옛 사람을 보고 현대인도 또 기절할 지경이겠지요.
그렇게 서로 다르듯 하늘의 능력이 땅에서 일면 기절할 정도 이상일 테지요.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코 1,41~4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깨끗해졌다는 증거
2015년 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복음: 마르코 1,40-45
< 깨끗해졌다는 증거 >
돈은 깨끗한 것일까요, 더러운 것일까요? 사실 돈 때문에 많은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으므로 돈은 더러운 것일 것입니다. 성경은 돈의 욕심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9)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부자로 편하게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나옵니다.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님은 돈을 더러운 것으로 보셨을까요? 먹고 입고
주무시기 위해서, 또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재정적 지원을 해 주는 여인들도 주님을
쫓아다녔다고 나옵니다. 당신에게 향유를 바르는 여인에게는 2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깨뜨리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2백
데나리온은 지금의 돈으로 2천만 원 정도 하는 것입니다. 2천만 원짜리
향수를 한 번에 다 써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엄청난 부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을 꾸중하셨습니다.
돈은 음식과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음식이 아니라
음식에 대한 욕심이 건강을 해치듯이, 돈도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욕심이 생기게 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9)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욕심을 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먹고 입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도대체 돈에 대한 욕심은 어떻게 사라질 수 있을까요?
‘Whatever Lola wants’(롤라)란 댄스영화가 있습니다. 24살 난 댄서의
꿈을 키우는 한 여성의 이름이 롤라입니다. 그녀의 직업은 우체국
직원입니다. 그녀의 춤이 썩 대단하지는 않아서 하는 오디션마다 다
떨어져 언제나 우체국 직원으로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친구의
소개로 가난하게 태어나 이집트의 전설적인 벨리 댄서가 된 이스마한의
비디오를 보고는 그녀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집트 남자 잭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잭은 롤라를 매순간
생각하지만 롤라는 이스마한의 비디오를 보며 춤을 따라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결국 잭은 롤라를 떠납니다. 잭이 떠난 이후 롤라는
자신의 전부가 잭이었음을 깨닫고는 이집트로 잭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만난 잭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보수적 이슬람 문화에서 댄서가 꿈인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가문의
수치입니다. 댄서는 거의 술집여자처럼 취급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잭은 그래서 롤라보다는 가족을 택합니다.
이집트로 와서 외톨이가 된 롤라는 다시 춤을 추기 위해 전설의 벨리댄서
이스마한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마한은 춤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었지만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그 남자를 위해 춤을 포기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마한은 매우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춤으로 최고의 경지에 있었지만
어디서도 춤을 출 수 없게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롤라의 집요함으로 이스마한은 롤라에게 춤을 가르쳐주게 되고
부잣집 혼인잔치에서 벨리댄스를 춘 것이 신문에 나게 되어 이집트에서
유명한 댄서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들이 서로 다른 데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롤라는 춤으로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직장과 남자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렇게 선망하는
이스마한은 남자를 위해 춤을 포기한 여자입니다. 잭은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야 했습니다. 롤라는 춤을 위해 남자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극도로
원하게 되면 다른 것들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돈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더
중요한 가치가 나타나게 되면 돈의 가치가 이전과 같지는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저의 조카들이 어렸을 때 돈을 가지고 장난을 많이 놀았습니다. 처음엔
천원을 줍니다. 아이들도 그것이 좋은 것인지는 압니다. 그래서 천원을
다시 빼앗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백 원짜리
동전을 보여주며 “이건 쇠로 돼 있어서 더 비싼 거야”라고 설득하면 아이는
백 원을 받고 천원을 포기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예수님은 밭에 묻힌 보물에 대한 예화를 들어주십니다.
밭에 보물이 묻혀있습니다. 아무래도 깊이 파다가 보물을 발견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돌이 많은 척박한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척박해
보이는 땅을 위해 가진 재산을 다 팔아버립니다. 돈이 싫어서가 아니라
밭에 묻혀있는 보물이 더 좋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나라를 발견한 이들은 세상 모든 것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욕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이 사실을 말로 퍼뜨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적이 말로써만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증명하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고 하느님나라를 만났다는 증거는
말이 아니라 바로 ‘예물’입니다. 하느님나라를 만났다면 이 세상 것엔
무관심하게 되기 때문에 예물을 바치는데 문제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봉헌이 바로 깨끗함의 증거인 것입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을 때 마음이 무척 괴롭습니다. 예수님은
모셨지만 자신의 집엔 부정한 재물들이 많이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보기에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캐오에게 그리스도는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쉽사리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은 자캐오의 집에 구원이 들어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차지한 증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이
세상 것은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직 우리가 돈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걱정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나라가 아니라 세상 재물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고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는 이 세상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돈에 집착하는 신자가 옆 집 사람에게 성당 나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 나와서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한
사람임을 누가 봐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보물을 간직했다는
증거는 이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당신을 만나 깨끗해졌다는 증거를 예물을 바침으로써
증명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줍니다.”
(디도 2,12)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
2015년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글입니다. 어떤 바보들의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수박을 귀신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을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이 어리석음을 없애주려고 마을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수박을
급하게 먹어 치웁니다. 이 행동을 본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말합니다.
“아마 우리도 저 귀신을 먹듯이 먹어 치울 거야. 도망가자.”
또 다른 사람이 이 마을을 지나가다 수박을 귀신으로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잠시 생각하더니, 마을 사람들과 함께 깜짝 놀라며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고 하면서 조금씩 수박에 가깝게 다가서게 했습니다. 결국 이 수박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더 이상 수박을 귀신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예수님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세상의 온갖 죄악을 직접 쫓아내는 편이 훨씬 더
쉬울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같이 이겨낼 수 있도록 그래야 더 심한
죄악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시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사랑을 기억하면서 큰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 사랑이 오늘
복음에 뜨겁게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시지요. 어려운 사랑의 길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우리 역시
쉽고 편한 세상의 법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신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에 나병 환자를 만지는 행동은 율법으로 금지된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병 환자를 직접 만지십니다.
커다란 스캔들을 가져올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이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외적 불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정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동이셨습니다. 즉, 나병 환자가 지닌 육신의 상처나 허물 때문에 그를
멸시하고 혐오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눈으로 그 안에 있은 마음의 깨끗함을 보셨고, 그 깨끗함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어 만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외적 모습만을 보고 쉽게 판단하고 단죄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얼마 전에 어떤 기사를 보니 연예인들의 상당수가 정신
치료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잘못된 소문 하나가 퍼져서 인터넷 안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때면 도저히 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연예인뿐만이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판단을 쉽게
내리는 우리였습니다. 소위 ‘~카더라.’ 통신에 의지해서 거짓이 진짜인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우리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려 할 때,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을 떠올려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은 따뜻하게 변할 것입니다.
천 번의 기도보다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단 한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이 낫다(마하트마 간디).
오만 가지 생각
사람이 하루 동안 몇 가지의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어떤 연구소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연구를 했고 그 결과 인간의 하루 생각은 4만 5천에서
5만 가지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보면서, 문득 ‘눈만 뜨면
오만 가지 생각에 오만 걱정이 일어난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오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걱정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그 중의 대부분이 걱정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어제한 걱정을 오늘도 하는 우리.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는 걱정이라는 생각들. 이 걱정이 우리의 미래를 더욱 더 어둡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떨칠 수 없지요.
이제는 끝없는 사랑을 주신 주님께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 본다면
어떨까요? 5만 가지나 되는 걱정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의 야경입니다. 그런데로 멋지죠?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고통, 구원의 도구 -연중 제6주일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2015년 나해 2월15일 연중 제6주일
고통, 구원의 도구
독감과 몸살로 꽤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낫은 것은
아닙니다. 아프니 기도도 묵상글도 일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수도원에서는 아플 때가 가장
서럽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남이 대신 아파해 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아플 때 가장 힘든 점은 다른 이들과 떨어져 있다는 것일
겁니다. 자기 혼자만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더 아픕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에 걸린 사람은 가족과 사회에서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정한 사람은
단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고통을 온전히 자기 자신의 탓만으로 돌리고
짊어져야 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컸지만 내적인 아픔이 죽음보다 더
처절했습니다. 외딴 섬처럼 혼자만 있다는 그 사실이 죽음이었습니다.
이 사람한테 주님은 오십니다. 주님 면전에 나병환자는 무릎을 꿇고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을 봅니다. 온전히 내어 맡기는 그 신뢰를
봅니다. 주님의 원의를 이미 알고 청한 것입니다. 주님의 유일한 바람은
외딴 섬처럼 홀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의 원의는 자비
그 자체입니다. ‘가엾은 마음’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σπλαγχν?ζομαι (splanchnizomai)는 직역하면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프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애간장이 녹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만 고통을 당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면서 짊어져야만
하는 고통은 주님과 만나는 도구가 됩니다.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내가
오늘 받는 아픔을 주님께 내어드립시다. 고통 안에서 주님은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우리는 온전히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고통
안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다른 이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내적 외적으로 더
아픈 이들을 위해 나의 작은 고통을 주님께 봉헌할 때 이웃을 위한 구원의
제물이 됩니다. 어제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에 걸어서 도착했다고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세월호
인양입니다. 단순한 선박 사고라고 하기에는 밝혀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냉대와 무관심이라는 고통을 안고 있는 유가족들을 위해 오늘 우리가
받는 고통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이 봉헌을 통해 그분들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주님 안에서 덜어지도록 기도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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