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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수도회]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누룩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6,5-8; 7,1-5.10
† 복음 마르 8,14-21
★ 갈수록 사람들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것을 마음 아파하시면서 모든 것을 없애 버리기로 하신다. 그러나 오로지
마음에 드셨던 노아를 통한 새로운 창조를 계획하신다(제1독서). .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이르신다. 이를 알아듣지 못하자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빵의 기적을
상기시키신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복음)
◈ 오늘의 묵상
누룩은 생활과 친숙하다. 명절과 애경사 때마다 술을 빚는 재료이자
이스라엘의 주식인 빵의 반죽에 필요한 식자재로, 예수님의 비유에 종종
등장한다. 누룩은 한 주먹만으로도 밀가루 서 말을 발효시키는 힘이 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누룩이란 그릇된 이념과 세계관이다.
바리사이들의 왜곡된 종교관과 헤로데의 타락한 국가관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당대 주류 세력의 중심이었다. 중앙 예루살렘의 결정권과
지배권을 가진 그들은 갈릴래아 변방의 민초들을 율법과 실정법으로 묶어
놓고 자신들의 이념을 세뇌시켰다.
지배 방식에는 강제와 압박의 채찍보다 당근의 회유와 세뇌가 자발성을
도모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 결과를 보라! 식민 지배와 독재 시대의
민중에게는 지조와 저항의 힘이 있었지만, 돈맛과 고기 맛에 전 자유
민주주의 시민들에게는 경제와 이기적 편견이 만연할 뿐이다. 경제가 모든
삶의 중심에 서 버린 것이다. 국민은 경제를 살려 줄 자를 우상처럼
떠받들며 그들의 기만에도 상관치 않는다. 국가는 금융 선진국을 추종한다.
그럴수록 정신세계는 타락하고 채무는 헤어날 길이 없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고’ 대응하는 길은 누룩보다 더
강렬한 유익 균을 투입하는 것이다. 요한 묵시록은 ‘두루마기를 빠는
순교의 피’(7,14 참조)로 비유한다. 교회는 경제 발전의 꿈이 악령의
망상임을 폭로할 의무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심각성을 보시고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시는데, 제자들은 경제와 빵 수준에 매인 나머지
‘쇠귀에 경 읽기’가 되어 버렸다. 어쩔 셈인가?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의 하느님
-사막인생, 유배인생, 막장인생-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창세6,5-8;7,1-5.10 마르8,14-21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6,5-8; 7,1-5.10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의 하느님
-사막인생, 유배인생, 막장인생-
어제 영적도반과 참으로 오랜만에 저녁식사 중 공감하며 나눈 대화가
신선했고 많은 통찰을 줬습니다. 대화에는 막걸리를 겸한 감자탕의
돼지뼈에 붙은 고기를 뜯는 식사가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한식이든 중국음식이든 각자 먹는 음식은 달랑 먹으면 대화도 더 이상
진척이 안되고 힘들어지는데 고기를 뜯으며 맛좋은 막걸리를 마시니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대화구조에 맞는 감자탕 식사구나!' 새롭게 깨달으며 감탄했습니다.
"영적 노후대책이 중요합니다. 수도원 밖에서만 아니라 수도원 안에서도
노수도자들을 대하면서도 절감하는 사실입니다.“
나 혼자 많이 말하고 도반은 듣는 편이었지만 절대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영적 노후대책이란 말마디에 화답한 도반입니다.
"외롭고 쓸쓸한 노후에도 혼자 잘 지내는 법 말입니다. 의식주의 노후대책
보장보다는 영적노후 대책입니다. 진정 하느님께 희망을 둔, 영적으로,
내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기도의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어 대화중 공감한 부분이 많은 수도자들이 나이들어갈수록 꿈과 희망을,
의욕을 잃고, 사막인생, 유배인생, 막장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 안이나 수도원 밖이나 삶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말 그대로 사막인생이요 유배인생이요 더 이상 물러날 길 없는 배수진을
치고 사는 막장인생의 대부분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런 깨달음이
동병상련(同病相憐), 동료도반들에 대한 '연민의 샘'이 되어 평화로운
공존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에서 전개되는 내용을
봐도 그대로 입증되는 삶의 진리들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유배인생을, 사막인생을, 막장인생을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 그 후손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유배중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 분위기가 오늘 창세기 1독서입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창세6,7).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마 오늘날 세상을 보신다 해도 하느님의
후회와 아픔은 여전 하실 것입니다.
답답하기로 하면 오늘 복음의 주님께 꾸중듣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마르8,17-18).
그대로 우리 모두의 분발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영적 깨달음이 없는 것은 마음이 완고한 탓입니다.
마음이 완고하니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보라 있는 눈이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 있는 귀입니다.
하느님을 기억하라 있는 머리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라 있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을 뵈옴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이 유일한 답입니다. 사막인생,
유배인생, 막장인생의 유일한 '구원의 출구(EXIT)'는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삽니다.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뿐이며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샘솟는 의욕과
열정,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사막인생은 기쁨과 희망의
오아시스 낙원인생이 되고, 유배인생은 축복받은 자유인생이 되며,
막장인생으로부터의 도약이, 내적초월이 이루어져 대자유인의 삶이 됩니다.
아, 바로 그 대표적, 상징적 인물이 오늘 창세기의 노아입니다.
노아 한 사람에게 희망을 거는 하느님의 희망이 참 눈물겹습니다.
사람은 많은데 사람은 없는 역설적 현실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가난'입니다.
노아와 같은 의인 하나가 하느님께는 더없이 큰 희망이자 기쁨입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창세6,8).
이어지는 다음 구절이 노아의 인품을 한 눈에 보여줍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창세6.9).
얼마나 고무적인, 닮고 싶은 노아의 삶인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희망의
샘물같은, 사막에 꽃처럼 피어난 의인 노아입니다.
마치 노아 이전에 나타났던 에녹을 연상케 합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창세5,23).
토마스 머튼의 서품 상본의 성구로 택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세상 눈에, 사람 눈에 들지 않아도 주님의 눈에 들면 됩니다.
노아같은 의인이 없다 탄식할 것도, 노아같은 의인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언제나 깨달아 살면 늦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心機一轉),
나 스스로 노아처럼 주님의 눈에 드는 삶,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
모든 일에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일 이렇게 새로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영적노후대책도 없습니다.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순종의 사람, 하느님과 원활한 소통의 사람, 노아입니다.
어제 감자탕 식사와 더불어 마신 막걸리 이름은 '장수(長壽)'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순종하며,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
'영적(靈的) 장수(將帥)'에 '영적 장수(長壽)'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당신 앞에서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노아처럼 의인이 되어 살 수 있는 은총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누룩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마르 8,14-21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7)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누룩
우리는 살아가며 서로에게 기쁨만이 아니라 때로는 상처나 슬픔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슬퍼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해본 적이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렇게도
완고하냐?"(8,17)고 탄식하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21)
하고 말씀하신다. 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다(8,15).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은 그들의 위선과 악한 표양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 곁에 있었으나 현세적인 걱정과 자신에 몰두한 탓에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새와
들의 꽃까지 돌보시는 하느님(마태 6,25-34)을 신뢰하지 못했고, 빵의
기적을 행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도 빵이 한 개 밖에 없다고 걱정을
했다. 이런 한심한 태도가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죄악으로 가득 차고 못된 생각만을 하는 사람을
보시고는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신다.”(창세6,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올바르고 흠 없이 사는 노아와 그의
식구들만은 살려 두기로 하신다. 그런데 왜 잘못은 사람이 저질렀는데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그 죄과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
만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온 세상을 오염시키기에 충분하며,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1코린12,26).
그런데 노아는 하느님을 알아 뵙고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따랐기에 자신과
자기 가족을 비롯하여 온갖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창조의 기원이 될 수
있었다.
우리도 믿음의 방주에 의탁함으로써 이 세상 온갖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믿음이란 나의 삶의
뿌리와 기준과 방향을 하느님께 두고, 주님을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명의 빵 자체이신 주님은 모두를 먹이고도 일곱 광주리나 남는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가져다준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눈앞에 보이는
누룩 곧 완고함, 소유욕, 육의 정신에 눈이 멀어 정작 보아야 할 보물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다. 믿음의 삶이란 순수하고 애정어린 눈길로
모든 이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선 자체요 온갖 선의 근원이신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좋은 것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삶이다.
만사를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 믿음이란 낡은 습관과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을 버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새롭게 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철저히 추종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받아들여 나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 시작된다. 그분의 눈으로 보면
만사 만인이 감사의 동기가 되고 창조의 계기가 되리라! 나아가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과 시련, 억울함과 오해받음, 절망적인 순간들, 나의 장점과
결점, 다른 이들에 대한 감정 등을 주님의 눈으로 ‘다시’ ‘새롭게’
바라보아야겠다. 이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며, 오늘도 우리의 죄악과 못된
생각을 보시며 탄식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다운
자세이리라! 진정 내 삶의 어떤 점들이, 내 마음의 어떤 지향과 속살이
주님을 슬프게 하는가! 사랑이요 진리 자체이신 주님, 당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소서. 주님, 제 안의 그릇된 생각,
위선, 완고함, 교만, 소유욕, 탐욕, 권력욕, 시기, 질투와 같은 누룩을
없애주소서! 우리의 죄와 불신 때문에 당신이 탄식하고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오늘 다시 당신 안에 머물고, 당신의 말씀을 갈망하며 오직
당신만으로 만족하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2.1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창세 6,6)
가끔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확 뒤엎어 버려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셨으니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만하면 살만한 세상인가요?
아니면 확 뒤엎어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세상인가요?
그런데 확 뒤집어 버린다면 그 속에 나도 포함되겠지요?
그래도 상관 없나요? 아니면 내가 노아같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의인이든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 보시기에 멋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세상이 이렇니 저렇니 하기 전에 내가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삶을 살아 봅시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구나!" 하는 그런 세상을 위하여...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말씀의 누룩|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마르8,14-21)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6,5-8; 7,1-5.10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말씀의 누룩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사고방식, 행태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 헤로데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쌓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의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오늘 한 발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제자들처럼 우리도 아직 꾸지람 듣지요.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6,5-8; 7,1-5.10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제자들처럼 우리도 아직 꾸지람 듣지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이리저리 쏠리며 몸까지 이리저리 휘어지게 합니다.
그러면서 인생까지 휘어버리니 영을 살려 이들을 제대로 세워야 됩니다.
세상의 세력에 쏠리지 말고 대자연과 하늘의 힘과 초능력을 향해야 합니다.
영성체 때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지만 깨달음이 적어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정신 마음 몸이 다 따로라서 아직 실감 못하고 벙~하기만 한 거 아닌가요?
제자들도 예수님의 초자연 능력을 못 깨달아 꾸지람 들었듯 오늘도
그러네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코 8,2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복음: 마르코 8,14-21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어린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납니다. 그리고 캣에게 묻습니다.
“어떤 길로 가야하나?”
체셔 캣은 앨리스에게 되묻습니다.
“어디에 가는데?”
앨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아주 짧고, 아주 단순한 대화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과연 내가 바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일까요, 아니면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과 안락함, 성공이나 재산
등일까요?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가려고 하는 길이 무엇인지
헛갈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원의 길을 원한다면 다른 길들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노아는 다른 모든 길을 포기하고 구원의 길을 선택한 인물이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바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길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명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의견을 같이하고 또 그의 일에 도움을 주지 않은 모든 이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을까요, 아니면 구원하러 오셨을까요?
예수님에 의해 구원되지 않는 이들은 노아의 홍수 때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가 바로 신약의 그리스도임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멸망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하여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따르는 이들은 구원해 주셨지만, 무관심하거나 믿지 않았던 이들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는데, 노아를 보면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오직 당신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노아만이 구원의 길인 것과 같습니다.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삶에 동의하고 그분의 삶이 ‘진리’라고 고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노아가 하는 행동이 어리석게 보였듯이,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행동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며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지 않을 때 세상은 우리를 바보라 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분의 길만이 참 ‘진리’이고, 다른 모든 길은 거짓임을
믿어야만 ‘생명’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만이 방주를 만드는
것에 동의하여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동의하고 투신할 때 그 교회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고대의 수학자 유클리드(Euclid)의 제자 중에 소타
(Ptolemy Sotar)가 있습니다. 소타는 이집트의 황태자로 뒤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는데 수학은 정말 그에게 괴로운
과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유클리드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좀 더 쉬운 방법으로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까?”
이때 유클리드의 입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을 두고 울려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기하학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배움의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노아의 삶과 그분이 만드신 방주만이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노아 때 일어났던 일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실수가 나쁜것만은 아님은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6,5-8; 7,1-5.10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엘런 랭어
(Ellen Langer) 교수의 실험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반드시 실수를 저지르도록 어떤 사건을 몰래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절반의 사람들에게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그런 실수를 그림 속에
담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반영하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스케치가 이런 지시를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창의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예를 들어,
토끼를 그리려다가 귀를 잘못 그리게 되어서 대신 여우로 바꿔 그리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여우 그림이 처음에 그리고자 한 토끼 그림보다
더 멋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실수 때문에
낙담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실수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수가 나쁜 것이 아님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특히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실수를 통해 죄로 기울어지는
경우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너 실수했어!”라면서 벌을
내리셨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경우 침묵 속에서 우리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다시 당신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안일한
태도입니다. 죄로 기울이지는 실수들을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간과하는 태도는 주님과의 일치를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사랑을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커다란 실수라도 다 용서해주셨고,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면서 당신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여주어도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그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빵이 없음을 두고 걱정하여 말하지요. 이미 빵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고, 지금 현재에 일에 집착하는 실수를 또 다시 범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 사랑에
의지하면서 이제는 우리의 실수를 하나둘씩 줄여 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과거 제자들이 받았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형편없는 결정을 할 때마다 뛰쳐나가 또 다른 결정을 한다
(해리 트루먼).
토끼를 그리려던 실수해서 그린 여우 그림이 더 멋있을 수도 있습니다.
동그라미를 그려 보면(‘좋은 생각’ 중에서)
가수 김창완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한 청취자가 사연을 보내왔다.
그는 직장 스트레스로 살이 빠져 갈비뼈가 보일 정도라고 했다. 이에
김창완은 직접 손 편지를 남겼다.
“뼈가 드러나게 살이 빠지셨다니 제가 다 안쓰러운 기분이 듭니다. 근데
너무 예민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완벽주의거나, 세상살이라는 게 그렇게
자로 잰 듯 떨어지지 않습니다. 좀 여유롭게 생각하세요. 제가 지금부터
여백이 되는 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겠습니다.”
그는 편지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말을 이었다.
“마흔 일곱 개를 그렸군요. 이 가운데 두 개의 동그라미만 그럴 듯합니다.
회사 생활이란 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 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퍼스 등의 도구가 아닌 손으로 직접 그리는 동그라미. 누가 완벽하게
그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삐뚤삐뚤하고 찌그러졌어도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완벽한 동그라미가 아님을 기억하면서,
어떤 모양이든 동그라미를 그렸음에 만족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깨달음이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깨달음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결과입니다.'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코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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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는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지만 저마다 가지고 있는 느낌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적 관점에서 생각해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창조적 개념이 아닙니다.
즉,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없었던 것을 새롭게 알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이미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즉 삶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관계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세계들, 생로병사와 같은 예외
없는 인간의 조건들,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확신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우리의 모든 부조리는 이처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하기에 생겨난 아픔인지도 모릅니다. 내일이라도 하느님께서 불러가실
삶인지도 모르고, 온갖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쏟고 있는 우리인지도
모릅니다. 청하십시오. 이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제대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이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아름답게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결국 우리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응답해주시는 지혜의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빵 논쟁 -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6,5-8; 7,1-5.10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2015년 나해 2월17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빵 논쟁
오늘 복음에서 먹을거리 논쟁이 나옵니다.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빵을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빵이 전부인 양 걱정에 걱정을
합니다. 위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없어질 빵이 전부인 양 걱정에 걱정을
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아둔한 생각을 주님은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위장에만 매달린 우리의
얄팍한 계산을 비판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당장 눈 앞의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빵밖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한
것에만 얽매어 전전긍긍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계산기를 쉴 새 없이
두드립니다. 통장에 돈이 넉넉히 들어있으면 행복한 줄 압니다. 걱정 없이
살 것 같습니다. 모으기에만 급급합니다. 나눌 줄 모릅니다. 자기 배만
부르면 세상만사 오케이인 줄 착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게
됩니다.
사실 빵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온통 빵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에 받았던, 또 앞으로도 받을 주님의 무한한
은혜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면 불평에 불평을
늘어놓고 근심 걱정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왜 믿지
못합니까? 왜 신뢰하지 못합니까? 왜 의탁하지 못합니까? 어찌하여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걱정을 덜어주시는 주님을 찾지 않습니까?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 정력의 몇 분의 몇이라도 주님을 생각하는데 쓰면
좋겠습니다.
곰곰히 침잠하여 기억을 떠올리면 우리 삶에서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또 그 은혜 덕분에 내 자신이 지금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도 그 은혜를 베풀고 계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빵이 부족함을 탓하기 전에 주님을 먼저 찾지 않는
우리의 아둔함과 완고함을 탓하게 될 것입니다. 빵의 기적에서처럼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빵 하나라도 없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믿음이
깊어집니다.
오늘 아침 슬프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받은 메시지를 그대로
나눕니다. “이른 아침 안타까운 소식 전합니다. 어제 저녁 금호타이어
공장 노동자 김재기 대의원 분신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존의
노동자들을 도급화하여 비정규직으로 만들겠다는 회사의 방침에 맞서
분신한 거 같습니다. 결국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제도는 노동자들을 죽이는
법일 수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 죽는다고한들 노동자들을
소모품으로 여기는데 그깟 목숨 뭐 대수겠냐는 거겠죠. 참 잔인한
세상입니다. 이들도 살아야 되는 소중한 생명인데
기도 부탁드립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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