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18)
돈 권력 중독의 끝은 허망하다
- 임상수 감독의〈돈의 맛〉
<드라마 / 한국 / 115 분 / 개봉 2012>
한국 사회의 맨얼굴을 비추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는 개봉될 때마다 세간에 크거나 작게 파문을 일으킨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꺼리거나 금기시되는 주제와 소재를 과감하게 건드려 화제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여자들의 주체적이고 발칙하고 솔직담백한 성 담론(1998, 처녀들의 저녁 식사), 공교육 사각지대의 음습한 그늘에 자라는 황폐한 청소년들의 방황(2000, 눈물), 가족제도의 붕괴된 인간관계와 성 윤리(2003, 바람난 가족), 정치권력 속에서 놀아나는 허깨비 인간들의 비극적인 행로(2005, 그때 그 사람들), 사랑과 정치사회적 신념의 함수관계를 그린 운동권 후일담(2006, 오래된 정원), 비정한 재벌 권력의 희생양이 된 하녀의 허망한 저항(2010, 하녀), 그리고 돈에 아귀 들린 사람들의 추태와 돈 권력 중독의 허망한 끝을 그린〈돈의 맛〉(2012)까지 임상수는 한국 현대사의 민감한 이슈들을 통해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맨얼굴을 거침없이 그려 왔다.
〈돈의 맛〉은 홍상수 감독의 신작〈다른 나라에서〉와 함께 2012년 제65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 영화는 2010년에 발표한〈하녀〉와는 그 내용상 연장선상에 있는데,〈하녀〉에 나오는 재벌 2세의 딸이 이 영화 속에서는 30대 초의 이혼녀로 성장하여 등장하니 20년 후 쯤의 버전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재벌 윤 회장의 부인 백금옥(윤여정 분) 가족이 영화〈하녀〉를 보던 중 딸인 윤나미(김효진 분)가 어머니에게 “ 그 하녀가 왜 그렇게 분신하면서까지 죽었느냐?”고 묻자, 백금옥은 “그 사람 미친 여자였어.”라고 냉소적으로 대꾸하는 대목이 바로 이 두 영화의 내적 연관성을 알려주고 있다.
이 영화에서 돈은 아주 상징적인 하나의 오브제로 등장하고 있다. 아무리 어려운 사건도 이것 하나면 쉽게 해결되고, 정치인이나 검찰 등 사회 지도층 인사에서부터 하녀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이것에 아귀 들려 있으며, 이것에 한 번 중독되고 나면 목숨이 끝나야만 풀려 나올 정도니, 이 정도의 위력이면 가히 ‘돈 권력’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돈 권력의 위력에 옴쭉 달싹 못하는 세상
이 영화의 오프닝 씬과 마지막 장면은 돈 권력의 위력을 실감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오프닝 씬에서 윤 회장(백윤식 분)과 비서실장 주영작(김강우 분)이 함께 돈 보관 창고에 들어간다. 윤 회장의 아들 구명 운동을 위해 검찰 고위 관계자에게 현금 돈 가방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이다. 윤 회장이 비서실장을 재촉하면서 “돈 다 담았으면 몇 다발 챙겨 맛이나 봐.”하고 냉소적인 한 마디를 내 던진다. 그러나 비서실장은 그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돈 보관 창고를 유유히 빠져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속에 죽은 채 드러누워 있던 필리핀 하녀 에바(마우이 테일러 분)가 눈을 떠 주위를 들러보다가 가득 들어있는 현금 뭉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이 장면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돈은 죽었던 사람도 깨어나게 한다.”일 것이다. 윤 회장과 비서실장 주영작이 돈 가방을 검찰 고위 관계자(정원중 분)에게 건네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윤 회장이 “우리 돈은 뒷탈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돈을 건네받은 검찰측 관계자는 “이보세요, 뒷탈 없는 돈은 이 세상엔 없습니다.”라고 두려운 눈초리로 으름장을 놓는 대목이 바로 그렇다. 특히 돈에 아귀 들린 사람들한테는 돈이 바로 명약이다. 그리고 한 번 돈맛을 본 사람이면 스스로 자신의 가슴 속에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돈 아귀를 키우게 된다.
이처럼 돈 권력의 위력은 실로 막강하다. 이러한 몇몇 장면들은 우리 사회에서의 돈의 위력에 대한 사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돈은 죽었던 사람도 깨어나게 할 정도의 명약이 되기도 하고, 한 번 돈을 맛보면 좀체 헤어나올 수가 없으며, 돈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해결해 주지만, 잘 못 하면 큰 뒷탈을 남겨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돈 권력의 위대함과 막강한 힘, 그리고 무서운 부작용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돈 중독에 대한 해독제는 사랑의 진정성
이 영화는 두 가지의 서사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노회장의 딸인 백금옥을 중심으로 한 돈 권력의 위력과 횡포와 백금옥의 허수아비 남편인 윤 회장을 중심으로 한 돈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랑의 진정성이다. 돈 권력의 위력과 횡포를 통해서는 우리 사회 현실의 불편한 맨얼굴을 낱낱이 까 발리고 있으며, 윤 회장과 필리핀 하녀 에바와의 사랑의 도피 행각은 돈 권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인간적인 몸부림을 나타내고 있다. 사고사를 가장한 돈 권력에 의한 에바의 타살과 윤 회장의 자살은 언뜻 보면 패배주의적 소극적 저항이지만 다소 역설적이다.
그렇다면 윤 회장은 왜 자살을 택한 것일까? 어떻게 보면 돈 권력의 위력 앞에서의 좌절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죽음은 돈 권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쟁취했다는 역설적인 승리감으로 확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의 도피 행각에 대한 백금옥의 제재를 상징하는 출국금지와 딴 곳으로 돈을 옮겨 놓은 텅 빈 돈 보관 창고 안에서 허탈하게 웃는 윤 회장의 태도는 어쩌면 무소불위의 돈 권력에 대한 감독의 역설적인 해석인지도 모른다. 돈이 없고 출국금지를 당한 상태에서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두 사람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 회장의 딸인 윤나미와 아버지 윤 회장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돈 권력에 대한 중독의 심각한 폐혜와 인간적 황페성을 암시하고 있다.
“아버지. 그렇다면 왜 어머니에게서 떠나질 못 했는데요?”
“돈에 중독되었기 때문이지. 이미 돈의 맛을 볼대로 다 봤기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돈 권력에 중독된 것이 얼마나 한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키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 번 돈의 맛을 보았다면 그 무소불위의 권력에 맛을 들여 좀체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윤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는, 돈 권력을 떠났을 때의 그 후유증에 자신이 정말 못 견디어낼 것 같은 절망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너무 성급하게, 그리고 너무 안이하고도 뻔한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결론을 내려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비서실장 주영작과 윤 회장의 딸인 윤나미의 사랑의 도피 행각이다. 주영작이 에바의 관속에다 자신이 그동안 훔쳐낸 돈을 모조리 담아 필리핀의 어린 두 남매에게 전달하기 위해 돌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무리인 것 같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전부터 지금까지의 주영작의 심리적 모티브가 개연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비서실장 주영작은 그런 심리적 개연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젊은 두 남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미래를 한 번 가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이 재벌의 돈 권력과 인연을 아예 끊은 채 살기에는 이미 윤 나미는 돈 권력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영작은 윤나미를 따라 백금옥의 돈 권력 그늘로 들어가 보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주영작의 영혼이 너무 순수해 쉽게 상처를 받을 개연성이 너무나 크다. 이처럼 두 젊은 연인은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나아갈 수도 없는 위치에 처해 있다. 우리 한국의 현실에서는 그렇다고 봐야 한다.
이 영화의 속편을 예상하고 만들었다면 이러한 결론은 쉽게 수긍이 갈 수 있다. 그 두 사람이 인연을 끊은 채 백금옥의 돈 권력에 맞서서 싸울 수도 있을 것이며, 아니면 돈 권력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서 강력하게 저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윤 회장과 에바의 사랑의 진정성과 백금옥의 돈 권력이라는 두 가지 서사 축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이 역시 주제의 초점 심도를 흐리게 할 위험성이 있다. 윤 회장의 사랑의 진정성은 제쳐 두고 아예 처음부터 시종 일관 무소불위한 돈 권력의 막강한 힘과 폐해, 그리고 이에 맞서 인간의 진정성 회복을 위해 피 터지게 저항하는 주영작의 일관된 행위로 몰아붙이는 것으로 승부수를 던져야 했을 것으로 본다. 다소 아쉬움은 있지만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있는 그대로의 맨얼굴을 보여 주었다는 측면에서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충실하고 있다.
첫댓글 그렇군요.
첫 장면에서 주영작이 외면했던 돈.
그러면 일관되게 주영작이란 인물은
사랑만을 고집하는 인물로 묘사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는 구토가 날 정도로 욕을 심하게 한다든지
폭력을 시도때도 없이 행하는 영화가 많아
도대체 저 영화는 왜 찍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좋은 감상평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