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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수도회] 무관심과 완고함을 먹고사는 진짜 거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예레 17,5-10
† 복음 루카 16,19-31
★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인간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을 믿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고 있을 때 그는
언젠가 쓰러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이다(제1독서).
★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는 부자는 현세의 행복으로 가득 채워져 영원한
행복을 찾지 않는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않을 것이다. 부자들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복음에 쉽게 마음을 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의 특별한 악행이나 라자로의
선행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죽은 다음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에 머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서 들은 말은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다.”(루카 18,25)는 것입니다. 부자에게 이 세상은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이미 완전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도
없었고, 자신이 소유한 것을 믿고 의지하면서 한평생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았습니다. 예레미야서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17,5)였습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 그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놓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나,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던 라자로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족한 것을 채워 줄 무엇인가를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 세상은 결코 완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내심을
갖고 누군가의 위로를 갈망해 왔는데, 하느님께서는 그의 인내와 기다림을
채워 주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싱싱한 푸른 나무와 같다고
하지만, 그에게 무더위도 닥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고통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복될 것입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믿음과 희망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 마음이 이 세상
것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지는 않은지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무관심과 완고함을 먹고사는 진짜 거지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루카 16,19-31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
무관심과 완고함을 먹고사는 진짜 거지
복된 사순시기가 깊어가고 있다. 그 깊이를 가늠하는 영의 숨결로
겸손하게 내 주제 파악을 하도록 하자! 오늘 독서의 주제는 하느님 심판에
대한 신념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심판에 대한 신념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17,7-8) 인간에게는 생명의 샘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17,9)라고 탄식하면서,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유다 지도자들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백성들의 ‘완고하고 반역하는
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는 생활은 부도덕하면서 성전에서 예배하면
속죄가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것이고,
그렇게 더럽혀진 성전은 파괴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세속의 힘을 믿고 사람에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17,5). 그는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고
스스로를 주님의 축복과 사랑 밖으로 내몰아버리는 것이다. 주님에게서
떠난 사람은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고,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 수밖에 없다(17,6).
아! 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느님의 손을 놓아버리고 자기에게만 몰두하고
자기 애착 속에 살아가는 이는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의
손길도 생명의 호흡도 없는 암흑에 갇히고 마는 것이리라! 이와는 달리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이다(17,7).
오늘 예화에 나오는 부자는 대제사장들이나 입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이 옷감은 노동자
하루 품삯의 3-4000배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였다.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벌였다. 반면에 가난한 라자로는 부자의 집 문간에서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다가 겨우 식탁에서 손을 닦고 버린 빵조각으로 배를
채웠다. 게다가 온 몸이 헐고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으로 고생하였다. 그는
상처를 핥으러 오는 개조차 물리칠 힘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죽어서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으나, 부자는 저승에 가서 불길 속에 극도의 고통을 받았다. 자비를
청해보지만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왜 이들의 처지가 죽은 뒤에 뒤바뀌었을까? 부자의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관심과 완고한 마음, 남을 거들떠보지 않는 냉혹함 때문이었다. 부자는
생전에 가난한 라자로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그는 이웃의 필요를 외면하였고 하느님의 비참함으로 내려가 함께
느끼지도 않았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뒤바뀐 처지는
바로 그의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극도의 비참과 가난한 처지에서 오직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했던 라자로와 달리 부자는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겨 저주를 받은 것이다.”(예레 17,5)
현세의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내가 바로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비참하고
불쌍한 거지가 아닐까? 지상적이며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것은 인간의
내면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결코 영원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함을
기억하자! 형제자매들의 울부짖음과 굶주림과 억울함과 외로움 속에서
신음하시는 하느님을 무심코 지나치는 몸짓 하나 하나가 바로 자신을
사막의 덤불로 몰아버림을 잊지 말자. 주님께 신뢰를 두고, 무관심과
완고함, 냉정함의 다리를 건너 애정깊은 관심과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움과 따뜻한 심장이 꿈틀거리는 땅으로 걸어가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이 사순시기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의 ‘명상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마음의 고통은 화를 내게 된 원인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화를 냈을 때
얻게 되는 결과다.’
당장에는 그 상황,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마음을 다친 것 같아도
사실은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자체가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인간이 과장하기 가장 쉬운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의 고통이 아닐까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가장 힘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을 때 어떤 선택과 결단을
내렸으며 그에 따라 어떻게 행동했는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는 흥미진지하게 진행이 되는데,
‘인생 역전’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구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전에
라자로에게 물 한 방울, 빵 한 조각 주지 않은 부자가 죽어서는 오히려 물
한 방울만 달라고 애원합니다. 물 한 방울, 참으로 별 것 아니지요.
그런데도 이 물 한 방울 조차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부자가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탐욕을
부린 것도 아니고, 남의 재물을 빼앗지도 않았습니다. 간음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없으며, 그 외의 어떤 잘못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볼 때, 형제애가 강한
착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어서 고통을 받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자신의 자리에서 충분히 베풀 수 있었던 자비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라자로를 바라보십시오. 그 역시 어떤
사람이었는지, 특히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증거 역시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선행을 베풀었다는 사실도, 의로운 행동을 한 것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고통과 시련 속에서 힘들어 했다는 것만을 전해줍니다. 그런데도
하늘 나라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그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어떤 불평불만을 남기지 않습니다. 가장 비참한 상황을
순수하게 받아들였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자기 자신을 봉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이 복음에서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비참했던 이 가난한 남자의 이름을 ‘라자로’라고 밝히신 반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린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이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만큼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고, 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생역전이라는 말은 텔레비전의 광고 문구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수 있는 축복의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결단을 내리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이 사순시기, 나의 죽음에 앞서 세상
안에 어떤 자비를 실천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주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살고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할 시기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라(제임스 딘).
무엇이 진정한 인생역전일까요?
경청과 공감(데이비드 스터트, ‘적응력이 실력이다’ 중에서)
보험 회사에서 일하는 롭은 입사 면접 중에 한 여성 지원자에게 자신의
강점을 말해 보라고 했다. 그녀는 “고객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제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고객에게 신뢰를 줘 상담이 더
잘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뒤 롭은 팀원들과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좀 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화 응대 시 첫 인사말을 “저는 웬디입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의문문에서 “저는 웬디입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라는 평서문으로 바꿔 보기로 결정했다. 이 작은 차이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상담자가 일을 제대로 처리해 줄 거라는
신뢰감을 가졌다.
어느 날, 지사의 부사장인 켄이 고객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켄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여쭤 볼게요. 다친 분은 없습니까?”라는 인사말을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막 사고를 당해 우울한 마음으로 보험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고 상상해보라. 보험 회사 직원이 사고 규모나 보상 금액
등의 사무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 우울해질
것이다. 그때 전화를 받은 사람이 주민등록 번호 대신 “다친 분은
없습니까?”라고 걱정스럽게 묻는다면 어떨까? 고객의 안녕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로 상담을 시작하면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 상대방의 선의를
신뢰하는 대화로 이끌 수 있었다.
변화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처리 청구 건수가 평균 1만 건에서
4,000건으로 줄었고 고객 만족도는 올라갔다. 회사를 나가는 직원도
줄었고, 남아 있는 직원들의 충성도는 더욱 높아졌다.
경청과 공감의 말을 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평생 경청과 공감을 실천하신 성모님.
◈ [수도회] 2015.03.0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좋은 것을 많이 받고 싶어합니다.
재물도 많이 받고 싶고 건강도 자식복도 많이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많이 받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받은 사람은 저 세상에서 누릴 것이 그만큼
적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받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저 세상에서 누릴 것이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많이 받으려고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받은 것을 더 많이 내어 놓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아무리 많이 받아도 나눈 것은 저 세상에서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논리입니다.
오늘 내가 받은 것이 적다고 한탄하지 말고
내가 받은 것이 많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내가 나눈 것이 적음을 한탄하고
내가 나눈 것이 많음을 기뻐합시다.
사순절은 특별히 이렇게 절제하고 나누라고 마련해 주신 시기입니다.
그렇게 할 준비 잘 하고 계시지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루카16,19-31)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천국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본향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집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
(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국은 이 세상에서 열리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하늘을 사랑했으면 하늘인정 받지요.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하늘을 사랑했으면 하늘인정 받지요.
재물이 많다 해도 하늘 아래, 권력이 높다 해도 하늘아래, 다 그렇습니다.
생명이 길다 해도 하늘 아래, 실력이 좋다 해도 하늘아래, 다 맞습니다.
소유가 많다 해도 하늘 아래, 자식이 많다 해도 하늘아래, 모두 맞습니다.
재물이 없어 세상에서 괄시 받아도 마음이 예뻤으면 하늘에서 인정받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이 짧아도 권력이 없었어도 하늘을 사랑했으면 하늘인정 받지요.
세상에서 홀로 외롭고 거지로 지냈어도 진솔한 생이었다면 하늘인정 받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우리는 나누고, 구분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생물은 ‘종속과목강문계’
라는 분류법을 만들어서 구분합니다. 역사는 ‘선사시대, 석기시대,
철기시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와 같은 방법으로 구분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소들도 ‘기호표’를 만들어서 구분합니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도 ‘분류표’에 따라서 책을 정리하기 때문에 찾기가 쉽습니다.
유엔에서 사람의 나이를 구분하는 새로운 분류법을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17세까지는 미성년자, 65세까지는 청년이, 79세까지는 중년, 99세까지는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분류법에 따르면 저는
아직도 청년입니다.
며칠 전에 세대에 따른 청소년의 분류법을 들었습니다. 1세대는 어른들의
말을 ‘예’라고 응답합니다. 저희들의 세대가 그런 것 같습니다. 공부하라고
하면 ‘예’, 성당에 가라고 하면 ‘예’ 주로 어른들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2세대는 어른들이 말을 하면 ‘왜요?’라고 응답합니다.
본인들이 납득하지 않으면 쉽게 ‘예’라고 응답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권위와 전통이 조금씩 무너지는 사회입니다. 3세대는 어른들이 말을 하면
‘즐’이라고 응답합니다. 성당에 가라고 하면 어른들은 가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본인은 상관하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도 그쪽 일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나의 일에도 관여하지 말하고 합니다. 4세대는 어른들이
이야기 하면 ‘헐’이라고 응답합니다. 어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당신들이 도대체 무엇인데 우리의 일에 간섭을 하느냐는
태도입니다. 5세대는 이제 ‘대박’ 세대입니다. 본인들이 좋으면 하지만,
싫으면 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쉽게 좌절하기도 합니다.
1세대의 청소년 시기를 지낸 저에게 지금의 청소년들과 대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3가지 기준에 따라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첫 번째는 무엇이
되고 싶은 ‘꿈과 비전’입니다. 두 번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꿈과 비전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해야 할 일들이 부담이 되기
마련입니다. 성당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누군가를 돕는 것도 해야 할 일로만 여긴다면 재미가 없고,
흥미도 없고, 성과도 적기 마련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꿈과 비전과 일치
하지 않으면 재미는 있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하기 마련입니다. 게임에
중독이 되기도 하고, 술에 중독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삶의 ‘꿈과 비전’을 명확하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과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은 지금 당장은
즐겁고 편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화답송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온 몸에
종기가 나서 지나가던 개가 그 상처를 핥았던 라자로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뜻대로 살다가, 세상에서는 편안하게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일까요? 저는 라자로처럼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라자로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교회의 역할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루가
복음 4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형제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채우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불신의 댓가
<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복음: 루카 16,19-31
< 불신의 댓가 >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신의 책 ‘트러스트(Trust)’에서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가 경제발전을 이끈다”고 말합니다. 신뢰도가 강한 나라들이 불신에
의해 치러야하는 손실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것들이 경제발전을 위한
재투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2013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개성공단이 일시적으로 폐쇄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곳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이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제때에 납품을 하지 못하게 되어 많은 손해를 보았고 또
공장에 쌓여있던 자재들도 방치되어 못쓰게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지금이야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고는 있지만 북한이 또 일방적으로 임금을
올리라고 해서 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언제 폐쇄 될지 모르기
때문에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은 엄청난 액수의 보험을 들어 놓아야합니다.
그만큼 운영자금이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심리적인 불안감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댓가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참으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일까요? 후쿠야마는
독일, 미국, 일본과 같은 나라들을 사회적 신뢰가 높은 나라들로 구분했고,
이탈리아, 인도, 중국, 한국과 같은 나라들을 저신뢰 문화권으로
나누었습니다. 학연과 지연 등으로 나라가 분열되어 있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북한만 갈라져있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와 경상도, 노인들과 젊은이들, 여와 야, 좌와 우로 갈라져 서로 믿지
못하고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 비방을 합니다. 즉, 시키는 대로만 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불신의 나라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북한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막대한 군사비용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내에서도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신뢰 비용들이 빠져나가고 있겠습니까?
만약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남편이
나가있는 동안에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할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자주 전화를 하여 누구와 있나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이 그것에 에너지를 다 빼앗기는 것을 넘어서서 남편도 제대로 일에
집중하게 하지 못하여 모두가 그 불신의 댓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만약
믿음이 있다면 서로의 자리에서 그 에너지로 열심히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사람은 약해서 약속을 언제든
어길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믿음을 자기 자신이나 사람들에게 두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신뢰가 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닌 하느님께 신뢰를 둠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신뢰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아닌 주님께 먼저 신뢰를 두어야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성경에서 ‘땅’이나 ‘나무’는 우리 자신들을 상징하고 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물댄 동산에서 살다가
죄를 짓고는 광야로 쫓겨나는 이유가 바로 죄가 성령의 은혜가 단절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이나 자신에게 믿음을 두는 자는
성령의 비가 오지 않아 광야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결국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신뢰를 두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크게
따지자면 자기를 신뢰하거나 하느님을 신뢰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은 사막과 같아서 언제 비가 올 줄 몰라 항상 걱정을
하고 살아가게 되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물가 옆에 있는 땅과
같아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이들은 당연히 ‘걱정’이 많을
것입니다.
빌 게이츠의 아들이라면 내일 먹고 살 걱정을 할까요? 우리에게는
하느님이라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입니다.
그런데도 내일 걱정을 하고 있다면 아버지께 신뢰를 두는 삶은 아닙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걱정’이 바로 ‘불신의 댓가’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반드시 건널 것이고, 그 강 건너의 삶은 이 시간에
달려있습니다.'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자신의
형제들에게라도 자신과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여 라자로라도 보내서 자신의 형제들에게 경고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로 거절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표현을 쓸 때, 그 표현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믿음이 가능할 때 올바른 관계는 만들어지고
유지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역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상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말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 누구와도, 미워하는
그 누구와도 결국은 헤어질 시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모를 리 없지만, 삶을 엉터리로 만들고, 준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흔한 모습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믿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스스로 의식을
피하려는 성향을 말합니다.
잘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진실을 항상 의식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이를 의식화(意識化)라고 합니다. 건강한 믿음, 신실한 믿음은
바로 이 진실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서만 허락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해진다고 해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 그것은
진실에 대한 믿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진실을 못 보는 이들, 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든
적든 간에 비유의 부자처럼 살다가 끝을 맺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코10,25)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반드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 건너의 삶은 이 삶에 달려 있음을 확신해야만 합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17,5-10 루카16,19-31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회개의 여정 -사람이 되는 길-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자 자유의 여정이요 사람이 되는
여정입니다. 사람이, 자유인이 되는 길은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참 사람으로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어찌 된 일인지 갈수록 힘들어지는 세상살이입니다.
노인이나 어른이나 젊은이나 똑같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 하는데 자유와 평등은 요원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자유롭지 못한 제한적 존재이며 평등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유전과 환경을 이야기하는데 잘 들여다보면 내탓없이
타고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재능도, 성격도, 외모도 타고 나고 가족력을 들먹이는 병도 타고납니다.
하여 천품, 천형, 천부, 천재라는 하늘 천자가 들어가는 낱말도 허다합니다.
여하튼 불평등하게 부자유하게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 역시 그렇다고 봐야합니다.
부와 빈곤이 대물림하는 현대판 계급 사회에서는 부(富) 또한 타고 난다고
봐야 합니다. 개천에서 용나는, 신분 상승은 참 기대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어제 면담성사중의 조언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이 원망들어도 쌉니다. 어찌 그렇게 잘 믿었는데 그런 불행을 주실
수 있습니까? 하느님을 원망하십시오. 그러나 더욱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문제도 답도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그냥 살기만해도 구원이니 하루하루 충실히 사시고
하느님 앞에 가면 왜 이렇게 살게 했느냐 따지십시오.“
사실 내 탓없이 타고나는 것들 대부분을 살펴보면 하느님께 닿아있음을
봅니다. 아, 이런 숙명적 절망의 틀에서 어떻게 벗어나 참 나를 실현하며
살 수 있을까요? 참 절실한 화두입니다.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평등은 하느님 앞에서만 가능합니다.
있는자건 없는자건, 강한자건 약한자건, 건강한자건 병든자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유능한 자건 무능한 자건, 잘난자건 못난자건
하느님 앞에서만 모두 평등하며 자유롭습니다.
부단한 회개의 여정을 통해서 성취되는 하느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바로 이런 주님 앞에 나를 세우고 성찰하는게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유입니다.
이 둘의 불평등의 골은 얼마나 깊은지요.
어느 시대나 부자와 라자로가 상존하는 불평등한 세상입니다.
문제는 라자로가 아닌 부자입니다.
부자의 무관심이, 닫힌 삶이 문제입니다.
부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셋입니다. 위의 하느님과의 단절, 앞으로
미래와의 단절, 옆으로 이웃과의 단절입니다.
오직 현재의 재물이 전부인 육적, 현실적 삶만 있을뿐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그대로 부자에게 적용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위로 하느님께, 미래에 죽음에로, 옆의 이웃에로 열려있어야 사람인데,
사방 모두에 닫혀 있는 흡사 자기 감옥에 갇혀있는 수인(囚人)의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삶의 의미도, 삶의 목표도, 삶의 중심도, 삶의 방향도
전무(全無)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것이 죄(罪)이자 병(病)입니다.
죄와 병의 구별이 애매합니다. 죄가 깊어지면 병이 된다고 봐야합니다.
부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위로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인 대화를 나눠야하고, 언젠가의
죽음을 내다봐야 하며, 주변의 가난한 이웃, 라자로를 보살피고 배려해야
합니다.
바로 회개를 통한 죄로부터, 병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의 회개와 더불어 치유되는 병입니다.
불통에서 소통으로, 단절에서 연결로의 전환이 회개이며,
이런 회개를 통해 깊어졌던 서로의 골은 메워질 때 치유입니다.
오늘 1독서의 두 부류의 인간은 그대로 부자의 내면과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눈엔 누가 진정 부자요 자유인인지 묻게 됩니다.
제가 볼 때 부자는 내적 불치의 병자요, 라자로는 내적건강의 자유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부단한 회개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이들이 진정
자유인이요 부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라자로의 내면이 이러했음이 분명합니다.
현세의 불평등과 부자유에서 탈출하여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절대 평등과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바로 회개의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들에게
내적자유와 평화, 부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40,5ㄱ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신부 -
◈ [수도회] 선택
2015년 나해 3월5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사순 제2주간 목요일(2015년 03월 05일) 선택
어제 수도원에 개인 피정 온 한 형제와 면담을 했습니다.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홀로 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을 깨닫고 믿게
되었으며 우연히 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우리 수도원에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무척 놀랐습니다. 놀라운 하느님의 이끄심을 그
형제에게서 느꼈습니다. 또 한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하느님의 진리를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고 처음으로
피정이라는 것을, 그것도 혼자 수소문 끝에 수도원을 찾아 피정하러 왔다는
사실에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비하면 짧디 짧은 이 지상의 삶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이 땅의 것에 매어있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복락은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의 즐거움만 찾았습니다.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웃의 고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라자로는 허다한 고통을 받았지만 하늘의 사람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땅에 살았지만 하느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저승은 땅 속에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땅은 중간 지역이었습니다.
이것을 단테의 ‘신곡’에서 잘 볼 수 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어떻게 보면 영원으로 건너가는 지역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여기 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고통을 선택해야만 하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눈 앞에는 영원으로 향한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실 오늘이 심판날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삽니다. 하늘의 삶은 당연히 나눔과 공감과 자비의 삶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가난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영원한 행복에 우리는
초대되었습니다. 짧은 이 땅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삶을
선택합시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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