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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수도회]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37,3-4.12-13ㄷ.17ㄹ-28
† 복음 마태 21,33-43.45-46
★ 야곱은 여러 아들들 가운데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다. 형들은 그를
미워하여 없애 버리려 했고,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다.
그러나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그는 그곳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장차
이스라엘 온 집안을 구하게 될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다. 그렇지만 포도밭을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다른 소작인들이다.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포도밭이 다른 이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 37,20).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
꿈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요셉이
꾸었던 꿈대로 그의 형들은 훗날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가 재상이
된 요셉 앞에서 절을 하게 될 것입니다(창세 42,6 참조). 요셉을 미워한
형들이 꾸민 계획과는 전혀 달리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형들이 꾸민 악을 하느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구하고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만,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말씀이 실감 납니다.
오늘 복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포도밭 주인의 아들로 비유되는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는 상황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암시하는 최악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들이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민족들이 하느님 나라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처럼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포도밭 주인의 아들이 살해됨으로써 포도밭이 다른 이들에게 넘겨지게
되었듯이, 이스라엘의 거부와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기에, 세상이 생명을
얻도록 외아드님을 내주셨던 것입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마태 21,33-43.45-46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마태 21,38)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
사람들은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그것을 위해 결정적인 걸림돌인
소유와 질투를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간다. 어쩌면 역설의 늪을 헤매며
때로는 사랑하고,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실존적 혼동과 역설 자체가 십자가요
십자가의 죽음을 부르는 근원적인 이유임을 깊이 헤아려보는 것은 어떤가.
소유는 구속을 부르고, 질투는 왜곡과 소외로 되돌아오는 이 지극히 평범한
인생의 부메랑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제1독서에서 요셉의 형제들은 질투의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요셉이 받는
총애 때문에 의기소침해졌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요셉의
행복한 처지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삶의 방향과
기준을 하느님께 두지 않고 정화되지 않는 욕망과 탐욕에 사로잡혀 요셉을
시기 질투하였고, 결국 요셉은 이집트에서 고통과 수난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자기중심적인 불순한 태도와 왜곡된 사랑을
통하여 당신의 창조를 이어가신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 앉혀주신다. 시기 질투로 꼬이고 더렵혀진 관계를 창조의 순간으로
되돌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하느님 나라요(21,43), 그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돌보고 그들로 하여금 정의의
결실을 맺도록 하시려고 당신 백성을 지도자들(소작인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람들(예언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그들은 “저 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재산을
차지하자.”(21,38) 하고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낸
포도원의 상속자인 예수님마저도 단죄한 다음 사형선고를 내리고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고, 나아가 하느님의 것을 탐하고 질투심에 눈이 어두워져 결국
하느님을 보지도 못하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거부당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게 되셨다.
죽음을 부르는 질투는 이렇게 하느님이 아닌 다른 이들과 비교함에서
비롯되는 악이다. 그 악의 뿌리는 가난을 거스르는 애착이요, 소유욕이다.
애착과 탐욕과 이기심이 부르는 질투는 다른 이들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하느님의 것임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다.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소중한 존재이기에 하늘 아래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향기 있는
삶의 태도이다. 비교하려거든 오직 하느님하고만 비교해야 한다. 눈앞의
다른 누군가의 태도나 말씨, 감정표현에 신경을 쓰며 분노하고 판단하고
시기 질투하는 이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순례길에서 방향 착오를 하고
있음을 뚜렷이 자각할 필요가 있다.
주님! 더는 주인인 양 착각하고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온갖 것을 당신께 돌릴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다른 이 안에서 선(善)을 이루시는 주님을
시기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서로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칭찬해주는
기쁨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시기와 질투의 희생이 되어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도 ‘새로운 창조’를 이어가시는 당신의 깊고 넓은 섭리의 손길과
자비를 굳게 믿고 기다리는 여유를 갖게 해주소서. 조금은 더 거룩해지기
위하여 몸과 마음으로 겪는 고통과 수고로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구원의 여정에 일치시켜 나가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소유 없이’(sine proprio), 그리고 왜곡된 사랑의 표현인 질투와
시기가 꿈틀거리는 죽음의 계곡 너머 참 자유와 기쁨이 기다리는 부활을
‘지금, 여기서’ 노래하게 하소서!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을 조롱하는 소유와
질투의 부메랑에서 벗어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다시금 점검해야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영국의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평생 1만 787번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평균 수명을 여든 살로 가정 하면 1년 365일
중에서 135일을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흘에 한 번 꼴로 고통을 체험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조사 결과를 보면서 앞으로 겪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생각해 봅니다.
아직도 수많은 고통과 시련이 내 앞에 있다니 끔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그만한 고통과 시련
중에서 정말로 기억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고통이 많기는 하지만, 잊혀버릴 고통도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흘에 한 번 꼴로 고통을 체험하지만 그 두 배를 고통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어렵고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반대로 그래도 살아갈 희망이
더 많은 세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면서
살아가시겠습니까? 사흘에 한 번 꼴로 다가오는 고통을 보시겠습니까?
사흘에 한 번 정도 걸러서 다가오는 희망을 보시겠습니까?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보면서, 이 소작인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라는 묵상을 해 봅니다.
사실 밭 임자는 말도 안 되게 너무나도 착합니다.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지요. 이 일은 주인의
일이 아닙니다. 즉, 소작인들에게 맡겨서 할 일을 주인이 직접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소작인들은 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저 포도밭을 보살피고
주어진 것을 지키라는 명령뿐이었습니다.
이런 주인이 있을까요? 소작인의 노고를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다하는
주인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주인의
배려와 사랑을 기억하면서 더 열심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소작인들은 노력은커녕
포도밭을 어떻게 하면 빼앗을지를 궁리하고, 그 결과 다른 종들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여 버리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왜 이런 못된 모습을
저지를까요? 보고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의 사랑을 본
것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모습이 못된 소작인의 모습에 오버랩 됩니다.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받은 것을 바라보지 않고, 받지 못한
것만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 그래서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기 보다는 더 받지 못한 것에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으며, 더 큰
욕심에 주님의 뜻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면 못된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지 배워야 할 필요를 더욱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매우 빠르고 때로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이다(앤디 워홀).
어제 특강을 했던 인천 구월1동성당입구입니다. 행복하고 신명나는
공동체 되시길....
사망진단 받은 아기, 엄마 품에서 살아나(‘따뜻한 하루’ 중에서)
의사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은 갓난아기가 엄마의 품에서 되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호주에 사는 케이트 오그(Kate Ogg)라는 여성은 애초 예정보다 훨씬 앞서
임신 27주 만에 쌍둥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러나 쌍둥이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딸 에이미는 비교적 건강했지만 아들 제이미는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결국 의사로부터 사망 진단을 받은 것이죠.
의료진은 제이미를 살리려고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20분이 지나도록
호흡이 돌아오지 않자 담당 의사는 부모에게 아기의 사망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아기를 한 번만 안아보겠다고 간절히 부탁하여 이미 숨이 멈춘
아기를 안고 “사랑한다.”라는 말을 2시간 동안 속삭였다고 합니다.
아기를 쓰다듬고 키스한 후, 마지막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젖을 물린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
아기가 숨을 쉬고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손가락도
움직였습니다.
깜짝 놀란 엄마는 의사를 불렀고, 달려온 의사는 아기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기적처럼 되살아난 아기는 건강을 회복해서 현재 평범한
아기들처럼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2010년에 있었던 일로, 해외에서는 많이 알려진 사연입니다. 아이를
살린 것은... 발달된 의학과 기술이 아니라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힘은 정말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힘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선 이야기의 아기가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였기에 죽었다가 살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잘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의 주인의 사랑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월1동성당 마당에 있던 성모상.
◈ [수도회] 2015.03.0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창세 37,19-20)
여러분은 꿈을 많이 꾸시나요? 간밤엔 어떤 꿈을 꾸셨나요?
황당한 개꿈을 꾸지는 않으셨나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꾼 꿈 이야기를 들으며
어떨 때는 '웃기고 있네~' 하며 무시하고
또 어떨 때는 현실감 없는 사람이라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꿈이 없는 사람은 희망도 없고 생기도 없는 사람이기에
살아 있으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꿈쟁이였습니다.
형들은 그런 꿈쟁이 요셉이
미웠고 형들인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꿈이 진짜인지 시험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꿈쟁이 요셉의 꿈을 실현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나요? 어려서부터 많은 꿈들을 꾸셨지요?
지금은 어때요?
현실의 벽에 막혀 그 꿈들을 다 접어버리진 않으셨나요?
오늘은 내가 꾸워왔던 꿈들을 다시한번 돌아봅시다.
그리고 "내 꿈을 펼쳐라~" 하는 노래를 다시한번 불러봅시다.
멋진 하늘나라의 꿈을...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꿈을...
통일이 이루어진 대한민국에서 한 형제로 자유롭게 살게 되는 꿈을...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주님께서 걸으신 길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마태21,33-43.45-46)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주님께서 걸으신 길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싸우면 어떤 양이 이길까요? 선한 양? 아니면
악한 양? 힘센 놈이 이깁니다. 그런데 어떤 놈이 힘센 놈이 되느냐? 내가
밥을 잘 챙겨 주는 놈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밥을 주어야 할까요?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더 높이 올려 생각해봅시다.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더 높이 올려 생각해봅시다.
준 것이나 맡긴 것에 대해서 서류가 없으면 무조건 무시해 버립니다.
내가 태어난 세상은 내 것인지 내가 맡은 것인지 명상에 잠겨보곤 합니다.
내 것 이기엔 감당이 안 되고 맡았다면 나름대로 이해가 조금 갑니다.
유산, 벌은 것, 세상 모든 것, 특히 내 몸, 내 것? 맡은 것? 확실합니까?
번 것 얻은 것 주어진 것이 내 것인 줄 알고 맘대로 하면 그게 맞을까요?
나에게 맡긴 주인인 실상을 세상이나 부모라 말고 더 높이 올려 생각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오 21,4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사순 제2주간 금요일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저는 영화배우 더스틴 호프만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아마도
배우와 키가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 배우로는 조재현과
닮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가장 많이 닮은 것은 부모님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는 성격과 품성이 닮았습니다. 정확하게 따지거나 분석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부드럽고 온유하며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을
닮았습니다. 때로 그런 성격이 사제로 생활하는데 유익하기도 하지만
아버지처럼 강인하고 명확한 성격을 닮았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습니다.
아버님과는 체질적으로 닮았습니다.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변해서
염색을 해야 하는 것, 혈압이 높아서 약을 복용해야 하는 것, 치아와 잇몸이
약해서 치과를 자주 찾아가야 하는 것을 닮았습니다. 가끔씩 어머니의
체질과 아버님의 성격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모두 제게 지극한 사랑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제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보다 2000년 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수님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막내로 태어났던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은전 스무 닢에
팔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은전 서른 닢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였고, 가족들에게 편안한 집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셉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잘못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지 2000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의 세력인 사탄을 닮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닮아야 할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빌라도를 닮아야 할까요?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했던 군중을 닮아야 할까요?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비를 얻는 법은 자비뿐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복음: 마태오 21,33-43.45-46
< 자비를 얻는 법은 자비뿐>
어느 부부의 사연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처음에 결혼하려고 할 때 기쁨에 설레어 혼수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랑은 신혼살림을 할 아파트를 샀고 신부는 혼수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얼마 앞두고 신부 측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고 신부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지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갚느라 혼수도 제대로 마련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은 전에 보여주었던 아파트는 자기 것이 아니라며 작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혼수도 제대로 해 오지 않은 처지라 신부는 다 이해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결혼 전에 말했던 봉급보다 훨씬 적은
액수만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아내의 아버지가 지병을 털고 일어나 다시 사업을 재개하여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괜찮아보이던
남편의 모든 것이 속상하게 느껴졌습니다. 행동하는 모든 것도 다 자기를
속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씩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친정어머니에게 남편이 결혼 전에 말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말이었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는 수 없다며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네 신랑은 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우리 사정과 맞추기 위해 집을
옮겼고 그 남은 돈으로는 아버지 병원비에 보탰었던 거야. 물론 매달
얼마씩 계속 병원비를 대줬단다.”
아내는 남편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감사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려면 마중물이라는 것을 먼저 부어야합니다. 물을
올리려면 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의
사랑이 솟아나려면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흙을 넣고 물을 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비는 안 그렇겠습니까? 자비로운 사람만이
심판을 이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심판만 이길 수 있다면 이 세상에서
어찌 살았건 성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질투를 받아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셔서 미래에 닥치게 될
흉년을 넘길 수 있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형제들의
생각대로 요셉을 죽였더라면 그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제들 안에는 자비를 가진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르우벤과
유다입니다. 르우벤은 그를 구해내려고 합니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또한 유다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요셉이 야곱의 가문을 구하기는 하지만, 이 두 형제의 자비가 없었다면
요셉도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둘마저 무자비했다면 그 댓가로 무자비한
멸망을 맞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비가 우리를 구원해준다면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Laguardia)
씨였습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라과디아 판사는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 것일까요? 노인? 물론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면서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 노인은
천국에서 라과디아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고, 그리스도도 그 노인의 증언을
듣고 라과디아 천사를 당신 자녀라고 증언할 것입니다. 라과디아는 자신의
자비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자비만이 자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꿈'의 실현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창세37,3-4.12-13ㄷ.17ㄹ-28 마태21,33-43.45-46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하느님의 꿈'의 실현
오늘은 '하느님의 꿈'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꿈, 희망, 비전 모두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사람만이 꿈을, 희망을,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꿈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늘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꿈을 지녔었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성경의 사람들 모두가 꿈과 희망,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꿈으르, 희망으로, 비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꿈이 없으면 현실도 없습니다.
부단히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킬 때 하느님의 뜻도 현실화됩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이스라엘이 늘그막에 얻는 아들이라 각별한 사랑을 받은
요셉 역시 꿈의 사람이었을 봅니다. 이런 꿈과 비전을 지닌 요셉이었기에
이스라엘은 물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 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형제들의 질투를 야기한 요인 중 하나가 요셉의 꿈이었습니다.
유독 형제들중 꿈꾸는 사람, 꿈의 사람은 요셉뿐이었습니다.
아, 꿈꾸는 사람이 광야세상을 낙원세상으로 바꿀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꿈입니다. 나이 들어도 하느님의 꿈이, 희망이 있어야 영원한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늘 꿈꾸는 분입니다. 사랑의 꿈입니다.
꿈꿀 때 하느님을 만납니다.
광야의 사순시기는 주님의 부활을 꿈꾸며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믿는 이들의 특권이자 꿈은 하느님을 꿈꿀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에는 늘 하느님이 함께 했음을 봅니다.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됩니다.
요셉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요셉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역시 늘 하느님을 꿈꿨던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유일한 꿈이자 비전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꿈을 실현시킵니다.
마침내 '부활의 꽃'으로 활짝 피어난 하느님의 꿈,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꿈의 실현된 예수님이요, 예수님 부활 후, 이를 깨달아
알아본 제자들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시편을 통해 한 감격의 고백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하느님의 꿈의 사람,
요셉과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꿈을 실현시킵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해 또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아름답게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의 꿈입니다. 다 덧없는 세상의 꿈들이요 진정 영원한
참 꿈은 하느님의 꿈뿐입니다. 요셉도 예수님도 예언자들도 모든 성인들도
평생 하느님을 꿈꿨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꿈을 지닐 때 마음의 순수요,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입니다. 사순시기는 주님 부활의 꿈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꿈꾸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하늘나라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요,
우리의 진정한 기쁨 역시 하느님 사랑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사순시기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지니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놀라운 것은 기쁨이라는 말이 베네딕도 규칙서에 단 2회 나오는데
모두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장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꿈과 기쁨은 함께 갑니다. 영적갈망의 기쁨을 지니고 부활의
꿈이 실현될 날을 기다리는 은총과 설렘의 사순시기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하느님을 꿈꾸는 아름다운 축복의
시간이요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라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신부 -
◈ [인천] 다시 마주하게 된 vip 손님.
2015년 나해 3월6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창세기 37장)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어제 오전에 하우스를 정리하고 있는데 수녀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냉담자들이 있는데, 오후에 시간이 되면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2시에 가기로 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 수녀님과
함께 첫 번째 집을 방문했는데요. 주차 한 곳이 제가 빌려서 쓰고 있는 밭
옆이었습니다. 그런데 밭을 보고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부터 저의 vip 손님이었던 분(?)이 또 제 밭쪽으로 쓰레기도 버리고,
포도나무 가지도 태워버리고, 먹은 술병도 쌓아 놓았더라고요. 화가 나서
고대로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옆에 계시던 수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가정 방문 다 끝내고 같이
정리하시죠...”
그 얘기를 듣고, 화에 사로잡혀 하려던 파괴적인 행동을 멈추었습니다.
아마 수녀님이 안 계셨으면 그대로 돌려드렸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랬다면 어땠을지..를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요셉의 형제들이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요셉의 형제들은 형제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되는데요. 그 결과가
어땠나요? 형제들은 갈라지게 되었고, 아버지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과 달리 형제들을 용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거 같습니다. 첫 아들을 낳고 그 동안의 일을 용서하고
내려놓을 수 있었는데요. 그러한 노력이 있어서인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도, 그 권력을 가지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제들에게 복수한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창조적으로 사용하여 형제들과 화해하려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하고, 그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는지를
시험하는데요. 몇 차례 시험해 본 결과 형제들은 예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다시
화해하여 함께 살게 되는데요.
아마도 제가 배워야 할 모습은 요셉의 형제들처럼 욱 하여 파괴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용서하고 창조적인 방법으로 그를
변화시킬 방법을 생각해 내고 실천하는 일일 겁니다. 물론 그 일이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신자 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vip 손님 옆에 사는 분이
그분 때문에 이사 갔다고 하더라고요. 또 다른 마을 분들도 그분을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제가 농사짓는 밭 옆에는 그런 분들이
두 분이나 계신데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그분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아마도 요셉과 같은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금세 되지는 않겠지만 요셉의 모범을 내 생활에
적용시켜 볼 수 있다면, 언젠가 그들의 다른 모습을 보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은 수녀님이 가르쳐준 방법대로 그분이 어지럽혀 놓은 것을 정리하고,
‘여기는 내가 쓰는 밭입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 아닙니다.’ 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거 같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새벽미사 나오는 분 중에 고깃집 주방장이 계시다.
한 형제님이 거기 가면 고기 많이 주냐고 물어보니까,
이런 대답을 하신다.
“제가 오너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대로는 못하고,
저울이 고장 나면 더 많이 드릴 수는 있죠~”
- 인천교구 대부성당 김기현 세레자 요한 밤송이 신부 -
◈ [수원] 그 뜻을 이루고(마태 21, 33-46. 03.06.)
그 뜻을 이루고(마태 21, 33-46. 03.06.)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17ㄹ-28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3-43.45-46
요셉의 형제들은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하며 아빠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요셉을 없애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기 질투에도 그들은 요셉에게 절을 하게 되고, 요셉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요셉의 꿈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소작인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우상숭배나 탐욕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당신의 뜻을 전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는 거짓
예언자들의 달콤한 말을 따르며 안도를 합니다.
하느님은 “내 아들 예수야 존중해주겠지.” 하시며 외아드님을 보내주셨지만
그 분도 십자가에 처형해 죽여 버립니다.
그들이 그토록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은 온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리고 교회의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 곳곳에 성인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아씨씨의 프란치스꼬, 십자가의 성 요한, 오상의 비오,
요한 보스꼬.....
그러나 모든 성인들은 모진 박해를 받으며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삶과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이 세상에 밝히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윤리 기준이 무너지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성사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심을 믿지 않고, 주일을 성스럽게 보내지 않는
세상에 어머니 마리아를 파견하십니다. “나의 어머니 마리아야
알아보겠지.” 하시며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시현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으며, 성모님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받아들여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에 뿌려지고, 반듯이 그 뜻을 이루고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아멘.
- 수원 교구 죽전1동 하늘의 문 성당 윤민재 베드로 희망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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