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배회하다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지그문트 프로히트는 정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잠재의식, 즉 무의식을 대단히 중시했다. 무의식은 평소에는 자아의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식이 그 통제의 벽을 뚫고 마음껏 활동하는 대표적인 증후를 그는 꿈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러한 잠재의식의 원동력을 ‘리비도’라고 명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적 에너지이다. 모든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바로 이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도 한다. 성장기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모두 이 성적 에너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유아기의 사내아이에게서는 ‘오이디프스 콤플렉스’, 그리고 유아기의 여자아이에게서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증후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들은 성적 에너지인 리비도에 의해서 성장 통을 겪으며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2013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압델라티프 케시시의〈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는 고등학교 여학생인 아델이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있는 엠마를 만나면서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극복하고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나는 퀴어 영화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델은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직관적인 성적 에너지의 정체를 모른 채 무료한 나날을 보낸다.
문학 수업 시간에 교사는 아이들에게 프랑스 극작가 마리보의 소설인〈마리안의 일생〉을 돌아가며 읽힌 뒤 여성의 감성과 직관에 대한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의견을 묻는다. 이러한 문학 수업 시간의 장면은 이 영화에서 아델(아델 에사초풀로스 분)과 엠마(레아 새이두 분)의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일종의 복선이다. 마리보의 소설은 여성의 감성과 직관에 관해 집요하게 탐구한 일종의 감수성 소설이다. 어느 날 아델은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과 어느 여자와 섹스 장면이다. 그러다가 아델은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근대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중시했다. 그는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바로 무의식이라고 규정했는데, 그러한 무의식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 마로 ‘성적 에너지’라고 했다. 이 영화에서의 문학 수업 장면과 아델의 꿈속에서의 사랑의 행위는 감성과 직관에 의한 아델의 사랑 방식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아델은 고등학교 3학년인 남자 선배와 성교를 하고 나지만 흡족함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다.
그러다가 그녀는 클라스메이트 남학생과 우연하게 게이 바에 들렸다가 엠마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엠마는 파란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상영 때의 영화제목이〈Blue is the warmest color>였는데, 이는 바로 엠마의 파란 머리와 파란 눈을 상징하고 있다. 즉, 엠마와의 사랑을 통해 성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고 여인으로 거듭나는 아델의 이야기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파란 색이 가장 따뜻한 색이라는 것은 엠마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엠마의 이지적이고 감성적인 사랑의 영향으로 아델이 성숙한 여인으로 변화해 나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랑의 본질은 진정성이다
이 영화에는 거의 위험수위에 가까운 아델과 엠마의 격렬한 사랑 행위가 나온다. 공원에서의 만남 이후, 엠마와 아델 집에서의 저녁 초대 이후, 그리고 두 사람의 동거를 통해 격렬한 사랑 행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여느 멜로드라마나 통속적인 영화속에 나오는 격렬한 사랑행위와는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성이 아닌 동성의 사랑행위인 데에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교성이 가득한 성교인 데에도 추함이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것은 두 사람의 사랑행위가 동물적인 본능으로서의 사랑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인격의 연대감에서 비롯되는 사랑의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엠마는 아델에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이야기하고,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아델의 지적인 교양을 고양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엠마는 아델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성장의 견인차가 되는 것은 물론, 육체적 관계를 통해 도덕적 관념으로 상징되는 자아의 통제에 의해 억눌려 있던 무의식 속의 리비도를 해방시켜 주는 역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파탄이 밀어닥친다. 그림 전시회 때문에 바쁜 엠마와의 소원함으로 외로움을 타던 아델은 유치원 동료교사와 관계를 가지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엠마는 아델을 창녀라고 격렬한 핀잔과 모욕감을 안겨주며 절교를 선언하게 된다. 엠마의 분노는 두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한 진정성이 훼손을 입은 것에 대한 배신감이었지만, 아델에게 있어서 그것은 사랑에 대한 본능적 감성과 직관에 충실한 자연적인 감정의 표출이었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의 본질은 두 사람 사이의 진정성에 있음을 주장하는 엠마의 분노에는 일견 설득력이 있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카페에서 두 사람은 조우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도 아델의 본능적인 감성과 직관에 의한 사랑행위가 느닷없이 보여진다. 그러나 이미 훼손된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엠마의 신념의 벽은 넘지 못하게 된다.
아델의 본능적인 감성과 직관으로서의 사랑은 수차례 엠마에게 시도된다. 엠마의 전시회에 초대된 아델은 엠마의 파란 머리와 파란 눈을 닮은 옷을 입고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식어버린 엠마의 이지적인 사랑은 아델에게 다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미 성적으로 성숙하게 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 아델은 지금까지의 동성애적 사랑을 버리고 이성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완성할 임무를 띠고 있다. 그래서 엠마는 의도적으로 아델에게서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 말 없이 전시회장을 나와 길거리를 걸어가는 아델의 성숙한 뒷모습은 잃어버린 사랑 대신에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가는 의젓함이라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아델은 엠마와의 사랑으로 성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고 사랑의 진정성을 깨닫게 된다. 결국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아진 셈이다.
영화적 리듬의 탄력성에 대한 세심힌 연출력
튀니지 출신의 프랑스 감독인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감각적인 연출력은 3시간이라는 느슨한 러닝타임에 동적인 탄력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영화는 긴 러닝타임에 입체적이고 현란한 서사구조가 없는 내러티브이지만 한 치의 지루함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화면 연결의 세심한 순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델과 엠마를 연기한 두 여배우의 능숙하고 리얼한 연기의 앙상블 크게 힘입었기에 그럴 것이다.
신인 배우로 아델을 연기한 아델 에사초풀로스의 연기는 압권이다. 그녀의 감성과 직관으로서의 본능적인 사랑방식에 적합한 연기를 하기 위헤 세심한 연기 설계를 하고 있다. 두툼한 입술과 약간 벌어진 입술로 잠을 자는 모습, 음식에 대한 갈증과 사랑을 갈구하는 맹목적인 시선, 그리고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흐트러진 표정 연기 등은 그녀의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을 강화시키고 있다. 엠마를 연기한 레아 세이두의 묘한 눈빛과 웃음, 그리고 성 정체성의 혼란을 상징하는 중성적인 뒷모습의 발걸음은 동성애자의 보편적인 특성을 예리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칸국제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종려상 수상 작품이 웬 퀴어 영화인가 하고 의아해 할 관객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세심하고 감각적인 연출력에 힘입은 탄력적인 템포와 리듬, 그리고 두 여배우의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연기의 절묘한 타이밍으로 통속영화의 범속한 주제를 뛰어넘고 있다. 고등학교 문학 수업과 유치원 커리큘럼의 예술적 안목, 음악적 예술성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시위 현장 등의 에피소드는 경직된 우리 교육이 모범적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통속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예술적 안목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러한 예술적 교육정책의 산물이 이루어낸 하나의 산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이 거의 3시간에 가까울 정도로 길다. 그러면서도 관객들은 그러한 긴 서사를 지루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아마 여느 성애 영화처럼 오직 성적인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면 처음의 성적인 호기심을 넘어서서 지루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전혀 그런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이 영화가 성애를 다루고 있되 그 바탕에 인문학적인 철학이 도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델의 이야기〉는 상업적 흥미성과 예술적 안목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들이는 쾌거를 이룩하고 있다. 보다 예술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선호하는 칸 국제영화제가 성애 영화에 집중 조명했다는 것 자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의 예술성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명은 ‘블루는 가장 따뜻한 색’으로 번역이 된다. 여기서의 ‘블루’라는 색깔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눈 밝은 관객들은 금방 눈치 챌 것이다. 블루는 엠마의 머리 색깔이기도 하지만, 성적인방황을 하는 아델을 엠마의 영혼이 바르게 이끌어 진정한 성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는 심층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의 본질은 진정성에 있다는 것을, 진정성으로서의 사랑만이 인간을 성숙시키는 연금술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감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영화는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우리의 도덕관념에서 가치 평가할 경우에는 이성애 영화보다 폄하될 가능성이 크다. 이 작품은 동성애적 성애가 이성애적 성애보다 더 진정성이 있고 순수하게 보인다는 인식을 관객에게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보다 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댓글 인문학적 철학이 도도히 흐르는
영화 감상 평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끔 빈둥거리는 시간에 볼 좋은 영화를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믿음직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