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25)
인간의 희망에 대한 묵시록적 알레고리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스토커〉
김 문 홍
< 스토커 Stalker, 잠입자 / 러시아 / 1979년>
SF적 우화를 통한 암울한 현재의 은유
러시아의 세계적 감독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몇 편 되지 않지만 그 모두가 영화적 형식으로서의 엄격하고 정밀한 미장센, 그리고 그 주제의식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희망이라는 사변적인 철학이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는 하나의 예술품이다. 그는 2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영화 인생 동안 단 7편의 영화를 남기고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희생〉(1986)은 인간의 희망에 관한 이야기로 그의 모든 영화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중〈스토커〉(1979)는 1972년에 발표한〈솔라리스〉와 함께 SF적 상상력으로 빚은 묵시론적인 우화로 역시 세기말적인 암울한 영상언어로 인간의 희망을 은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러시아의 스투루카츠키 형제가 쓴 소설인〈길가의 소풍〉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소비에트 정부의 위선과 부조리를 우화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제목인 ‘스토커’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현실에서 희망조차 없는 사람들을 구역 안으로 데려오는 것을 마지막 희망으로 삼고 있는 사내이다. 어쩌면 그 희망조차 없는 사람은 작가와 물리학자 교수가 아니라 그 자신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영화의 메인 타이틀 시퀀스에서는 ‘구역’이 어떻게 설정되었는가에 대한 노벨상 수상자인 윌러스 교수와의 인터뷰가 자막 해설로 소개되고 있다. 20년 전에 이곳에 운석이 떨어져 폐허가 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바깥의 사람들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되돌아 나온 적이 없어, 당국에서는 경계선을 설정하고 출입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구역 설정의 경과 내용이 해설 자막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바깥 세계에서 희망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구역 안으로 안내하는 일을 하나의 성스러운 소명으로로 여기고 있는 ‘스토커’라는 한 사내의 내적 명상의 여로에 관한 철학적인 에세이에 가깝다. 이 영화는 화면의 톤이 특이한데 처음과 마지막의 구역 바깥의 현실은 암갈색의 세피아 톤이고, 구역 안에서의 험난한 여정은 칼라 톤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스토커라는 사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상은 묵시론적인 암울함으로 가득하다. 감독은 그런 희망 없는 세상을 세피아 톤의 암울한 빛깔로 은유하고 있다. 열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진동에 흔들리며 움직이는 탁자 위의 물잔, 항상 축축한 물기로 음습함을 더해 가는 마룻바닥, 흔들림이 없는 카메라는 우에서 좌로, 좌에서 우로 잠자고 있는 사내의 가족을 느릿하게 훑어 나가기 시작한다. 사내가 가족 몰래 살며시 일어나 옷을 입자 그의 아내가 절망과 체념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애원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사내가 구역에 들어가려는 것을 애써 만류하지만 사내는 ‘어딜 가나 나에게는 감옥이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한다. 이미 사내는 구역 안내의 형벌로 수형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의 바퀴 소리가 바닥에 쓰러져 통곡하는 아내의 울음을 짓누르며 지나간다. 스토커인 사내는 강변 옆의 허름한 카페에서 이미 창작의 영감이 소진된 작가와 암울한 세상에 넌덜머리를 느끼는 물리학자인 교수를 만난다. 현실의 세상과 구역의 경계선에서 그들은 무장 순찰 경관의 감시를 피해 몸을 숨긴다. 여기에서 작가의 푸념이 시작된다. 작가는 자신의 의식은 채식주의를 원하는데 무의식은 육식주의를 원한다, 자신이 세상의 모든 물건들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모든 것은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는 등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깥 세상에 대한 환멸의 감정을 쏟아 놓는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의 구역 바깥의 세상은 희망을 잃어버린 묵시론적인 암울함과 절망으로 은유되고 있다. 스토커인 사내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이 영화에서 표층적인 의미로는 사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스토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스토커는 그 자신을 위한 안내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안내하는 작가와 교수는 타인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그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가치관, 즉 작가로 상징되는 감성과 물리학자로 상징되는 이성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에서의 구역 안으로의 잠입은 스토커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자아의 여정으로 은유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작가, 물리학자와 함께 구역 밖으로 나왔을 때의 바깥 세상의 변화를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앤딩 시퀀스에서 사내의 딸아이가 초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딸아이가 매서운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인 물잔들을 응시하자 그것들이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은 세피아 톤의 암울함 빛깔이지만 딸아이의 모습만 칼라로 비치는 것은 암울함 속으로 스며드는 희망이라는 한 줄기 빛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역 안으로의 잠입은 스토커 자신을 위한 내적인 자아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내의 아내가 잠든 남편을 바라보며 푸념하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내는 침대 위에 허탈하게 누운 채 절망적인 독백을 늘어놓는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와 교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만을 믿으며, 목적을 위한 삶과 소망만을 믿는다고 절망하는가 하면, 아무도 그곳을 믿지 않는데 누구를 데려간단 말이냐며 울부짖는다. 그의 아내가 나를 데려가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자 그는 안 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당신도 안 되면 그 땐 어쩌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아내는 그는 스토커이며 영원한 죄수라고 푸념한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본다면 사내의 스토커는 타인을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암울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찾기 위한 그 자신 속의 처절한 내적 자아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강인한 것은 결코 승리할 수 없는 희망의 이상향
이 영화 속에서 스토커에 의해 안내된 구역 안은 강인한 것은 결코 승리할 수 없는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상향으로 은유되고 있다. 스토커는 구역 안의 물건들을 함부로 건드리는 작가에게 경고하는데, 여기에서 구역의 본질적 속성이 드러난다. 스토커는 구역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며 작가가 가지고 온 술병을 술을 버린다. 그러면서 그는 구역의 본질에 대해 설명한다. 구역은 복잡한 체계를 지닌 곳으로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구역 스스로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외부인 바깥 세상에서 구역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면 구역이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역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 독백의 형식으로 읊조리기 시작한다. 연약함은 위대하다, 우리들을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게 해달라, 열정은 아무 것도 아니며 강간한 것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연약한 나무는 가지와 잎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나무가 자라 강해지고 뻣뻣해지면 죽는다, 여기서는 직선으로는 갈 수 없으며 돌아서 가야 된다는 등의 말을 늘어놓는다. 이는 어쩌면 타르코프스키가 영화적 작업에 제약을 받던 당시 소비에트 정부의 위선과 부조리를 우화적으로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는 풀밭에 몸을 접촉하며 평화와 안식을 찾는 듯 나른한 잠속에 빠진다.
여기서 스토커의 환상이 펼쳐진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화면이 칼라에서 암울한 세피아 톤으로 바뀌며 묵시론적인 세기말의 암울한 공포가 펼쳐진다. 카메라는 팬 다운되면서 물속에 가라앉은 문명의 잔해들을 차레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제비뽑기에서 걸린 작가가 앞장을 서서 걸아가다 그들은 작은 모래 언덕이 있는 방에 도착한다. 작가는 여기에서 바깥 세상에 대한 환멸로서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뱉어놓은 영혼(작품)을 씹어먹는 편집인, 언론인, 비평가들에 대한 공격, 자신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글을 썼는데 정작 그들은 변하지 않고 자신이 변화한다는 역설 등을 통해 구역 바깥 세상의 절망적인 상황을 늘어놓으며 비판한다.
물리학자의 구역 파괴 행위로 이 영화는 절정에 이른다. 물리학자는 이 구역은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못하므로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킬로톤의 폭탄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그의 지론은 이 구역이 만약 나쁜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무력을 동원해 엄중하게 감시하는 것은 이 구역이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에 대한 그들의 공포와 불안에서 비롯된 행동이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커는 그래도 이 구역은 바깥 세상의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유일한 곳이므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스토커는 인간이 가진 것은 희망밖에 없고 이것이 없으면 희망이 없어져 버려, 그 자신이 희망조차 없는 사람들을 이 구역에 데려올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들은 결국 구역 안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지만 현실은 여전히 세피아 톤의 암울한 절망의 빛으로 늘 축축하게 젖어 있을 뿐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스토커〉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묵시론적인 세계의 절망을 통해 희망과 믿음을 이야기하는 역설적인 영화이다. 그의 영화는 늘 암울하고 축축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근원에 다가가 보면 한줄기 희망과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 역시 그의 다른 영화들처럼 물과 불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물과 불이 절망과 암울함을 정화시켜 희망에 이르게 한다는 통과의레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다. 이 영화는 처음에 일 년 동안 코닥 필름으로 촬영했는데 나중에 보니 필름이 현상되지 않아 다시 처음부터 촬영했다는 제작 후기가 있는데, 이는 영화 속의 스토커처럼 희망을 찾기 위한 고통과 절망의 험난한 내적 자아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어쩌면 그러한 사건은 말년에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로 망명한 그의 영화 인생을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댓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납니다.
이 글을 읽으니 한 편의 영화를 다 본 것 같아요.
그만큼 명쾌하고 철학적 사유를 유도하며 분석적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