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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3월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수도회] 성사적 수용으로 하느님 뜻을 따른 요셉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2사무 7,4-5ㄴ.12-14ㄱ.16
† 제2독서 로마 4,13.16-18.22
† 복음 마태 1,16.18-21.24ㄱ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했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이기도 한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성모님과 함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충실한 도구로
선택되어 성가정을 돌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셨던 요셉 성인께서 오늘도 교회를 위하여 전구하여 주시기를
청하며 이 대축일 미사를 봉헌합시다.
★ 다윗이 임금이 된 뒤에는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집안과 그 왕좌가 영원히 굳건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마태 1,1)
께서는 구약에서 약속된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약속이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어,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되었다(제2독서).
★ 다윗 왕조가 무너졌어도 하느님의 약속은 유효하다. 요셉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합니다.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시편 89,29). 그러나 이 시편은 다윗 왕조의 붕괴를 배경으로
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후손을 약속하셨는데, 왕조가
무너지고 말았다면 하느님의 영원하신 자애는 어떻게 되는가? 하느님의
약속은 깨지고 말 것인가?’ 이것이 이 시편의 주제입니다.
믿는 모든 이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게 되면 하느님의
약속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았지만, 이렇게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했습니다(로마 4,18 참조). 시편 89편 또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다윗 왕조가 무너져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실낱같은 왕정복고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왕정 붕괴로 깨어질
수 없기에 하느님의 자애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자애가 보존될
수 있을지는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신약에 이르러 그 약속은 실현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약속이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선언합니다(로마 4,16 참조).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간의 믿음, 곧 약속을 믿었던 의인 요셉은 그 약속된
후손이 태어날 수 있도록 말없이 협력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어 의인으로 인정받고 믿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었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마리아와 그 모태의 아기를 받아들인 요셉 성인은
우리 모두의 보호자가 됩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사적 수용으로 하느님 뜻을 따른 요셉
2015년 나해 3월19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마태1,16.18-21.24ㄱ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대로 하였다.”(마태 1,24)
성사적 수용으로 하느님 뜻을 따른 요셉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무게로 다가온다. 특히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과 사람을 만날 때 당혹스러움과 혼란, 분노를 체험하곤 한다.
그런 일로 인생이 꼬여버리기도 한다. 한편 사회의 세포인 가정들도
제모습을 잃어가는 듯하다. 성 요셉은 그 매듭을 푸는 법을 가르쳐준다.
예수님께서는 양아버지 요셉을 통하여 법적인 다윗의 후손(마태 15,23)이
되었고 메시아로 불릴 수 있었다(마태 22,42).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 전에 그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음을 알게
된다(마태1,18).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그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파혼하기로 작정한다(1,19).
성경에서 의인이란 신심 깊은 사람,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사람,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을 뜻한다. 의로운 요셉은
자신이 겪게 될 난처한 상황과 고통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약혼녀의 부정행위는 간음으로
여겨져 돌로 쳐 죽이든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신명 22,23-24).
요셉은 율법을 뛰어넘어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생명이 인간에 의해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아 파혼을 생각한 것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한
인간으로서 관계 안에서 발생한 당혹감, 배신감, 분노, 수치심, 고통을
받아들여 대신 지는 일이었다. 그의 파혼 작정은 관계 단절이 아니라
율법의 문자를 넘어 ‘성사적 관계 수용’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셉이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잉태한 아이가 백성을 구원해주실
메시아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23) 하는 말을 꿈에서 듣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님의
양부가 되었고, 나아가 우리 모두의 어버이가 되었다. 그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마리아의 생명을 지켜주었고, 구원의 길을 가야하는 마리아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 침묵 가운데 받아들였다. 그의 이
거룩한 수용을 통해 세상 구원의 길이 열렸다.
한편 요셉은 훌륭한 가장이자 예수님의 아버지였다
(마태 13,55; 루카 3,23; 요한 1,45). 그는 마리아와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고, 생계유지를 위하여 몸소 목수 일을 했으며, 예측불허의
어려운 상황에서 가정을 안전하게 꾸려나갔다. 요셉은 예수의 이름을
짓고(마태 1,21. 25) 아들에게 할례를 시키며(루카 2,21), 성전 정화 예식
때 참석한다(루카 2,22). 그는 이렇듯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마리아와
예수를 보호하고 받아들이고 동반하였다. 사회나 교회도 한 가정에 비유할
수 있다면 사회 안정과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요셉과 같은 의로운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충성스런 종이며, 훌륭한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는 참으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슬기로운 관리인이다. 무책임, 책임전가, 책임회피 등이
이 시대의 슬픈 특징이 되고 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의 구세사 안에서의
역할에 온전히 충실하였다. 책임은 응답할(respons) 능력(ability)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하느님의 청지기요, 관리인이라는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께 책임 있는 응답을 하며 살아갔으면 한다.
주님, 저희도 다가오는 고통과 분노, 배신, 당혹스러움, 슬픔과 같은 온갖
어려움을 성 요셉처럼 묵묵히 받아들이게 하소서. 일상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이 곧 하느님의 의를 드러내는 길이며 구원으로 가는 길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생명이 숨 쉬는 순간마다 모든 일과 만남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들의 수용과, 이해 불가의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가장 중요시하며 따르는 거룩한 순종이 나날의 리듬이 되게 하소서. 또한
요셉이 보여준 하느님 앞에서의 충실함과 성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
있고 헌신적인 태도를 본받게 해주소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는
안내자요 그런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말없는 도전자인 성 요셉을 따라
당신과 더 깊이 일치하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생각하는 대로 된다.
2015년 나해 3월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저는 아침마다 E-Mail을 확인합니다. 주로 쓸데없는 광고성 메일만이 가득
메우고 있어서 짜증을 내면서 삭제 버튼을 누를 때가 많습니다. 반가운
소식이 담긴 메일은 거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메일 확인을 안 할
때가 종종 생기더군요. 중요한 메일은 거의 없으니 하루쯤 메일을 확인하지
않는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의 제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대로 ‘오늘은 내게 도움이 되는 메일이 있어.’라는 생각을 먼저 하고
메일함을 열어 보았지요.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제게 도움이 되는
메일뿐이 아니라, 옛 지인으로부터 온 메일, 반가운 소식이 담긴 메일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은 늘 긍정적인 일만 생긴다고
하지요.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정적인 일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느냐가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수녀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녀님께서 어느
학교에서 보건 교육을 하다가 겪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응급처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친구와 산에 함께
갔는데 한 친구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몇몇 아이들이 “그냥
내버려둬요.”라고 말하고, 심지어 “죽여요.”라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답니다.
물론 튀어보려고 이렇게 극단적인 말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곧바로 나온
이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군요. 컴퓨터 게임의 영향입니다.
컴퓨터 게임에서 약자는 버려도 되는 존재, 때로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
죽일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는 사랑이 아닌, 입으로만 외치는 공허한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부터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요셉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배필 마리아의 임신한 사실을 알았을 때, 충분히 질투와 미움의 감정을
가질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재판에 넘겨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율법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마음먹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전해주신 사랑의 법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게 되어 사랑의 법을 따름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마리아를
아내를 맞이하게 됩니다.
앞서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셉 성인은 인간의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했기에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었고, 하느님의
양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생각하는 대로 된다는 큰 명제를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법인 사랑을 늘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함께 웃어줄 것이다.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 울 것이다.(엘라 휄러 월콕스)
예수님과 요셉성인.
감사하기.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가장 좋은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하기’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때 갖게 되는 내 마음을 보십시오. 좋은
감정이 있었을까요? 그보다는 부정적이고 나쁜 감정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부정적인 생각들이 또 다른 부정적인 생각들을 끌고
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하기는 솔직히 쉬운 행동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다보면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마음도 자리 잡게 됩니다.
저는 새벽에 남들보다 일찍 일어납니다. 남들은 어떻게 새벽에 잘 일어
나냐고, 혹시 할아버지 할머니들처럼 새벽잠이 없느냐고 하지요. 그러나
저는 누구보다도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데요. 그리고 5분만 더 자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아서 이불 속에서 얼마나 꼼지락 거렸는지 모릅니다.
이랬던 제가 새벽에 벌떡 일어날 수 있었던 비결은 일어나자마자 성호를
긋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나서입니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도의 큰 힘을 알기에 잠 잘 때에도 성호를 긋고 “오늘 하루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눕자마자 곧바로 코를 골고 잠 속에 빠집니다.
감사할 일들을 찾아보세요.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변화시켜주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더라고요.
예수님과 성모님 앞에서 돌아가신 요셉성인. 그래서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하지요.
◈ [수도회] 2015.03.1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 4,18)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앞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고 온통 절망 뿐입니다.
이제 다 내려놓고 그냥 스러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안보입니다.
누구 이야기냐구요?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의 이야기이고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에 대해 경탄하며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요셉에 대해서도 똑같이 경탄하며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요?"
나와 평생을 행복하게 함께 하겠다고 언약한 그 아리따운 나의 약혼자가
남의 아이를 베어 왔는데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아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나요?
절망의 늪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희망의 꽃을 어떻게 보셨나요?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사랑의 사람이
됦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 희망, 사랑은 함께 갑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음으로써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의 선물을 주는 자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조 아브라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믿음 안에 의로운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마태1,16.18-21.24)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믿음안에 의로운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
“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위대한 '배경의 사람' 성요셉 -성 요셉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19일 목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사무7,4-5ㄴ.12-14ㄱ.18 로마4,13.16-18.22 마태1,16.18-21ㄱ
2015년 나해 3월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위대한 '배경의 사람' 성요셉 -성 요셉 예찬-
오늘은 우리 요셉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작년 3.25일부터 시작된 안식년을 2015.2.28일로 끝내고 귀원하여,
3.1일 요셉 성월 첫날부터 미사 주례로 새롭게 시작된 모원(母院)에서의
수도생활 중 맞이하는 대축일이기에 감회가 깊습니다.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이렇게 긴 타이틀이 붙는 성인은 없습니다.
내 산티아고 순례 때, 순례자 증서에 무수히 찍혀 있던 스탬프들이
훈장처럼 보였는데 이 긴 타이틀이 마치 요셉성인에 붙은 훈장처럼
보입니다. 정말 자기비움의 '겸손의 대가', 위대한 '배경의 사람',
'하느님의 선물' 요셉 성인입니다.
'보일 듯 말 듯/있는 듯 없는 듯
뒤로 물러나/바라보고 지켜보는
그윽한 불암산 배경이 되어/살고 싶네.‘
얼마전 써놓고 자족한 자작시입니다.
말그대로 요셉수도원의 위대한 배경인 불암산같은 성 요셉입니다.
어제의 신선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전베드로 형제가 피정을 끝내고
귀가하는 연벨라뎃다 어머니와 전수산나 누나를 모시러 왔습니다.
소방대원으로 근무하는 아주 신심깊은 성실한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빈 손으로 와서 미안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란 책을 나에게 선물 받으며 미안해 어쩔줄 모르며
한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전베드로 형제 자체가 참 좋은 선물인데 무슨 선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진정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빈
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성 요셉은 말 그대로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들로 가득한 세상이요
이에 대한 저절로의 응답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오늘 강론은 위대한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한 탐구입니다.
첫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사랑입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기도하는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기도에 대한 내 지론입니다.
바로 위대한 기도의 모범이 성 요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침묵의 밤, 꿈중에 주님과 대화하는 요셉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든 것이 바로 기도요 주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한 침묵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요셉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신뢰했던 요셉에게 당신의
천사를 통해 속내를 고스란히 털어 놓은 하느님이요
침묵 중에 깊이 듣고 받아들이는 성 요셉입니다. 평소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넓고 깊은 내면을 지닌 큰 그릇 같은 요셉이었기에
주님의 천사의 말씀을 깊이 경청했음을 봅니다.
둘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침묵의 기도 중에 주님 천사의 말씀을 깊이 경청한 요셉의 신속한 순종이
감동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짦은 구절이 아주 통쾌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실천의 순종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요셉의 믿음의 순종에 깊이 감동하셨을 것이며, 그의 순종이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람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부단한 순종을 통해 자기비움의 겸손에 도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연상케하는 요셉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 이것이 믿음의 진수입니다. 보이는 희망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희망하는 것이 진정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요셉의 믿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1독서의 나탄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다윗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
요셉에게도 그대로 적용됨을 깨닫습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 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요셉의 양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고스란히
실현되고 있는 나탄의 예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배경의 사람'이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요셉수도원의
배경인 불암산과, 불암산의 배경인 하늘입니다.
'하늘과 산'이라는 오래 전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하늘이 있어/산이 좋고, 산이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신 하느님을 배경했기에 성가정의 넉넉하고 든든한 불암산 같은
배경이 되어 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품에 안았던 성 요셉입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에서도
위대한 배경의 사람, 요셉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를 위한 성 요셉의 섬세한 배려가 눈물 겹도록 감동입니다. 그대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을 닮은 의로운 사람, 배경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날로 추락해 가는,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날로 줄어가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성 요셉 같은 아버지들이, 어른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아버지 상(像)이 없다' '어른 상(像)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부터 성 요셉 같은 아버지가, 어른이, 신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끝으로 불암산같은 배경의 성인 요셉에게 드리는 오래 전 나의 자작
헌시(獻詩)를 나눕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사랑만으로
행복할 수는 없을까
하느님의 산, 불암산(佛巖山)처럼,
성 요셉처럼!'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015년 나해 3월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
성인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 성인에게
배필로 마리아를 소개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중매를 하였습니다.
중매는 잘하면 쌀이 서말이요, 잘못하면 뺨을 맞는다고 합니다. 성서에
말하는 대로 마리아는 요셉과 혼인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음이
드러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뺨을 맞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그렇게만 살아도 존경받을 사람입니다.
거짓과 욕망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겨서는 잠을 못 이루는
세상입니다. 무한 경쟁의 세상입니다. 재물을 위해서는 영혼까지도 팔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사는 것입니다. 어두운 바닷가에 등대처럼 사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의롭게 살지는 못하였습니다. 법대로 살기에도 벅찬 세상입니다.
뺨을 맞을 처지에 있던 가브리엘 천사는 요셉에게 또 다른 말을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뜻’이니 받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롭게
살던 요셉 성인은 깊은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에게 ‘시련은 있어도 절망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 이집트로
보낸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욥은 재물, 건강,
자녀들을 잃어버린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요셉성인은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만 살아도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운전을 한다면 준법운전은
물론 안전운전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비록 자존심이 상하고, 이해 할 수 없을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서에서 요셉
성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분께 사랑을 드리고, 그분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신분으로 살았는지, 어떤 피부색으로 살았는지,
어떤 성별로 살았는지, 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살았는지 일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들은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마음이 온유한 자 땅을 차지한다.
2015년 나해 3월19일 요셉 대축일
<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복음: 마태오 1,16.18-21.24ㄱ
< 마음이 온유한 자 땅을 차지한다 >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영화 제목 중에 ‘정의의 심판자’나 ‘응징자’ 등이 등장합니다. 죄를 짓고도
법으로는 싹싹 빠져나가는 나쁜 인간들을 총을 들고 직접 나서서 참
정의를 세운다는 내용들입니다.
사실 정의로움은 죄를 지으면 합당한 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의 요셉은 절대 법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었고 의로운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법대로 했다면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임신하였기에 그 배신한 여자를 돌로 쳐 죽여야 정의로운 것입니다.
약혼까지 해 놓고 자신을 버젓이 배신한 여자를 감싸주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요?
성경에서 정의롭다는 말은 구원과 연관됩니다. “의롭게 되어 돌아갔다”
라고 말한다면 “구원받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나왔는데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세리라고 합니다. 바리사이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정의롭지 않았고, 세리는 죄만 지었지만
정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단어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을 정확히 알아야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15장에 미르얌과 아론이 모세에게 대항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결혼도 했던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인과 또 결혼하였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인이라면 아마도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함께 데리고 나온
흑인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흑인인 노예와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스캔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백정 딸과 결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라 욕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심판은 다릅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비판한 미르얌과
아론을 꾸짖으시고 미르얌에게는 악성 피부병이 걸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주님께 “하느님, 제발 미르얌을 고쳐 주십시오.”하며
간청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모세의 청을 들어주시어 이레 동안 진영
밖에 격리하게 하신 다음 그를 다시 고쳐주셨습니다. 정의롭다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데 모세는 그녀를 위해 용서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졌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정의로움이라 생각한다면 모세가
아니라 미르얌이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미르얌의
질책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모세가 아닌 질책하는 미르얌을
심판하십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
여기에서 ‘겸손(프라우스)’이라는 단어는 “마음이 ‘온유한’ 자는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온유’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말이 이 사건 중간에 나오는 이유는 ‘겸손이나 온유함’을
지닌 사람이 참으로 ‘의로운’ 사람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닌 온유한 사람이 진정 정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와서 배워라.”라고 하실 때, 당신은 또한 의로우신 분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겸손하고 온유하셨던가요? 이스라엘 사람에게
써서는 안 되는 ‘독사의 자식들’이란 욕을 하시고, 가장 거룩한 자세로
있어야 하는 성전에서 폭력을 쓰시며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화가 나셔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함은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화를 내지 않는 성격과 같은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모세 또한 사실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온유했다면 자신의
동족을 죽이는 이집트 사람을 살해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십계명판을
들고 내려오다가 금송아지를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판을 내던져 깨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모세를 그릴 때
뿔이 난 사람으로 그리겠습니까?
참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겸손)나 정의로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덕은 마치 ‘멍에를 맨 소처럼’ 그 주인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덕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자와 혼인을 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혼인하였다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아버지의 뜻만을 따라 아버지를
드러내신 것처럼, 온유란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 자리를 알아 그분 멍에를 매고 그분이 부리는 대로 움직이는
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종이라 하시며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청한 성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르얌이 모세를 판단할 때는 모세가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의해 행동하는
것을 믿지 않고 자기식대로 하느님의 위치에 서서 모세를 심판한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이 되어 모세를 심판했으니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누구라도 온유하지 못하고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소가 소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 판단은 오로지 주인에게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이 마리아를 판단했다면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의롭지 못함 때문에 구원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가 돌에 맞았다면 어찌 될 것이며 또 어떻게 아기를 혼자 낳고 또
어떻게 이집트로 피신하여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은 자신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임을 잘 알았습니다. 이런 온유한 사람을 마리아와
혼인시키신 것입니다. 정의롭게 판단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여자가 임신하여서 돌아왔어도 그 여인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의로움입니다.
예수님은 가리옷 유다를 함께 데리고 다니면서도 다른 사도들이 그가
배신할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그를 끝까지 감싸주셨습니다. 당신께서도
심판을 유보하신 것입니다. 당신은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러 오신
분임을 잘 아셨습니다. 당신의 위치가 바로 하늘이 아닌 땅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땅처럼 당신을 낮추시니 당신의 신부인 교회의 참 신랑인
새 하늘이 되신 것입니다. 새 땅의 주인인 새 하늘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이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심판자가 아닌 땅과 같아서 심판을
유보하고 조용히 마리아를 보내주기로 마음먹었기에 땅인 마리아를 참
신부로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이가 땅을 차지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땅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땅은 영영
그분의 소유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 처지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죽은 땅이었음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의롭고
온유한 요셉처럼 낮은 마음으로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돌려드립시다.
그러다보면 하느님의 섭리가 나를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모세는
온유하기에 성가정의 가장으로 뽑혔던 사람입니다. 요셉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의 온유하고 겸손하여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라는 의로움을
본받는 것입니다. 땅은 나의 신부입니다. 땅인 나의 신부를 차지하는
방법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를 잊지 않고 오직 주님의 멍에만 매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침묵이라는 금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2015년 나해 3월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침묵이라는 금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조건부로 연애 사랑 결혼 출산 돌봄의 진행이 만연한 세상! 안타깝습니다.
조건부 대인관계라는 오염에 물들어 모두가 조건 채우느라 고생들 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의 흐름 속에 자란 사람은 모든 걸 말없이 사랑할 텐데.
말없는 사랑을 익힌 사람은 침묵이란 금으로 온 몸 가꾼 사람일 겁니다.
용기 없어 말 못하는 침묵과는 거리가 먼 요셉성인을 생각하며 느낍니다.
하늘이 원하는 사람은 침묵이라는 금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란 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태오 1,1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전구자 성 요셉
2015년 나해 3월19일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7,4-5ㄴ.12-14ㄱ.16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22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성 요셉 대축일(2015년 03월 19일) 전구자 성 요셉
요셉 성인은 생각하면 우리 수도원의 주광남 보나벤뚜라 수사님이
떠오릅니다. 수사님은 독일인이신데 1959년에 한국에 선교 파견되어
지금까지 우리와 살고 계십니다. 파킨슨 병 때문에 걷는데 불편하십니다.
그래도 묵묵히 기쁘게 살고 계시지요. 2007년 수도원에 큰 불이 난 후
수도원 재건을 위해 우리는 많은 고민과 걱정을 했습니다. 그 엄청난
건축비 때문이었지요. 화재 직후부터 보나벤뚜라 수사님은 당신 사무실
한쪽에 모신 요셉 성인께 기도하셨습니다. 목수 출신 요셉 성인은 건축의
주보성인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전구 기도와 더불어 수사님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요셉 성인의 어깨에
무거운 벽돌 조각을 매달았습니다. 그 벽돌은 우리 수도원 건축에 쓸
건축자재를 상징했지요. 아기 예수님도 무거운데 벽돌까지 짊어지신 요셉
성인은 건축이 끝날 때까지 거의 3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보나벤뚜라 수사님은 요셉 성인의 고생을 약간
덜어주기 위하여 대축일이 되면 벽돌을 그 어깨에서 내려놓았습니다.
대축일만이라도 요셉 성인이 쉬시라는 배려였지요. 수사님의 기도와 요셉
성인의 도움 덕분에 2009년 8월 30일에 새 성당과 수도원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감사드립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분이십니다. 이 의로움은 가장 힘들고 약한 사람을
도울 때 드러납니다. 가장 연약한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를 힘을 다해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임종 중에 있는 이들에게 보호자로 일을
하고 계십니다. 힘드십니까? 그러면 요셉 성인께 기도하세요. 예수님의
양부이시기에 우리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아드님 예수님을 보호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울타리가 되어주십니다
- 성 베테딕도 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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