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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수도회] 주님 오심의 신비와 신앙의 결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이사 7,10-14; 8,10ㄷ
† 제2독서 히브 10,4-10
† 복음 루카 1,26-3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도록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응답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성모님의 응답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응답으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 전쟁의 위험 속에서 하느님을 믿기 어려워하는 아하즈에게, 이사야는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한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그 아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 주는 표징이다(제1독서).
★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따른
번제물과 속죄 제물이 아니라 당신의 그 몸을 제물로 바치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제2독서).
★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리아의 응답으로 말씀의
강생이 이루어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의 말씀 전례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고
자신을 송두리째 봉헌한 분들을 만납니다. 영원하신 말씀께서 사람이
되기를 받아들이신 응답은, 하느님이 아닌 우리에게는 이해도 상상도
불가능한 응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시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은 그
내어 줌의 연장이며 완성이었습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를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응답 또한, 한순간에 끝나는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처녀로서 잉태하여 겪게 될 위험은 생명을 내어놓는
것 이상이었고, 설령 그 죽음을 피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서는 당신의 삶을 모두 바쳐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리라는 전갈을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각오해야만 하셨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 우리 구원을 위하여 이런 응답들이
필요했습니다.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이런 응답들을 원하셨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내 뜻대로나 나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내 삶을 송두리째 드리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의 구원이고 인간이 자기 자유를 최고로 발휘하여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주님의 뜻을 “즐겨” 이룬다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화답송 후렴).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주님 오심의 신비와 신앙의 결단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수 루카 1,26-38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루카 1,31)
주님 오심의 신비와 신앙의 결단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듯한 나날의 시간들은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난제를 풀어주기도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은총이자 또 다른 도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의미의 하느님을 만나고 은총을 체험하며, 행실을 통해 하느님을
낳는 창조의 터로 초대받는다. 주님 탄생 예고 축일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구세주를 잉태하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것을
기념하는 날로서 나 자신이 또 다른 어머니가 되도록 촉구 받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에 관한 복음 말씀에는 깊은 신비들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그를 믿는 이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요한3,16) 주님 탄생 예고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필리 2,7) 자신 전부를 건네주시는 그 무한한 하느님
사랑의 오심의 신비를 알려준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주님 탄생을 알려주시면서 그녀의 협조를 요청하신다.
마리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통보를 받고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라고 말하며 깊은 믿음과 강한 사랑으로 순응한다. 말씀에
대한 순응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육화를 가져왔다. 생명의 탄생은 불신,
교만, 이기심, 야심, 독단과 편견이 사라질 때에야 이루어진다.
주님 탄생 예고의 신비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복되신 마리아가
겪으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탄생의 신비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과 생명의 오심을
마리아처럼 늘 믿고 행동해야 한다. 태어날 아기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1,32)이라는 천사의 예고와는
달리 끔찍한 수난을 겪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것을 침묵 가운데
받아들이셨다. 이것이 바로 탄생 예고가 가져다주는 이해불가의 신비를
사는 태도다.
복되신 마리아는 아버지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순응하셨다. 성모께서
주님의 부르심에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라고 응답하신 것은 엄청난 신앙의 결단이다. 성모님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인내하면서 비우고 채우며 받아들이는 결단을 보여주셨다.
성모님은 그 말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에서의 첫
시련, 헤로데의 박해로 인한 이집트로 피난, 나자렛 성가정의 가난한
생활, 골고타에서 아드님의 십자가상 끔찍한 죽음의 목격 등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묵묵히 겪어내셨다. 마리아께서는 아드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늘 확고한 믿음 안에 머무셨으며 항구한
사랑을 잃지 않으셨다. 성모님의 이 “예”에 대한 사랑의 책임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걸어갈 가장 우리다운 길임이 틀림없다.
어떻게 주님을 낳을 수 있을까? 주님을 낳는다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사랑의 존재, 선을 뿜어내는 존재가 되어 세상이 하늘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태1,18) 육의 경향에서 벗어나 주님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낳을 수 없다. 내 삶에서 하느님을 잉태하고 낳으려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도록 해야 하며, 세상의 사건의 의미를 하느님의
눈으로 보며 찾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온갖 고통과 시련,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한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처럼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주님을 보시고 다님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되고,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주님을 낳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2신자 편지 53절)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주님 안에서 즐기시는 성모님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8,10ㄷ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4-10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전부터 알고 지냈던 청년들이 인사차 찾아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것이라 무척이나 반가웠고, 저희들은 식사를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한 청년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지금 안식년인데 뭐 하고 지내세요?”
“공부도 하고, 또 책도 읽으면서 보내고 있지.”
저의 대답을 들은 한 친구가 “그렇게 지내면 지루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곧바로 “지루하긴. 나는 하루 종일 방에 앉아 책보고
또 글 쓸 때가 제일 즐거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들은 말.
“신부님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에요.”
정말로 제가 이상한 사람일까요? 사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저 같은
사람을 보면 제가 직접 이 청년의 말을 했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어 이제는 즐기는 단계까지 온 것 같습니다.
논어의 ‘옹야’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무엇을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무엇을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도 있지요.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자신의 자리에서 즐기며 할 수 있는 사람은 기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왜 일까요? ‘할 수 없다.’, ‘절대로 안 된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해?’ 등등의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나타나
주님 탄생을 알려 주시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사실 가브리엘 천사의
주님 탄생 예고 소식은 성모님께 그리 기쁜 소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미혼의 몸이었거든요. 당시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공개재판에 넘겨서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절대로 반가운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안 된다.’, ‘할 수 없다’ 등의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즐기시는 성모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만큼 주님과 함께
하려 했고, 주님의 뜻을 간직하셨기 때문에 이런 대답을 기쁘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즐기는 삶,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여 즐기고 있을 때만큼 사랑스러울 때도 없다. 더구나
자신을 잊고 어떤 일에 몰두할 때 그 사람의 진지한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아닐 수 없다(라트브루흐).
성모님께서 주님 탄생 예고 소식을 들으셨다는 곳입니다.
네 시간의 속도를 늦춰라(성 프란치스코)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면
네 시간의 속도를 늦춰라.
일을 적게 하는 대신 그 일을 잘 끝내라.
진심어린 일은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꿈이 이루어지길 원하면
네 시간의 속도를 늦춰라.
작게 시작한 일이 더 위대한 결과에 이른다.
소박한 일은 성스럽다.
매일매일 하나하나씩
네 비밀을 천천히 쌓아 올려라.
매일매일 너는 진실해질 것이며
하늘의 영광을 알게 되리라.
너무나 급하게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특히 주님의 일이 아닌
세상의 일에만 급해서 정작 보고 신경 써야 할 하늘의 영광은 소홀히
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네 시간의 속도를 늦춰라.’는 성인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하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
◈ [수도회] 2015.03.2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루카 1,37)
여러분은 남자를 모르는 여자가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구세주가 십자가에 무참하게 못박혀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드셨다니
그게 가당찮은 일이라고 여기십니까?
나같은 보잘것없는 사람, 아니 정말 못된 흉악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하실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하느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사람이 사흘만에 부활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불가능해 보여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참신앙인입니다.
내 생각에 불가능해 보인다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믿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하느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렇다면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담을 수 있었고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그릇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담을 그릇이 되겠습니까?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루카1,26-38)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8,10ㄷ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4-10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라
매년 정기적인 사제 인사이동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인사권자인
교구장 주교님께서 발표하시기도 전에 신부님들 사이에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누가 어디로 갈 것이라고 나름대로 자리배치를 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인사발령 공문을 받으면 의외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해마다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인사권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내 생각과 그분의 생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수도자들은 정결과 순명, 청빈을 서약합니다. 사제들은 사제수품 때에
독신과 순명을 서약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가난한 삶을 살 것을 권고
받습니다. 그렇다면 교구장을 통해서 주어지는 삶의 자리가 복된 곳이고
그곳에서 기쁨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 서운함을
갖기도 합니다. 누구는 좋은 대로 가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외곽으로 빙빙
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며 더 있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떠나기도 합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분명 지금 있는 자리가 예수님께서 안배하신 자리로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뜻에 목숨을 담보로 응답을 하셨는데 우리의 모습은
내 입맛에 맞는 것만을 찾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물론 신부님의 강론도, 이웃들의 애정 어린
충고도 내 구미에 맞지 않으면 서운함만 쌓이고 맙니다. 순명은 기적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적을 낳기보다 불신만 커갑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동이 얼마나 주요한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가1,37). 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영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 안에서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사7,10-14;8,10ㄷ 히브10,4-10 루카1,26-38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8,10ㄷ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4-10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
부활대축일 전 사순시기중 대축일의 배치가 공평하고 적절합니다.
3.19일 성요셉 대축일에 이은 3.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바로
성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그 부모님에 그 아드님 예수그리스도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이며 오늘 강론의 제목입니다.
얼마전 한 주 내내 행복했던 체험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기억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좋은 체험의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간히 떠오르는 순례체험 기억을 통해 실감합니다.
수도원을 방문했던 청담동 자매들이 두 아름 사다 준 아름답고 향기로운
튜립과 후리지아 꽃에 대한 기억입니다. 한주간 내내 고백성사를 드린
분들에게 보속으로 '말씀의 처방전'과 더불어 꽃한송이씩을 선물했습니다.
이때 바로 '보속'은 '선물'이란 진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사십시오. 떠날 때는 물론이고 떠난 후의 삶이
더 아름답고 향기로워야 합니다.“
꽃 한송이를 드리며 한 덕담입니다.
형제자매들 모두가 기쁨으로 환한 웃음을 짓던 얼굴이 꽃같았습니다.
꽃송이를 받아든 순간 예외없이 본능적으로 모두가 코에 대며 향기를
맡았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향기없는 꽃이라면 마음은 허전할
것입니다. 꽃의 아름다움만 아니라 삶의 아름다움이요, 꽃의 향기만
아니라 삶의 향기입니다.
1.기도에 충실한 삶이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이 그 모범입니다.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한
주님과 소통의 대화인 기도가 바로 오늘 복음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 하느님도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실현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성모님뿐 아니라 우리 역시 기도생활을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특히 위 말씀은 제가 보속의 말씀 처방전에 많이 인용되는 내용입니다.
며칠전 한겨레 신문에서 읽은 '김영훈의 생각줍기'라는 삽화의 글귀도
생각납니다.
-시간은 돈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사람의 종잣돈이다.
그 자본금 키우기 위해 애써 쪼개고 늘리려 발버둥치지만
'자신과의 만남'이 빠진 시간은 새나간 종잣돈이다.-
바로 기도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동시에 '자신과의 만남'의 시간이 바로 기도시간입니다.
2.말씀공부에 항구한 삶이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영혼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하느님 말씀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과 빛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도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말씀을 경청하는 성모 마리아를 통해
'관상의 대가', '렉시오디비나의 대가'의 면모가 잘 드러납니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곰곰이 말씀을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 주님과의 만남이요 일치입니다.
이어 전개되는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과의 깊은 신뢰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의 말씀공부가 얼마나 높은 수준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3.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말씀공부에 겸손히 충실할 때 깨달아 알게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즉시 순종으로
응답하는 마리아의 고백이 감동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순종의 믿음입니다.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수 아기의 탄생 예언도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실현됩니다.
아무리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도 마리아를 강제하지 못하며,
마리아의 응답없이 일방적으로 구원역사를 펼치지 못합니다.
모전자전(母傳子傳), 그 어머니 마리아에 그 아드님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의 예수님의 고백도 어머니 마리아를 닮았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아니 예수님만 아니라 우리 믿는 모든 이들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온 존재이유이자 우리 삶의 유일한 의미입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4.기쁨의 삶이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샘솟는 기쁨입니다.
기도에 충실할 때, 말씀공부에 충실할 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저절로 맺는 열매가 기쁨의 열매입니다.
복음의 기쁨보다 이웃에 줄 수 있는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 모두 은총이 가득한 삶이요 기쁨이 충만한 삶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정진하는 삶이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수행자의 근본자세를 압축하는 두 말마디가 '끊임없이'와 '한결같이'
입니다. 어제 미사때 영성체후 기도에 나오는 '끊임없이'라는 말마디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희가 언제나 천상선물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영성생활에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루하루,
기도해야하고, 말씀을 공부해야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시는 성모마리아이십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꽃이 되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명동 마당에 작은 꽃들이 핀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곧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필 것입니다. 어느 교실에서 한 학생이 대답한 것이 생각납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옵니다.’ 봄이 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바뀌고,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고, 그렇게 우리들 가슴에도 봄이
올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봄은 매년 우리의 곁을 찾아 올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봄은 계절의 봄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해방이었습니다. 봄의 길목에서 ‘시’를 한번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 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찿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ㅡ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지금 우리의 신앙은 계절의 변화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드리려는 이들의 응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임마누엘’ 주님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우리들 또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가슴에도 봄이 찾아 올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으로 표징 되기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복음: 루카 1,26-38
< 믿음으로 표징 되기 >
1991년 3월 캘리포니아 시에라네바다의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한
부부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75세의 남편
던켄과 68세의 체이니 부부는 자녀들의 노력 끝에 죽은 지 2개월 뒤인
5월 1일에야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이 타고 있던 승용차 안에는
기름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차안에서 아내
체이니가 18일 동안 자신의 심경을 적어놓은 노트가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그들이
남긴 글 중 일부가 언론에 공개된 것입니다.
1991년 3월 1일 금요일 오전 6시 30분
이 아침 우리는 지금 아름다운 설경에 묻혀 있다. 길을 잘못 들어 눈 속에
묻히는 바람에 어젯밤 여섯 시경부터 눈 속에 갇혀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밤에도 눈이 많이 내려 한 자 높이 정도의 눈이 더 쌓인 채
우리를 덮고 있다. 창문을 열 수가 없다. 손바닥과 무릎에 대고 글을
쓰려니 글씨가 엉망이다. 이해해라, 아이들아!
어젯밤에 우리는 찬송과 성경 읽기를 시작하면서 잠깐씩 눈을 붙이며
지새웠다. 두어 시간마다 5분씩 차 엔진을 켜고 히터를 틀어 몸을 녹였다.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하게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셈이다.
오늘이 3일째다
아직 배고픔은 없다. 장갑 상자에서 작은 젤리 봉지 두개와 껌 하나를
찾아냈다. 나중을 위해 이것들을 잘 두었다. 창문을 열고 눈을 집어 먹고
있다. 직장에 결근해야 하는 문제로 너희 아빠가 조금 걱정하고 있다.
3월 6일 수요일
오늘 밤이 일곱 번째의 밤이 된다. 차에 기름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히터를 켤 수가 없다.
3월 12일
한 모금의 물이, 한 입의 음식이 이렇게 귀한 줄을 다시는 잊지 않게 될
것이다. 몸이 약해져 옴을 느낀다. 우리는 너희 모두를 진정 사랑했다.
3월 18일
아빠가 오늘 저녁 7시 30분에 주님 곁으로 가셨다. 모든 것이 몹시
평온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조차 몰랐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주님께 감사하다는 것이다. 나도 곧 그의 뒤를
따를 것으로 생각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매우 많은데 이제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앞이 잘 안 보인다. 잘 있거라. 너희 모두를 정말 사랑한다.
그의 아들 스킵과 딸 제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 체이니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어짊과 상냥함은 어머니를 한 번 만난 사람은 누구나 오랫동안
기억합니다.”
[출처: 채복기, ‘그대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이 분의 글 안에는 절망이나 불평이나 두려움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죽음까지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마음뿐이고,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에서 감사와 찬미와 사랑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분들의 이 감사한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가 드러남을
목격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그런 분이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뜻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말씀대로 성모님의 믿음은 이 세상에
구원의 표징이 되셨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믿고 자신을 맡기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를 ‘표징’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곳에서는 좀처럼 표징을 일으키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믿는 사람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없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 아하즈 왕에게 표징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을 위해 당신 친히 위대한 표징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고, 예수의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곧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주님께서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죄가
아니겠습니까? 의미상으로는 같은 이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이시는 성모님을 통해 사람이 되셔서
진정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보여 주셨습니다. 함께
계시겠다는 이름으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진정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표징은 오직 성모님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전선을 통해 전기가 흐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그 전기를 받아들여 자신의 몸으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구의 필라멘트라고 한다면 그 필라멘트에 전기가 흐를 때 비로소 전기가
흐르고 있음을 빛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광은 마치 전기처럼 누군가를 통해
흐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그
전기에 맡겨서 태워버릴 믿음이 있는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믿으며 우리 자신을 표징의 도구로 내어드릴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전기는 오직 전구가 있을 때만 유익하듯이, 하느님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드러나게 해 준 이에게는 성모님께 주신 영광을 함께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난 너의 양심 속에 살아있단다.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8,10ㄷ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4-10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난 너의 양심 속에 살아있단다.
방금 아기가 탄생하니 크신 대자연님이 ‘너는 내 자식이다.’고 하십니다.
산고를 치룬 엄마와 자기를 닮은 아빠가 ‘내 자식이구나.’고 합니다.
그 순간부터 아가는 ‘난 누구의 자식이란 말인가.’하며 고갤 갸웃거립니다.
크신 자연 힘님은 계속 말합니다. ‘난 너의 양심 속에 살아있단다.’라고요.
부모는 아이를 기르며 계속 주입합니다. ‘어떻든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아이는 커가며 부모 세상 양심에 헷갈려 ‘내 기분대로 살 거야.’ 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사야서 7장 10~14절. 8장 10절)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8,10ㄷ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4-10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독서 마지막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짧은 일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체험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두세 달 전의 일입니다. 옆 본당 신부님과
이냐시오 영신 수련 이론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서 부천으로 매일
왔다갔다 할 때인데요. 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수녀님이 주신
참고서적을 먼저 제본 집에 맡기자..’ 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대학가 근처로 향하긴 했는데, 제본집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려고 했는데 데이터를 초과해서
연결을 막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정차한 동안 정말 아주 잠깐
와이파이가 연결이 되는 겁니다. 어~ 하면서 빨리 찾아보고 검색이
되자마자 신호가 떨어져 출발하게 되었는데요. 꼭 필요한 만큼 딱
와이파이가 연결된 그 느낌이 저 개인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는구나.. 도움을 주시는 거 같다.. 하는 느낌을 받게 해 주었던 거
같습니다.
두 번째는 지난번에 sine 피정을 다녀온 뒤에 개인적인 악습 한 가지를
끊어버리고자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 정도 또 그 악습을
반복하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예 그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더라고요. 그렇게 그 행동을 할 수 없게 된 상황
앞에 서서, ‘하느님이 나를 그 악습으로부터 끌어내고자 하시는구나..
보호해 주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동기 모임 때 있었던 일인데요. 이 이야기를 하면 아마 동기
신부는 싫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동기들이
군종 신부가 있는 곳에 가서 반 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외국에서 사목하는
친구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거
같습니다. 힘들어 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요. 그 날 한 친구가 티비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평화방송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다른 때면
그냥 넘길 수도 있는데 교구 주교님이 나와서 잠깐 멈추더라고요.
주교님이 선교하시는 분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계셨는데요. 마침 그
순간에 대략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선교사들이 타지에서 힘들고
외롭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현존에서 위로를
느껴야 합니다. 어디서 그 현존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미사 안에서
성체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그분을 가까이서 만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왠지 그 이야기가 외국에서 사목하고 있는 동기 신부에게
누군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신기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세례 받은지 얼마 안 되었지만 레지오도 열심히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나가는 얘기로
짧게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평소에는 외부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이 엄청 막히고 신호도 잘 걸리는데, 레지오 하는 날은 신기하게 길이
뻥 뚫리고 신호도 하나 안 막히고 다 열려~’ 그러면서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형제님의 모습을 보면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느낌을 받았던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일상생활 안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그분이 보여주시는
작은 표징들 안에서 찾고 만나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봉성체 하시는 할머니 중에 약간 치매가 있으신 할머님이 계시다.
내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늘 목사님이라고 하시는데..
한 번은 그 댁 며느리님이 안 계실 때 봉성체를 하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며느리가 들어와서 누가 왔다갔냐고 물어보니까,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한다.
“목사님하고.. 뚱뚱한 여자 둘이 왔다 갔는데...”
뚱뚱한 여자 둘은 사무장님하고, 수녀님이다...^^;
- 인천교구 대부성당 김기현 세례자 요한 밤송이 신부 -
◈ [수도회] 분별
2015년 나해 3월25일 수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7,10-14; 8,10ㄷ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4-10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6-38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2015년 03월 25일) 분별
봄이 왔습니다. 새벽 아침 봄 바람에 들려오는 새 소리도 맑고 높습니다.
겨울의 삭풍에서 들리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봄의 따뜻한 기운과 함께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오늘 유대...인 한 처녀의 몸에 당신의 거처를 마련하셨습니다.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라는 마리아의 동의로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현존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되십니다.
우리는 오늘 축일에서 성모님의 분별력을 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이 분별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성모님은 천사의 말을 곧바로 따른 것이
아니라 분별의 과정을 걸어가십니다. 우선 곰곰히 생각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고 확신 속에서 응답합니다. 그러고는
하느님을 뜻을 실천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분별의 힘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뜻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우리가 던져야 하는 유일한 질문입니다. 이것이 분별의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삶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스쳐지나가는 모든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느님 뜻을 찾아가는 분별 기준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여인이십니다. 기도 안에서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분별하셨습니다.
우리도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 사랑의 계명을 판단하고 우리 몸으로
실천해 나갑시다. 분별의 은사를 간구합시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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