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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3월 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수도회] 허상을 좇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17,3-9
† 복음 요한 8,51-59
★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실 것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다인들과
논쟁하시면서, 당신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날을 보리라고 희망하면서 즐거워했다는 말씀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이 있지만 어느 한 가지도 분명한 풀이로 제시하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오늘 독서에 비추어 살펴본다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기다리던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이 약속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본 것은 아니고, 단지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는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히브 11,13). 아브라함이 기다리던 그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완전하게 이루어졌기에, 약속을 기다리던 아브라함보다 그 약속의
성취이신 예수님께서 더 크신 분이시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오늘 요한 복음의
장면을 묵상할 때, 공관 복음서의 다른 장면이 연상됩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37 병행) 두 장면 모두 모호합니다. 마태오 복음의 첫
구절에 기록되었듯이,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심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두 가지
명칭에 대하여 유보를 하십니다.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어서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8,53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이 기다린 분은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계신 분,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성조들의 기다림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허상을 좇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2015년 나해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8,51-59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요한 8,55)
허상을 좇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우리는 눈만 뜨면 무엇인가를 찾고 성취하려고 열심히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정작 찾고 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지, 찾아야 할 것을 찾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왜 찾는지, 찾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 있는 것이 하느님 안에서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이 없이 부산하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허상(虛像)을 좇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의 태도를 통해 헛걸음,
헛손질하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영의 눈을 떠보도록 하자.
앞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라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말하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악마의 자식’(8,44)이라고 선언하신다(8,31-47). 그러자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비방한다(8,48). 그들은
자기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데 근거하여 아버지는 한분이신
하느님이시며 자신들이야말로 사생아가 아닌 적자이며, 오히려
예수님이야말로 사마리아 사람이요 마귀 들렸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요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는다고 반박하신다.
이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8,51)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다인들이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그런 말을 한다며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난한다(8,52). 그들은 예수님께 이미 죽은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들 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며 도대체 누구로
자처하느냐?” 하고 대들었다(8,53).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당신의
신원을 분명히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으며’
(8,42),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8,54)라고 하신다. 나아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8,58)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더욱 더 분노한다.
유다인들의 태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극단적인
적대감을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아브라함의 유일한
하느님은 곧 당연히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의 하느님이시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하느님은 자신들의 상념과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감에 갇혀 있는 존재로서 말씀과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께로부터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브라함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실제로는 하느님을 생각만 했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알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심으로써(8,55) 하느님 안에 머무셨고 온전히
일치되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그 말씀의 요구를 행동하는 실천으로 채우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유다인들처럼 완고하고 굳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생각
안에만 가두는 이들은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다리를 놓는
셈이어서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유다인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자신들의 도구화, 이기적 대상화한 것이었다.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다양한 삶의 양식, 개별성의 존중, 다종교,
다문화가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보다는,
자신의 뜻에 하느님을 맞추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할 때가
적지 않다. 또한 자신의 생각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기도 한다. 이 사순절에 잠시 멈추어 나는 어떤 하느님상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뜻과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주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하실 여백을
마련하는 지혜가 참으로 중요한 때인 듯싶다. 유다인들이 격앙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들었던 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보았으면 한다. 오늘도 유다인들처럼 하느님을 내 생각 속에서
만들어내거나 생각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하느님에 만족하면서,
‘허상(虛像)을 좇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의식을 깨우는 복된 날
되시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늘 사랑의 실천을
2015년 나해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한 부부에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기가 생겼습니다. 아내의 임신 소식에
남편은 너무나 기뻤지요. 그리고 이 아이를 정말로 잘 키울 것을
다짐하면서, 전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아내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는
남편이 안쓰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너무 힘들었는지 도저히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아내는 이렇게 말했지요.
“아가, 아빠 사업 좀 잘 되게 해줘.”
이 말을 들은 남편이 졸린 눈을 비비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여보, 나 괜찮아. 그리고 아기한테 벌써부터 부담 주지 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담’이라는 말에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해서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계속해서
주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부담감을 드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청하고 있으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 그리고
필요한 것을 주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청하고 있으니 얼마나 그 청이 부담되시겠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청할 때,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입장이 아닌 내 입장만을 내세우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은 감히 예수님을 향해
“마귀 들렸다”라고 말합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는 광경을 한 두 번 본 것도
아닐 텐데, 오히려 예수님이 마귀 들렸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바로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다보니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는 극한 상황까지도 가게 됩니다.
정말로 큰 부담이 되는 상황입니다. 진실을 말해줘도 믿지 않고 심지어
돌을 던져 입막음까지 하려는 그들의 믿지 않는 마음에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이 바로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틀에 갇혀서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완고함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사랑의 실천보다는 율법의 준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그들의 무지에 얼마나 아쉬워
하셨을까요?
그런데 우리 역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짙게 물들어 우리의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전혀 없이 그저
세상의 틀에서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스스로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바로 주님께 부담을 여전히 드리고 있는 우리라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사랑의 실천을 멈추지 않으셨던 주님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 사랑 실천의 모범을 보고 따르는 사람만이 분명히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슴이 원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미겔 데 우나무노).
부담되는 삶을 살지 마세요.
비밀 결사대(‘좋은생각’ 중에서)
미국 어느 마을에 30여 년간 정체를 숨기고 이중생활을 한 아홉 명의
할머니가 있다. 1977년, 당시 20~40대였던 이들은 어느 날, 각자의
할머니를 추억했다. 없는 살림에도 딱한 사람을 위해 쌈짓돈을 건네고
정성껏 만든 음식을 이웃과 나누던 분이었다. ‘내 손자, 남의 손자 할 것
없이 보듬어 주던 할머니들이 아직도 있다면 세상은 더 따뜻할 텐데...’
라고 생각한 그들은 ‘우리 동네 할머니’가 되어 주기로 결심했다.
우선 모임 이름을 ‘아홉 할매들’이라 짓고 식비와 세탁비를 아껴 돈을
모았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어디서나 귀를
기울였다. ‘아홉 할매들’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알아내면 새벽 네 시에
회원 중 한 명의 주방으로 모여 음식을 만들었다. 전기가 끊긴 집의
전기세를 몰래 내주거나 미혼모의 아이에게 옷을 보내 주곤 했다. 그들은
늘 이런 메모를 남겼다. ‘당신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30년간 성공적으로 활동하던 그들에게 위기가 왔으니, 바로 남편들이
행동을 수상히 여긴 것이다. 할 수 없이 할머니들이 사실을 털어놓자
남편들은 깜짝 놀라며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그날 이후 비밀 결사대의
규모는 두 배로 늘었다. 더욱이 인터넷을 통해 이들의 사연이 알려지자
서로 자기 마을의 할머니가 되겠다는 지원자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당신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습니다.’라는 말이 크게 와 닿습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라고 이웃을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이웃을 생각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굳은 믿음, 또 실제로 그 사실을 직접 느낄 수 있다면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글을 읽으면서 그 곳은 다른
이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네요.
우리 모두 다른 이들의 비밀 결사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죠?
◈ [수도회] 2015.03.2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요한 8,54)
우리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이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삶에서는 "영광은 나에게
고통일랑 하느님께..."라고 하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어하고
"잘 한다" "착하다" "예쁘다" 이런 말을 듣고싶어 합니다.
사실 모든 좋은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고
자신에게는 그 어떤 영광도 돌리지 않은 종이
참으로 겸손하고 가난한 종입니다.
오늘 내가 잘 한 일이나 수고한 일이 있으면 다 주님 덕분이라 여기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립시다.
"영광송"은 나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겁니다.
이걸 잘 하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이시길 빕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하느님의 권위 아래서|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요한 8,51-59)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하느님의 권위 아래서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한 1,14).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억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관계의 깊이 -하느님과 나-
이수철 프란치스코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창세17,3-9 요한8,51-59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관계의 깊이 -하느님과 나-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리 '인간은
무엇인가?'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영원한 미궁의 반쪽 인간일뿐입니다.
새삼 하느님과의 관계가, 관계의 깊이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 동방영성의 탐구라는 책을 읽다가 공감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병(illness of the heart)은 '무지(ignorance)'
이다. 그것은 정보나 지적 지식의 결핍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성인들이 실제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마음의 무지'이다. 이런
하느님의 직접적 체험의 결핍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모르게 만든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손실과 궁지가 얼마나 큰 심연인지
의식하지 못한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은 오직 길고도 끈기있는
영적수행에 의해 도달될 수 있다.-
-마음의 주요한 병인 무지와 관련된 병이 '망각(forgetfulness)'이다.
마음이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한다.
마음이 기도상태 안에 머무르는 것을 잊었다.
인간의 자연적 상태는 끊임없는 관상이며 하느님의 기억이다.
그것은 두뇌의 기억이 아니라 마음안에서 활동하는 기억이다.
그들은 잠잘수 있으나 마음은 성령의 은총 안에서 활동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기도의 기술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법을 습득할 때 저절로
일어난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병이 정말 큰 병입니다.
무지에 저절로 따라오는 하느님을 잊는 망각의 병입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해, 하느님과 관계를 더욱 깊이 하기위해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修行)도 하느님과 관계의 성장(成長)과 성숙(成熟)을
목표로 합니다. 하느님과 우정의 관계가 깊어져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저절로 '참 나(眞我)'의 발견이자 실현입니다.
하느님과 관계의 모범이 오늘 1독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이요, 요한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이 두분에게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빼버리면 남는 것은
말그대로 '허무의 심연'일 뿐입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깊은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쌍방간의
계약입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바로 예수님의 새계약을 통해 완전히 실현된 하느님의 아브라함과의
계약입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의 바뀐 이름이 그 관계의 깊이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세례명 역시 주님과 관계의 깊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계약에, 계명에, 말씀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느님과 관계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는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우리와 영원한 동반자 관계를 맺어주시겠다는,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 말씀입니다.
단 그의 우선적 필수조건은 계약의 준수입니다.
새삼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우정의 관계임을 깨닫습입니다. 하느님과
우정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저절로 치유되는 무지의 병, 망각의 병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와 실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오늘 화답송 후렴 역시 은혜롭습니다.
계약을 잊는 것은 우리이지 하느님은 영원히 계약을,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약에 끝까지 충실하고자 당신의 아드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계약을 갱신하심으로 그 계약을 놀랍게 업그레이도
시키셨습니다. 바로 그 은혜로운 산물이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과 관계의 깊이가 놀랍습니다.
아브라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다음 영원한 화두와 같은 말씀이 그 관계의 깊이를 웅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모두가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고백이요 거의 하느님과 동급의 위치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버지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관계의 절정은 다음 고백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윗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영어가 더 분명합니다.
"before Abraham came to be, I AM,"
바로 하느님과 영원한 일치를 상징하는 하느님의 이름
'I AM(나는 있다)'을 사용하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의 당혹감을 이해할만합니다.
하여 완전히 신성모독이기에 예수님께 돌을 들어 던져 죽이려 합니다.
하느님 뿌리까지 닿아있는 예수님의 하느님과 관계의 깊이요, 우리 역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이런 가능성이 우리에게도 활짝
열렸습니다.
바로 이런 경지를 노래한 매주 월요일 저녁성무일도 때 바치는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서 찬가 중 두 번째 구절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뽑으셨고,
사랑으로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 되게 하셨도다.“
아, 우리의 성소의 신비가 놀랍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뿌리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불림 받은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바로 이런 진리가 우리 모두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하도록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병인 무지와 망각을
치유하시고 당신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사순 제5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유클리드 기하학, 해석 기하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세상을 이해 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거시세계는 물론, 미시세계도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유전자를 파악했어도, 높은 건물을 지었어도, 우주선으로 지구를
벗어났어도 인간은 아직은 초라하고, 부족합니다. 수학, 물리, 경제라는
옷이 화려해 보여도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근심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양심, 선함, 사랑, 나눔, 희생, 헌신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계산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불안, 근심, 시기, 질투, 분노, 원망을
물리적인 법칙으로 풀어낼 수 없습니다.
미분과 적분으로 계산을 할 수는 있지만 가치와 존재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색의 조합으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는 사람만이 돌아온 탕자를
바라보고 감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의 분자식 ‘H2O'로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물리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의 관점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물리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르다.”
사랑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분은 결혼하고 몇 년 후에 남편께서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우연히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고, 남편은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남편은 몸은
깨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깨어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힘들게 했다고
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짜증을 내는 그런 남편을 23년간 수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남편만으로도 힘에 벅찬데 시어머니께서도 쓰러지셔서 한집에 2명의
중환자를 돌봐야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도 10년 이상
돌봐드려야 했던 그 분은 왜 하느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하느님
원망을 참 많이 했다고 합니다. 병중에 시어머니도 세례를 받아서 함께
묵주기도를 했지만 원망과 고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그분의 품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남편도 하느님 품으로 가셨고 조금 숨을 돌리나 했는데
이제는 본인이 암에 걸려서 큰 수술을 했어야 했습니다. 남편 복도 없었고,
시어머니 복도 없었는데 자신까지 암에 걸렸으니 정말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컸다고 합니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돌아와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많은 고통과 십자가를 주셨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은총도 받아야 은총
2015년 나해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복음: 요한 8,51-59
< 은총도 받아야 은총 >
역사상 화장이 시작된 것은 클레오파트라 때부터였다고 합니다. 고대
이집트 여인들은 눈썹을 밀어버리고 진하게 눈썹을 칠하고 다녔는데
아름다움과 동물에게 겁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눈 화장은 워낙 유명해서 유럽에까지 화장술이 전파되어 눈 주위를 검게
칠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유명했던 화장법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했던 것처럼 얼굴을
새하얗게 칠하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얼굴에
천연두 상처가 남아있었고 피부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화장을
했던 것인데 이것이 유행이 되어 남녀 가리지 않고 얼굴에 분을 바르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분 제품이 이태리에서 수입하는
베니스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을 바르면 얼굴이 푸르러지고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얼굴에 이상한 것들이 돋아나니 분을
더욱 짙게 바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그 분은 납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을 위한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결국 분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치명적인 유혹으로 당대 가장 아름답다던 배우 ‘마리아
거닝’이 할머니와 같은 피부와 치아와 머리카락이 다 빠진 상태로
사망하자 그때서야 베니스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니스분이 조서에 ‘박가분’이란 이름으로 들어와서 많은 조선
여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루에 5만개까지 팔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영국에서 있었던 것과 똑같은 부작용이 발생했지만 역시 분칠은
멈출 줄 몰랐고 한 기생이 얼굴이 썩어가면서 박가분을 먹고 자살을 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익스트림 서프라이즈 I, 치명적인 유혹]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으시는 ‘계약’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 내용은 온통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고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며 그에게서 큰 임금이 나오게
하시겠다는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는 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이 계약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받는 것도 주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계약은 절대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좋은 것을 주어도 받아야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기는 하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박가분을 바르면 납중독에 걸리니 쓰지 말라고 해도
더 안 좋아진 피부를 가리기 위해 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드님을 주셔서
그를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구원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고집을 부리며 그분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미워하지만
않으면 심판하시지 않는다고 하시는데도 그 미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부여잡고 있고, 내일 걱정하지 말고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라고
해도 돈을 움켜잡고 죽어갑니다. 우리 또한 알면서도 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알면 그대로 행할 수 있는 결단이 없이는
죽음의 길로 가면서도 돌아서지 못하게 됩니다. 알고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받기 위해서는 지금 쥔 것을 놓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내 손에 엄청난 계약이 쥐어지겠고 그 계약을 통한
무조건적인 구원의 은총을 거저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해 주신
계약의 약속을 믿고 지금 쥐고 있는 우리를 썩게 만드는 헛된 행복을
놓아버립시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예수님이 얼마나 고충 많았겠어요.
2015년 나해 3월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예수님이 얼마나 고충 많았겠어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제일 큰 장애 문제는 서로의 소통문제라고 봅니다.
마음이 다르고 환경 경험 배움 습성 성격 빈부 언어 나이 엄청납니다.
내 집 안에서도 모기 진드기 파리 벌레 애견 외의 동식물 등 다지요.
외에도 하늘과 땅, 믿음과 불신, 기름과 물, 불과 물 같은 게 공존합니다.
시간공간에 매인 것과 이를 초월하는 상상의 영역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인간과의 소통에서 얼마나 고충 많았겠어요!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57~5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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