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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4일 부활성야
[수도회] 부활, 열림의 신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서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11
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7
부활 성야의 모든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여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엄한 전례를
통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참된 승리와 해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한다.
부활 성야에는 일곱 개의 구약 독서와 신약의 서간, 그리고 복음이
선포된다. 이 독서들은 천지 창조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인간의 역사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이루어져 왔음을 고백한다.
당신의 선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부르시고, 이집트의 종살이와 바빌론 유배에서 구해 내셨다.
신약에 이르러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우리가 그 아드님과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천사에게서 부활의 소식을 듣고, 그분께서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심을 힘차게 전하게 된다.
◈ 오늘의 묵상
지난해 성주간 수요일(4월 16일)에는 ‘세월호 침몰’이라는 참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이 세상의 빛도, 생명도 깊은 바닷속으로 잠긴
듯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거나 경축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더욱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하기도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빛은 죽음의 어둠 속에서 빛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인간 역사의 빛과 어둠을 번갈아 보여 줍니다. 선하게 창조된
세상이었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고통과 죽음으로 얼룩졌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와 바빌론 유배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어둠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부활 성야를 홀로 밝히는 부활초처럼, 하느님의 빛은 어둠 속에서 당신
백성의 길과 인류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짙게 드리운 절망의 무덤에서부터 부활의 기쁜 소식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천사에게서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여인들은
무덤에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활을 전한 천사는 무덤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집트도 바빌론도 아닌 절망의 자리, 바로 무덤에서
시작하여,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세상의 변두리’에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합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십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겨 낸 생명의 승리, 불신을 이겨 낸 믿음의 승리, 미움을
쳐부순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결국 진실과
진리가 승리한다는 점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삶과 죽음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퀴리오스)
으로 고백합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부활, 열림의 신비
2015년 나해 4월4일 부활성야 토요일 마르 16,1-7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
부활, 열림의 신비
겨울을 난 온갖 생명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세상에는 신기한 일이 참으로 많지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신비스런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 거룩한 밤에 교회는 어둠과 죄에서 우리 인류를 빛과
생명으로 구원하신 주님의 업적을 노래한다. 안식일 이른 아침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다. 무덤 문이 열려 죽음이
생명 안에 하나가 되었다. 부활은 열림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닫혀있으면 답답하고 소통이 부자연스럽게 되고 불안해지기도 하면서
관계 안에 소외가 발생하게 된다. 오늘의 말씀들을 보면 주님께서 ‘먼저’
막히고 닫혀있는 우리의 돌무덤을 열어주심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 삶의 태도를 말해준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한 처음에 말씀으로 세상을 새롭게 여시고
창조로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으셨으며, 있게 하신 모든 존재를
‘보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신다. 제2독서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고 말씀하시며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시고, 제4독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또다시 내치실까 몹시 두려워하지만 주님께서는 ‘자비와 자애’로 그들의
두려운 마음을 열어주신다. 제5독서에서도 주님 친히 생명과 희망의 길을
열어주신다. 제7독서 에제키엘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시며, 죽음의 과거에서 해방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실 것임을 선포한다.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묻힘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가르친다.
이제 마르코 복음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이 빈무덤 사건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체험은 사막, 어두움, 두려움, 공포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인들은 천사의
발현을 체험한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며,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지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고 알려준다.
엄청난 사실에 직면하여 여인들은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려”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마르 16,8).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죽음의 상징인
무덤문을 열고 나가시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신다.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분 친히 우리가 만들어놓은 문들 곧 두려움, 아집, 이기심, 편견, 선입견,
판단으로부터 나오게 하시고, 우리를 은총의 샘으로 인도하신다.
그렇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 학연, 지연, 재물, 지나간 과거, 나의 바람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 된다. 물론 믿음과 사랑은 나자렛의 예수에
기초하고 있지만 이제는 고향의 예수를 넘어 보편적 예수, 만민의 주님,
우주적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사실 회칠한 무덤이 아닌
빈무덤에서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은
일체의 차별을 타파하는 평등의 원리와 삶에서 체험되는 하느님의
은총이며 존재의 열림이다. 이런 존재의 열림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자신의 돌무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부활의 신비인 ‘열림’은 수직의 열림과 수평의 열림을 아우르며, 이 두
차원의 열림이 만나는 곳에 구원의 꽃이 핀다. 이 꽃은 예수님의 수난의
다섯 상처이며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가 받았던 거룩한 오상의 신비를
드러내주는 상징이다. ‘수직의 열림’은 하늘이 열리는 것으로서 영(靈)의
열림, 영의 깨달음을 말한다. 영이 열리면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여
바라보고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알아차리게 된다.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게 되고 자신이 종임을 명확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영이 열린
사람은 겸손가운데 감사하면서,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일상의
모든 것을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게 된다. 그럴 때에 진정한 기쁨을 알고,
주님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삶이 열리게 된다.
부활 신비의 또 다른 차원은 ‘수평의 열림’이다. 수직의 열림인 영이
열리면 필연적으로 수평의 열림으로 연결되고 표현된다. 주님을 주인으로
알아보는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자신에게만
쏠려있던 눈길이 문을 열고 밖으로 향하게 된다. 또한 한쪽으로만 쏠려
있던 생각(편견)이 모든 이를 향한 사람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과거의 생각에 묶여있던 생각(선입견)에서 해방되어 ‘지금’, ‘여기서’
새롭게 모든 이를 바라보며 경탄하게 된다. 모든 이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에 그 어떠한 울타리도, 차별도 없이 모든 이를 너무나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하고 열어주는
부활의 신비이다. 그래서 결국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에로 건너가는
“생명의 다리”, “희망의 다리"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스스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편견과 선입견, 차별, 불신, 미움과 같은 우리 마음의 돌문을 열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부활하신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만나기로 합시다.
알렐루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사랑을 주십시오.
2015년 나해 4월4일 부활 성야
서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11
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7
“교회는 성토요일에는 미사를 봉헌하지 않는다. 주님의 무덤 옆에
머무르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한다. 이날은 노자 성체만
허락되며, 주님 만찬 성목요일의 만찬 미사 뒤에 제대포를 벗긴 제대는
오늘도 그 상태로 둔다. 장엄한 부활 성야 예식을 거행한 뒤에야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이 기쁨은 50일 동안 넘쳐흐른다.”
그래서 오늘은 새벽 묵상 글이 없습니다. 오늘 밤 부활의 큰 기쁨을
기대하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든 실패의 99%는 변명과 실패를 정당화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온다(조지 워싱턴 카바).
어제 전례를 참석했던 인천 논현동 성당의 신축성당 모습. 함께 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을 주십시오.
어떤 현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비웃기만 하는 것입니다. 현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어느 날, 그 날 역시 한 무리의 남녀가 이 현자를 뒤따르면서 모욕의 말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서는 오히려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모욕을 던진
사람 중 한 명이 “당신 귀머거리요? 욕지거리를 쏟아 붓는 우리를
축복하다니....”라고 의아해하며 묻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만 줄 수 있는 법이지요.”
주님을 모욕했던 많은 사람들, 그들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예수님이
우습게 보였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진 것은 사랑뿐이었기 때문에,
당신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이용해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내 자신이 가진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가진 비판과
미움을 주려기보다는, 내 마음 깊숙이 있는 ‘사랑’을 꺼내 주어야 합니다.
시집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글. 제 선배신부님께서 다른 선배신부님게
쓰신 글이더라구요. 감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의 책장에 이 책이
있을까요? 신부님들 성함은 모자이크 했습니다. ㅋㅋ
◈ [수도회] 2015.04.0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일년 중 유일하게 미사가 없는 날입니다.
미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니까요.
오늘은 말씀묵상도 없습니다. 침묵합시다.
깊은 침묵 속에 오로지 그분의 부활을 숨죽여 기다려봅시다.
미사 없는 것이 얼마나 갑갑한지 말씀이 없는 것이 얼마나 허전한지
체험하는 날 되십시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는 봄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4일 토요일 부활 성야
창세1,1-2,2 창세22,1-18 탈출14,15-15,1ㄱ 이사54,5-14 이사55,1-11
바룩3,9-15.32-4,4 에제36,16-17ㄱ.18-28 로마6,3-11 마르16,1-7
서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11
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7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는 봄이다-
예수는 봄입니다. 부활의 봄입니다.
아주 오래 전 써 놓은 '예수는 봄이다'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예수는 봄이다/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푸른 싹/돋아난다
예수는 봄이다/봄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봄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만개하기 시작한
온갖 봄꽃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축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본격적으로 알렐루야 하느님 찬미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봄으로 부활하심으로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당신 아들 예수님을 하느님은
마침내 살려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에 응답하여 그 외아들 이삭을
살려내신 하느님은 어김없이 예수님의 사랑의 순종에 응답하여
영광스럽게 살려내셨습니다.
며칠 전 선물받은 수국 꽃 화분에 달린 커다란 분홍색 리본에 쓰인 글자가
각별한 느낌입니다.
"축 부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덕분에 저도 부활했습니다.
아니 여러분 모두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부활의 봄을 맞이했습니다.
세월의 나이와 상관없이 영혼은 언제나 부활의 청춘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삶과 죽음을 넘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아,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무덤문 박차고 죽음의 사슬을 끊어 버리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신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영광스럽게도 우리를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부활로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부활하신 예수님 계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 무슨 맛, 무슨
기쁨으로 이 막막한 광야인생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부활성야 전례는 언제나 감동입니다.
부활성야전례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전례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 온갖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축제'입니다.
창세기의 세상 창조가 예수님 부활로 완결되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예수님 부활입니다.
'찬미하라', '깨달아라', '기뻐하라' 촉구하며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부활성야의 부활찬송보다 아름다운 시가(詩歌)를 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의 위업이 찬란하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자 빛입니다.
우리의 기쁨이자 평화입니다.
우리의 사랑이자 희망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아니 우리의 모두입니다. 바오로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라는 고백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세상은 온통 어둠이요 허무의 심연입니다.
사제가 부활초에 십자가를 그으며 하는 고백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시작이요 마침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대도 세기도 주님의 것이오니 영광과 권능이 영원토록 주님께 있나이다.“
우주와 인류역사 한 복판 중심에서 영원히 구원의 빛을 발하고 있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축제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지혜의 샘, 자비의 샘이신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예수님의 부활로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아 와서 먹어라.
와서 돈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먹어라.“
예수님 부활로 값없이 돈없이 은총의 빵을, 은총의 생명수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분은 양식도 못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않는 것에 수고를 들입니까?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주님 부활성야미사 잔치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하느님의 자애는 우리에게서
말려나지 않고 평화의 계약 역시 흔들리지 아니 합니다.
에제키엘의 예언도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완전 실현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누구나 주님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값싼 부활체험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주님과 함께
고통과 죽음을 나눴던, 열렬히 주님을 사랑했던 이들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오늘 복음의 빈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여인들입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천사의 말입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을 무덤에서 찾습니까?
무덤과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그 어디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곳은
천국이고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지 않은 곳은 무덤입니다.
산 이들이 있을 곳은 무덤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지금 이곳은 천국입니까 무덤입니까?
복음의 마지막 주님의 천사의 말씀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가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를 향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갈릴래아입니다.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못 만나면 어디서도 만나지 못합니다.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거룩한 부활성야 이 밤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심으로,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부활성야미사를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합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제게 다가오신 부활하신 주님
2015년 나해 4월4일 부활 성야
서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11
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7
제게 다가오신 부활하신 주님
또 다시 부활절입니다. 이번 부활절만큼은 예년과는 다른 부활절을
꿈꿉니다. 예수님 부활이 내 삶 안에 실현되는 부활절, 예수님의 부활로
내 삶의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활절,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며
한 단계 더 성숙되는 그런 부활절, 결국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는
부활절.
그래서 한 가지 내면 작업을 해봅니다. 부활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얻을 있는 무상의 선물이 결코 아니기에...영광스런 부활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기에...그래서 절실한 부활 체험을 위해서는 그에 못지않은 죽음
연습이 필요하기에.
부끄럽지만 내면의 상태를 천천히 살펴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한 인간을 폐허로 만드는 죽음의 요소들로 가득했습니다. 교만과
위선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짙은
어둠이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죄책감과
자책으로 꽉차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있는 그대로의 제 환부를 주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정말 창피했지만 그분 앞에 머물며 제 치부를 남김없이
드러냈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당신께서도 당신 손과 발의 상처를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시고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며 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괜찮다! 다 괜찮다!”
거룩한 부활성야에 내게 그리고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에 예수님의
부활은 무슨 의미인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그간 주고받은 상처를 서로
어루만져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서로의 눈을 맞추며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이번 부활은 그저 한 바탕 이벤트일 뿐입니다.
우리 안에 ‘죽음 연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번 부활에도
기대할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죄에 죽고, 나태함에 죽고, 냉담함에
죽어야 합니다.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했음에 죽고, 세상의 악 앞에 맞서지
않았음에 죽어야 합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제대로 치루지 못한 예수님의 장례절차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여 제자들이었습니다. 스승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시신이라도
깨끗이 수습해드리려는 그 마음이 참으로 애틋합니다.
그러나 이미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완전히 텅 빈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온 몸으로 체험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비워내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 가득한 교만과 아집을 비워내야 합니다. 우리 내면을 채우고 있는
불신앙과 의심을 비워야합니다. 이웃을 해치는 분노와 악담을 비워야
합니다.
말끔히 비워낸 그 자리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끔히 씻긴 지고하고
순수한 우리들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향한 우리들의 맑고 투명한 사랑 안에 찬란히 부활하십니다. 원망과
미움이 사라진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십니다. 폭력과 이기심이
사라진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사랑의 승리|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4일 부활성야 (마르코 16,1-7)
서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11
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7
사랑의 승리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합니다.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거듭 태어남을 축하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그리고
우리 이웃에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승리하였다는 것을
드러내준 사건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시련과
역경,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주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의
승리와 희망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어야 부화 되어 병아리가 나옵니다. 품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약 3주, 21일입니다. 어미가 알을 품어 온도를 맞춰
주고, 굴려주고 하면 때가 되어 병아리가 속에서 톡톡 껍질을 깨고 나오게
됩니다. 품는 수고와 깨는 아픔이 없이는 병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인공부화를 한다고 해도 온도와 습도를 어미 품처럼 섭씨36-37도로
맞춰야 하고 정상적 발육을 위해 알 굴리기를 해야 합니다.
부활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사실 부활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욕심에 죽고 베푸는
삶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갈라2,20)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새 삶을 위한 수고와 땀이
있어야 그만한 기쁨과 보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품는 수고와
깨는 아픔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있었고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젊은이가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무덤이라는 과거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 갈릴래아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1,14). 이제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의 삶이 있던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덤의 시신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가신 길을 따름으로써 그리고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행함으로써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 고달프고
힘들어 보여도 그 삶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으니 두려움 없이 그 길을
가야겠습니다. 그 길은 변함없는 사랑의 길이었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명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오늘이 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사는 복된 순간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행하기로 다짐하며 예수님의 빈
무덤처럼 우리의 마음도 빈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 순간이
거듭나는 부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알렐루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생명의 기도, 마음의 기도
2015년 나해 4월4일 성토요일
성토요일(2015년 04월 04일) 생명의 기도, 마음의 기도
기상종이 울립니다. 어김없이 날이 다시 밝았습니다. 성토요일 아침입니다.
성무일도 아침기도를 하기 위해 수도원 성당에 들어갑니다. 성수를
찍으려고 하니 성수가 없습니다. ‘습관이 무섭구나’ 하며 혼자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벗겨진 제대 위에는 어제 수난 예식에서 사용한 십자가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습니다. 깊은 침묵만이 흐릅니다. 어제 성금요일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절규의 날이었다면 오늘은 아픔조차 사라진 깊은
침묵의 날입니다. 긴박한 사건이 지나간 다음에 반드시 찾아오는 공허와
허탈감. 무덤 앞에서 느끼는 슬픈 허전함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서늘한
공허함이 가득합니다. 찬바람이 붑니다.
작년 성토요일이 생각납니다. 정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너나 할 것없이 모두 깊은 침묵의 바다에 빠졌습니다. 일년이 지난
지금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직도 고통과 슬픔의 침묵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왜 어찌하여 무엇 때문에 아이들이 죽어야 했는지 그
어떤 것도 밝혀지지 않은 지금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절규하고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생명의 몸부림입니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성토요일 오늘은 교회에서 미사가 없는 유일한
날입니다. 오직 성무일도만 공동으로 바칩니다. 사실 성토요일은 우리
관심 밖입니다. 성금요일 주님의 죽음과 오늘 저녁부터 시작되는
부활대축일 파스카 성야 사이에 있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보냅니다. 그냥
건너가는 날인듯합니다. 부활 준비로 마음이 바쁩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냥 보내면 안됩니다. 마음의 기도를 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어 무덤에 안장되셨지만 그분은 ‘무덤이 없는 유일한 분’
이십니다.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인님이 이미 우리 마음에서
활동하십니다. 무덤처럼 차가운 우리 마음에 생명의 뜨거움으로 주님이
이미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토요일은 생명의 기도를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삶으로 이야기하는 날입니다. 죽음은 생명 앞에 힘이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는 날입니다.
생명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생명의 기도로 승화합니다. 무덤이 없으신 생명의 주님께
봉헌합니다. 작년 묵상글을 인용합니다.
“무거운 죽음의 침묵이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이를 잃고 쓰러진
부모들의 마음에 생명의 주님이 친히 들어가셔서 힘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아이들은 그대들 마음속에서 살아있고
또한 내 안에서도 살아있습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십시오.’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절망과 분노에 휩싸인 저희
모두에게 평화를 주소서.’”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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