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 결핍증 소심남의 백일몽 오딧세이
1천 여 만원의 초저예산으로 일주일만에 찍었다는 115분짜리 독립영화인〈낮술〉은 기존의 인디영화와는 다른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기존의 독립영화들은 우선 그 색깔 자체가 칙칙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와 불편한 주제의식으로 관객들을 괴롭히기 십상인데 이 영화는 아주 상큼하고 발랄하다. 어렵지 않은 주제지만 뭔가 인간의 일상성 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을 까발리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강원도 정선의 투명한 겨울 풍광처럼 상큼하고 발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뭔가 그 풍경 속의 인물들이 수상하기 그지없다. 흡사 훨씬 가벼워진 홍상수류의 수채화 풍의 영화 한 편을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상업영화적인 내러티브를 유지하고 있지만 뭔가 때 묻지 않는 맑은 영혼을 대하는 듯 유현한 느낌이다.
내러티브 역시 아주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우유부단한 소심남 혁진(송삼동 분)의 낮술에 취한 백일몽 오딧세이를 보는 듯하다. 그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현실 속의 인물들이지만 모두 일상적 궤를 벗어난 듯한 낯선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영화는 어쩌면 술에 취한 한 젊은이의 의식 속에서 펼쳐지는 비일상적 판타지를, 강원도 정선이라는 구체적 등가물로 대체해 보여주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통해 일상성 속에 은밀하게 내재해 있는 인간의 위선적인 이중성을 은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프닝 씨퀀스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술집에서 혁진의 고등학교 동창들 넷이 술을 마시고 있다. 그들은 모두 혁진의 실연을 위로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다. 친구 기상이 혁진의 실연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도로 강원도 정선 여행을 권하며 선배의 펜션을 소개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막상 정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나와 있지 않다. 친구 기상은 아직 술에서 덜 깬 듯한 몽롱한 목소리로 이틀 뒤에 오겠다고 한다. 어쩌면 혁진은 그 날 친구들과의 술판, 아니면 그 날 밤의 꿈속에서 정선 여행의 환상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서 감독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일상이 한 순간의 백일몽인지도 모른다는 가벼운 철학적 사유의 농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프닝 씨퀀스의 술판은 어쩌면 지독한 현실이고, 그 다음으로 진행되는 혁진 혼자의 강원도 정선 여행은 비일상적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일상적 삶 역시 이런 판타지가 아닐까?
낮술의 길에서 만난 비일상적 인간 풍경
혁진이 정선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상의 궤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아주 귀찮은 듯한 퉁명스런 표정과 말투로 방 열쇠를 건네주고 가게를 알려주는 펜션 주인의 중년 사내, 걸어서 고개를 넘다가는 호랑이를 만날지도 모르며 어쩌면 버스가 안 올지도 모른다며 호랑이 담배 먹는 시절 투의 얘기를 하는 가게 할머니, 뜬금없이 담배를 얻어 피우고 버스 정류장에서 술을 먹고 싶으니 사 달라고 조르는 펜션에서 만난 미모의 옆방 여자(김강희 분), 강릉 경포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상한 음악을 들려주며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중년 여자 란희(이란희 분), 끊임없는 요설과 허장성세로 집요하게 술을 권하는 옆방 여자의 수상한 남자 친구, 동사 직전의 혁진을 트럭에 등승시켜 저녁 식사에 차비까지 빌려주다가 동침하면서 그의 가슴을 더듬는 변태 트럭 운전수(신운섭 분) 등은 모두가 하나같이 평균적 도덕규범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일상의 궤를 벗어난 듯한 비일상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혁진의 윤리적 틀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혁진은 한 개체로서의 개성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술과 여자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보편적 남성들을 상징하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감독의 숨은 의도일지 모른다. 세상의 뭇 남성들이여, 세상의 어떤 도덕적 위기 앞에서 나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윤리적 순결성을 강조하지 말지어다. 술과 여자 앞에서도 그런 도덕적 엄숙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대들은 흔들리지 않겠다고 안간힘을 쓸지 몰라도, 그대들 양심 저 밑바닥에 움츠리고 있는 ‘이드’(무의식)의 원초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충동질에도 그렇게 의연할 수 있겠는가? 감독은 이처럼 인간의 양심 밑바닥에 음습하게 자라고 있는 탈일상의 유혹을 술과 여자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백일하에 까발리고 있다. 그러기에 우유부단한 소심남 혁진도 매번 술과 여자 앞에서는 맥을 못 춘 채 허덕이다 굴욕적인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강릉 경포대 해변에서 낮술에 취해 거닐던 혁진은 펜션에서 만난 미모의 옆방 여자와 그녀의 수상한 남자 친구와 맞닥뜨린다. 횟집에서 술에 취한 혁진은 노래방까지 따라가게 되고, 거기에서 그는 수상한 친구가 없는 틈을 타 그녀와 키스까지 하게 된다. 여관방에서 수상한 친구가 잠든 사이에 그는 그녀를 덮치지만 그 이후는 깜깜한 어둠이다. 일어나 보니 그는 팬티 차림으로 도로변의 눈밭위에 내팽개쳐진 상태이다. 말하자면 지갑을 탈취당하는 사기극에 휘말린 것이다. 우연히 그를 동승시켜 준 트럭 운전사는 저녁을 대접하고 차비까지 빌려주지만 동침 상태에서 변태로 돌변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낮술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에 의해 어쩔 수 없는 리비도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우유부단한 소심남 혁진이 이럴진대 세상의 다른 남자들이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 말하자면 감독은 낮술이라는 판타지적 매개체에 의해 까발려진 남성의 숨겨진 본능을 아주 통쾌하고 발랄한 기법으로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야유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영화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전복적 상상력
말하자면 독립영화〈낮술〉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빌려 표현한 일종의 가볍고 유쾌한 심리학적 보고서이다.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세 영역이 존재한다. 맨 위가 ‘슈퍼 에고’라는 초자아인데 이는 주로 윤리학적인 고차원의 영역이다. 보통 인간은 ‘에고’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이드’라는 무의식적 영역이 에고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다. 이러한 통제를 벗어나 이드가 자유롭게 활동하는 예가 바로 꿈이다. 그러한 꿈을 통해 인간은 에고에 의해 통제되고 속박당하는 이드의 본질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에고는 빙산의 일각이고 물밑에 잠겨 있는 빙산의 실체가 바로 이드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체 1 중에서 이드가 0.918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얘기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이드의 실체에 대한 가벼운 농담을 아주 상쾌하고 발랄한 서사로 풀어내고 있다. 이 영화의 엔딩 씨퀀스에서 낮술이라는 취생몽사의 상태에서 친구 기상은 혁진의 헤어진 애인인 지혜와 관계를 가졌다고 토로하자 혁진은 노발대발해 그를 다그친다. 그런데 다음 날 혁진을 태워 운전하고 있던 친구 기상은 그 지혜는 혁진의 과거 애인인 지혜가 아니라 혁진의 여동생인 지혜라고 진실을 털어놓는다. 기상의 차에서 내려 서울행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혁진은 그곳에서 다시 사진을 찍어달라는 웬 미모의 여인과 다시 맞닥뜨리며 낮술의 정선 오딧세이는 막을 내린다. 이런 엔딩 씨퀀스의 반전의 반복적 서사를 통해 감독은 모든 남성의 윤리적 리트머스 시험지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저예산 독립영화도 이렇게 상쾌 발랄하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남성의 위선적인 이중적 심리의 세계를 결코 무겁지 않은 풍자적 은유의 터치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감독 혼자서 감독, 각본, 촬영, 미술, 편집, 심지어는 강릉 경포대 횟집 주인의 목소리 연기까지 1인 다역을 감행했다고 한다. 출연진 역시 모두 낯선 얼굴들이지만 강원도 정선의 투명한 겨울 풍광처럼 때 묻지 않은 혼신의 연기로 영화의 상쾌 발랄한 터치에 큰 방점을 찍고 있다. 홍상수 같으면서도 전혀 홍상수 같지 않은 신인 감독의 유쾌한 심리학적 관찰 보고서인 영화〈낮술〉은 불편한 자기 성찰이 아니라 유쾌한 자기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그리고 아주 가벼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우리 자신을 비추고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첫댓글 일상을 전복시키는 흥미있는 영화입니다. 대리만족인 것 같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을 잘 비춰주네요^^
정말 재미있는 영화 평입니다. 쏙 빠져들었어요.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