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밀광복군’ 1980 년 육군본부의 ‘창군전사(創軍前史)’가 발행된 이 책은
지금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실과 군사연구소, 육군사관학교 도서관 등에 비치돼 군사(軍史) 연구
자료로 쓰이고 있다.
1980년 8월18일 육군본부가 펴낸 이 책에서 박정희는 해방 전 만주군으로 위장한 비밀광복군으로 등장한다.
1939년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로 간 것도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이며, 1945년 초 광복군에 가입해
제3 지대장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절한 시기에 일본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는 1979 년 10 월 26 일 김재규와 차지철의 불화로 인하여 흉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사료에 의해 1980 년 8 월 18 일 창군 전사에 기록 되었다.
한동안 박정희가 독립군을 수천명 학살하고, 수백회 토벌에 나섰다는 좌경주의자들의 글을 인터넷에
마구 떠돌아 다녔으나,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에 비추어 보면,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친일의 역사는 이제라도 제대로 밝혀져야 하겠다.
김일성 시절부터 박정희가 죽어야만 적화 통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주사파들과 386 좌파 세력들은 북한 공산당이 날조 왜곡한 기록들을 가지고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지금도 그들은 박정희를 철천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며 활동하고 있다.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
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벅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가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 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 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수 밖에 없다고 한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
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문서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으나,
박정희는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하고 순국 선열들의 미기록까지 철저히 조사하라 지시하였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만약 박정희가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하였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이승만도 아닌 박정희가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 하였다.
김희선 열린 우리당 의원이 자신의 백부라고 환부역조 사기 행각을 벌였던
조선 독립군 영웅 김학규 장군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박정희는 제 2 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이렇게 역사가 왜곡되고 날조되었던 것을 우리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그렇게 박정희를 씹고 또 씹으면서 부관참시를 하여 큰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전용뷰어 보기
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8B%A0
박정희 대통령과 5.16 군사혁명을 함께 한 김구의 아들 김신
박정희와 웃고 있는 김신(가운데)
김신(金信, 1922년 9월 21일 ~ )은 중국의 군인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이며 공군중장, 제21대 교통부 장관,
유신정우회 소속 제9대 국회의원, 중화민국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공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백범 김구와 최준례의 둘째 아들이다. 기업인 김진, 외교관 김양의 아버지이다.
호는 서언(瑞言),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2&printCount=1&publishDate=1989-05-30&officeId=00020&pageNo=5&printNo=20818&publishType=00020
경향신문 1961.05.19 군사혁명위원 32명 명단발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51900329101003
&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1-05-19&officeId=00032&pageNo=1&printNo=4714&publishType=00010
http://study21.tistory.com/category/%EB%B0%95%EC%A0%95%ED%9D%AC%EC%9D%98%20%EB%8F%85%EB%A6%BD%EC%9A%B4%EB%8F%99
<1> 송남헌의 [해방3년사]에 기록된 비밀 광복군 박정희
위 사진은 여운형과 함께 좌익 사학계의 대부였던 송남헌의 <해방3년사>라는 책 표지다.
<해방3년사> 에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 이란 기록이 있다. 송남헌은 박정희 정권때
국가보안법 위반과 시위법 위반으로 2년이나 옥살이를 했던 반박정희 성향이였다.
이 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당대가 아니라 그가 서거한 이후인 1985.9.20에 초판이 발행되고,
1989.3.15에 재판이 발행되었다. 이 책 26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박승환은 국내 항일 지도자로서 여운형과 긴밀한 유대와 연락을 가지면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는
한편,일본군의 조선출신 장교로서는 당시 최고 계급이던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남방전선으로 전출되기 전까지)과 상호 긴밀한 유대를 견지하고
만주국에 군적을 둔 조선출신 장교를 상당수(60-70) 규합하여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그런 한편 그는 일본 관동군의 주력부대가 남방전선으로 이동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패전이
결정적으로 예견된 1944년부터 위에서 말한 조선출신 장교와의 연계를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군의 기밀작전 지도를 탈취하여 엄밀한 계획을 수립한 후 한달에 한번씩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관동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이동한 허점을 이용하여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과의 결합과 인근주재 부대의 통합으로 약 1개 사단병력을 편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군사편성을 모의하고 1945년 8월 29일 국치일을 기하여 국내진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의 항복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만주에서의 박승환을 중심으로 한
조선출신 군인의 국내 진공계획은 유감스럽게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 국내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박정희 전대통령도 있으며>>
송남헌의 "해방 3년사"보다 일년 앞서 발행된 장창국 저 '육사 졸업생’ 역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1945년 2월 9일 만주군 제8단 위문하기 위해 [신 태양 악극단] 찾아 왔다. 박정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광복군 사령관 李靑天(이청천) 장군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學奎(김학규)의 지령을 받았다."
이것은 1967년 광복군이 출간한 도서 "광복군"과도 일치하는 증언이다.
<2> 광복군 김학규 장군과 박정희의 인연
신경군관학교 2기 출신으로 열하성(熱河省)에 있는 만주군 보병 8단 부관(중위)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광복직후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 3지대 ‘평진대대’에 합류했다. 그때 제3지대장이
김학규 장군이었고, 박정희는 제2중대장이었다.
김학규 장군은 열병 등의 신병으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1948년 4월16일 영국 상선편으로 귀국했다.
김 장군은 곧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한독당(韓獨黨) 조직부장에 취임한다.
1949년 6월26일 현역군인이던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저격하자, 안두희의 한독당 입당을 주선했던
김 장군은 배후조종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6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김학규 장군을 서대문 감옥에서 석방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재수감된 김 장군은 4·19 직후 풀려나 1960년 한독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한다.
1961년 5·16 이후 박정희는 옛 상사였던 김학규 장군을 보살폈다. 김 장군을 복권시키고,
1962년 김학규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토록 했다고 한다.
원로 한국학자인 최서면(崔書勉·78·일본거주)씨는 “김학규 장군이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 대통령이 내게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라’고 부탁해 내가 그 분을 등에 없고 가서
국군 병원에 입원시켜 드렸다”면서 “김학규 장군은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광복군 3지대 ‘평진 대대’ 대대장이었던 신현준(申鉉俊·88·미국 거주) 전 해병대 사령관은
“내 아래에서 중대장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학규 장군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자신의 예전 상관을 깍듯하게 모셨다”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정리(情理)를 생각하면, 세상을 ‘친일이다,
아니다’로 재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알게 된다”고 했다.
1967년 9월20일 김 장군이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별세하자,
박정희 정부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케 했다.
<3> 광복군 활동을 입증하는 미국 OSS비밀문서 첫 공개
이 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좌파 역사학자들이 박정희가 광복군과 내통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비밀 광복군은 설로만 있을 뿐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OSS비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 상 박정희가
해방 이전 광복군과 내통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하는 입증 자료가 되고 있다. 즉,
당시에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가운데 탈출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 시기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5관구사령부 보병 8단에 있던 때와 겹치고 있는 시기이다.
(아래 지도 참고)
임시정부의 년도별 이동 경로
또 일본이 망할 것을 알고 국내진공 작전을 세웠던 그 정보는 지청천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의 정보력이라는
정황적 증언들이 많았는데, 그 당시 그런 고급 정보를 제공할 사람은 박정희 뿐이란 설과 지청천 장군의
독자적 정보력 이였단 설로 나뉘지만 전자의 설도 상당히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당시 광복군이
가진 일본군 주둔 배치도는 당시 정보장교였고 지리학에 식견이 풍부했던 박정희가 없이는 입수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 참조)
OSS비밀문서 첫 공개…광복군-미군 對日심리전 합동작전
입력 2003-02-28 18:28:00 수정 2009-09-29 14:20:20
김학규장군
1945년 광복군이 미국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CIA의 전신)과 함께 작성한 심리전
선전문(전단)의 원문이 처음 발견됐다
광복회 김우전 회장은 28일 “재미 사학자인 방선주 박사가 최근 미국 국가기록청에서 발견한
1945년 미국 OSS의 비밀 문서를 입수했다”고 밝히고 이를 공개했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는
미국 OSS가 1945년 4∼9월 작성한 보고서 9건.
여기에는 중국 푸양(阜陽)을 무대로 김학규(金學奎·1900∼1967) 장군이 지휘하던 광복군 제3지대가
미군과 함께 암호문과 심리전 팸플릿을 작성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돼 있으며 팸플릿 문구도 첨부돼 있다.
45년 6월 20일 작성한 보고서는 “팸플릿의 한글 번역을 교정했다”고 밝히고 원문 사본을 첨부했다.
첨부 사본은 당시 광복군 연락장교였던 김 회장이 번역해 기록한 것이다.
‘일본 군수공장에서 피땀 흘리시는 동포에게’라는 제목의 이 선전문은 한국인 노동자에게 ‘태업(怠業)’을 지시하고 있다.
·총 4쪽 분량으로 ‘흙, 쇳가루, 모래를 기계 회전부에 넣을 것’ ‘물, 모래, 오줌 등을 가스통에 넣을 것’ 등
구체적인 방법이 제시돼 있다.
김 회장은 “당시 선전문을 작성한 기억이 또렷하다”며 “이 선전문은 미군이 야전 인쇄기를 통해 중국 내 일본군
점령 지역에 뿌리기로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광복군 제3지대가 OSS와 합동작전을 펼쳤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이 부분의 연구는 자료가 없어 광복군 관계자들의 증언과 회고록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어 객관성 논란이 일어왔다.
광복군사를 연구하는 단국대 역사학과 한시준 교수는 “이번 문건은 광복군 제3지대가 OSS와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자료”라고 말했다.
http://news.donga.com/3/all/20030228/7917949/1
<4> 만주건국동맹과 박정희
해방전 국내 진공을 목표로 군사행동을 하기 위한 건국동맹의 실제적 주역은 만주건국동맹이었고,
만주건국동맹이란 여운형을 추종하던 만주국군 군관 박승환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었다.
미국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8월 중 한반도 침투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은 광복군에 병력 추가 모집을, 그리고 본토에
침투 작전시 협력할 연계 세력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는 민족주의 계열이냐 공산주의 계열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이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박정희 만군 소위에게
국내 진공 계획에 참여하라고 밀서로 지령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여태 모르고 있었는가? 언론의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조차
미주 한인 80 여명이 첩보기관 OSS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60 여년간 감추어 왔다. 일본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요구로
일본 정부가 원산상륙작전에 참전케 한 일본인들이 국익을 위해 그 사실을 평생 비밀로 하여야 했다. 극동 CIA 전신인
비밀광복군의 임무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1961년 5월 극동 CIA 담당자가 혁명 주체는 박정희 장군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미국의 입장은 군사혁명 지지를 기정사실화한 사실을 상기해 보라.) 박정희의 상관이었던 문용채는
비밀조직으로서 만주국군 내에 비밀광복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이렇게 증언한다:
<<"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 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운동단체이다.>>
이외에도 모든 증언들이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당시 태평양전쟁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일ㄹ련의 사건들 및 모든 사건의 정황들이 만주국군 보병 8단 박정희 소위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입증한다.
적어도 만주국군 내에 조선인 장교단이 주축이었던 만주건국연맹이 있었다는 사실을 좌파 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면 여운형은 완전 부정되며, 여운형이 완전 부정되면 좌파의 역사 논리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첫댓글 광주의 한 치과의사는 김대중과 노무현지지자이지만 이 시대 젊은층에게 진정으로 호소하고 있다
"책 좀 보고 공부하고나서 박정희를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