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홍의 영화 속을 걷다>(38)
상처받고 외로운 영혼들의 아름다운 白日夢
- 에릭 포프 감독의 노르웨이 영화《하와이, 오슬로》
김 문 홍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 드라마 | 2005.05.07 |125분>
에릭포프 감독의 오슬로 3부작 중 두 번째
에릭 포페 감독은 1960년 생의 노르웨이 감독으로 스웨덴 스톡홀름 연극학교에서 영화 촬영 공부를 하고 영화계에 입문했다. 1998년에 노르웨이 빈민가의 소년이 범죄에 물들어 가는 내용의 첫 작품《Schaaa》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그 후에 6년 동안은 단편영화와 CF 영화만을 만들며 침묵을 지키다가 6년만인 지난 2004년에 자신의 ‘오슬로 3부작 영화’의 두 번째인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흥행성과 작품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노르웨이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찬탄을 받았다. 이 영화는 그 해에 오스카(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영화상 부문에 노르웨이 대표 영화로 출품된 바가 있다. 대개의 경우 두 번째 작품은 작품성에 있어서 첫 작품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소포모어 콤플렉스’에 시달린다고 하지만, 그가 두 번째로 발표한 이 작품은 그러한 징크스를 깨고 비평과 흥행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보통의 영화 형식과는 다른 기법을 취하고 있는데, 미국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숏컷》이나《메그놀리아》,《21 그램》과 같이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서사 구조(내러티브)의 형식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의 우연적인 별개의 삶을 퍼즐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런 낯선 사람들의 삶의 장면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의미 있는 주제를 구현하게 되는 퍼즐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상처받고 외로운 영혼들의 아름다운 일상적 파편들
우리는 이 영화에 나오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의 우연적인 파편화된 삶의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사 비다르는 의사로서 ‘예지몽’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는 매번 꿈속에서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꿈의 내용들은 반드시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그는 꿈 속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현실로 재현되는 것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역부족이다. 그의 환자 중에 레온인 는 젊은이가 있다. 이 젊은이는 14살의 어린 시절에 오사 는 소녀와 첫사랑의 약속을 하게 된다. 11년 뒤에 성인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 다. 11년이 된 지금 그는 오사뤠 찾기 위헤 길거리의 벽마다 오사뤠 찾는 광고지뤠 붙인다. 그는 오사뤠 만나지 못하면 어쩔까, 또는 오사뤠 만나게 되면 어떻Œ오사까 하고 항상 불안한 나날홄실에뀜다. 그에게는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는데, 마음이 불안하게 되면 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밀려오는 불안감에 오슬로의 밤거리를 정신없이 내달리는 레온, 그런 레온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뒤쫓는 의사 비다르, 산통을 겪고 있는 여자 밀라와 그녀의 남편 프로데를 싣고 밤거리를 질주하는 구급차, 11년 전에 남편과 이혼을 하고 아들 두 형제를 버린 전직 가수 보비는 길거리를 방황하고, 자신들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에 대한 애증의 분노로 역시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형인 미켈과 동생인 마그네, 이런 낯선 사람들이 상처받은 외로운 영혼으로 밤거릴 헤매고 있다. 그 때 산모를 싣고 밤거릴 질주하던 구급차가 바람처럼 내달리던 레온을 들이받는다. 그 사고 현장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낯선 사람들의 모여드는 것으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이 장면은 바로 의사 비다르의 예지몽이다. 이 장면 다음부터는 낯선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이 차례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의사 비다르는 꿈 속의 장면처럼 그의 환자 레온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까 두려워 잠시 자리를 비운 레온을 찾아 밤거리를 몽유병자처럼 헤매기 시작한다. 레온에게는 형이 하나 있다. 그 형은 트리그베로 강도범으로 체포되어 지금 복역중이다. 그는 모범수의 특전으로 동생 레온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헤 간수와 함께 특별 외출을 허락 받는다. 그는 동생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외출을 나왔지만, 사실은 그것을 이용하여 크게 한 건을 한 뒤에 자신의 이상향인 하와이로 도망가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한 편 레온의 첫사랑이었던 오사는 어느 날 갑자기 그와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레온을 찾아 오슬로의 병원을 찾는다.
같은 시간대의 또다른 공간에는 또다른 절박한 사람들이 있다. 산모 밀라와 그녀의 남편 프로데가 바로 그들이다. 밀라는 사내 아이를 출산하지만 아기가 휘귀한 병에 걸려 수술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된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고 어쩔줄을 모른다. 남편 프로데는 자신이 생명처럼 아끼던 기타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팔지만 수술비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은행에 가서 대출을 애원하지만 아직 갚지 못한 돈이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은행을 털기로 마음 먹고 모자와 옷으로 위장하고 은행으로 들어간다.
한 편 레온과 그의 형 트리그베는 교도관과 함께 근처 공원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갑자기 형 트리그베의 난폭한 행동에 동생 레온은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리를 내달리고 형은 그의 뒤를 쫓는다는 구실로 수행 중이던 교도관을 따돌리고 도망친다. 형은 위장을 하고 은행에 침입하며 총을 겨누고 돈을 훔친다. 그 혼란스런 외중에 돈을 훔치러 들어갔던 프로데는 그만 얼결에 은행 바닥에 엎드린다. 길거리를 배회하던 부랑아 미켈과 마그네 형제는 흑인 우유 배달 소녀인 티나에게 어느 집에 편지를 좀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 편지는 오늘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티나는 우유 배달을 끝내고 두 형제의 어머니인 전직 가수 보비의 집에 들른다. 거기서 티나는 외로움과 두 아들에 대한 죄책감에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한 보비를 발견하고 구조를 요청한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보비는 교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큰 아들 미켈의 절규에 가득찬 원망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두 아들을 찾기 위해 오슬로의 밤거릴 헤매게 된다.
레온은 형 트리그베가 차를 내려 불법 여권을 인수받고 있는 사이에 돈뭉치가 든 봉지를 들고 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한다. 꿈에 그리던 첫사랑의 연인 오사가 ‘하와이, 오슬로’라는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레온은 찻집 앞 공원에서 멍청하게 앉아 있는 프로데에게 ‘하와이, 오슬로’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그는 갑자기 돈뭉치가 든 봉지를 공원 쓰레기통에 내팽개치고 프로데가 일러준 장소를 향해 내달린다. 그곳에서 프로데는 레온이 버린 돈뭉치를 몰래 주워 들고 밀라와 아기가 있는 병원으로 내달리고......
찻집에 도착한 레온은 오사를 만나게 되지만, 다시 벅차오르는 불안감에 어쩌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이를 목격한 의사 비다르가 다시 그를 설득하여 안으로 밀어 넣는다. 오사와 레온이 앉아 있는 좌석으로 레온의 형인 트리그베가 들이닥쳐 돈뭉치의 행방을 대라며 다그친다.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한 레온은 다시 오슬로의 밤거릴 질주하고, 의사 비다르는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그의 뒤를 쫓는다. 아기의 수술을 위해 프로데와 밀라 부부가 탄 구급차는 공항으로 가기 위해 밤거리를 질주한다. 전직 가수 보비는 두 아들을 찾기 위해, 두 형제인 미켈과 동생 마그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흑인 우유배달 소녀인 티나는 피곤한 발걸음으로 귀가하기 위해 거리를 걸어가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오토바이를 타고 레온을 뒤쫓던 의사 비다르는 레온을 밀쳐내고 자신이 구급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레온이 구급차에 받쳐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자신의 예지몽의 내용을 바꾼 것이다. 여기서의 기적은 의사 비다르의 헌신적인 죽음이 아니라,상처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영혼이 치유되는 바로 그것이다. 레온과 오사는 서로 사랑의 눈길로 힘차게 끌어안으며 사랑의 감정을 완전하게 회복하고, 전직 가수 보비와 그녀의 두 아들은 서로의 손을 힘차게 잡으며 화해하고, 프로데와 그의 아내 밀라는 꺼져 가는 아기의 목숨에 스며드는 축복 같은 희망의 설레임에 사랑의 눈길을 보내는 등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낯선 사람들의 피폐한 삶이 한 사내의 헌신적인 죽음으로 구제되는 것이다.
애간장을 쥐어짜는 듯한 주제 음악이 흐르며 카메라는 부감으로 오슬로의 밤거리를 롱 쇼트로 잡으며 점점 멀어진다.
영화의 두가지 기능: 교시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
20세기 과학 기술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해온 영화는 대중적인 예술 장르이다. 영화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쾌락적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자아를 성찰하게 하는 교시적 기능이다. 대부분의 상업 영화를 양산하는 미국 헐리웃의 영화는 쾌락적 기능에 층실하고, 자아를 성찰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유럽의 예술영화들은 교시적 기능에 충실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광복 이후부터 80년대까지는 미국의 상업주의 영화 일색이었다. 재미 위주의 상업주의 미국 영화들은 우리나라 영화 관객들의 입맛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미국의 상업주의 영화들은 시장 논리에 충실하여 일관된 멜로 드라마의 서사 구조와 쇼트와 컷의 빠른 전환으로 우리의 관극 태도를 고정시켜 버렸다. 빠른 장면 전환의 영화에 길들여진 우리의 관객들에게는, 유럽 예술 영화의 롱 테이크 화면은 지루하기가 그지 없다. 한 화면 속에 여러 가지 인물과 오브제를 배치해 놓고 그것들의 관련 의미를 통해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것이 롱 테이크 기법이다. 그런데 미국의 상업주의 영화들은 그러한 장면을 조각 조각 분절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사고를 즉물적으로 분절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재미 위주의 영화에 길들여진 우리 관객들은 조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느긋하게 기다리기 보다는 성급하게 결론을 예측하려 하고 일관된 서사 구조를 선호하는 취향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 관객들은 자아를 성찰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영화들에는 넌덜머리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보기의 고정관념화는 독서 패턴마저 바꾸어 놓고 말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 하고 자아를 성찰하게 하는 토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독서보다는, 말초적인 감각만을 추구하는 시드니 쉘던이나 존 그리샴의 작품 같은 상업주의 작품의 독서 경향에 침잠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깐느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같은 예술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은 재미 없으니 보지 말라.”는 낯 부끄러운 말까지 만들어 내고 말았다.
우리 영화 관객들에게는 도대체가 폭넓은 상상력과 깊이 있는 사유를 요구하는 롱 테이크 화면이 생리적으로 싫은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서편제》를 찍을 때 롱 테이크 화면 때문에 고심하고 주저했다는 일화가 있다. 세 가족(김명곤, 김규철, 오정해)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보리밭이 펼쳐진 돌담길을 걸어오는 그 장면은 약 5분 가량의 롱 테이크 화면인데, 과연 우리 관객들의 성급한 취향에 맞아 떨어질 수 있을지 고심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그 장면에서의 노래나 세 인물들의 행동, 그리고 보리밭의 자연 풍광은 우리의 민족적 정서에 맞아 떨어져 별로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의 정서와 다른 유럽 예술영화의 롱 테이크 기법이었다면, 대부분의 성질 급한 관객들은 참지 못하고 극장 밖으로 뛰쳐 나갔을 것이다.
부산의 시네미테크에 보관되어 있는 대부분의 예술영화들은 우리의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은 희귀 필름들이다. 대부분의 영화 수입 회사들이 흥행이 저조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수입하지 않은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세계영화사에 기록이 될만한 영화들은 보지 못하고, 한 번 보고나면 금방 사라질 쾌락적 기능의 영화들에만 목을 매달고 있는 형편이다. 언제쯤 우리는 느긋한 느림의 미학으로 자아를 성찰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영화들을 볼 수 있을지......
아름다운 영화는 우리의 영혼을 淨化한다
에릭 포페의《하와이, 오슬로》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는 아름다운 영화이다. 우리의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하고, 우리에게 지금 이곳의 우리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여운이 있는 영화이다. 주제도 주제이려니와 낯선 사람들의 파편적인 우연한 삶의 장면들을 퍼즐식으로 구성하여 전개하다가, 라스트 신에서는 이러한 모든 낯선 삶의 모습들이 하나의 주제 아래에 모며 통일되게 하고 있는 영화 기법의 참신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이나 동화의 구조에 견주어 볼 때 이러한 기법은 일종의 3인칭 전지자적 시점에 해당된다. 여기서의 ‘전지자적 시점’은 영화 감독의 눈이기도 하다. 한 조각 한 조각의 단편적이고 분절적인 퍼즐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듯이, 이 영화의 분절적인 한 조각 퍼즐 같은 각 개인들의 삶은 아무런 여운을 주지 못하다가 종내 그것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아름다운 삶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분절적 삶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의사 비다르의 이타적 사랑의 숭고함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은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힘이 있으며,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은 우리의 영혼의 숲에 부는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일 수 있다. 노르웨이의 영화인 에릭 포페의《하와이, 오슬로》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영화는 내게 동화나 소설 창작에 있어서 퍼즐식 구성의 참신하고 혁신적인 기법의 방법론을 깨닫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위에 있는 상처받고 외로운 영혼을 지닌 이웃들에 대한 관심을 내게 깨우쳐 준 것이었다.
|
첫댓글 다양한 군상들의 결핍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풀어나가는 기법이
독특하네요.
좋은 평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