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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4월 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수도회] 영원 생명을 향한 갈망과 열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7,51―8,1ㄱ
† 복음 6,30-35
★ 거짓 증언에 의해 고발당한 스테파노가 최고 의회에서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설교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지난날에 저지른 불순종을
상기시키는데, 오늘 독서는 그 설교의 끝 부분으로서, 이스라엘이 구약
시대부터 예언자들을 죽여 왔고 이제는 의로우신 분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였음을 말한다. 스테파노는 결국 돌에 맞아 순교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설명하신다. 표징을 보는 이들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시며,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 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하였다고 최고 의회에 끌려온 스테파노가
지혜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최고 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신
사실과 십자가의 죽음 장면, 그분에 대한 거짓 증언 등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시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모세에게도
순종하려 하지 않았고, 예언자들 가운데 그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마지막에는 그 예언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그분마저
죽였다고 스테파노는 목숨을 걸고 질타합니다. 지금 최고 의회는 율법을
내세워 스테파노를 고발하고 단죄하지만 사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일찌감치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 부활 시기에 우리는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특히 오늘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용감한 행동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 말로 ‘순교’(마르티리아)라는 단어는 본디 ‘증언’을
뜻하지요. 사도행전에서는 ‘증인’들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데 그들은 모두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진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없다면 결코 증인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처럼 다른 무엇을 위해 타협하거나 진리를 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스테파노처럼 순교를 각오한 그 증언이
참되고 힘이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빵을
먹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빵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영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영적인
생명이란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곧 신뢰, 순종, 사랑 등을 말합니다.
이 관계는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생명의 빵을 모실 때에만
이루어지고 완성될 수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영원 생명을 향한 갈망과 열정
2015년 나해 4월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요한 6,30-35(15.4.21)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영원 생명을 향한 갈망과 열정
나는 무엇으로 만족해하는가? 어떤 것을 왜 갈망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인생살이에서 삶의 질과 영적인 성숙도를 가늠하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오늘 이런 점들을 숙고해보자. 불교에서는 인간 실존을 네
가지 형태로 파악한다. 곧, 앉아 있음, 서 있음, 누워 있음, 걸어감. 여기서
걸어간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군중들은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6,30) 하고 묻는다.
이것은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낸 태도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그분께로 ‘가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동일시되고
있다. ‘오다’와 ‘믿다’라는 표현은 모두 예수를 믿으라는 촉구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7,37-38 참조). 신앙은 정체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역동성을 지닌 투신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요한복음에서는 추상적 개념인 명사 형태의 ‘믿음’이라는 단어 대신에
‘믿는다’라는 동사를 통해 역동적인 신앙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한 곳에 머무는 어떤 것이 아니며 어떤 고요하고 안정된 내적
상태만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은 움직임이며,
능동적인 투신이다.
오늘의 제 1독서에서 터지는 스테파노의 외침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이처럼 신앙은 하나의
적극적인 투신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오는 이는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 하시며 당신께로 움직이도록 우리를 촉구하시고
당신 구원의 선물에로 초대하시고 계신다.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네
가지 실존적인 위기를 체험하였다. 곧 이집트 탈출 이후 이집트 병사들에게
쫓기는 긴박한 상황, 목마름, 우상숭배, 배고픔 등이 그것이었다. 영신의
광야에서 우리는 이런 체험을 하며 살아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살과 피’는 죄를 끊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새로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시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 몸이다. ‘생명의 빵’은 예수님의 전생애 곧 그분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전 여정을 통하여 드러난 그분의
가르치심과 행적들의 총체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6,33).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이
엄청난 선물을 받기에 앞서 전인격적인 투신을 하여야 할 것이다. 하루의
시간 안에서 열정을 더욱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 말씀에의 열정, 기도에
몰두, 형제들에 대한 작은 배려들, 우리의 성소에 충실하려는 능동적인
노력 등 그분을 향한 적극적인 몸부림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증표가 아니겠는가.
오늘 독서의 기도 제 2독서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목소리로
노래하라, 마음으로 노래하라, 입술로 노래하라, 거룩한 행실로서
노래하라”고 권고한다. 그렇다. 우리는 온몸으로 투신하고 쏟아 부을 때
그분과 일치할 수 있으며 생명이신 그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열정(passio)이라는 라틴어는 동시에 수난을 뜻한다. 믿는다는 것은
이렇듯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열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마치도 불 속에
던져진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 속에 있는 개미집을 향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드는 개미들처럼 삶의 모든 면에서 그분이 주신 생명의 열기를 쏟아
붓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4.2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60)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 사람이 죄인이 아닙니다.
저를 사랑하고 아낀 것이 저 사람의 잘못일 뿐입니다.
그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보듬어 안지 못하고 말과 행동으로
더 큰 아픔만 안겨 주는 제가 큰 죄인입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에게 돌리지 마소서.
저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그리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저 사람에겐 위로와 축복만 주시고 저를 벌하시옵소서.
오늘따라 저를 아끼고 사랑한 탓에
수많은 아픔을 겪어야만 했을 저 사람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결코 드릴 수 없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이 함께하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상처 깨끗이 씻고
새로이 부활하시길 빌고 또 빕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랑하면 닮는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사도7,51-8,1ㄱ 요한6,30-35
제1독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7,51―8,1ㄱ
복음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5
사랑하면 닮는다.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축구선수 차범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독일에서도 특히 지금도 기억되고 있는 선수라 합니다.
더불어 요즘 독일에서 맹활약중인 손흥민 선수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인터뷰 기사에서 읽은 한 대목입니다.
"차범근이 전설이라면 손흥민은 스타다.“
오늘 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전설이라면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스테파노는 스타입니다.
아니 스테파노뿐 아니라 교회 드넓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예수님을
닮은 무수한 별들이 성인들입니다.
우리 또한 교회 하늘에 성인의 스타가 되도록 불림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닮는다.“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며칠전 집무실에서 ME부부팀 4쌍 8명에게 열강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의자 수가 8개라 사람과 자리가 딱 맞았습니다.
강의후 부부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확인하며 제가 한 말에 모두
웃었지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듯 했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천국입장시 다른 것은 보지 않습니다.
오직 부부가 서로 닮았는지, 또 부부가 예수님 당신을 닮았는지만 봅니다.
정말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닮게 되고 저절로 주님과도 닮게 됩니다.
부부는 한몸입니다. 혼자는 절대 천국에 못갑니다. 부부의 사랑 점수 합한
후 둘로 나눠 평균 60점은 넘어야 둘 다 천국에 입장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사랑으로 깊어가는 부부관계인지, 주님과의 관계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강의 후 얼굴들을 들여다 보니 서로 닮은 부부의 얼굴같아 보였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을 닮아간다'는 말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닮아감으로 괴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대를 이은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을 닮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이래야만 악순환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릴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예들을 믿음과 사랑 깊은 형제자매들을 통해 무수히
목격했습니다. 참으로 혹독한 악조건의 상황속에서도 은총으로 평화롭게
빛나는 얼굴들은 분명 괴물이 아닌 주님을 닮은 얼굴들이었습니다.
말그대로 영원한 생명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들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 예가 스테파노입니다.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과의
사면초가의 싸움 중에도 사랑의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기에, 괴물같은
그들의 얼굴을 닮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마음을 닮은
'주님의 스타' 스테파노입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바로 영원한 전설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닮은 주님의 스타 스테파노를
환대하기 위해 하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다음 스테파노의 임종어가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임종어와 똑같습니다.
다만 하느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을뿐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참 아름답고 감동적인 임종어입니다. 추호의 증오나 원망이 없는 사랑
가득한 그대로 주님의 마음을 닮은 임종어입니다. 평생 삶의 요약입니다.
이렇게 살았기에 괴물들과의 엄혹한 싸움중에도 괴물이 아닌 주님을 닮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고 배웁니다. 바로 스테파노의 순교장면을 그대로 보고 배운 사울을
주님은 당신의 스타로 점지해 놓습니다. 괴물들과의 싸움중에도 괴물을
닮지 않고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최고, 최상의 수행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체성사에의 참여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영원한 전설이자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믿고 모실 때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지닌 주님의 스타가
됩니다. 주님은 매일미사은총으로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하시며
끊임없이 당신의 얼굴을 닮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시편31,17).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인천]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분, 주님
2015년 나해 4월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7,51―8,1ㄱ
복음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5
어제는 아는 지인의 집을 다녀왔습니다. 맛있는 식사와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봄의 기분을 맘껏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지요.
그런데 함께 갔던 어떤 자매님께서 쑥을 캐서 제게 주시는 것입니다. 봄
쑥은 무조건 먹어야 한다면서, 어떻게 하면 쑥국을 맛있게 끓여 먹을 수
있는 지 요리법까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집 주인 자매님께서 쑥국 맛있게 끓여 먹으라면서 직접
담근 된장을 퍼서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마트에서 파는 된장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맛이 다를 테니 직접 담근 된장을 먹어보라는 것이었지요.
저녁식사로 쑥국을 끓였습니다. 그리고 받은 된장을 넣고 끓인 쑥국을
맛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한 요리가 맞나?’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깊은 맛에 감탄을 했지요. 봄 쑥의 향기도 좋았지만, 이를 받쳐주는
된장의 맛이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된장 하나로 이렇게 맛이 완전히 바뀌더군요. 그런데 우리의 삶 역시
완전히 바뀌게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무엇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악을 피하고 선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이전과 다른
삶으로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님께서는 된장
같은 분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보다는 세상의 원리원칙만을 따지면서 주님의 뜻에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삶은 변화되지 못하고, 세속적인 모습 안에서
힘들어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계속해서 떠올리도록
하는 거룩한 미사가 우리 신앙인들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생명의 빵을 모실 수 있기에, 우리는 미사에 참여하면서 나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 미사 안에서 많은 분심이 들기도 하고, 신부님의 강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주변의 어수선함으로 미사를 잘못 드린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식사 메뉴를 모른다고 식사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미사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해서 미사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식사를
했다는 것 자체로 내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미사를 했다는 것 자체로
내 영을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분, 주님 모시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내 자신을 행복한 나로 변화시키고 싶다면 말이지요.
끝없이 나누어도 줄지 않는 것은 사랑뿐이다(앤 머로우 린드버그).
제가 직접 끓인 쑥국. 비주얼은 그렇지만 맛은 정말 좋았어요. ㅋㅋ
어떤 장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야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나무 조각가인 ‘티라쿠시 덴추’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날, 50년간 쓸 목조용 목재를 구입해서 자신의 마당에 쌓아둡니다. 50년간
쓸 목조용 목재를 구입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앞으로 50년 동안
조각하겠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렇게 목조용 목재를 구입했을 때
그의 나이는 자그마치 100세였다고 합니다.
언제 주님 앞으로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갈 때, 나중에 할 후회들을 조금이라도 줄이게 할 것입니다.
제가 방문한 집의 된장독. 엄청나죠?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할례 먼저
2015년 나해 4월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복음: 요한 6,30-35
< 할례 먼저 >
프랑스의 작가 까뮈는 ‘오해’라는 작품에서 이런 내용을 소개합니다.
한 어머니가 남매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어린 시절의 가난한
생활을 못 견뎌 집을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강변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는데 돈을 많이 모으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무서운
범죄를 저지릅니다. 투숙객에게 수면제를 먹여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간 아들이 성공하여 오랜만에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있는
마을로 와서 자기 신분을 감춘 채 여관에 투숙합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아들인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날 밤에도 수면제를 먹여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발견된 그 청년의 짐 속에서 나온 신분증을
보고 두 모녀는 자신들이 살해한 남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며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절망한 어머니는 아들을 던져 버렸던 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합니다.
어떤 이들은 탐욕, 어떤 이들은 교만, 또 어떤 이들은 욕망이라는 눈꺼풀을
쓰고 살아갑니다. 만약 그들이 그것들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오염되지 않은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세상도 그렇게 명확하게
보기 힘든데 하느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또한
처음에는 민족주의적 전통신앙에 취해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더군다나 감당할 수가 없어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용서하라는 말을 성당에서 한다면 다 그 말을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은 귀를 막아버리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노려보기까지
합니다.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하기 위해서는 귀의 할례, 눈의 할례,
마음의 할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징표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성조
아브라함 때부터 계약의 징표로 할례를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오늘도
역시 스테파노는 할례에 대해 말합니다. 육체적인 할례는 받았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 백성에 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성령과 관계됩니다. 성령으로 할례 받지 못한 이들은 더 이상
성령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설교는 이런 두 반응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고 하나는 귀를 막고 공격을 해 오는 반응입니다.
바오로는 하나니아스의 안수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할례입니다. 그 이후엔 성경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먼저 할례 받지 않으면 성당에 다니던 성경을 읽던 자기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엔 귀를 막아버립니다.
그러나 할례 받은 이들 특징은 교회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로마 코르넬리우스 백인대장의 집안을
할례 시켰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상징인 베드로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할 때 세례를 주지 않았는데도
그들에게 성령께서 내리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과 오관의 할례를 하시고
나서 밭이 비옥해지면 말씀의 씨를 뿌립니다. 만약 교회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면 아직은 온전한 할례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에 속하기 위해 우리는 영적 할례를 받았는지 그래서 영적인 것이
보이고 들리는지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부활 제3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4월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7,51―8,1ㄱ
복음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5
요즘 드라마에 중에는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것들이 있습니다. 왕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정부의 대신들은 당리당략이
먼저였기 때문에 상대방의 주장이 옳다할지라도 반대하곤 하였습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7년 동안 조선은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전란에 빠진 조선을 구한 것은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습니다. 많은 의병들이 왜군들과 싸웠고,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피난을 다녀온 왕은 함께 도망갔던 신하들을
공신으로 세웠습니다. 이름 없는 의병들은 나라를 구한 공신의 자리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1950년 한국전쟁을 겪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고, 지금은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제품은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짧은 시간에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외국에
나가면 한국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경제성장의 주인공은 산업화 세력이라고 말을 합니다. 당시 정부를
이끌었던 정치 지도자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우리의 형님과 누님들이 고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주린 배를 움켜지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독일로 가서 광부가
되었고,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월남으로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중동으로 가서 거센 모래바람을 이겨냈습니다. 그분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그분들이 바로 지금 화려한 도시의 뿌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스테파노는 구원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권력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밝히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권력자들은 스테파노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는 권력을 가진 이들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들을 헌신한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21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상이 될 거라고 합니다.
첫째, 급속한 변화입니다. 가전제품, 핸드폰,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우리는 전 세계인이 하루에 만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는 질병이
급속하게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사스, 에이즈, 조류 독감 등)
둘째, 인간의 능력이 커지지만 그와 비례해서 인간의 자기 조절 능력이
커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치관을 상실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마약 중독, 테러, 전쟁이 더 늘어납니다. 낙태, 유전자
조작, 인공 수정 등이 윤리적인 검증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셋째, 자원을 개발하고, 경제가 발전해서 인류는 충분히 먹고 살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만 빈곤층은 더욱 늘어나고 있으며 영양실조,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납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넷째, 인류는 연대를 강조하고 주장하지만 세상은 더욱 분열되고 있으며
갈등의 골은 더욱 커져갑니다. 사상과 이념, 진보와 보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지역감정이 있고, 보수와 진보가 갈등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의 사상이나 철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사상이나
철학이 혼재하는 다원주의 사회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도 늘 바른 길을
찾아가고,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희망을 찾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진리와 마음의 양식을 더 귀하게
2015년 나해 4월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7,51―8,1ㄱ
복음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5
진리와 마음의 양식을 더 귀하게
아기는 배고프면, 싸면, 아프면 웁니다. 몸의 반응이 제일 우선입니다.
조금 철이 들면서부터 단계적으로 몸에 관한 걸 가릴 줄 알게 되고요.
성숙해 지면서는 몸의 불편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생깁니다.
성숙하여 교양이나 예의를 배워 내 몸보다 환경을 살피고 분위기도 봅니다.
더 성숙하여 정의와 책임감까지 생기면서 남의 생명까지 돌보려 하지요.
이에 생각과 믿음이 더해지면 진리와 마음의 양식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천상의 양식을 갈망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요한 6,30-35)
제1독서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7,51―8,1ㄱ
복음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5
천상의 양식을 갈망하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세례식 미사에서 성체와 성혈을 모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일 뒤 한 분이 “신부님, 미사 때 사용하는 포도주는
일반 포도주와 무엇이 다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 했더니 “첫 영성체를 할 때 그 맛이 너무 감미로워서 미사
때 사용한다는 포도주 마주앙을 사다 마셔봤는데 그 때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맛이 좋았으면 그런 생각을 다
하였을까? 생각해 보지만 분명 술이 아니라 ‘주님의 피’이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허물을 용서 받고 새롭게 태어나며 첫 영성체를
하였으니 그 감동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떤
감각적인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마음의
뜨거운 감동과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 당신을 빵으로
표현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빵을 찾아 나선 군중에게 빵으로 다가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빵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군중에게 스스로 빵이
되겠다는 일종의 ‘눈높이’식의 깨우침을 주시려는 것입니다(박병규).
예수님께서는 빵인 당신을 통해 군중이 배부르게 되길 바라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두를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친히 생명의 빵으로 음식이 되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너무 높은 분으로 계시면 우리가 감히
접근하기가 어렵고 일회적으로 오시면 잊어버릴 수가 있기에 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안배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분으로 계십니다. 그러니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멀리 찾지 마십시오. 어디 계시냐? 고 묻는
바로 여러분 앞에 사랑으로 계십니다.
성 비오10세는 “영성체는 천국으로 가는데 가장 빠른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장 쉽고 안전하고 빠른 길은 성체를 모시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천상 영복의 즐거운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도록 해 주시며 천상행복을 주시는
주님을 모시는 일에 더 열심 해야 하겠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병중에 영성체를 한 감동을 “작은 성체 조각을 영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것조차 삼키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모시게 된 기쁨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첫 영성체 날처럼 울었습니다.”
하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마다 그런 마음이기를 바라며
앞으로 우리 모두가 이런 뜨거운 마음으로 생명의 빵을 모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어떤 세상의 양식보다도 천상의 양식을 갈망하게 되기를
희망하며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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