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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
[수도회] 목자와 삯군의 차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4,8-12
† 제2독서 1요한 3,1-2
† 복음 요한 10,11-18
★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게서 온다고 선포한다.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바로 그분이 우리 구원의 원천이
되신다(제1독서).
★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가 아직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기에 하느님 자녀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온전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우리도 언젠가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시며, 흩어진 양들을 하나로 모아 당신의 양
떼가 되게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문이다.”, “나는 길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는 형식으로 “나는 ……이다.”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나는 목자다.”가 아니라 “나는 착한 목자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쁜 목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나 즈카르야서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있었던 나쁜 목자들을 비난합니다. 목자가 약한 양은 전혀
돌보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튼실한 양을 잡아먹거나 양털을 깎아서 돈만
벌려고 한다면 분명 나쁜 목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나쁜 목자들을
없애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착한 목자를 보내시겠다고, 아니 당신께서
몸소 양들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양털만 깎아 팔아먹는 나쁜 목자가 아닌,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에는 여러 가지 행사도 하면서 많은 젊은이가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도 하겠지요. 목자가 되려고
한다면 반드시 착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잘못된 것입니다. 따뜻한 양털 덮고
세상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목자가 되는 것은 성소가 아닌 하나의 직업일
뿐입니다. 착한 목자가 되려면 먼저 침묵과 인내 가운데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성소 주일에 복자 바오로 6세 교황님과 함께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사제들에게 넓은 마음을 주소서. 침묵
가운데 힘차게 타이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온갖 불미한
야심과 덧없는 인간 경쟁을 전혀 모르는 마음, 거룩한 교회만을 걱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보려는 넓은 마음을 주소서 …….”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목자와 삯꾼의 차이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목자와 삯꾼의 차이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조차도 그 존재 이유인 헌신적이고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위해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증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가난과 소외와
불의에 맞서는 ‘양 냄새나는 목자’, ‘국민과 함께하며 국민의 아픔과
시련을 어루만져주는 정치지도자’,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서로를 따뜻이
품어주는 손길이 있어 소박한 행복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그리운 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양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양떼를 잘 알고
친히 하나하나 생명을 돌보시는 목자로 표현된다. 당시 팔레스타인
관습에 따르면 여러 목자의 양떼들이 밤중에는 한 우리에 갇혔다가 날이
밝아 목자들이 오면 각기 자기 목자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을
따라갔다. 예수님은 ‘삯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착한 목자’이시다(10,11).
‘착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착한 목자는 양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자기 양들을 잘 알며(10,14) 헌신적이며 사랑으로
책임을 질 줄 알며, 목숨까지도 내놓는 희생을 감수하는(10,11. 17)
지도자이자 동반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0,1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밖의 ‘다른 양들’도 그분의 목소리 곧,
복음 말씀을 듣고 모이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란 미래형 표현은 일종의 예언으로서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는 약속과
확실성을 시사한다. ‘착한 목자’는 ‘모두’를 사랑하며, 그 사랑은 끝이
없다.
삯꾼은 착한 목자와는 전혀 다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0,12-13)
삯꾼은 양들과의 친밀한 내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므로 무관심하며
(10,13) 헌신적이지 않으며 오직 품삯과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한다.
이런 삯꾼의 모습은 영광만을 서로 주고받는 유대 지도자들(5,44; 12,43),
율법을 모르는 이들을 저주하거나(7,49)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는
바리사이들(9,22. 34)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국민과 하느님 백성들에게는
무관심하고 사랑이 없으며, 자신의 안위에 영달과 출세만을 추구하는
지도자들도 없지 않다. 사랑으로 섬기고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양
냄새나는 착한 목자, 사랑의 지도자, 더불어 삶을 호흡하는 진정한
동반자는 어디에 있는가? 허허로운 들판처럼 텅 비어 있고, 외딴 섬의
황혼처럼 쓸쓸한 외로움과 씁쓸함이 밀려오는 그 자리에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적인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지도자와 동반자를 찾기
어렵다면 ‘나’ 자신이 ‘먼저’ 그런 존재가 되어보는 것은 어떤가? ‘나’를
떠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손길을 내밀고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시간과 땀과 재물을 내어놓고 생명을 주고받는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권위는 진정한 사랑 실천에 있는 것이지 ‘이름뿐인
직함’에 있지 않으니... 나 자신부터 ‘삯꾼’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4.2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요한 10,11.14)
성소주일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 부르심"(聖召)을 기억하고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불림받았습니다.
서약을 통하여 "수도자"로 불림받았고 서품을 통하여
"사제"로 불림받았습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에 어떻게 화답해야 할까요.
그 모범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이 보여주셨지요.
자신이 돌보도록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 여러분이 가장 착한 목자를 닮으셨군요.
수도자, 성직자들은 이 성소주일의 주인공인듯 하지만
그 성소를 오히려 잘 못 살고 있기에 그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 주라고 하는가 봅니다.
오늘 여러분이 알고 있는 수도자, 성직자
한분한분을 떠올려 보시고 그들을 위해 주모경 한번만 바쳐주세요.
저를 위해서도... 고맙습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착한 목자 -예수닮기, 예수살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이민의 날) -
인보성체수도회 피정지도 6일째- 사도4,8-12 요한10,11-18
제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8-12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
복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착한 목자 -예수닮기, 예수살기-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이며 이민의 날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은 성소자들이 많이 배출될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착한목자 영성은 비단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물질주의가, 세속화가 만연되어갈수록 예수님을 닮은 착한목자의 영성을
사는 이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세상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말로써 전하는 예수 전도는 소음으로 들리게 되었으니,
예수닮기와 예수살기를 보이라'고 신자들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저는 인보성체수도회 피정지도차 와서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은
인보성체수도회 창립자 착한목자 윤을수 성인 신부님(1907-1971)을
만났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닮기와 예수살기를 전생애의 목표로 삼아 사셨던
신부님의 감동적인 평생 삶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평생 불쌍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은
순교적 삶을 사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알고 보니 큰형 윤갑수와 사촌형
윤복수도 6.25사변시 순교한, 순교자 집안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김홍섭 판사가 작사한 윤을수 신부의 사제서품 은경축 축가가
그대로 착한목자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탁덕의 마음 하늘로 뻐친 정성/사랑과 겸손 박애의 높은 뜻을
정히 받으사 임의 뒤 따르시니/거룩한 세월 아, 二十有五年
2.
날에 날마다 달에 또/해를 이어, 살이 닳도록 핏줄이 마르도록
꽃다운 계절 세락(世樂)과 휴식과(休息果)를 헛되이 여겨
분토(糞土)로 바리시니
3.
자애 깊으신 영혼의 어버이여/착한목자요 우리에게 끼친 사랑
많고 많은 총은을 베퍼 주사/당신 공훈을 천상에 빛내소서.
저도 작년에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을 지냈지만, 은경축 행사에 이런
학덕이 높은 김홍섭 판사 같은 분에게 축시를 받을 사제가 몇이나
될런지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은경축 상본의 성구는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였고
제 은경축 상본의 성구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인데 서로 일맥상통하는 성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통 쏟아 실천했던 신부님의 평생 삶이셨습니다.
신부님의 자전적 고백도 감동입니다.
"나는 참되이 살았다. 거짓이 없었다. 속임이 없었다.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침이 없었다. 누구보다 양심의 밝은 눈은 피할 수도
없고 그의 맑은 소리는 아니 들을 수도 없었다.“
전쟁 고아원 아이들을 돌볼 때 꼬마 영자에게 했다는 말에서도 신부님의
깊은 영성을 감지합니다.
"눈을 감아 보아라.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없어지는 거야.
눈을 떠 봐.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아름답단다.
네가 사랑해야 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 보이는 것은 다 네 것이다."
참으로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착한 목자 윤을수 신부님이십니다.
평생 예수닮기와 예수살기에 진력한 결과입니다.
저절로 눈길은 참 좋으신 착한목자 예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1독서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예수님 고백이 감동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아, 저는 예수님처럼 윤을수 신부님도 사람들의 무지와 오해로 버림을
받았지만 인보성체수도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다는 시편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고백은 또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예수님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착한목자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 말고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바로 성인들이, 윤을수 신부님이, 수녀님 여러분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매일미사때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마음 깊이 되뇌어야할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은 착한목자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파스카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나는 착한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매일 사랑의 성체성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진리입니다. 바로 당신
양들인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놓으심이 바로 성체성혈의 선물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착한목자 예수님과 우리의 우정
관계입니다.
윤을수 신부님처럼 매일의 미사은총으로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갈 때
예수닮기와 예수살기도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을수 신부님의 한자 이름을 딴 새감연구소의 '새감'이란 호칭도
심오합니다.
'새(乙:을)가 물가를 감돈다(洙)', 결국 끊임없이 미사가 거행되는
생명수의 제단을 감도는 영혼을 상징하는 이름이요 우리 모든 영혼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착한목자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생명의 물가에 감도는
새감들인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성소주일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제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8-12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
복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는 자매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사제로 사는지 24년이 되어 가는데 어떻게 지낼 만한지요?”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지낼 만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제 생활이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시장에서 물건 바꾸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이런
이야길 하시더군요. 둘째 애가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데 사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참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대답도 하기 전에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친절하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마인드로 접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내 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1년이
지나도록 한번 입지 않는 옷도 있습니다. 몇 년 째 듣지 않는 음반도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여행을 가면 따로 방을 마련해 주시는 교우들의 배려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다른 분들은 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사제라는 이유로 음식을 갖다 줄 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자가용으로 모시러 오고,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아니라고 지하철 타고 버스타고 간다고
말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은 죽어가기 때문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안도현님의
‘가을엽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 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며, 나의 모든 것 주님께 돌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착한 목자의 미움 받을 용기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복음: 요한 10,11-18
< 착한 목자의 미움 받을 용기 >
‘죽기 전에 답해야 할 101가지 질문’이란 책에 ‘천직을 찾았는가?’
라는 제목으로 리사 랭이라는 작가가 기고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리사
랭은 나이 일흔을 바라보지만 자신의 첫 책을 지금에서야 출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은 한 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용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글을 쓰는 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현실은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대학은 영문학을
전공하여 졸업 후 영어 선생님으로 매년 같은 문법 수업만 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따분한 일을 견딜 수 없어 얼마 만에 그만두고
기자로 취직을 했지만 그 분야의 소식을 전하는 수준의 글밖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넘게 해 온 직업이
출판 편집자였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나 편집을 하는 것이나 샴쌍둥이와
같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편집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믿고 그렇게 생계를 꾸려온 것입니다.
30년 편집자로 살고 승진하여 이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작가들을 찾는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심한
고공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못합니다. 미국 전역을
버스만 타고 며칠이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버스에서 자신의
출판사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유명한 여행 작가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 하던 도중 그녀도 비행기를 타는 것을 무척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안 돌아다녀본 곳이 없는 전문
여행 작가인데도 비행기 공포증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무섭고 싫은 비행기를 어떻게 매번 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직이니까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사실은 지독한 배멀미쟁이었어요.”
‘천직’. 리사 랭에게는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직업도 목숨을
걸 수 있을만한 ‘천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고 비행기를 탔고 그렇게도 소원하던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도 그 일 자체에 목숨을 걸 수 있다면 그것이
하늘이 내린 천직인 것입니다.
천직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직업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직업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저 ‘삯꾼’으로 살고
있습니까? 삯꾼이란 돈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직’은 돈이 아니어도 그 일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을
만큼 그 일을 사랑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단 하나의 그림만이
팔릴 정도로 인기가 없었지만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돈보다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여건상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굶어죽어야 하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원하지는 않지만 돈을 주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착한목자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즉, 성직이란 천직이란 뜻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맡겨주신 일이기에 천직인 것입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어떤 다른 보상을 원한다면 그는 삯꾼일 것입니다.
삯꾼은 돈에 관심이 있지 양에 관심이 없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삯꾼의 특징은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사제로서 떠받들어주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이런 유혹은
사제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봉사하는 모든 이들이 겪게 됩니다.
‘죽기 전에 답해야 할 101가지 질문’에 새러 버그먼이란 자매는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하는가?’란 제목으로 자신의 지나친 인정받고 싶었던
욕구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였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10월이면
성직자에게 감사하는 날이 있었는데 오직 그 날만 되면 힘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자들이 모든 영광을 받을만하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서러워 견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누구 하나 고생했다고 선물을 주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카드와 선물 등을
사목자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책상에 선물과 카드가 수북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축하해 주고 있던
어느 날, 한 자매가 수고한다면 봉투를 하나 주었습니다. 선물인줄 알고
열어보았는데 교리를 위해 걷고 있는 휴지심들이 잔뜩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바라며 봉사생활을 해 왔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돈만 바란다고 삯꾼이 아닙니다. 보상을 바라면 다 삯꾼입니다. 보상 중에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가장 큽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자신이 치는 양들을 통해서 얻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자들이 자신을
싫어할까봐 봉헌이나 죄나 지옥과 심판 같은 것들은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그저 이 세상에서 잘 살게 된다는 희망이나 위로의 이야기만 합니다.
그렇게 신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강론만 하며 신자들의 애정을 구걸하는
목자들이 돈만 바라는 목자들보다 더 무섭습니다. 돈만 바라는 삯꾼은
양들이 바로 눈치를 채고 조심하는데, 그들의 호감을 얻으려는 목자들은
그들을 꾀어서 잘못된 방향으로 단체로 이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절에 가서 이런 인상적인 홍보 구절을 보았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어쩌면 요즘 종교들이 대부분 이런 현세적 이익을 얻기 위해 부수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그러는 중에 하느님도 그런
분으로 전락시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잘 살게 해 주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심부름을 해 주어야 하는 금송아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화를 이끄는 목자들은 인기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독이 되어 전체 교회를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결코 건들지 않는 인간의 가장 존엄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유’입니다. 이 자유 때문에 스스로 지옥에 가려고 믿지 않는
이들을 구원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도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그 자유를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워할 수 있는 자유를 존중하는 목자가 진정으로
양떼를 사랑하는 목자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꺼리를 놓아두셨고 또한 인간을 지옥에 가도록 놓아두기 때문에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강요하지
않는 애정을 목자들이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양이 계속 우리 밖으로
나가면 막대기로 양들을 미움 받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들어 높임을 받는 것이 하느님 눈에는 가증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 하지만 절대 애정을
강요하지 않고 할 말을 하는 목자인 것입니다. 누구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고 애정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사랑을 빙자한 삯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부르심에 응답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요한10,11-18)
제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8-12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
복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부르심에 응답하시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습니다. 스스로 내놓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소’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이전에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기 부름 받은 대로 그 부름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에로 부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 몫을 다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안 되겠습니다.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기에 노력해야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면 그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느니만큼 특별성소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 가야
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 하고 제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째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가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손위 누나가 공무원 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께서 어머님께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 이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 것을 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 깨나 걱정이십니다. 이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 그러면서 지금도 매일 기도하십니다. 가끔 집에 들를 때가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어머니께서 기도하시면서 꼬박 꼬박 졸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한번을 몇 시간을 걸려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 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래요. 당신이 할 것은 다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그래도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자동차 옆자리에 여자 신자 분이 앉으신 것을 보고는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다 보지마라’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미국 교포사목
중에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 할 때 반대 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다’
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어미 생각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째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 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서 어울리는 네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응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이해타산으로 썩어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희생으로 헌신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성소자발굴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물질적인 후원에도 마음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은 항상 제일 좋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도구가 될 사제나 수도자도 자식 중에 제일 나은 자녀를 선택해
주시도록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직자, 수도자의 길이 성스럽고
존경스럽다고 하면서도 자녀를 봉헌하시라고 하면 얼굴색이 확 변하는
분도 계십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좋긴 좋은데 내 자식은 말고 다른 자식
중에서 나오길 바랍니다. 그런 생각을 거두시고 내 가정에서 성직자,
수도자가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하길 희망합니다. 성소는 본인과 그 가정,
이웃에게도 하느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더 많은 젊은이가 하느님의
선물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받아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베네딕도16세 교황님께서는 "성소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며, 우리는
이 하느님 사랑에 삶을 열어젖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온전한 자기 헌신을 할 때 성소가 자랄 수 있다."
하시며 "기도하고 하느님 말씀을 열심히 읽고, 성찬례에 자주 참례할 때
우리는 이웃안에서 주님이신 그리스도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시며
말씀에 대한 사랑과 미사참례를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가정은 하느님
나라에 봉헌된 생활을 위한 성소의 일차적이고 가장 훌륭한 못자리"
(가정공동쳬 50항)라고 말씀하시며 "젊은이들이 가정 안에서 사제직과
봉헌생활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소, 거룩한부름의 주체요, 협력자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모든 성소의 모범이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부르심에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
라고 대답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이끄십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커다란 용기로
마리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려놓으시고 당신 삶의 계획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께로
향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계획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며 서둘러 길을 떠나 다른 이들을 찾아 가려는
바람을 키웁시다(루카 1,39 참조).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 모두를
보호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간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제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8-12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
복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오늘까지 새벽 묵상 글을 쉰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묵상 글을 올리니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사실 어제 저녁에 교육은
끝났습니다. 3일 동안 매일 9시간 이상의 교육을 받아야 하다 보니, 어제는
시간이 없어서 도저히 올릴 수가 없었고 오늘은 힘들어서 좀 쉬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교육도 없는데 그냥 쉬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과
더불어, 몸이 힘들다고 신앙생활을 쉰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특별한 일도 없는데 묵상 글을 쉬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오늘 역시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의 잠재 역량’에 관한 실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서로 모르는 6명을 선발해서 ‘정해진 장소로 함께
이동하세요.’라는 미션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이동을 하던 중에
리더가 나오고, 또 이 중에서는 그 리더를 따라서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소극적인 사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지에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여러분을 포함한 6명 중에서 리더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누가
소극적이었습니까? 그들을 종이에 적어보세요.’
사람들은 겉으로 보인 데로 리더와 소극적인 사람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진행자는 이 둘을 불러서 설문조사의 결과를 정반대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즉, 리더 역할을 한 사람에게는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당신을 가장 소극적인
사람으로 선택했다고 말해주었고, 소극적인 사람에게는 당신이 가장
리더의 모습을 보였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이제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도록 했습니다. 과연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까요? 정반대로 가르쳐준 설문조사 결과대로 행동하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리더 역할을 스스로 담당했던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사람은 적극적인 리더의 모습을
담당했습니다.
누구나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잠재능력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는 가운데 이끌어낼 수 있음을, 반대로
질책과 무시를 하게 되면 잠재능력은 전혀 일어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 실험을 보면서 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었을까요? 인정, 칭찬일까요? 아니면 질책과 무시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했을까요? 사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항상
힘이 되어주고 위로를 주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는 날이지만, 특별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힘을 쏟아야 하는 사제, 수도자들의 성소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종종 인간적인 측면에서 쉽게 판단하고
결론 내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너는 안 돼. 네가 무슨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부르심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역할은 기도하면서 그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는 인정, 칭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왜 이리
많을까요? 그런 부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 긍정적인 말과 행동,
그리고 인정해주고 칭찬하면서 서로가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키우는 방법을 모르면 좋은 관계도 곧 시들어집니다. 소통은
그것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팃닛한).
가려진 것 너머에 있는 큰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제들이여(베네딕토 16세 교황)
사제들이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여러분에게 맡겨진 신자들과
연대하며, 겸손한 삶을 사십시오. 모든 이를 섬기십시오. 곧 본당과
고해소에서 만나기 쉽도록 항상 대령하고, 새로운 신심운동과 단체들을
지도해주고, 가정을 돌보고, 젊은이들과 유대를 소홀히 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말해야 하고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성령께서 제시해 주실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사제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힘인데, 솔직히 다른 외적인 것들을 통해서만 힘을
얻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제 자신의 성소를 다시금 떠올리면서 믿음의 생활을 마음 안에 품어
봅니다.
성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오늘입니다.
◈ [서울] 돈을 탐냈다면 나라일꾼 아닌 삯꾼들이지요.
2015년 나해 4월26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제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4,8-12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
복음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18
돈을 탐냈다면 나라일꾼 아닌 삯꾼들이지요.
사랑하고 미워하고 등 ‘돈 때문에’라는 게 결론일 때가 많습니다.,
권력이나 명예욕으로 돈을 탐냈다면 나라일꾼 아닌 삯꾼들이지요.
오히려 연구하고 노동하여 벌며 사는 사람들이 나라일꾼들입니다.
아버지는 가정 부양 때문에 어머니는 자녀들 때문에 일하지 않습니까?
이런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에 위험 무릅쓰고라도 온 몸 바치는 거지요.
인간도 자녀를 위해 헌신을 하는 데 아버지 하느님이야 더하시지요.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요한 10,12~1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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