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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수도회] 어디서나 모두를 품어주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11,1-18
† 복음 요한 10,1-10
★ 할례 받은 신자들은 베드로에게, 그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비난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일이 주님의 명에
따른 것임을 설명한다. 베드로 또한 처음에는 이방인의 집에 가거나
그들에게 세례를 주려는 마음이 없었으나, 환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정하게 여기지 않으심을 알고 로마인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 것이다(제1독서).
★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으며,
당신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문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모두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나 예루살렘
신자들보다 코르넬리우스의 처지에서 다음 얘기를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헌혈을 하러 갔더니 어떤 지역에 살았다고 “영구 배제”랍니다. ‘영구
배제’, 그 표현이 너무 강해서 5년이 지났는데도 잊히지 않습니다.
유다인과 이방인의 관계에서 이방인의 위치가 바로 ‘영구 배제’였습니다.
우리는 본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식사라도 하면 부정을 타게 될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유다인이었고, 그래서 이방인의 집에는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처음에는 사도들을 비롯한 유다인들이
‘영구 배제’ 대상이던 우리 이방인들을 초기 교회 공동체 안에 어렵사리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환시에서 본 짐승들을
잡아먹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이방인들을 공동체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인간적 저항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장벽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양들의 목자이며 문이신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모두 그 안으로 들어와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가 ‘영구 배제’였다가 교회에 받아들여진
이방인들임을 생각하며, 교회와 교회 안의 모든 공동체는 상대방을 사려
깊게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분열과 배척을 극복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 역할을 해야 하겠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 뿐 아니라, 그분
말씀의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라나서서 그 말씀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새롭게 시작되고,
그 덤으로 평화를 넘치게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어디서나 모두를 품어주는 사랑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10,1-10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는다.”(요한 10,9)
어디서나 모두를 품어주는 사랑
불교에서는 있지도 않은 비실재를 있는 것처럼 상상하여 갖가지 망상을
일으키는 ‘분별심’(分別心)을 허망분별이라 하여 경계한다. 분별심은
이것저것 분석함으로써 망상을 일으키고 번뇌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쪼개고 대립시키는
내적 작용들을 소통보다는 폭력과 단절을 불러와 영적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는 목자이며 문이시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이 아니라
목자와 양들이 드나드는 문에 비유하신다. 곧 참된 목자란 문인 당신을
통하여, 곧 당신의 이름과 권위로 백성들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참된 목자는 주고 돌보기보다는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몰래 찾아드는 도둑과 강도들과는 달리 맡겨진 양떼를 풀이 많은 목장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목자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10,3) 이 말씀은 양에 대한 목자의 특별한 애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10,3-4)
늘 어디에서든 함께하면서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는 목자의 음성을 양들은
사랑으로 알아듣는다. 사랑이 양떼를 따라오게 변화시킨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10,9) 하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10,10) 오셨다. 문이신 그분은
당신을 통한 구원의 은총을 유다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주신다.
목자인 예수님께서는 양우리 밖과 안을 오가며 양들을 돌보고 생명으로
이끄신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은 양우리 안에서든 밖에서든 다를 바
없다. 어느 곳이든 주님의 영과 사랑이 쏟아지고 있으며, 주님은 누구든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따라서 ‘누구든지’ 문이신 착한 목자
예수님께로 다가가 그분과 더불어 하느님 안에 머문다면 생명을 얻게
된다.
우리도 복음을 선포하고 영성생활을 하면서 폭력과 단절을 불러오는
이분법적인 사고, 흑백논리, 비합리적 사고를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성과 속, 초자연과 자연, 교회와 세상, 영혼과 육신,
선과 악, 신앙인과 비신앙인, 우리 종교와 타종교 등을 대립시키고
배척하는 때가 참으로 많다. 내가 좋아하고 내 마음에 드는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싫어하는 대상에게는 냉정하고 거리를
두고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참 신앙은 이제 좋고 싫음의 차원을 넘어
모두를 끌어안는 복음적 통합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타자’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사려 깊게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폭력과 단절을 부르는 대립과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2015.04.2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9)
우리 주위엔 문이 참 많지요?
집에만 해도 대문이나 현관문이 있고 방마다 실마다 문이 있고
또 창문도 있습니다.
왠 문이 이렇게 많을까 할 징도로 세어보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다 필요하니까 있겠지요.
문은 분리와 차단, 사생활 보호의 역할을 합니다.
보기 흉한 부분을 감추어 주고 소음을 방지하는 역할도 합니다.
창문은 햇빛을 받아들이고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하십니다.
양들이 안전하게 마음놓고 먹고 놀 수 있게 해 주시겠답니다.
여러분은 부족함이나 걱정스러운 것,
두렵거나 아쉬운 것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문이신 주님께 가십시오. 그 문 안으로 들어가시면
안전하고 행복하고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 문을 바라보며 문이신 주님을 묵상하며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위한 작은 문이 되어드리는 멋진 날 되십시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인보성체수도회 피정지도 7일째) 사도11,1-18 요한10,1-10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8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
오늘 강론 주제는 '벽(壁)이 변하여 문(門)으로'입니다.
참으로 재미있고 풍부한 주제입니다.
길을 찾는 사람이듯 문을 찾는 사람입니다. 방이나 성전에 들어가서도
우선 눈길이 가는 것은 창문입니다. 벽을 볼 때는 답답한 마음이, 문을 볼
때는 활짝 열린 마음으로 변함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 역시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문같이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닫게 하는 벽같이 불편한 사람도 있습니다.
웃을 때는 문같은 얼굴이 화를 내고 긴장하면 벽같은 얼굴로 변합니다.
마음 역시 똑같아 너그럽고 자유로울 때는 활짝 열린 문인데 절망하여
닫힐 때는 완전 벽처럼 되어 버립니다.
얼굴도, 마음도 문이 될 수 있고, 또 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나 벽은 고정된 실재가 아닙니다.
문이 변하여 벽이 될수도 있고, 벽이 변하여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 영적 성장은 마음의 문이 부단히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살아갈수록 좁아지는 문이 아니라 넓어지는 마음의 문을 의미합니다.
이래야 너그럽고 자비로운, 자연스럽고 자유스런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나는 문이다.“
예수님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예수님은 벽이 없는 온통 사방으로 활짝 열린 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늘의 문, 구원의 문, 생명의 문, 진리의 문,
사랑의 문, 희망의 문, 평화의 문, 기쁨의 문, 행복의 문, 끝이 없는 주님의
문입니다.
문이라고 다 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죽음의 문, 멸망의 문,
지옥의 문, 어둠의 문, 절망의 문 역시 끝이 없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은 착한목자 주님뿐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나 사랑이, 우정이 깊어질 때 벽은 변하여 문이되고
계속 넓어지는 우리 마음의 문이요 성령충만, 생명충만한 삶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의
수행이요, 이런 모든 항구한 수행이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활짝 열린
문으로 바꿔줍니다.
주님을 만날 때 마음의 벽은 변하여 문이 됩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예루살렘의 할례받은 신자들의 변화 과정을 통해 생생히
입증됩니다.
베드로가 왜 할례받지 않은 신자들과 음식을 먹을 수뿐이 없었는지
주님의 환시를 해명하는 과정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의 벽이 문으로
변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주님, 절대 안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자기 벽에 완전히 닫힌 완벽주의자 베드로의 마음의 문을 여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마라.“
사실 마음의 문만 활짝 열려 깨끗한 마음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 만드신
세상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마침내 환시의 깨달음을 통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베드로의 확신에
넘친 담대한 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의 이 말에 역시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예루살렘의 할례받는
신자들도 화답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인보성체수도회 창립자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님도 온갖 어려움 중에도
불구하고 활짝 열린 문으로 사셨음은 다음 평생 삶을 요약하는 유언에
따른 묘비명이 입증합니다.
"어머니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동,
서에 전해 주!“
신부님은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면서도 누구를 험담하거나 비방하지
않았고 철저히 함구하고 침묵했다 합니다. 세상에는 침묵했지만 하느님을
향해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셨던 성인(聖人)
신부님이셨음을 깨닫습니다.
마음의 벽이 변하여 문이 되는 것, 역시 주님이 주신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주님과의 우정이 깊어질 때 저절로 마음의 벽은 마음의
문으로 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벽을 문으로
바꿔주십니다. 벽이 변하여 문이 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부활 제4주간 월요일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8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어제는 성소주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날씨를 주셨고, 신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성소주일 행사가 잘 끝났습니다. 예전에는 성소주일을
담담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교구의 성소국 일을 맡은 후에는 성소주일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새삼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성소주일을
지내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는 밭의 상태에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자갈밭, 길가, 가시덤불에서는 씨는
뿌려졌어도 열매를 맺기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비옥하고, 넓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신앙과 하느님이었습니다. 가정이 신앙과
하느님의 사랑으로 넘쳐나기에 ‘성소’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가족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제, 수도자가 되는 자녀들을
축복하였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터전에서 성소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밭은 어떠한가요?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성공, 돈, 출세, 공부가
대부분입니다. 자본주의는 재물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돈이라면 양심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는 세상입니다. 돈 때문에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배반하는 세상입니다. 화려한 도시의 조명, 쉴 새 없이
나오는 방송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잠시 쉬는
여유, 침묵 속에 느끼는 기쁨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야기를 하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뒤를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양반과 천민이 없는 평등한 세상입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웠던
최양업 신부님은 바로 그런 세상이 발전하는 것이고, 그런 나라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사람이 되셨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셨듯이, 선교사들은 먼저 선교해야 하는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만 충돌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런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도들은
서로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고, 같은 전통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였고,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남과 북’의 대화도 그렇고, 거의 모든 일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정치인들도
그렇습니다. 저도 동료들과 대화를 할 때 듣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목적인 결정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해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라면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결정을 통해서 교회는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선교는 바닷물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가 희생과 사랑으로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진리의 기둥, 베드로의 무류권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 나는 양들의 문이다. >
복음: 요한 10,1-10
< 진리의 기둥, 베드로의 무류권 >
어제 방영된 서프라이즈 ‘사라진 아이’는 1980년 호주 울루루 야영지에서
생후 두 살 된 아기 아자리아가 사라진 사건을 다뤘습니다. 부부는 호주
늑대개인 딩고가 텐트 안에 있는 아기를 물어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늑대개가 살지 않고 늑대 개는 사람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이 주장했습니다. 또 아기가 입었던 잠옷이 하나도
찢어지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차 안에서 아기의 혈흔이 묻은 가위가
발견됨으로써 엄마 린디 체임벌린이 용의자로 주목되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아기가 죽었음에도 매우 안정적이었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여론은 이상한 종교에 심취한
엄마가 아기를 제물로 바쳤다는 식으로 몰아갔고, 결국 배심원들도
린디를 중노동 무기징역형을 내렸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5년 뒤 한 사람이 야영지 인근 딩고 굴에서 아자리아
속옷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사건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주위에
딩고 굴이 많이 있으며 딩고 전문가들의 말과는 다르게 딩고가
어린아기들을 공격했다는 사례들이 많이 나왔고 옷을 찢지 않은 채 아기를
빼낼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당시엔 여론이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에 모든 배심원들이 그런 판결을 내렸던 것이지만, 긴긴
재판 끝에 2012년 30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동원돼 가장 정의롭게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죄 없는
사람을 30년간이나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마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판단의 한계를 잘 말해주는 사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건 하나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높은 빌딩을 짓고 우주여행을 하고 암을 치료한다고
해서 인간이 하느님처럼 완벽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으면 교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교만으로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임사체험을 하고 돌아와서는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한계를 아는 겸손한 이들을 위해 진리의 기둥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바로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티모 3,15)
특히 그 교회의 수장은 그 큰 배의 선장역할을 해야 하기에 그의 결정엔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배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쇠는 곧 진리의 성령을 가리키는데 그 성령의 힘으로
죄도 용서해 주고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믿을
교리에 대해 교황님이 가르치신 것들이 오류가 있다고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교회의 수장 한 분을
통해 진리를 밝히 보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이 혼돈의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고 하는 것에 화를 냅니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 있다는 믿음을
그리스도인들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부정하다고 믿는 음식들을 먹으라고 세 번씩이나 환시를
보여주시며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이젠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베드로이기 때문에
반대하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동안의 성경의 가르침을 버리고
베드로의 말을 따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베드로를 통해 이제는 이집트인을 미워하고 이스라엘 사람만 사랑하는
하느님이 아니시라 모든 인류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나중에 할례의 문제가 나왔을 때도 베드로와 함께 있는 사도들이
할례까지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철저하게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엔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도 교회의
결정이 있으면 충분히 바뀔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성경말씀을 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권위적으로는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가 앞섬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성경조차도 교회가 인정해서 성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쓰시지 않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타 종교에서 성경을 펼쳐놓고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경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위에 성령의 힘으로 세우신 교회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차고 넘치게 하시는 주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요한10,1-10)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8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차고 넘치게 하시는 주님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미사 안에서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으로 가서 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행복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8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등반에 최초로 도전했던 탐험가
조지 말로리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 오릅니다.”
그는 과학적인 장비나 기술적인 도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요.
대신 단지 성취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용기, 미지의 저 세계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참을성 없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가지고 에베레스트 등반을 했던 것이고요. 저 역시 신학생 때
우연히 조지 말로리의 이 말이 얼마나 멋지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산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산악반에 들어가 열심히 등산을 했었지요.
솔직히 힘든 산을 오르게 되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이런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제 끝이야. 두 번 다시 산에 오르나 봐라.”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정상에 서는 순간, 이 말은 쏙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하산할 때 다시 같은 괴로움이 약간 들지만, 정상에서의 기쁨을
떠올리면서 웃으면서 내려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번에 다시 산을
향하게 됩니다.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전날 저녁 미리 산 밑의
민박집에 도착해서 쉬었다가 아침 일찍 등산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두 잔만 하려던 계획이 틀어져서 너무 술을 많이
마신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산에 오르려고 하는데, 몇몇은 도저히 오르지
못하겠다면서 중간쯤 가다가 포기하고 왔던 길로 내려갔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숙취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힘들게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정상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올라가면서 땀을 많이 쏟아서 술기운도 완전히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요.
하산해서 중간에서 포기한 친구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친구들은 여전히
술기운에 힘들어합니다. 또한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아서 넘어져
상처까지 생겼다며 불평합니다. 안 좋은 것투성입니다. 그러나 정상을
다녀온 사람은 모든 점이 다 만족스럽습니다.
주님을 느끼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상황이든
감사하며, 만족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들에 더 중점을 두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뒤에
그들은 완전히 바뀔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라는 정상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똑바른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그래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와야 함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주님이라는 정상에 이르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행복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들은 조금씩 찾아온다. 작은 구멍에서도 햇빛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조약돌에 걸려 넘어진다.
작은 것들이 곧 중요한 것이다(코난도일).
1990년 신학생 때, 다른 신학생들과 함께 오른 소백산 겨울등반.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엘러 휠러 윌콕스)
오늘날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요.
부자와 빈자는 아니에요.
한 사람의 재산을 평가하려면 그의 양심과 건강 상태를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 겸손한 사람과 거만한 사람도 아니에요.
짧은 인생에서 잘난 척하며 사는 이는 사람으로 칠 수 없잖아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도 아니지요.
유수 같은 세월, 누구나 웃을 때도 눈물 흘릴 때도 있으니까요.
아니죠.
내가 말하는 이 세상 사람의 두 부류란 짐을 들어주는 자와 비스듬히
기대는 자랍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가는 이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남에게 당신 몫의 짐을 지우고 걱정 근심 끼치는 기대는
사람인가요?
짐을 들어주는 자와 비스듬히 기대는 자.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연히 짐을 들어주는 자가 되어야 함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비스듬히 기대는데 익순한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네요.
따뜻한 봄을 알리는 개나리처럼, 따뜻함을 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서울] 초대장이 두 장 있었겠다.
2015년 나해 4월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8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초대장이 두 장 있었겠다.
태어나면서 받아든 초대장이 두 장 있었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봉투에는 ‘초대받았으니 이제부터 이렇게 준비하세요.’라 적혀있습니다.
그 때는 글을 몰라 좀 있다가 철 좀 들어 읽어보기로 했다고 합시다.
철 좀 든 후 보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실컷 즐기도록 하세요.’ 이고
하나는 ‘몸 마음 다해 하느님을 사랑,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세요.’
이렇게 돼 있는 데, 사방에서 끌고 밀고 하니 힘들겠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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