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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청주]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사도 15,7-21
† 복음 요한 15,9-11
★ 할례 문제로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린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일, 곧 그가
환시를 보고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준 일을 환기시킨다. 야고보
사도도 구약을 근거로 하여 이방인들을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면서
최소한의 규정만을 요구할 것을 권고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당신이 머무시는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 안에 머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의 기쁨과 평화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할례 문제에 관한 토론이 이어지는데, 오늘 독서는 “오랜 논란”이
있었다고 짤막하게 전합니다. 하지만 이 단락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발언을 전혀 전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그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지요.
사도행전 저자는 바오로가 어떤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그들을
이해시켰는가보다는 베드로가 어떻게 그를 지지해 주었으며 야고보가
어떻게 그 논쟁을 마무리 지었는가를 전해 줍니다.
베드로 사도는 처음에 이방인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고
말씀하신 뒤에야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때에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을 부르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경 말씀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확인하고
증언합니다. 다른 민족들이 주님을 찾게 되는 일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할례 받은 이들과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이 함께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교회의 일치를 도모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야고보는 유다인들에게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 것을 간청하고, 이방인들에게는 유다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최소한의 규정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먼저 함께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성령의 이끄심에 맡겼습니다. 성령께 귀를 기울이고 성경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내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을 이루시도록 길을 내어 드리고 그 길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하느님 귀에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성령께서 머무시는 장소가 되고 그
성령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쁨을 소유하려면 언제나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기쁨이 고통과 시련을 거슬러 험하고
끈질긴 투쟁으로 얻을 수 있는 열매이기도 하듯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노력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거나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2015.05.0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1)
여러분은 기쁘게 살고 싶으시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지요?
어떻게 하면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시며
그 방법까지 알으켜 주시네요.
한마디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 하시네요.
사실 우리가 기쁨 가운데 머물렀던 때를 돌아보면
늘 사랑 안에 있었을 때였지요.
충만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우리는 마냥 행복하고 기쁩니다.
오늘 내가 사랑 안에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사랑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살펴 봅시다.
사랑 안에 있지 않으면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요.
사랑 안에 머무는 여러분이 아름답습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여러분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참으로 기쁨으로 충만한 오늘 만드소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사랑 예찬-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사도15,7-21 요한15,9-11
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복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사랑 예찬-
어제의 '내 안에 머물러라' 대신 오늘의 강론 제목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내 안에' 대신 '내 사랑 안에'로 바뀌니 뜻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주님의
사랑을 흡수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무한한 텅 빈 공허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뿐입니다.
만병의 근원은 사랑 결핍이요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공부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유일한 답은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닙니다.
눈먼 맹목적 사랑, 왜곡된 사랑, 병적 사랑, 이기적 사랑,
육적 사랑, 본능적 사랑, 자기 중심적 사랑 등 부지기수입니다.
부단히 주님 사랑 안에서 정화되어야
건강하고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유입니다. 사랑은 기쁨입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사랑은 평화입니다. 사랑은 정의입니다. 사랑은 예의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사랑은 배려입니다.
사랑은 존중입니다. 사랑은 신뢰입니다. 사랑은 공감입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사랑은 겸손입니다. 사랑은 온유입니다.
사랑은 순종입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사랑은 지혜입니다. 사랑은 분별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입니다.
사랑은 기적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기적'
대신 '사랑'을 넣어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의 기적은 모두가 사랑의 표현이었으니, 말그대로 '사랑의 기적'
입니다. 아, 사랑은 끝이없습니다. 모두가 사랑의 표현입니다.
나 더하기(+) 사랑은 충만이지만 나 빼기(-) 사랑은 허무입니다.
사랑은 모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신록의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온누리에 눈부신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랑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오로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마지막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신
공동번역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가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정말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양빛 아래 모든 피조물의 윤곽과 아름다움이 들어나고,
태양빛 사라지면 모두가 '무(無)의 어둠'에 잠기듯 사랑도 똑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대로 온 누리를 살리는, 밝히는, 따뜻이 덥히는 햇빛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야고보의 사랑이 그대로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두 사도는 늘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인간이 눈 먼 열심이 만든 불편하게 부자유하게 무겁게 하는 '인위의
멍에'를 '주님 사랑의 멍에'로 바꿔줍니다.
베드로의 진정성 가득 담긴 사랑의 웅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수제자다운 베드로의 사랑에 감동한 회중은 쥐죽은
듯 잠잠합니다. 이에 야고보가 논란의 종지부를 찍으며 결론을 냅니다.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
하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규범을 최소화하여 형제들의 어려움을, 짐을 덜어주는 것이 바로
분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 모두 인위의 불편하고 무거운 멍에를
당신 사랑의 멍에로, 온유와 겸손의 멍에로 바꿔 메고 살 것을 촉구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깨달아 실천한 두 사도입니다.
얼마전 수녀회 연중 피정때 칸막이 고백소에서 준 일률적인 보속도
생각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과 언니들을 사랑하며 행복한 하루를 지내십시오.“
어제 창4동 성당 구역장 반장 57명에게 '인생순례여정' 강의를 마친 후
요셉수도원의 로고이자 심볼을 이정표로 선물했습니다.
"제 휴대폰 앞에 붙은 수도원의 로고처럼 여러분의 휴대폰에도 붙이고
통화를 할 때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사랑하십시오.
참 좋은 '사랑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수도원 로고의 '이정표'와 더불어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라는 책도 선물
했으니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에 와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 간
자매들입니다.
성모성월 5월, 성모님께서 저를 통해 섬김의 삶에 충실했던 구역장, 반장
자매들에게 선물하신 것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요한 15,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11)
Remain in my love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
사람은 무엇인가에 만족하거나 내적으로 충만함으로 느낄 때 기뻐한다.
기쁨 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의 갈망이기도 하다.
인간이 추구하는 기쁨은 겉으로 표출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기쁨인지
알 수 없다. 가장된 기쁨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적으로
표현되는 기쁨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 기쁨이 음식이나
세상의 물질, 육체적 만족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시적인
즐거움이거나 쾌락일 수는 있어도 참 행복의 표현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잘 묘사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5,9-10)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소유하시는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줌으로써 일치와 연대감을 형성하는 완전히 개방된 사랑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10)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해주시려는 것이다.’(15,11) 이 기쁨은 그리스도의
현존과 더불어 주어지고 체험되는 기쁨이므로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영원한 기쁨이다. 기쁘게 살아가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만
한다.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 곧 사랑의 삶을 살아 그분의
뜻을 실천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계명은 공관복음에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하여 그분이 걸어가셨던 수난의
사랑의 발자취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결점이 많은
이들을 문제 삼거나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면서 그들과 함께 하였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식사를 사셨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으며, 간음한 여인 곁에서 함께 머무르면서 그의
영혼의 병을 치유해주시면서 그녀를 죄인 취급하였던 그들까지도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그리고 연약한
이들과 함께 하셨다. 그분은 가르치실 때에도 군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과 비유로써 그들을 가르치셨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자. 나는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의 죄와 약점과
결점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감싸며 살아가는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려면 다른 이의 약점과 결점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나에게도 있을 수 있는 약점이요 결점이라는 좀 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행동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건네주는 철저한 이타적 사랑을
실행할 때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동시에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는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정 사랑 실천을 통하여 생명이
흘러가도록 물꼬를 트고 있는가? 사랑 안에 머물지 않을 때 생명이
멈추어 죽음의 문화가 우리를 덮치며 ‘더불어 신명나게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내 뿌리를 사랑이신 그분 안에 두고 살아갈 때에 진정 행복해질 수
있고, 참으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고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찾지 말고, 참 기쁨의 원천이신 그분 안에서
사랑을 실행하는 참으로 행복한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어디서
기쁨을 찾으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수행이란...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복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수행이란...
주요 직책에 오래도록 몸담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남기는 말이
있습니다. 퇴임사 혹은 이임사라고 하는데...아무래도 만감이
교차하겠지요. 삼십년 사십년 청춘과 일생을 바쳐 일했던 곳을 이제
영원히 떠나려하니...이런 저런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눈물도 앞을
가릴 것입니다. 그래서 더 남아서 일할 후배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와
영혼이 담긴 당부의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이지요.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요한복음의 내용들 역시 예수님의 퇴임사와
유사합니다. 떠날 때가 임박한 예수님께서 남아서 복음 선포를 해야 할
제자들을 향해 ‘고별사’를 남기신 것입니다. 예수님 고별사의 특징은 우선
따뜻함입니다.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상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메시지 하나하나는 위로와 격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되풀이해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복음 15장 9절)
예수님께서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를 안쓰럽게
내려다보시며 남기신 유언 같은 말씀 ‘사랑!’ 과연 무엇일까?
고민해봅니다. 오늘 우리 시대, 그 사랑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묵상해봅니다.
이 냉혹한 시대, 사랑은 아무래도 온화함으로 표현되지 않을까요?
따뜻함, 부드러움, 이웃을 향한 호의적인 시선, 너그러움, 관대함...
이 모든 덕목들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속성을 대변하는 덕목들이겠지요.
서로를 향해 너무나 큰 대립각을 세우고 첨예하게 맞서느라 갖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이 시대 우리들을 바라봅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격려와
위로의 말에는 어찌 그리도 인색한 우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이웃에게는 어찌 그리도 날카로운지 섬뜩섬뜩합니다.
젊은 형제들과 소풍을 갔습니다. 한 사찰에 들렀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글귀를 접했습니다. 제목은 ‘수행’입니다.
“참기 어려움을 참는 것이 진실한 참음이요. 누구나 참을 수 있는 것은
일상의 참음이다. 자기보다 약한 이의 허물을 기꺼이 용서하고 부귀와
영화 속에서 겸손하고 절제하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수행의
덕이니 원망을 원망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
참는 것이 진정한 참음이다.”
가끔씩 철저한 수행의 결과 이 세상 작은 풍파에 조금도 연연치 않는
훌륭한 스승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인군자의 DNA를
타고 태어났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끝도 없는 진지한 자기성찰, 셀 수도 없이 많은 결심과
좌절, 그리고 또 다시 일어섬의 반복이 오늘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유언처럼 남겨주신 ‘사랑’의 계명은 그저 글이나
생각으로서 끝나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사랑이 생명력, 역동성을
지니고 우리 안에, 우리네 인간관계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살아
움직여야겠습니다. 매일의 작은 일에 대한 충실성, 인간관계 안에서의
정성과 예의, 배려를 통해서 사랑이 구체화되어야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계명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작은 계명
하나라도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그분 사랑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돈보스코 대축제에 초대합니다!
2015년은 돈보스코 탄생 200주년을 경축하는 해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살레시안들의 대희년을 기념하기 위해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는 아래와
같이 돈보스코 대축제를 준비했습니다. 이 기쁜 잔치에 많이들 오셔서
기쁨을 함께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시
서울 지역: 5월 23일(토) 오후 2시~6시
광주 지역: 5월 30일(토) 오후 2시~6시
장소
서울 지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회 대강당(02-828-3500)
광주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살레시오 수도원 대성당
(062-512-0332)
내용
-돈보스코 영성과 관련된 다양한 볼거리
-돈보스코 축제 한 마당
-돈보스코 장학회 발족 및 장학금 수여
-돈보스코 관련 기념품 증정
-저녁 식사 제공
참가대상
돈보스코와 살레시오회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참가비 없습니다. 무료 주차 가능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활 제5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복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교회에는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봉사하는 분들은 무슨 보수를 받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봉사하는 마음에는 자신들의 봉사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누군가 나의 봉사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봉사에 점수를 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봉사를 하면 ‘사인’을 받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야 봉사
점수에 기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보속’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속을 한다는 것은 드러날 경우 나의 허물과 나의 잘못이 알려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봉사하려고 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게 됩니다.
이 봄에 많은 생명에게 활기를 주는 물은 자신이 한 일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빛을 주는 태양도 짜증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밝은 빛을 우리에게 줄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나의 공로를 알아주지 않을 때면, 말은 하지 않아도 속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는 몇 가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점차 늘어나는 이방인
공동체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방인 공동체는 유대인 공동체와는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어가 달랐고, 음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사고와 철학도 달랐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이방인 공동체들도
유대인들의 문화와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초기에 박해의 단초가 되었던 ‘제사논쟁’도 비슷한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첫 번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명확하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방인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토착화’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해지는 지역의 풍토와 전통에 맞게 토착화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선배 사제들은 이런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게 되면
먼저 6개월 동안 그곳의 전례와 그곳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문제점이 있다면 천천히 고쳐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전임자들이 하였던 일들은 한꺼번에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고 성급하게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관계문제 착각은 큰 실수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복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관계문제 착각은 큰 실수
부모가 자식을 낳을 때 어떤 아이를 마음대로 고르는 결정 못합니다.
또 아이가 태어날 때 어떤 부모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 부모 그 자녀로 어쩔 수 없는 관계로 연결 될 뿐입니다.
부부는 결혼 전에 남남이듯 이혼하면 다시 남남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자식을 통해서 남남인 부모가 한 관계로 엮어지게 마련이고요.
하나이신 신과 대자연 순리로 연결된 인간이지 자유 선택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으로 인정받은 자, 교회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복음: 요한 15,9-11
< 성령으로 인정받은 자, 교회 >
출판사에서 편집보의 직위를 가지고 근무하는 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편집장이 써 놓은 원고를 읽으면서 주로 문법이나
구두점에 잘못이 있는지 점검하는 일을 했습니다. 편집장은 능력이
부족한 여성이었는데, 편집보가 자기보다 유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편집업무를 편집보에게 점점 더 많이
맡겼습니다. 비록 신망은 편집장이 얻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대부분의
일을 편집보가 다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편집장은 발행인과 다투다가 자기가 제시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발행인은 “떠나도
좋습니다. 결국 편집보가 일을 다 해왔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편집장이 소리쳤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읍니다”라고 발행인이 말했습니다. “여러 달 전부터 당신이 그녀를
몹시 신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그때부터 다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 짧은 이야기는 편집보가 결국은 편집장이 된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녀는 자기 업무를 잘 해냈으면서도 인정받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발행인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왜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콜로새서 3장 23-24절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주님에게서 상속 재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오래 전에 저는 제 영광을 구하지 않기로 작정했읍니다”라고 그녀는
매주 모이는 성경 공부 그룹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이 편집보의 특징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랄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이의 인정을
바란다면 동시에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았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됨을 주장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인정해주시는 방식은 ‘성령’을 보내주심을
통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맺어주시는 열매가 곧 우리가
바라야 할 유일한 보상입니다. 그 보상이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인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이루어졌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할례가 성령을 받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준비과정이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이제 할례 대신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세례가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이런 신학적인 결론에 도달하자 이제 야고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이는 예언자들의 말과도 일치하는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이렇듯 성경에는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는 말도 있고, 새로운 다윗인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초막, 즉 새 예루살렘에는 할례 받지 않은 백성들도
모이게 되리라는 예언도 함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의지하기보다는 성령으로 인정받은 교회에 머물면 됩니다. 하느님은
성령강림으로 교회를 인정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교회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7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요한15,9-11)
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7-21
복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1
받은 사랑을 기억하라.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이미 받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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