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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수도회] 관계속에 꽃피는 사랑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10,25-26.34-35.44-48
† 제2독서 1요한 4,7-10
† 복음 요한 15,9-17
오늘 전례
▦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시면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를 당신
친구라고 부르시며 당신 곁으로 이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 사랑 안에 머물면서, 그분께서 당신 생명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 베드로 사도는 자발적으로 이방인들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알려 주시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는 환시를
보고는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마 사람
코르넬리우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제1독서).
★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써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안다(제2독서).
★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킨다면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정성을 다해 오랜 시간 공들여 작지 않은 선물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담긴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면 왠지 섭섭한 마음도 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겠지요. 또한 별로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값진 선물을 하게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을 하게 되면, 그 선물에 자기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리도록 고맙기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실 때 펄쩍 뛰던 베드로를 왜 사탄이라고까지
꾸짖으셨는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둘로스’는, 사실
성경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용어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이 주님의 종으로 불린 것처럼 오히려 종은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칭호이기도 합니다. 동방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종은 사적 공간인 임금의
침전까지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로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종보다도 더 가까운 당신의 벗,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는 친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에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간이나 신장 이식 수술이 필요한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자녀가 자기 장기의 일부를 기쁜 마음으로
내놓는다고 할 때, 부모님이 자녀의 애틋한 사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듯이, 예수님의 친구, 벗인 우리는 친구인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시겠다고 하실 때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2015.05.1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 15,15)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나요?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
임금님
스승
......
그런가요?
다 맞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맞을려면
예수님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느껴져야 한다네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어때요? 비슷한 느낌인가요? 아니면 달라도 너무 다른가요?
오늘은 내가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고 내 속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그 친구에게 참으로 고맙다고 인사합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참으로 고맙다고...
친구야 고맙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되어주셔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 맛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사도10,25-26.34-35.44-48 1요한4,7-10 요한15,9-17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하느님 맛
하느님 사랑, 하느님 찬미, 하느님 자랑 저에겐 다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아름다움, 행복과 자유, 기쁨과 평화의 원천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은 영원한
물음만 있을뿐, 결국 방황과 혼란이요 허무의 심연에 함몰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바 자비롭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기쁘고
평화로운 삶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이렇게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살 권리와 의무가,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이런 삶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이 모두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신록의 생명으로 빛나는 5월 성모성월, 산하(山河)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온누리에 가득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닮아 갈수록 비로소 자비롭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 기쁘고 평화로운 삶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하느님 사랑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일'보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일에 충실할 때 그 어렵다는 '함께 사는 일'도 수월해지고,
'소임상 맡은 일'도 잘 하게 됩니다.
세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어제 예전 34년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제자들 셋이 선물을 무겁게 가득
들고 저를 찾았습니다. 13세 때 아이들이 이미 47세의 중년이 되어
어버이날 다음날 사랑하고 존경했던 옛 스승을 찾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시공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영원을 체험했습니다. 34년전
동심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다음은 주간경향에서 읽은 '김성근 리더십의 비밀'과 '정신분석학자
정도언 교수와의 대담' 기사입니다.
-"김 감독(73세)의 리더십의 비밀은
첫째, 매경기를 한국시리즈 7차전처럼 올인하는 것입니다.
오직 오늘 이 순간, 볼 하나에 승리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붓습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김 감독의 좌우명 '일구이무(一球二無)'
(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 그대로입니다.
공 하나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거는 장인의 혼이 느껴집니다.
두 번째는 선수를 쓸 줄 안다는 것입니다.
10을 가진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5밖에 안되는 선수도 많습니다.
김 감독은 5밖에 안된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김 감독은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5밖에 안되지만 그 5만이라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김성근의 용병술입니다.
셋째, 동기부여입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이 하나의 팀으로,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게 하는 데 남다른 노하우가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
감독이 한계를 너무도 쉽게 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리더십을 닮은 김 감독입니다. 매순간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할 때, 모두를 사랑하여 아무도 버리지 않을 때,
늘 하느님의 사랑이 동기가 될 때 저절로 형성되는 참 리더십입니다.
-어떻게 하면 맛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정작 인생에는 단맛이 별로 없습니다.
그게 삶의 실체예요. 맛은 철학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음식이나 맛에 대한 표현이 많습니다.
단맛은 화려하지만 오래가기 어렵고 금방 질립니다.
쓴맛이 나는 관계는 세월이 흘러야 가치를 알 수 있지만,
쓴맛 나는 음식을 뱉어내면 관계마저 해소됩니다.
짠맛나는 관계는 오래가지만 장아찌처럼 많이 접할 수 없죠. 신맛나는
관계는 잠시 상큼할 수 있지만 시어버린 음식처럼 정리해야 할 관계일 수
있습니다. 매운 맛은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알려 줍니다.
모든 사람마다 각자의 맛이 있고, 모든 관계마다 교훈이 있습니다.
진리는 이처럼 단순하고 평범합니다.“
다 공감이 가는데 결정적인 한 맛이 빠졌습니다. 바로 '하느님 맛'입니다.
진정 수도승처럼 하느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살아갈 때
분별과 이해도 깊어질 것이며 참으로 맛있는 삶도 가능합니다.
하느님 맛들이는 비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세상 최고의 맛이 예수님 맛입니다. 말씀 맛, 성체 맛, 기도 맛입니다.
늘 먹어도 질리지 않는 늘 새로운 맛이 하느님 맛, 예수님 맛입니다.
하느님 맛은 사랑 맛입니다. 그러니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그 외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참으로 맛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둘째,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늘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상의 행복, 관상의 기쁨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인 부단한 계명 준수와 수행이
있을 때 비로소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이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롤모델은 하느님이요 예수님입니다.
주님 사랑안에 머물러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것이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준수에 항구함으로 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충만한 기쁨입니다. 주님 맛은 바로 기쁨의 맛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친구가 되십시오.
구약의 하느님의 친구인 모세와 아브라함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친구' 최상의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마찬가지 우리 믿는 이들
역시 예수님의 친구요 이보다 자랑스러운 칭호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준수에 충실할 때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됩니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갈 때 주님과의 우정과 더불어 삶의
맛과 향기도 날로 깊어져 갑니다.
넷째, 예수님을 가리지 마십시오.
늘 예수님 뒤에서 배경으로 사십시오.
오직 예수님 사랑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비우고 버리는 사랑 있을 때 주님 배경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배경이 되어 살 때 주님 또한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십니다.
하늘과 산을 가린 괴물같은 무수한 고층 건물들은 바로 하느님을 가린
에고의 상징입니다.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성 요셉상 배경의 꽃과 나무, 산과 하늘을 보며
써놓은 글입니다.
-꽃들처럼/나무들처럼
산처럼/하늘처럼
늘 당신의 배경이 되고 싶다-
다섯째,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구별, 분별은 좋고 필요합니다만 차별은 하지 마십시오.
차별과 편애보다 고약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감동입니다.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
차별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닮아 차별도 편애도 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사랑은 편애라기 보다는 분별의 사랑에 속합니다.
어제 방문했던 초등학교 한 제자로부터 들은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학창시절, 늘 위축되어 지냈는데
선생님 밑에 있을 때만 가슴 활짝 펴고 마음 편히 지낼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무도 차별하지도, 편애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 모두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습니다."
여섯째, 예수님께 뽑힌 자임을 명심하십시오.
좋은 의미의 선민의식(選民意識)은 건강한 자부심의 원천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바로 이 말씀이 성소의 신비를 말해 줍니다.
주님은 세상 기준이 아닌 당신 고유의 기준에 따라 우리를 뽑으셨습니다.
목적은 둘입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뽑아 주셨기에 비로서 사랑의 열매 풍성한 삶이요,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주님께 뽑힌 우리
수도형제들은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때 마다 하느님 백성을
위해 얼마나 많이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치는지 모릅니다.
무슨 맛으로 살아갑니까?
위의 예수님 대신 하느님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세상 맛이 아닌 하느님 맛, 예수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관계 속에 꽃피는 사랑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관계 속에 꽃피는 사랑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왔다. 사랑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사랑을. 사람은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사랑은 그렇게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요 존재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이기적인 동기로
이용함으로써 불행과 고통을 자초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앞에서 나왔던 “머물다”(15,9-10)라는 말과
“열매를 맺다”(15,16)라는 주제가 되풀이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5,9-10)라고 말씀하신다. 이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15,12).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며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야말로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구속을
위한 명령이 아니라 해방의 메시지요, 참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구약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계명’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창조와 사랑과 자유의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삶 안에서 늘 메아리쳤으며, 그 말씀은
마침내 사람의 몸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다. 사람이 되신 그 말씀이 곧
우리 구원과 행복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 곧 ‘계명’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15,11)
우리도 예수님처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해야 하겠다.
사랑은 자기를 떠나 자신을 잊고, 자기 소유를 포기하고 조건 없이 다른
이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사랑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리라! 이
흘러가는 사랑은 삼위일체의 친교에서 나온다. 참을 수 없는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이 흘러 말씀이 사람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서로를 일치와 사랑으로 이끄시는 성령, 이 세 위격의
긴밀한 친교와 역동적인 사랑의 주고받음에서 사랑은 샘솟는다.
나에게서가 아니라...
사랑은 익숙한 존재에 고정되거나 정체되지 않고 흘러야 한다. 나와는
신분이 다르고, 더 못살고, 생각이 다르고, 심지어 밉고 싫은 이들을
향하여 흘러가는 그 사랑은 그래서 늘 어색하며 낯설고, 거북하며 새로울
수밖에 없다. 계명을 지키는 사랑이란 바로 이런 어색함과 불편함과 낯선
것에 길들여지는 여정이다. 그래서 사랑은 쉽지 않은 죽음의 길이요, 갈등
속에 맞추어가는 길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랑은 타자(他者)에 대한 사랑의 흐름을 멈추지 않기 위해 나를 비워내는
작업이다. 서로 사랑하는 계명 실천은 ‘관계 넓히기’요, 관계를 발생시키는
출발점이다. 사랑은 상호작용이며 관계 안에서 드러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런 상호간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상호간에 한 식구임을 서로서로 보여줄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수도규칙
6,7-8)
‘타자’를 잃어버리고 외면하는 사랑은 방향을 상실한 폐쇄적이며 이기적인
사랑이요, 관계 속에 드러나지 않는 사랑이란 허구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사랑도 생명도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이며 끊임없는 건넴의 순례이지
않는가! 고통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생명은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와 갈등, 가난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삶의
자리로 걸어가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나란 존재에 대한 가치와 의미부여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나란 존재에 대한 가치와 의미부여
우리가 눈만 뜨면 외치는 말이면서도 가장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많이 사용하신 단어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9~10절)
어떤 사랑을 해야 가장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랑이며, 그분께서 기뻐하실
사랑일까 묵상해봅니다. 그 사랑은 아무래도 균형 잡히고 성숙한 사랑,
이성과 감정이 잘 조화를 이루는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사랑, 즉 3중 사랑이 서로 잘 교류되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일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극진한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 또한
중요하겠지요.
그럼 하느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으로 다 끝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랑을 놓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불행해하고 허전해합니다. 그 사랑은 바로 나 자신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란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 내 인생에 대한 의미 추구, 내게 다가온
고통에 대한 진지한 탐구, 나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존엄성에 대한 인정이
중요합니다.
물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머리칼보다 많은 죄로 인해 가슴 칩니다.
돌아본 나날들 안에 벌어졌던 크고 작은 사건들 안에 수치스런 일들로
인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란 존재의 과거에 대한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지난 삶, 인생에 대한
가치와 의미 부여에 인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끄러운 인생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투박한 질그릇 같은 우리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빛이 빛나고 있으니 우리는 존엄하고 거룩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긍심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거기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노력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때로 구차스러워 보이고 때로
폭풍 속의 돛단배 같은 우리네 인생이지만 우리 삶을 좀 더 고상하고
우아하게 꾸며나가기 위해 매사에 대한 가치와 의미 추구는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 가운데서도 따분해하지 않고 충만하고 흥미진진하게 살아갈 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계속되는 좌절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견디고 극복할 에너지의 소유자이기 때문에...그 이유는 바로 삶과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부여 때문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활 제6주일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오늘 미사 전례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제가 전부 헤아려 보았더니 33번이나 나왔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이 도령과 춘향이의 사랑이
아닙니다.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자 이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사랑의 원조, 사랑의 모범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특징은 크게 다섯 가지 입니다.
첫째, 죄인들을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루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넘치도록 말씀하십니다. 제가
세검정 본당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의도 차량 질주 사고로 손자를
잃어버린 할머니께서는 감옥으로 찾아가 범인을 용서하였습니다.
가족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범인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둘째, 겸손하고 무상으로 행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으시고, 조건을 달지 않고,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제가 열병에 걸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은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힘 때문에 제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수난과 고통 중에 행해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음의 강을 건너셨습니다. 예전에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자매님들을 모두 구하고, 숨을 거둔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신부님은 죽어가는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신장을
나누어 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형제가 나중에야
알았을 때, 그분이 바로 신부님이셨다고 합니다.
넷째, 사람들을 무조건 믿고 끝까지 신뢰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어도, 끝까지 믿고 사랑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갔어도,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도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렵지만,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심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의심하기
때문에 내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다섯째, 하느님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죽기까지 아프리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명동에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음식을 팔기 위해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배우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우리의 열정이 그분들 보다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런 사랑은 어쩌면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
함께 알고 만나고 일치하고 공감을 해야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대로만 하고 타인과 공감형성이 안 되는 사람은 친구가 없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돈만 있으면 무조건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잔다잖아요.
친구와 노선 지키기, 이웃과 공감하고 유대하기가 세상 제대로 살게 하지요.
이런 노선을 철칙으로 알고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면 삶이 커지는 거지요.
예수님의 노선이 곧 사랑하라는 계명이지요. 목숨까지 내놓는 그런 사랑.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2~1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아름다운 구속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복음: 요한 15,9-17
< 아름다운 구속 >
제가 본당에 있을 때 한 비신자 부모님이 고등학생인 아들 둘을 데리고
상담을 하자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이 워낙 속을 썩여서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고 2짜리
형이었는데, 그 아이는 학교에 안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는 학교
간다고 하고는 밖에서 놀다 들어오고 또 직접 학교까지 데려다 주어도
2교시를 못 버티고 나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공부를 안 해도
좋으니 학교 마치는 시간까지만 붙어있어 달라고 애원해도 머리는
끄덕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학교 안 가고 PC방에서 놀다가 주인의 돈까지 훔치려 하여서 부모님이
불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부모님을 화나게 하는 것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무리 물어보아도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랬다는 것입니다. 보고 있던 저도 답답했습니다.
그럴 바에야 자퇴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면 또 자퇴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사귀는 여자 친구도 자퇴한
아이인데 그 아이에게 자퇴만은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어떤 누구의 말은 안 들어도 여자 친구의 말은 듣고 따르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든지 할 수 있어.’라고 하는
노래가사처럼 사랑을 얻기 위해서 그 친구의 말은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도 알게
됩니다. 내가 의사인지 알면 의사의 일을 하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와
떨어질 때 불안해 우는 이유는 어머니가 사라지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앞에서 자신이 자녀임을 알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젖을 빨 수 있고 웃어줄 수 있고 말썽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구속되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불안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들까지 하게
됩니다.
위의 친구들은 부모님이 있어도 또 학생으로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도 답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춘기란 더 이상 사람의
애정으로는 자신이 충족될 수 없음을 아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부모님의 애정이 자신의 삶의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마치 아이 때는
우리가 조국의 무한한 영광을 위해 태어났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도
어른이 되어서는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처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다행한 일인지는 몰라도 그 아이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 줄 대상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여자아이의 애인으로서 무언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인으로 머물기 위해서는 그 여자의 말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래야 지금 죽더라도 적어도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
받던 ‘무언가’로 죽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엔가 어떤 의미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잘 나타낸 시가
김춘수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하더라도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누군가가 없다면 꽃은 그저 의미 없는 식물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리어진다면, 누군가의 관심을 받게 된다면 그 꽃은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바로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참으로 자신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안으로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마치 자신이 꽃인지 모르는 식물에게 “너는 꽃이야!”라고
말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너는 마리아야!”라고 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하던 아담의 직무였습니다. 아담의
역할은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 존재이유를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이름을 불러주시며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려주십니다. 그분을 만나야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자캐오는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즉,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당연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명령하시는 것을 구속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이 아름다운 구속이 참
자유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쾌락과 돈과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캐오도 돈의 노예로 살았지만 이제 돈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무엇’으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Nothing)은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 것에 집착하지만, 이제 무엇(Something)이
되어버렸다면 더 이상 세상 것으로 자신을 들어 높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아직도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친구가 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가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이고 해방이고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그분께 구속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사랑을 미루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저는 올해 1월 12일부터 1년 동안의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발령을 받은 뒤, 사제 생활 16년 만에 처음 맞이하는 안식년에 얼마나 큰
기대를 했는지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이 정말로 많았지요. 전문코치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 국내외 많은 여행을 통한 휴식, 그동안
보지 못했던 책 읽기, 2010년 이후 책을 출판하지 못했기에 이 시간을
통해 책도 몇 권 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님께도
효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했지요.
안식년 발령을 받은 뒤 벌써 4개월이 지난 지금, 적지 않은 것들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계획대로 착착 들어맞지 않더군요. 하긴 마음먹은 대로 다
이뤄진다면 아마 세계 정복도 가능했겠지만,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내일도 있으니까.’라는 안일하고 게으른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했던 제 모습을 보니, 앞으로 남은 8개월도
후회의 시간으로 지낼 수 있다는 긴장감이 생깁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래, 이 정도도 충분하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하면서 안식년을
마무리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지금까지 지내왔던 시간 전체가 이런 후회를 늘 간직하며 살게 했던 것
같습니다. ‘내일이 있다’는 게으른 마음, ‘이 정도도 충분해’라는 안일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지금’이라는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과거에 연연해서도, 또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지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금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분명, 후회하지 않는 미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나의
계명이다.”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고 하십니다.
내일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계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일까요? 또한 지금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당장, 바로 이 순간에 실천해야 할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미래의 어떤 보상을 원해서 행하는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정도의 무한한 사랑을 지금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의 체험 안에 있음을 기억할 때, 사랑의 실천은 결국 내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해서 참 진리의
계명을 이야기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미루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실천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랑,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딘가에 ‘좋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일을 좋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
(구로네코 야마토).
어제 인천의 동춘동 성당에 다녀왔습니다. 성당이 참 아름답습니다.
스트레스 없애기.
얼마 전에 인터넷을 통해 재미있는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보이스
피싱에 관한 것이었는데, 우선 상대방이 서울 중앙지검에 오수사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화 받는 사람은 웃기만 합니다. 그 오수사관이라는
사람은 “왜 웃으시냐?”고 묻지요. 이에 “자꾸만 검찰직원이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와서요.”라고 답변하면서 계속 웃으며, “이번에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보이스 피싱 전화를 건사람 역시
겸연쩍었는지 결국은 서로 웃으면서 통화를 마치더군요.
저는 이 전화 받는 사람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이스
피싱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웃으면서 상대방이 오히려
미안해하며 전화를 끊게 만드니까요.
저 역시 그런 전화를 종종 받습니다. 부동산이라고 하면서 좋은 땅이
나왔는데 보지 않겠냐는 전화, 은행대출이 좋은 조건이라면서 권유하는
전화, 보험에 가입하라는 전화 등등... 그때마다 “지금 바쁩니다.”라고
화를 내면서 얼른 전화를 끊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웃으면서 충분히
상황을 마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전화가 많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남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즉,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또 안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런 행복의 삶을 사시길 응원합니다.
파이팅~~~
제 동창신부의 동생 혼배미사. 성가정 이루시길...
◈ [청주]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10일 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제1독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25-26.34-35.44-48
제2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0
복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9-17
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높고 깊게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남편이 뛰면 아내도 같이 뛰어야 합니다. 아내가 뛰면 남편도 같이 뛰어야
합니다. 한쪽은 뛰는데 한쪽이 뛰지 않으면 뛰지 않는 쪽은 뛰는 쪽을
잡아당기는 고삐가 됩니다”(이규경). 따라서 뛸 때는 같이 뛰고, 쉴 때는
같이 쉬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새로 산 와이셔츠보다 빨아 입은
와이셔츠가 더 눈부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옷에는 옷을 빤 사람의
정성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상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시로 표현 했는데 “이년, 저년, 못된 년,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년” 하고 썼습니다. 여자분들이 기분 나쁘다고요? 그럼
‘이놈, 저놈, 못된 놈,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놈’ 이라고 하지요. 여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함께해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놓는 진정한
사랑은 순교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그 사랑을 살 수 있는 힘을 바로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얻어야 합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오늘의 내가 있음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받은 사랑을 기억하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에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주시며 사랑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을 당신의 벗으로서,
친구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몽땅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산다는 것, 친구를 위해 목숨 내 놓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나온 희생은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끼고 혹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마음을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족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성 아우구스띠노는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곤란에 처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은 “작은 희생을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조차 놓치지 마십시오.
여기서는 미소로, 저기서는 친절한 말 한마디로 항상 작고 바른 일을
행하면서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희생을 먼 곳에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작은 배려와
희생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노인 요양원에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앞을 못 보시니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가 없으셔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께서 그
방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 방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산보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혼자서
휠체어를 굴리기 힘들어하는 불편을 이겨내게 되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작은 관심이 큰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성인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결코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산다는 것은 어떤 요구나
생색내기 없이 그저 베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았듯이 나도 나의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해 내 놓을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보상입니다.
한 연세 많은 신부님께서 임종직전에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3번 놀랄 것이다. 첫 번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게 될 때이고 두 번째는 내가 마땅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드러내지 않고 사랑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산 사람일 것입니다. 겉은 화려하였지만 속을
채우진 못한 탓일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 하느님의 자비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일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을 다져가야겠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사랑의 속성은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요, 또한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은 언제나 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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