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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수도회] 떠나시는 예수님, 오시는 성령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16,22-34
† 복음 요한 16,5-11
★ 바오로와 실라스는 필리피에서 감옥에 갇혔다. 그들이 점 귀신 들린
하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그 주인들이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녀의 주인들이 그들을 고발하자 행정관들은 그들을
매질하고 가두었다. 그러나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린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그들에게
이롭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보호자 성령께서 오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사’(18―19장) 바로 전에 그분의
‘고별사’(13―17장)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다음인 부활 시기에 이 고별사를 읽으면서 묵상하다 보니, 마치 이
말씀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시어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들이 좀 더 쉽게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비록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지만 곧
성령께서 오시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기한 대로 이 고별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떠나가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근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지금까지는 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중심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말고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 열두 사람이, 그분께서
떠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자들의 앞날은 그저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고 하십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훌륭한 교황님 한 분만 계셔도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지고, 훌륭한 지도자 한 사람만 있어도 본당과 단체가
얼마나 활기를 띠게 되는지를 우리가 이미 체험하였는데,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과연 이로울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보호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이끌어
주시기를 더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제부터는 너희
안에서 활동하실 성령께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활동하셨다면 성령께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면서 어느 곳에서든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계속
수행하시는 보호자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보호자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면
오늘 독서의 바오로와 실라스처럼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실 위로자 성령을 기다립시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2015.05.1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요한 16,7)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했던가요.
사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돌아갑니다.
우리 회사, 우리 공동체, 우리 본당 모두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갑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양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마저도 당신이 없어야 한다네요.
내가 떠나야 너희에게 더 이롭다네요.
내가 가야만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네요.
형제들이여 오늘은 내가 없는 듯 한번 살아봅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해보고 나를 내려 놓읍시다.
그래야 더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아,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귀가(歸家)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사도16,22-34 요한16,5-11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22-34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5-11
귀가(歸家)의 여정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죽음에로의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입니다. 제가 자주 예로 드는 예가 일일일생, 인생사계입니다.
일생을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현재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점차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시간이 가까워 왔음을
실감합니다.
하여 사막교부들은 물론이고 성 베네딕도는 동료 수도승들에게
'날마다 죽음을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했습니다.
귀가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늘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고별사에서 예수님은 귀가 시간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해 진 우리 인생여정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가는 귀가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아름다운 '귀천'이란 시도 바로
죽음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임을 말해 줍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바로 이렇게 하늘이신 하느님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적지가 될 때
방황하지 않습니다. 요즘 제 관심사도 남은 귀가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수 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평균수명을 80세 초반이라면 이제 남은 시간은 15년 안팎입니다.
서품 금경축까지의 90세까지도 생각합니다만 욕심일 것입니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남은 귀가 시간을 어떻게 보람있게 지낼까 요즘 골똘히 생각 중입니다.
며칠전에는 점차 아버지의 집에 가까워진다는 느낌에 언뜻 홀가분하면서도
기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치 하루의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내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들 때처럼 말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생각이 마음을 초연하게 겸손하게 합니다. 환상의 거품을 거둬내고
감사와 기쁨으로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 올인하게 합니다.
다음 예수님의 말씀이 귀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약속대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신후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귀가 여정중에도 이미 여기서 하늘나라를 살게
하시고, 생사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살게 하십니다.
더욱 열렬히 하느님을 찬미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의 박해중에도 치열한 순교적 삶을 사는 바오로와 실라스의 삶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심한 매질을 당한 후 발에 차꼬가 채워져 가장 깊은
감방에 갇혀 있지만 찬미하는 이들의 영혼을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실라스가 하느님 찬미의 위력을 잘 보여줍니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풀렸다.‘
말그대로 '찬미의 기적'입니다. 우리를 내적으로 묶고 있는 온갖 사슬을
풀어 자유롭게 하는 찬미의 위력입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의 성무일도보다
귀가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알든 모르든 무수한 하느님 찬미의 기적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복된 '귀가의 여정'은 바로 '찬미의 여정'이자 '기적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의 찬미의 기적에 충격을 받은 간수와 제자들의 주고 받은 문답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늘 예수님과의 믿음을 새롭게 함으로 예수님과의 우정을 깊이할 때 즐거운
귀가 여정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뻣노라'하는 시편을 노래하면서
기쁨 가득한 귀가의 여정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귀가의 기쁨을 앞당겨
체험케 하심으로 하루하루 충실한 귀가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떠나시는 예수님, 오시는 성령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요한 16,5-11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I am going to the one who sent me."
떠나시는 예수님, 오시는 성령
일찍이 니체는 항상적인 세계의 상실과 더불어 최고의 가치를 상실한
허무적 상황을 가리켜 '신은 죽었다'(Gott ist todt.)라고 표현하였다.
현대인은 스스로가 주인인양 처신할 뿐 아니라 ‘주님의 영’(靈)이 아닌
‘육(肉)의 영’의 영을 따라 정신없이 살아감으로서 하느님을 죽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재 상황을 자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예고하시자 제자들은
슬픔에 잠겨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는 이가 없었다. 제자들은 예수 부재의
상황에서 자신들을 박해하고 적대시하는 세상과 맞부딪쳐야만 하는
처지를 생각하며 슬픔에 잠겼던 것이다. 예수님의 떠나감으로 인한 부재는
심판과 단죄를 의미한다. 심판은 해방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세상을 그대로 남겨놓는 예수의 완전한 부재상태이다. 예수님의 현존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죄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께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이 이별은 심판 때에 변호자의 역할을 하실 성령께서
오시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6,7). 그분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면 성령을 보내겠다고 거듭 강조하시며 제자들을 위로하신다
(16,7).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성령 안에 있는 공동체에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내주시는 보호자 성령께서는 ‘세상의 죄악과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폭로하고’(16,8) 십자가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혀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세속적인 것에 대한
애착심에서 벗어나 오직 천상 사물만을 갈망하게 하시고 두려움과 겁에서
해방되어 용맹의 정신을 갖게 하신다.”(성 치릴로 주교) 성령께서는
세상에 예수님의 신비를 계시하시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심판하는
것으로 활동하시고, 공동체 안에서는 진리에로 이끌어가는 것으로
활동하신다. 이 두 가지 활동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협조자
성령의 활동은 신앙과 선포를 통하여 구원사건을 굳건하게 견지하고 있고
증언하고 있는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와 함께 세상에 대해 무엇이
죄이고 정의이며 심판인가를 선언한다. 공동체도 이제는 세상을 향해
이런 비판적인 물음을 제기할 단계에 와 있다. 공동체가 선포하는 승리는
예수님의 승리이며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 사명이다.
우리 신앙공동체와 교회는 과연 세상을 향하여 정의가 무엇이며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만이 궁극적인 가치임을 드러내고 있는가?
나의 삶은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가? 예수님의 부재
상황에서 진정 우리는 그 빈자리를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사랑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성령의 오심을 거부하며 내 생각대로만 행하고 얼빠진
자신의 모습도 보지 못하면서 나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성령의 역사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22-34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5-11
성령의 역사
때로 감미로운 봄바람 같으신 분, 그러나 때로 천둥이나 섬광처럼
다가오시는 분, 보통 인간의 통상적 사고의 틀을 깨트리시고 그
틈바구니로 들어오시는 분, 그래서 알쏭달쏭한 분,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저희 동료 수도자들 사이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다든지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질 때 우스갯소리로 성령께서 역사하셨다고 말을
합니다. 제자들과의 작별을 앞둔 예수님께서는 당신 뒤를 이어 제자들을
인도하실 존재, 보호자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는데,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복음 16장 7절)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떤 역할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소상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복음 16장 8절)
‘죄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우리는 자주
죄의 비참함, 그로 인한 죄책감만을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죄에 따른 은총도 있더군요. 죄가 많은 곳에도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내린다는 진리를 잊고 살았습니다. 죄는 가급적 안 짓는 것이 좋겠지만
그러나 그 죄를 통해서 나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의지할 대상은 하느님 밖에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죄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 이 큰 죄가 과연 용서가 될까?’ 의구심을 품고 살았습니다.
한번 중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생각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느님 자비는 훨씬
크십니다. 그래서 죄지을 때 마다 가슴을 치고 자신을 학대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두 손 활짝 벌리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뛰어가야 하겠습니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주어진
율법과 계명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준수하는 것이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사랑의 실천이 추가되어야
참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스스로를 낮추어 내가 제일 죄
많은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매일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간 하느님이
무시무시한 심판자라고 생각했는데, 절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심판 날은 우리 죄인들이 싹쓸이
당하는 끔찍한 날로 생각했습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우리의 죄목들에 대해
하나하나 철저히 응징 당하는 두려운 날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게 아니었습니다. 심판 날은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가
대자대비하시며 완전하신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는 축복의 날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활 제6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22-34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5-11
우리는 분석, 평가, 나눔에 익숙해 있습니다. 어릴 때, 모든 생명체는
‘종, 속, 과, 목, 강, 문, 계’로 나눌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학교의 도서관에
있는 많은 책들도 ‘십진분류법’으로 나눌 수 있었고, 원하는 책을 이름만
알아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혈액형, 피부 색, 남과 여, 지역 등으로
사람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민족끼리 구분해서 어떤 민족들은 조상들의
악연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나누고, 분석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위해서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누고 분석하는 것의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성향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잘못 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다른 민족을 지배하려 하였고, 여자를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개종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와 다른 것들을 나와
같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폭력이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민족 간의 분쟁, 지역 간의 분쟁, 종교로 인한 전쟁도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발생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죄인이고, 이방인은
선택받지 못한 것이고, 이방인은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들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이들은 한 형제요 자매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어제 저는 선배신부님의 지갑과 저의 지갑을 혼동하였습니다. 제가 너무
자연스럽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니, 선배도 그 지갑이 제 것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가 착각을 한 것을 알았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습니다.
후배 신부님과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저는 방향이 틀리다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후배 신부님은 운전도 잘하고, 운동신경도 좋기 때문에 틀리다고
말은 했지만 저도 내심 불안했습니다. 잠시 후에 후배 신부님도 자신이
착각을 했다며 방향을 돌렸습니다. 이런 작은 착각은 그런 대로 넘어갈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착각도 더러 있습니다.
본당을 비우고 피정을 가면 본당이 큰일 날 것 같지만 피정을 다녀와도
본당은 잘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나만 잘 할
수 있다는 착각, 이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착각과
비슷합니다. 유명 인사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예쁘고, 똑똑하고,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아야 한다는 착각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고통입니다.
본당 신부는 임기가 5년이고, 보좌신부는 임기가 2년입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말처럼, 아쉬움이 남고, 미련이 남아도 때가 되면 떠날 줄
아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이 착각의 틀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꽃은 피었다 지기 마련이고, 사람은 나올 때가 있으면 들어갈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역사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했던 사람들 때문에
본인은 물론 공동체가 수렁에 빠지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다 될 것을 예감하십니다.
구원의 역사에 또 다른 협조자가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바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을 떠나야 하고, 하느님나라 운동에서도 떠날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주님의
‘비움’이 바로 참된 자유의 시작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서울] 아빠들이 가서 돈을 보내왔기에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22-34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5-11
아빠들이 가서 돈을 보내왔기에
1960년 전후에 아빠들이 중동으로 독일로 노동하러 많이 나갔습니다.
아빠들은 가서 돈 벌어 보낼 테니 이제 잘 살 거라며 신바람 났었습니다.
셋방살이 끝내고 도시 주변에 집도 땅도 사며 전후의 고통이 정리됐지요.
아빠들이 가서 돈을 보내왔기에 어려웠던 사회 희망의 꽃이 피었었지요.
지금도 아빠들이 하늘로 파견 가 가정에 평화를 보낸다면 참 좋겠어요.
부조리의 세상고통 견디라고 주님은 하늘로 가시어 협조자를 보내셨군요.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굳은 믿음으로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22-34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5-11
안식년이라 그런지 텔레비전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
프로그램 중에서 이런 내용을 가진 것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빠가 아이를 키우는 프로그램, 정글이나 오지에서의 체험을 다루는
프로그램, 군대에서의 생활을 다루는 프로그램, 선수가 아닌 연예인의
각종 스포츠 경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 가상 결혼을 보여주는 프로그램
등등...
이 프로그램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일상생활 안에서 자기 스스로 할 수
없고 힘든 것들을 연예인들이 직접 체험하면서 풀어나가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힘들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들을 시청자는 편하게 거실에 누워서 웃으며 볼 수 있지요.
어쩌면 대리만족이 아닐까요? 즉, 해야 하고 또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남들(특히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통해 만족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볼 때에는 그렇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지만 보고 나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왜 일까요? 아마도
내가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남들의 모습을 통한 만족보다는 직접 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겠지만
만족도는 더 높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에도 더욱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남들의 모습을 통해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의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행동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차서 차마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각종
두려움으로 인해서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은 떠나시고 대신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시지요. 물론 우리 곁에 계시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인간의 육체라는 몸을 떠나야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계속 육체를 가진 채 우리 곁에 계신다면, 아마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을 세속적인 왕 정도로 낮춰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는 자신 있게 무엇인가를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호해주고 지켜준다는 굳은 믿음으로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하고 근심에 가득
차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굳은
믿음으로 이 세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품은 쉽게, 조용하게 계발되지 않는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만, 영혼이
강해질 수 있고, 비전이 분명해질 수 있고, 꿈이 고취될 수 있고, 성공이
이뤄질 수 있다(헬렌켈러).
2015년 인천교구 서품식 제대
실수의 말이 오히려....
지금부터 10년 전, 그러니까 제가 갑곶성지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성지
사무실에서 불같이 화를 내는 어떤 자매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어떤
불편함에 대한 항의였는데, 솔직히 좀 너무하다 생각이 들면서 점점 화가
납니다. 하지만 화를 내봤자 시간만 더 끌 것 같아서 얼른 이 자매님이
불평하는 부분에 대해 인정을 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상황을 종료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뭐가 고맙다는 거예요?”라고 더 화를 내십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신부이고 또 이렇게 성지를 처음 맡다보니 고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자매님처럼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분이 없었거든요.
따라서 얼마나 감사합니까? 고맙습니다.”
불같이 화를 내시던 이 자매님께서 이 말씀을 듣더니 잠잠해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세요.
“제가 더 죄송하네요. 그렇게 화낼 것도 아니었는데... 사실 하루 종일 안
좋은 일이 있다 보니 화내지 않아도 될 것을 화냈네요. 그런데 이렇게 좋게
받아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실수로 한 말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었지요. 그때 느낀 점 하나는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의 말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집니다.
갑곶성지의 십자가
◈ [청주] 떠나보면 알거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요한16,5-11)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6,22-34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5-11
떠나보면 알거야
봄은 분명 생명력이 넘칩니다. 이 생명은 겨울의 쓸쓸함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봄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여름, 가을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집의 충분하고 넉넉한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 보면 알게 됩니다. 자기 삶의 자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한 발 물러서 있을 때입니다. 그러니 한 발 물러서보십시오.
지금 자리를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어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기밖에 더 하겠어?
2015년 나해 5월12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
복음: 요한 16,5-11
< 죽기밖에 더 하겠어? >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비웃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 본진랜드 장군은 성실한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하루는 신하들과 같이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왕의 천한
야유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비웃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장내는 그런 분위기로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엄숙한 표정을
한 본진랜드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왕폐하! 대왕께서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나는 전쟁터에서 대왕을 위하여 38번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저는 이제 나이 많은 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머지않아 지금 대왕이 웃으시는 나의 구주 그리스도를 만나 뵈러 가게
됩니다. 나이 많아 영원을 바라보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왕보다 더욱
위대한 분인 것을 압니다. 폐하, 소신은 이제 물러가려 합니다.”
이 엄청난 태도와 말에 온 장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장군을 즉시
처형하라는 추상같은 대왕의 명령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대왕의 떨리는 음성이 다음과 같이
들려왔습니다.
“본질랜드 장군! 내가 잘못했소. 나를 용서하시오!”
가끔 두려운 일이 앞에 가로놓이면 농담식으로 이런 말을 하며 스스로에게
힘을 주곤 했습니다.
“죽기밖에 더 하겠어?”
사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침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겪으신
분들입니다. 어쩌면 죽는 연습을 많이 하신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담대하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부러움’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의 장례식 때 그렇게 많은 선교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실라스를 감옥에 가두었던 간수와 그 가족이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지진이 나서 감옥 문이 열리고
그들을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 다 풀렸음에도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담대함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죽음을 겁내지 않는 담대함. 그것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갖지
못한 힘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죽음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하느님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행복해하고, 주름이 늘어가는 것도 행복해하고,
조금씩 재산이 사라져가는 것도 감사해하고, 명예와 건강과 기력이
떨어져감도 주님께 더 가까이 간 증거가 되는 삶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할 때 불안에 떠는 이들을 위해 정장을 하고 갑판에서
찬송가를 연주하며 서서히 가라앉았던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금 앞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을 찬미할 수 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당장 죽어도 행복하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면 오게 될 죽음을 애인처럼 맞아들일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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