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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수도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20,17-27
† 복음 요한 17,1-11ㄴ
★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만난다. 그는 에페소 신자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이제 바오로 사도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순교를 맞이해야 할 마지막 여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제1독서).
★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남김없이 이행하심으로써 땅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을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의 밀레토스 설교를 묵상하다 보면 늘 부러움을 느낍니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내어 주었기에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는 삶,
이것이 그의 삶이었습니다.
이 설교에서 바오로 사도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 받은
직무”인데 그 내용은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에게는 이것이 삶의 의미였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이것에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남김없이 다 바쳐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목숨을 아까워해야 할 이유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살면서 겪은
시련과 눈물, 그리고 앞으로 닥칠 투옥과 환난과 죽음마저도 그 직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할 일을,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완수했으니 하느님 앞에
가서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1코린 9,16)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당연한 직무라고 밝혀 왔기 때문입니다. ‘직무’는 그 일을 해서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듯이,
바오로도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은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라는 직무는 바오로에게
덧붙여지거나 부과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기도’가 봉독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종결하는 최대의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분에게 일생의 영광이었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분께 순종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오신 예수님께서 그분께 되돌아가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영광에 이르는 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직무는 서로 다릅니다. 평생 이루어야 할
사명도 있고, 오늘 만나야 할 사람도 있으며, 지금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에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 바오로 사도처럼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에 기쁜 마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오늘 하루에도 우리는 수없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때마다
“이 십자가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자문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하늘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사도20,17-27 요한17,1-11ㄴ
제1독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복음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ㄴ
하늘길
삶이 힘들수록 긍정정, 낙관적 사고는 절대적입니다.
부정적,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끝이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바오로는 물론 모든 성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었기에 힘든 중에도 긍정적,
낙관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승천하심으로 하늘길이, 하늘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아버지의 하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자, 하느님 향한
하늘길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나름대로 하늘길을 따라 하느님께 가고 있습니다.
수도원길이 그대로 하늘길을 상징합니다.
-행복하여라,
푸르른 '메타세콰이어'/가로수 사열(査閱)을 받으며
향기로운/아카시아꽃/하느님 향기를 숨쉬며
하늘길/승리의 길/수도원 길 걸어
하느님의 집/수도원 성전을 찾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어제 써놓고 나누며 기뻐했던 '하늘길'이라는 시입니다.
아마 가장 많이 써드리고 신자분들 역시 가장 좋아하는 성구는
다음 데살로니카 전서 말씀일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5,16-18)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록 이 성구를 반가워합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느님 희망의 끈, 하느님 믿음의 끈,
하느님 사랑의 끈을 잡고 힘겹게 살아들 가는지요.
어제도 여러분에게 이 성구를 써드리며 드린 조언입니다.
"이 말씀대로 사시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하늘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야 활짝 열리는 하늘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사도 바오로의 고별사가 감동적이며
성공적 하늘길 여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늘길 막바지 하늘문에 이른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자신은 물론 남은 우리들 역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성공적 하늘길
여정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예수님이십니다.
하여 수도원 정문 하늘길의 출발지점 커다란 바위판에 새겨진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우리 분도수도회의 모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죽음을 앞둔 고별사 역시 성공적 하늘길 여정의 완료를
보여줍니다. 말그대로 온갖 박해와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바오로의
하늘길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말씀대로 끝까지 하늘길 여정에 최선을 다한 바오로입니다.
믿는 이들 우리 역시 하느님을 향한 하늘길 여정 중에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위해 하늘길 여정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영광스럽게 하시며
희망과 기쁨을 가득 선물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 화요일 요한 17,1-11ㄴ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Father, Give glory to your son, so that your son may glorify you."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예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잘 보이고 싶어 외모에 신경을 쓰고, 힘을 기르려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려고 하며, 명예를 누리려고 재물과 권력에 깊은 관심을 두며
살아간다. 그렇게들 서로가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보다 너 낫게 보이고
싶어하고 튀고 싶어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들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에게 참으로 영광스러운 삶이 무엇인지 곧 참으로 인간답고 행복한
길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이 주제를 이루고 있는 오늘 복음의 고별기도
(17,1-26)는 죽음에 임박한 예수님의 봉헌 기도이다. 13장부터
계속되어온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이 어느덧 끝부분에 와 있다. 이어지는
18장부터는 예수님의 죽음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만큼 장엄하고 절박한
예수님의 호소와 바램이 담겨 있다. 예수님의 이 간절한 마음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그 어떠한 사심도 없이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였고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며 하느님의 뜻만을 찾으셨다(17,1). 그분은 다음과 같이
아버지께 온전한 신뢰와 찬미를 드리신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17,1)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해 철저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영광스럽게 되신다. 아들은 십자가상 죽음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임무를
최종적으로 수행하고, 아버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아들을 당신 자신에게
들어올린다. 곧 아들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이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청한다.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17,5) 예수님의
이 요청은 믿는 자 모두가 그 영광에로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는
아들이 영광 가운데 아버지께 돌아감으로써 아들 예수가 세상의
‘주님’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자로서 또한 생명을 주는
자로서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을 뜻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께서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되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17,10) 예수님은 지상에서 활동함으로써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했고, 제자들 또한 예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그런 예수를 드러내 보여주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죽기까지 실행하심으로써
영광스러워졌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예수님의 그
영광을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진정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의 몫은
무엇일까? 참으로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내 행동과, 마음과 생각을 오직
하느님을 드러내려는데 모아져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자신을 포기하고 죽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반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재물과 권세를 누리려 하고, 세상적인 힘만을 키우면서
자신을 내세우려 한다면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져버린다. 이제부터 세상
물질이나 권력에서 영광을 찾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타자를 위해
사랑으로 죽고, 일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견뎌내고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그날, 행복한 날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복음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ㄴ
그날, 행복한 날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날 무렵 예수님처럼 조금은 비장한 어조로
그러나 담담하고 편안한 음성으로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다
제 것입니다.”(요한복음 17장 1절, 10절)
가끔씩 ‘그 날’ 결정적으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땅으로 건너가는
그날을 묵상해봅니다. 근본적으로 나약하고 두려움 많은 우리 인간이기에,
그리고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날이기에, 그날은 아무래도
두렵고 떨리는 것이 당연지사이겠지요.
그러나 ‘그 날’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생에 걸쳐
기다려왔던 날, 일생일대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기에 가슴 뛰고 설레는
날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 날’은 언제나 미완성이었던 우리네 인생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날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결정적으로 만나는 날, 그간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다양한 인간적인 한계, 죄, 상처, 부족함, 비참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날은 우리 평생의 소원이 성취되는 은혜로운 날, 한없이 나약했던
우리 인간성이 풍요로운 하느님과 합일하는 날, 결국 구원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그 날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날로 장식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그 날을 보다 기쁜 축제의 날로 장식하기
위해 이 지상에서부터 좀 더 고민해야겠습니다.
가장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노력,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심을 의식하고 자각하는 노력이 아닐까요?
요즘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잘 준비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계획을 미리 자식들과 논의해서
프로그램을 마련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날을 영원한 작별의 슬픈 날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기쁜 축제의 날로 여기고 세부 프로그램을
짭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기로 가장 유명한 분이 ‘인생수업’의 공동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장례식 순서를
살아생전 미리 짰습니다. 고별식 때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의
아들이 미리 준비한 큰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랬더니 봉투 안에서 크고
예쁘고 화려한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나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나비의 아름다운 날갯짓에 다들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문객들에게 미리 나누어준 작은 봉투를 모두 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일제히 작고 예쁜 하얀 나비들이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야말로 장관이 연출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나비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죽음이 결코 나쁜 것만이 아니구나. 죽음을
통해 비록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지만 영혼은 한 마리 예쁜 나비처럼
그 비루하고 추했던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을 향해 훨훨 날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젖어들었습니다.
우리의 ‘그 날’을 보다 지혜롭게 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언젠가 반드시, 아니 100% 우리에게 손님처럼 찾아올 그날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부활 제7주간 화요일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복음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ㄴ
가톨릭교회는 2000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나이가
많은가요? 아니면 아직은 젊은 걸까요? 나이는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우주의 탄생, 지구의 시작에 비하면 교회의 나이는 아직 걸음마도 시작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것에 비하면 그래도 젊은
편입니다. 힌두교와 불교보다는 젊은 편이고, 이슬람교와 개신교에 비하면
나이가 많은 편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어떨까요? 우리는 그 시작은 1784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에 가톨릭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 왔을 거란
말도 있고, 조선의 선비들은 이미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가톨릭교회를
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분명 젊은 교회입니다.
아직도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한국사회, 한국교회는 고령화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 출산으로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있으며,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 노령인구가 많아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글을 좋아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마음의 생태를 말한다.
그 것은 장미 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육십세이든 십육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이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 대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영원의 세계에서 오는 힘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으면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하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세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동창신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함께 사제가 된 신부가 34명입니다. 동창
중에 3명은 세상을 떠났고, 2명은 몸이 아파서 휴양을 하고 있고, 4명은
중도에 사제의 길을 그만 두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맡은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늘 밝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며, 어떤 친구들은 걱정과 근심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친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배운 것을 함께 나누기도 합니다. 어떤
친구는 운동을 해야 하는 것도 알고,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도 알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제 집에 돌아오면서
문득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회중 앞에서 또 개인 집에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지닌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청춘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셨던 예수님께서도 영원한 청춘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논에 심어진 모가 가을이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들의 신앙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믿어야할 주제는 사랑 관계론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복음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ㄴ
믿어야할 주제는 사랑 관계론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흔히 말합니다. 물론 자기도 포함되지요.
나도 내 마음 모르고 애인도 부부도 자식도 믿기 힘든 세상이라지요.
사랑을 주고 사랑 받아야 세상 살기 그런대로 편하다는 걸 다 잘 압니다.
사랑에 전념하고 사랑위해 태어났고 그대로 사는 사람을 미쳤다는 세상.
예수님은 하느님과 사람들과 자신의 관계를 사랑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나 비유 없이 직설적으로 관계론을 말씀하셨는데 믿어야 해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 이들은 또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을참으로 알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 17,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모습을 따라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복음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ㄴ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작가인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의 글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그 분량에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곧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처리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불행도
현미경처럼 확대하여 스스로 큰 고민에 빠진다.”
이 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현명한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사실 어제 저는 커다란 실수 하나를 했습니다. 새벽 묵상 글에 그날의
복음과는 다른 내용의 글이 올라간 것입니다. 그 내용은 5월 25일의 새벽
묵상 글 내용이지요. 원래는 당일에 묵상을 해서 올리지만, 오늘 평화방송
라디오에 ‘오늘의 강론’ 녹음이 있는 날이어서 제 방송분량인 5월
25일부터 30일까지의 묵상 글을 미리 써 놓았거든요. 그런데 실수로 25일
것을 올린 것입니다.
어제 오후가 되어서야 다른 분들이 올려주신 댓글을 통해 저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그러면서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서두르다보니 또 커다란 실수를 했습니다. 두 개의 컴퓨터를
통해서 작업을 하는데, 이쪽의 묵상 파일을 다른 컴퓨터로 옮겨 작업을
하는 도중에 옛날 묵상 파일로 덮어쓰기를 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평화방송 녹음을 위해 미리 써놓았던 묵상 글이 모두
사라지고, 2015년 5월 12일까지의 묵상 글까지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저는 어떠했을까요? 소위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용어인
‘멘붕상태(멘탈 붕괴)’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함과 동시에
(다른 누군가가 일부러 한 것은 분명히 아니니까요)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한 화가 너무 났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자책을 하고, 또 화를
낸다고 해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곧바로 ‘그때의
글이 좋지 않았나 보지. 다시 쓰라는 하느님의 뜻인가 보다.’라면서 다시
묵상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또 만약 방송 당일 날인 오늘 아침에
확인했으면 대처 할 시간도 부족했을 텐데 미리 발견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책하는 것, 또 화를 내는 것. 모두 필요 없는 일입니다. 그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 나갈 때 비로소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기도에 있어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바치는 기도를 한 다음에 자신의 일을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나의 일을
분주하게 나열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더 많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생각,
그리고 마음에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의 모습을 따라, 내 마음을 먼저 하느님을 향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면 나의 일들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늘 감사의 모습으로 기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햇빛은 달콤하고, 비는 상쾌하고, 바람은 시원하며, 눈은 기분을 들뜨게
만든다. 세상에 나쁜 날씨란 없다.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날씨만 있을
뿐이다(존 러스킨).
묵주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보고 싶더군요.
흉내라도 내 봅시다.
옛날에 한 불효자가 상을 받으려고 효자 흉내를 냈습니다. 임금이 그에게
상을 주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요.
‘그 사람은 원래는 엄청난 불효자인데, 임금님께 상을 받고자 효자 흉내를
낼 뿐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는 상을 줬다고 합니다.
“효도는 흉내를 내어도 잘 하는 것이다.”
본심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흉내를 내는 과정 안에서 분명히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도 비로소
깨닫게 되겠지요. 그런 차원에서 흉내를 내어도 잘 하는 것이라면서 상을
준 임금의 판단은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효도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 역시도 이러한 흉내를 통해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진정성이 떨어져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흉내 내는 과정 안에서 분명히 주님의 뜻에 조금이라도 다가서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새집에는 누가 살까요? 쓰레기만 살더군요.. ㅠㅠ
◈ [청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19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요한17,1-11)
제1독서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를 다 마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17-27
복음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ㄴ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어라.
많은 분들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자비의 기도,
십자가의 길 등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가끔 “9일기도를 하면
소망을 꼭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기도 하고 기도하는 만큼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나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기도문만 외운다고 그렇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횟수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대로 삶의 쇄신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함에 있어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핵심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이들, 바로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완성하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기에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과(요한6,32이하) 생명의
물(요한4,10이하)을 주시며 풍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결국 통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면서 사랑의 친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업시간에는 일로써, 기도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를 말, 생각, 장소, 시간에 국한시키지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시는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부디 삶이 기도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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