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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수도회] 삶의 한복판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2코린 3,4-11
† 복음 마태 5,17-19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사도직에 대해 말한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직분을 받았기 때문인데, 사실 이것은 모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 하더라도 율법의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복지 시설, 유치원 등 많은 사도직 시설 안에서 근무하기 위해서도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될 수 있는 자격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오로의 경우 그가 사도라는 자격을 입증해 주는 것은 코린토 신자들과
그들의 모범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추천서나 자격증이 아니라 자기가
선포한 복음 내용을 코린토 신자들이 흔쾌히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자신이 사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이 사도의 자격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여 많은 이가 신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오로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신자가 된 이들 때문에 자기가
사도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실 사도라는 단어는
‘파견된 이’를 뜻하기에, 파견 없이 자기 스스로 일한 사람의 업적 자체가
그를 사도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도직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유치원 교사 자격이 있어서
유치원 사도직을 하면, 그 자격증은 그가 유치원 교사를 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지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사도직’, 사도로서 하는 일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통해서 일을 하시더라도,
그가 아무것도 자기 업적이라고 내세우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그가 하고
있는 일은 파견된 사도의 일이 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하는 작은 일들이, 나를 보내신 분께서 하시는 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어느 일이건 그것이 내가 한 일이라고 애착을 갖거나
붙잡지 않고 바오로처럼 언제라도 빈손으로 떠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유다교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은, 율법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효하기 때문에 설령
개종을 하였다 하더라도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율법의 근본정신이 준수되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근본정신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법조문에 구애받으면서 표리부동하게 살아가는
바리사이적 삶이 아니라 유연하고 느슨해 보이면서도 정직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삶이며 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요.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삶의 한복판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길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 5,17-19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삶의 한복판에서 율법을 완성하는 길
우리는 삶을 점검하고 쇄신하려 할 때 자주 ‘법적인 데 매이지 말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자’고 외친다. 그러나 더 깊이 자신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법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법도
영성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고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문제는 법이나
영성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마음과 지향으로 받아들이고 살아내느냐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법이 있듯이 정신세계를 망가뜨리는 영성도 있지
않은가! 어떤 것이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수용하고
함께한다면 성사(聖事)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삶의 법으로 여겼고,
자신들의 삶을 그 법의 구속력에 내맡김으로써 하느님 앞에 의롭게
산다고 생각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선포한 ‘
하늘 나라’에로 정향된 ‘의로운 삶’을 새롭게 요구하셨다. 이제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풀이되고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5,17). 여기서 율법과 예언서를 함께 열거한 것은 구세사적인
관점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이다.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 그 자체의 구속력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완성한다’는 말은 율법의 조목 자체를 완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이 새롭게 밝혀지기 시작했고
그분과 함께 충만하게 이루어져 나간다(5,18-20).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한 자 한 획에 집착하지 않으시고 과감하게 율법을 심화하거나 폐지하셨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잡다한 계율들을 원수 사랑(5,43-48),
황금률(7,12),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22,37-40)으로 환원시켜
단순화하셨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려면 규칙과 제도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을 원활하게 해주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법규에 얽매이거나 제도만을 중시한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관계나
사랑에 금이 갈 수 있다. 그리고 삶의 전반에서 드러날 수 있는 지나친
원칙주의로 인해 초래되는 메마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5,19) 율법은 이 지상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므로, 율법의
구속력과 그 유효성은 종말론적이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율법의 주인이시요,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 율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철저히 실행하는 이들이다. 모든 계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기에 강도나
구속력이 크든 작든 동일한 가치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한 모든 계명을 빠짐없이 철저히
준수하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 율법의 문자에 매여 스스로를 구속하지 말고,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추종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해나가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2015.06.10.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코린 4,6)
아니 우리 이모가 사람을 죽인다고요?
언젠가 우리 수사님 한분의 우스게 소리가 기억납니다.
이모님 성함이 '문자'라네요.
그럼 탈렌트 '김성령'이가 사람을 살렸다구요? ㅎㅎ
말씀묵상을 하면서도 성경 글자 하나하나에 매여
자구적 해석을 하다보면 엄청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그 정신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십니다.
613개 율법조항을 지켰다 못지켰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오늘은 너무 말마디만 따지지 맙시다.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흥분하기보다 그 말의 속 뜻을 새겨보면 어떨까요?
성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남보다 더 많이 알고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말과 모범으로 돌려드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부디 이 말씀묵상이 여러분을 죽이는 도구가 되지 않고
살리는 도구가 되길 간절히 빕니다.
[출처] 2015.06.10.|작성자 알타반
- 오상선 바오로 작은 형제회 신부 -
◈ [수도회] 율법의 완성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코린3,4-11 마태5,17-19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4-11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율법의 완성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없이 율법의 완성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여전히 지켜야 할 율법은 남아있고 마음의 평화도
없습니다.
결코 율법주의는 하느님이 원하는 바도 아니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율법의 완성입니까?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과 율법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 율법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행할 때는 율법에 거스르는 일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예전에 써놓은 짧은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나무는 부단한 율법준수를 통해 완성을 지향하는 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반면 호수는 하늘 사랑을, 사랑의 하느님을 마음에 담은 '사랑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나무가 되어 살 것이 아니라 사랑의 호수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런 호수같은 사랑의 사람을 통해 비로소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보다는 사랑 실천에 집중해야 합니다.
율법준수에 집착할 때는 자유롭지 못하고 사랑에 힘쓸 때는 자유롭습니다.
사랑이 진정 자유롭게 합니다. 비단 율법만이 아닙니다.
수도자의 모든 수행도 사랑의 표현이요 궁극엔 자유를 목표로 합니다.
어제의 경우가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아침 식사후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 몹시 힘들어 보이는 한 자매가 문 앞에 서서 고백성사를
보고 싶다 했습니다.
"3시경 기도 후에 오십시오. 그때 고백성사 드리겠습니다.“
기도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상 기다릴 여유가 없어 떠난 듯 했습니다.
참 마음이 걸렸습니다.
힘들게 오신 분이 분명한데, 이런 예외적인 경우는 기도를 못하더라도
사랑의 분별로 우선 불쌍해 보이는 자매부터 성사를 드렸어야 하는 건데
많이 후회되었습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분별의 사랑도 성령의 선물입니다.
사랑의 성령에 따라 살 때 저절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1독서의 새 계약의
일꾼은 비단 바오로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위한 율법이지 율법을 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빠진 문자 그대로의 율법주의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의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새 계약의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들,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분별로 율법의 완성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성령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 -
◈ [수도회] "폐지하러 온것이 아니라..."-한상우 바오로신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4-11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마음이 필요한 나와 너를 만나게 됩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립니다.
공동체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기에 완성시켜야 할 완성의 여정이 필요합니다.
위태로운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율법이며 공동체의 예언서입니다.
이와같이 율법과 예언서들을 완성하시는 분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간격을 좁히면 사랑해야 할 우리의 시간이 됩니다.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소중한 시간이 예수님과 함께 사랑을 완성하는
사랑과 용서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율법과 예언서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함부로 사는 우리들 또한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율법과 예언서에서 다시 만납니다.
삶의 좌표를 잃은 우리들에게 다시금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께서 완성하시겠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4-11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지난주에는 교구청 마당 공사가 있었습니다. 일하시는 분들이 빨간 벽돌로
조적을 하였습니다. 하나의 벽돌은 아름다운 바닥이 되었고, 벽이
되었습니다. 바닥은 3번 작업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콘크리트를 치고,
다음에는 방수액을 바르고, 그 위에 또 콘크리트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래를 펼치고, 보도 불럭을 깔았습니다. 벽을 쌓을 때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닥을 정리하고, 수평을 맞추고, 정성껏 벽돌을
쌓아갔습니다.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들이 정해진 작업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작업 공정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바닥은 방수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벽은 금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주고 있는 ‘메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에
대응을 잘 하였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매뉴얼이
있음에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환자들이 있었던 병원을
공개했으면 의혹과 혼란은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모임들은
취소되었고, 학교는 휴교를 하게 되었고, 시장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들었고, 관광객들은 여행일정을 취소하였습니다. 아무런 잘못 없이
격리가 되고, 확진 환자가 된 분들의 고통은 말 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작은 것이지만 원칙과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위한 많은 법과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규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들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대접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4-11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대접
자연법을 어기고 어기도록 시키는 사례를 사회뉴스에서 종종 봅니다.
그게 다 돈만 생긴다면 뭔들 못하겠느냐는 어른들의 버릇일 겁니다.
돈이 된다면 거짓말도 사기도 서슴치 않으며 이웃을 망하게도 합니다.
모두 하늘나라에서 별 볼 일없는 사람대접 받을 준비를 하는 겁니다.
옛 어르신들은 황금을 돌 같이 보라면서 이웃의 우애를 중시 했지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대접 받으려면 진리를 잘 따르고 가르쳐야지요.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오 5,17)”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사랑의 혁명가이신 예수님
신희준 신부(서울대교구 공릉동성당)<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 마태오 복음 5장 17-19절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사랑의 혁명가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혁명가셨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것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그런 혁명가는
아니셨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진정한
혁명가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율법”은 단순히 율법 규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인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모세오경의 내용 가운데 핵심은 다음의 말씀에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9,2) 또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구약성경에는 총 16권의 예언서들이 실려 있습니다.
16명의 예언자들이 남긴 말씀이 전해져 오는데, 핵심은 다음의 말씀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3.16-17)
율법과 예언서가 완성되는 날 사람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 우리는 모두 사랑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무딘 마음이 변해서
참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최고의 기적입니다.
- 서울대교구 공릉동성당 신희준 루도비꼬 신부 -
◈ [인천] 문제의 해결은 내 마음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4-11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전에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시작 전에 해설을 맡고 계신 자매님께서 교우들이 미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휴대전화를 꺼달라고 세 번에 걸쳐서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마도
본당신부님께서 이 휴대전화 벨소리에 무척이나 민감하신가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어떤 신부님께서 “저렇게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을
해도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사람이 있을걸.”이라고 이야기하시네요.
미사가 시작되었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이제 거룩한 성찬례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조용하게 제대를 바라보고 있는 순간, 갑자기
휴대전화 벨소리가 우렁차게 울립니다. 해설자는 ‘내가 몇 번을
얘기했는데 휴대전화를 끄지 않은 사람이 있어?’라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곳을 찾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본당신부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또 어떤 분은 인상을
찌푸리며 벨소리의 진원지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립니다. 그런데 제대 위에
있는 신부님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웃음을 꾹 참고 있었지요. 어떻게 된
것일까요? 글쎄 미사 직전에 ‘저렇게 말을 해도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신부님의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을 뿐인데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 다릅니다.
짜증을 내는 사람, 화를 내는 사람, 걱정하는 사람, 그리고 웃는 사람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어떤 상황에
처해져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다 다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을 또 다른 기회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며 절망하여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로 기쁘고 좋은
일이어서 감사할 상황인데도 이를 ‘겨우 이것밖에 안 된다.’면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내 마음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내 마음을 얼마나 잘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행복한 나로 만들 수도 또 반대로 불행한 나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에 가깝나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말로만 계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계명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큰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평불만에 빠지면서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가까울까요? 아주 자그마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가까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특별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하다(세스 고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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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교육 수료증이 나왔습니다. 힘들었는데 그래도 수료증이 나오니
기분이 좋네요.
문제와 답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문제를 보았습니다.
1. 대학에 합격하는 꿈을 5글자로 말하면? 정답: 재수(!) 없는 꿈.
2.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를 한 글자로 말하면? 정답: 짠.
3. 금술 좋은 부부가 잘 섬기는 신은? 정답: 여보당신.
어때요? 다 맞추셨습니까? 문제만 보았을 때에는 도저히 정답을 모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답을 보고나면 “아~”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지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를
받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왜 이런 문제를 내셨는지, 이 문제의
뜻은 무엇인지, 과연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문제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깨닫지요.
중요한 것은 문제를 받고 실망하고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답이 무엇인지 찾는 그 과정 안에서 분명히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커다란 선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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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시험문제.
◈ [청주] 율법의 완성은 사랑|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6월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마태 5,17-19)
제1독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4-11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되고
맙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변하나 정리
못하면서 어떻게 큰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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