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름....
................................................위안부...
일본군위안부 [日本軍慰安婦] -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
일본군위안부는 오랫동안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신대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으로 일제시대 노동인력으로 징발되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 중 ‘여자근로정신대’의 일부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두 제도를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와 더불어 혼용되어 쓰이는 용어가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이다. 이는 자발적으로 군을 따라 다닌 위안부라는 의미로 강제로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던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감추려고 일본이 만들어낸 용어다. 현재 공식적인 용어로는 한국, 중국 등 한자 문화권에서는 ‘일본군위안부’, UN 등 국제기구를 포함한 영어권에서는 ‘일본에 의한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가 쓰이고 있다
* 출처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울부짖으며 딸을 찾아 헤매던 부모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어린 소녀들의 모습이 내 안에서 점점 커져만 갑니다.”
일본 도야마(富山) 현 도야마 시에 사는 사와다 준조(澤田純三·78) 씨는 해마다 이런 내용이 적힌 연하장 다발을 받아 왔다. 발신
인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이케다 마사에(池田政枝) 씨였다.
패전을 앞둔 일제의 발악이 극으로 치닫던 1944년, 서울 방산초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이케
다 씨는 ‘여학생들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도야마 군수공장으로 보내라’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았다.
일제의 ‘황국신민론’에 물들어 있던 그는 다른 일본인 선생들과 함께 밤마다 학생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일본에 가면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고 여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며 어린 제자들을 꼬드겼다. 당시에는 그도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었다.
1945년 12월에야 일본으로 귀국한 후 ‘한국 쪽 하늘은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며 홀로 살아가던 그는 1991년 4월에야 나머지 제자 1명의 행방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는 도야마의 한 TV 방송국 기획취재반과 함께 3개월 동안 찾아 헤맨 끝에 한국에서 제자를 만날 수 있었다. 진심으로 사죄하는 그를 제자는 원망하지 않았다. "선생님, 행복하세요?”라고 조용히 물은 게 전부였다.
진정한 사죄의 길을 깨우쳐 준 것은 몇 달 뒤 제자의 딸이 보낸 편지였다. ‘백번 사죄하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천진난만한 어린 제자들에게 저지른 죄를 널리 알리는 데 발 벗고 나섰다.
‘정신대 동원은 민간업자가 한 일이다’라고 발뺌하는 일본 정부를 향해 그는 “전시에 학생들의 정신대 동원은 거역할 수 없는 ‘천황 폐하’의 명령이었다”고 외쳤다.
그의 증언은 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발뺌하던 일본 정부가 사실 인정과 함께 공식 사과를 하게 만드는 큰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매년 보낸 참회의 연하장은 심장병과 고령으로 몸이 불편해진 그가 잘못된 과거를 미화하려는 쪽으로 기울어 가는 일본 사회에 던지는 작은 경고음이었다.
일본 사회를 향한 그의 외침은 아직도 긴 여운을 남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 (지배의) 일원이었습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독립기념관에 가서 피해자들이 쓴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기 바랍니다.”
동아일보 2007-01-13 04:00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일제시대 일본의 야욕으로 발생한 대동아 전쟁에 끌려간 조선인 여성 위안부는 10만에서 20만명로 추정된다. 현재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은 130여명정도가 계시고, 이들은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18년째 시위를 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 분들의 억울함은 이제 세월 속에 뭍혀간다. 지난 70여년동안 피맺힌 절망과 한스런 세월을 보내면서 오직 한가지 뜻은 일본정부가 일본의 제국주의의 과오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 뿐이다.
이분들의 남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시대의 증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있는 지금, 나라의 책임있는 위정자들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일본은 양심이라는 감정이 없는 무생물처럼 왜곡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돈을 받고 성매매를 했던 직업은 없었다. 엄연히 기생과 창녀는 다르다. 더군다나 11세부터 20세 초반의 나이, 보수적이고, 여성들에 폐쇄적인 제도를 유지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돈받고 몸을 팔러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본적인 시대적인 민중들의 의식조차 반영하지 못한 증거를 들이대며 자발적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일본인들의 양심과 그런 일본의 왜곡되고 조작된 자료를 들고 그에 동조하는 모단체의 행각을 볼때면 너무나도 분노가 치민다.
능욕당하고 수치스러웠던 치욕의 역사.
이 나라의 아픔과 모진 상처로인한 고통을 온 몸으로 감싸안고 제국주의 칼날을 홀로 막아섰던 여인들.....
이제는 우리가 그 여인들을 지켜줘야 할 때다.....
첫댓글 위안부 문제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 "우리에겐 아직도 국가가 없구나. 세계화니, 자본의 전지구화니 하는 시대에, 아직도 19세기 이전이구나," 하는 것. 참 칙잡, 쓸쓸하지요.
말로는 다 할수 없는 아픔 입니다.
이러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자는 취지에서 일본의 양심세력이 운영하는 많은 곳이 일본 우익의 공격에 하나 둘 문을 닫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그들을 도와야합니다. 월산명박한테 도와달란 뜻은 아닙니다. 쥐*끼한테는 결코...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만 하는 우리민족의 아픔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