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리타 쿰 -
☆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청주] 일어나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지혜 1,13-15; 2,23-24
† 제2독서 2코린 8,7.9.13-15
† 복음 마르 5,21-43
(교황 주일)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 없음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이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 주일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감사드리며, 또한 성 베드로 사도 축일을 앞두고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 지혜서는 하느님의 창조 계획을 기억한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도록 만드셨고,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본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이 악을 선택할
때에 비로소 죽음을 자신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본디 부족함이 없이 충만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셨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본받아 가난한 이들에게 너그럽게 베풀 것을 권면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심으로써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사람들이 생명을 되찾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내 목숨 나의 것이니 내 인생 소신껏 마음대로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애원합니다. 피붙이를 낳아 지금까지 키워 왔으니, 그
생명은 아버지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들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는 수많은 부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친밀함의 표현으로 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그 호칭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여자가
‘딸’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질병에서 벗어나기를 당연히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딸’에게 생명과 행복을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통계 수치에 따르면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건강을 해치는 행동뿐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 스스로 정리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이 존재하여 살도록 만드셨음을 강조하면서,
만물이 창조된 본디 목적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데, 특히 그분의 창조
계획에 따라 우리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신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따라서 지혜서는 인간이 본디 악하기 때문에 애써 그 본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결코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 본성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본성을 간직하면서
살아간다면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부모보다 우리를 더 애틋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본디의
선한 모습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특별히 어리석은 판단이나 결정을 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삶을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는 뜻이다.> (마르 5,41)
새로 태어난 아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잘 아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 그러겠노라 하였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프랜시스 마리아야, 어서 일어나거라!"
"탈리타 쿰!"
여러분도 오늘 저와 함께 이 아이를 위해 탈리타 쿰을 외쳐 주십시오.
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는
이가 있다면 그를 위해서도 "탈리타 쿰"을 외쳐 주십시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세상이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게 되도록
노력하시는 교황님이 늘 영육간에 건강하여 힘차게 일어서실 수 있도록
교황 프란치스코를 위해서도 "탈리타 쿰" 하고 기도합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소녀는 부모님의 소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지극히 순수한 사춘기의 시간을 겪고있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딸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빠르게 성장하는 자녀들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저마다 제대로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공부와 취업때문에 누려야할 기본적인 삶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이땅의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먼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치유는 시작됩니다.
소녀의 아픔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들의 가족
우리들의 부모님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두려움때문에 잠 들어있는 소녀를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깨우십니다.
"탈리타 쿰!"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는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소녀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만남이 행복한 만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녀와 소녀의 아버지 야이로를 괴롭히는 두려움이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일상안에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마음을 나누는
거기에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치유
김태홍 신부(서울대교구 수유동성당)<연중 제13주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마르코 복음 5장 21-43절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3-15; 2,23-24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줍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8,7.9.13-15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또는 5,21-24.35ㄴ-43>
치유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압니다. 어떻게 상처가 깊어지고 무거워지는지.
상처는 우리의 육체에만 자리 잡지 않습니다.
마음을 살피다가도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상처가 있다고 말합니다.
상처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의미를 더해 갑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이를 더해 가는 고통은 가히 당사자 아니고서야
절대 같이 나눌 수 없는 심연입니다. 어떤 이는 분명 과거를 아파하는
고통을 가질 것이고, 어떤 이는 현재를 몸서리치도록 아파할 것이며,
또 어떤 이는 아직 현실은 아니지만 곧 들이닥칠 미래의 상실에 가슴
미어지는 아픔을 새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회당장은 딸의 죽음이라는, 아직 현실은 아니지만
곧 닥칠 고통을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열두 해나 하혈하는 고통을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까지 안고 있어야 했던 여인은 분명히 현재를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기다림의 끈을 놓아 버린 채 자신의 현재를
죽음 저편으로 넘겨 버린 소녀는 과거형이 되어 버린 아픔 그 자체입니다.
이들 모두를 예수님께서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이들의 상처를 더 이상 과거, 현재, 미래에 묶어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파하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통해, 미래를
통해 예수님의 현존(치유)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아파하고 계십니까?
아파하는 거기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 혹시 말 못할 아픔이 있다면 예수님께 보여드리며 치유를 청하십시오.
기꺼이 어루만져 낫게 해 주실 것입니다.
- 김태홍 사도 요한 신부(서울대교구 수유동성당) -
◈ [서울] 연중 제13주일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3-15; 2,23-24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줍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8,7.9.13-15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또는 5,21-24.35ㄴ-43>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2015년도 이젠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내일부터
수요일까지 예비 신학생 담임 부제, 수녀님들과 함께 여름 연수를
떠납니다. 뜻 깊은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기도는 메마른
나무에 물을 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교황주일이기도 합니다.
교황님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을 가지고, 오늘 세상을
떠날 것처럼 뜨겁게 살자!’ 참 좋은 글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꿈을 꾸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하느님을 만날 것
같은 마음으로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황님은 어떻게 사목을 해야 할까요? 오늘의 성서는 교황님이 해야 할
사목의 방향과 목적을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이 세상을 풍요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교황님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모든 이가 평화롭게 살도록
하셨으니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교황님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소외된 사람,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고,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3년 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하셨던 일입니다. 교황님께서 그렇게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높은 산은 평평하게 하고, 낮은 골짜기를
메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시면서 늘 기도하셨습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고,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교황님은 바람이 불어도 견디어
낼 수 있고, 기도하는 교황님은 가뭄이 와도 영혼의 샘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나면 서로 어색합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조금씩 어색함이
사라집니다. 자주 만나고, 대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 갑니다. 서로를 알게
되면 친해지고, 친해지면 보고 싶어집니다. 이런 것이 사랑이고, 사랑하니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기도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소리로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외우는 12가지 기도문,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기도와 같은
기도는 우리의 소리를 이용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서 하는
기도도 훌륭한 기도 방법입니다. 이것만 잘해도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머리로 하는 기도입니다. 생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흔히 묵상이라고 합니다. 성서 말씀을 읽고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당이나 성체조배 방에서 나의 하루를
돌아보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
성경공부를 많이 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묵상기도를 자주 합니다. 세
번째는 가슴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나와 친해지셔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시고, 내게 말을 건네기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멀리 하늘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힘이 강한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친구처럼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나도 이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어주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네 번째는 온 몸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이에는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짓 자아 때문에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태어날 때 아이가 우는 것은 편안한 어머니의 태중에 나와 낯선
곳으로 나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이런 상처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느님과 하나 되지 못합니다. 나의
거짓자아를 없애주고, 치유시켜 주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온 몸으로 하는 기도는 나를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나를 나쁜 일로 인도합니다. 나에게는 또 다른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은 온 몸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분들은 거짓자아를 없앴을 수 있었고, 내면에 있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 욕심, 분노를 하느님께 맡겨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당신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십니다.
교황님도, 교구장님도, 본당신부도, 신자들도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과 친밀해 져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내면에
있는 거짓된 자아를 몰아내야 합니다. 나와 하느님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를 보존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셨지만 가난해 지시면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부모는 가슴에 살아있는 자녀와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3-15; 2,23-24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줍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8,7.9.13-15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또는 5,21-24.35ㄴ-43>
부모는 가슴에 살아있는 자녀와
자녀가 사고나 병으로 먼저 떠나면 부모는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가슴에 묻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고통은 무엇과도 비교 못합니다.
그 고통의 해결은 자녀가 되살아나 함께 지내는 것밖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에게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었다고 하십니다.
이젠 세상을 떠나 부모 가슴에 잠들고 하늘에서 깨어있다고 믿어야지요.
부모는 가슴에 살아있는 자녀와 기도하며 영적으로 교감할 수밖에 없네요.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코 5,3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일어나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마르5,21-43)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3-15; 2,23-24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줍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8,7.9.13-15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또는 5,21-24.35ㄴ-43>
일어나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단비가 내렸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은총의 비를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을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얻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회당장이라면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엎드렸습니까?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과 가정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거센 돌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시련 중에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사람이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위하여모든 것을 내 놓았습니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쉬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여간해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딸의 고통 앞에서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 고 합니다. 회당장은 거센
역풍을 무릎을 꿇는 성숙한 믿음을 통해 해결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높은 것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회당장은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분노와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도 말 못할 고민이나 걱정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더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과 고민,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당신만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도와주십시오.”하고 주님께 모두를 맡겨 드릴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보면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시며 동안의 쌓인 모든 것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쉬고 계시던 이분이 고해성사를 보게 된 계기는 하나의
시련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병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손목에 이상이
생겨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을병도 아니고 손목에 이상이
생긴 것을 뭐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느냐? 호들갑떤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분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병원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그래서 고해성사보고 수술에 임하려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그분이 다시 오셨습니다. 남편과 함께
오셨는데 선물을 잔뜩 가지고 오셨습니다. 제가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는
것을 알고 한약제로 만든 소화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배우자 되는 분이
한의사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병은 의사에게 맡겨야지
신부에게 찾아오시느냐?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하느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그 도구일 뿐입니다.” 보통의사는
겉으로 드러난 병을 치료하지만 명의는 원인을 다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치유해주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자매는 수술을 하지 않고 완치가 되었습니다. 내면의 치유를
통해 외적인 병도 나았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느 때 드러납니까?
믿음이 있는 곳에서 그분께서 역사하고 싶으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와중에 시련이 연속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회당당장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매달렸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접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북돋워주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지
네가 지금까지 지켰던 믿음을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냐?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은총의 때,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회당장은 “사람들의 말”이라는 유혹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의 능력, 권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은 은총의 기회입니다.
혈액암으로 고통을 받는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늘 맑고 밝은 모습이라서 환자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분께서 투병 중에 천일기도를 시작 하셨고 물질로도 매일 10달러씩
봉헌을 하였으며 저에게 매주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몸은 아프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과 성모님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나의 사랑하는 딸, 테클라야! 내가 너에게 병고를
주는 것은 너를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지 깨닫게 함이며 또 한 가지는 너의
몸과 마음을 비울 수 있을 데까지 그리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내려놓아라. 그래야 내가 네 안에 자리 잡고 너의 주인이 될 수 있단다.
이제까지는 너의 몸과 마음이 너에 의해서 움직였지만 지금부터는 이제
내가 너의 주인 이란다.’그래서 이제는 저를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많이
많이 비워서 큰 빈공간을 하느님이 자리 잡으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거예요, 신부님, 저의 이 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070811)
“저는 병을 통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가? 두 번째는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느님이 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병의 고통을 통해 몸과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알아서 저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제게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070901)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아주 힘든 주였던 것 같애요. 마음 속으로 ‘그래
암세포야! 너 내가 그렇게 좋으면 내 몸 속에 들어와 놀다 가거라.’하며
너그러운 척 하면서도 실제로 줄기세포 이식 후 에는 99%의 암세포가
죽고 1%는 남을 수가 있는데 왜 나는 그 1%의 극 소수의 수치에
포함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묵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답은 한가지! 제 생명을 주신 분도 한 분, 거두어 가실 분도 한 분, 우리 주
하느님 뿐이시니 모든 것을 그 분 계획안에 맡기고 따르는 길 뿐임을!’
(080217) 이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남모르게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천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080625) 세상을 떠나셨지만 임종을 맞기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검 앞에서는 울고불고 우왕좌왕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과
무질서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슬픔가운데에도 영원한
생명의 희망이 넘쳐났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삶을 믿는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살 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탈리타쿰!”,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 이런 기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쫓아다니지만 기적은 믿음을 지닌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기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육으로뿐
아니라 영으로도 살아났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라고 한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적인 음식을
먹던 그는 죽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신앙인이 먹어야 할 음식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자주 읽고 미사 참례를 더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숙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 빛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 기적을 낳고 기적을 전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마음을 읽기 위해
2015년 나해 6월28일 연중 제13주일
제1독서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13-15; 2,23-24
제2독서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가난한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 줍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8,7.9.13-15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1-43 <또는 5,21-24.35ㄴ-43>
제가 책을 구입하는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최고등급
회원입니다. 특별히 아는 사람이 있거나, 책을 출판했다고 최고등급
회원이 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저 책을 많이 사기 때문입니다. 석 달에
50만 원 이상을 구입하면 되는데, 저는 이를 훌쩍 뛰어 넘거든요.
수필, 시, 소설, 자기계발서 등등, 가리지 않고 책을 구입하는 저를 보면서
“학술 서적이 아니라면, 도서관 같은 곳에서 빌릴 수도 있는데 아깝지
않아요? 어차피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읽는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 말씀처럼 빌려보면 경제적인 이익은
분명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이름을
건 책을 출판해 보니 책을 힘들게 냈을 작가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지식과 정성,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갖게 되는 저의
새로운 관점과 생각들을 만 원 정도의 비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아깝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보고 싶은 책은 모두 구입하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예의와 함께 이
책을 통해 얻게 될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취미
활동을 줄이고 책을 사는데 집중해보니 그리 불가능한 것도 아님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책값이 너무 비싸다는 분을 만나곤 합니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출판하기
위해 쏟아 붓는 작가의 노력과 정성을 볼 수 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음을 읽지 못하면 모든
것이 불평불만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읽으면 모든 것이 감사요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려 주십니다.
사람들은 이 딸이 이미 죽었다고 판단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살려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에 사람들의 반응을 봅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주님의 치유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고 그저 놀라기만 뿐이었습니다.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믿지 못하고, 세상의 관점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했으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에 그저 넋을 잃고 놀랄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만이 두려움을 없애고 대신 기쁨과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오늘을 만들어 보십시오. 어렵고 힘든
삶이 아닌, 기쁨과 감사할 수 있는 삶이 분명 내게 다가올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리처드 백스터).
이태리 다녀온 기념으로 스파게티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ㅋㅋ
하루를 자주 점검해 보세요.
저는 새벽 묵상 글을 일기처럼 생각하기에 자주 그 전날 있었던 특별한
일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묵상 글을 쓰기 전에 특별한 일들을
떠올리면서 복음의 말씀과 연결 지으려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묵상
글을 쓰려고 하는데 특별한 일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문득 '내가 뭐하면서 살았지?'라는 의문이 들었고, 저는 전날 있었던
일들을 사소한 일까지 종이에 차례차례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특별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하루
중에 쓸데없이 보낸 시간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지요.
자신의 하루를 자주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잠자리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는 그 순간까지를 차곡차곡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얼마만큼 충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일들 안에서
충실함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안에서의 충실함이 내
자신을 더욱 더 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태리의 가레짜 호수. 정말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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