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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청주] 미래 지향적인 삶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창세 27,1-5.15-29
† 복음 마태 9,14-17
★ 창세기 25장에서 에사우는 불콩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야곱에게
팔았다. 이제 이사악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지자, 야곱은 맏아들이
받을 축복을 형 에사우에게서 가로챈다. 야곱에게 준 축복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미 그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제1독서).
★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시대의 표상인 혼인 잔치의
비유로 응답하신다. 혼인 잔치에 신랑이 와 계시니 단식할 수 없다(복음).
◈ 오늘의 묵상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러니 하느님은 계시지 않으며, 결국 그 하느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긴 논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만들었다면 좀 더 우리 마음에 들도록 만들었겠지요.
보십시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마음에 안 들잖아요.”라고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카인과 아벨 가운데 아벨을 선택하시고 야곱과 에사우 가운데
야곱을 선택하시는 하느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선택받지 않은
편에서 보면 억울하고 부당합니다. 더욱이 카인은 아벨의 형이었고
에사우는 야곱의 형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맏아들이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선택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일 뿐, 하느님의 선택은 아니지요.
컴퓨터로 채점하는 객관식 시험에서 시험 결과가 순전히 답안지를 작성한
사람에게 달려 있듯이, 인간 스스로 어떤 조건을 채우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결정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겠지요. 카인의 입장이 되어야 하고 에사우처럼 난감한 처지로 몰리게
되는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손으로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음미하면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살다보면 우리는 위아래를 따지고 사람된 도리를 따집니다.
그리고 그에 벗어나는 일에 대해선 분노와 열불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냐고요!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의 진짜 장자 에사오가 아니라
속임수의 달인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아니 어찌 그러실 수가 있지요?
때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더 인정받고 나보다 공부도 못한 사람이
지금 더 부자가 되어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약은 사람이 더 성공하고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분의 심오한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되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 여기고 축하해 줍시다.
나에게는 사실 그보다 더 큰 축복, 성령의 축복,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축복 등을
이미 베풀어주셨음에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시다.
오늘 다른 사람이 받는 축복을 축하해주고
내가 받은 축복에 감사하는 날 되시길 빕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한상우바오로신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모든 사랑의 관계는 저마다의 생명에서 시작됩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이 모두가 둘 다 보존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온전히 서로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렇듯 새 포도주를 담는 것에서 더욱 확실해집니다.
새 포도주는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랑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더더욱 신앙인의 정체성을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안에 담을 때
새 부대인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새 부대는 결박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생생히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안에
새롭게 적용시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거듭하여 반복되는 심리적인 왜곡을 멈추게 하는 건 새 포도주를
알고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몸과 피를 내어 주신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를 잊지 않는 사랑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새 포도주를 닮는 기쁨안에서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 집니다.
사랑의 본질은 새 포도주를 신뢰하는 사랑의 참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가 있는 곳에 새 부대도 있습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새 포도주를 담고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십시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를 간절히 원합니다.
새 부대의 오늘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2015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7,1-5.15-29
복음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저는 형이 둘 있고, 여 동생이 한명 있습니다. 어릴 때는 형들이
부러웠습니다. 큰 형은 장남이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글쓰기,
미술,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했다면 예술분야에서
공부를 했을 것 같았습니다. 둘째 형은 키가 크고, 운동 신경이 좋았습니다.
달리기도 잘 했고, 옷을 입으면 잘 어울렸습니다. 아무래도 옷걸이가
좋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여동생은 당연히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막내이면서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은 딸들을 예뻐하시기
마련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들 중에 한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큰 형이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고, 운동 신경이 좋고, 키가 컸던 작은 형이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술적 능력도 별로 없고, 신체적인 조건도 그리
좋지 않았던 저를 택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저를 여러 곳에서 일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목 국에서는 교육담당 업무를 했었습니다. 해외 연수도
다녀 올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본당 신부로 사목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습니다. 청소년 국에서는 수련장 관리를 했었습니다. 지금은
교구의 성소 국에서 사제성소를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봐도 참
놀라운 일입니다. 단 한 번도 제가 원한 일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자동차의
스페어타이어처럼 어딘가 상황이 벌어지면 제가 가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어타이어는 언제나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지내는데,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옹기장이 손에든
진흙처럼, 내 영혼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도 단식을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들에게 더욱 큰 시련과 아픔, 박해의 상황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따르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
저에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십시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주말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새 사람
민경일 아우구스티노 신부(재단법인 바보의나눔 사무총장)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마태오 복음 9장 14-17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새 사람
오늘 복음은 우리가 평소 자주 듣는 복음 말씀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오늘의 복음이 마태오 복음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그 뜻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인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바로 당신의 관점에서 구약의 율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약의 율법은 본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참뜻으로 담고 있었지만, 당시엔 이미 종교가 많이 변질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통한, 율법을 통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종교 제도 그 자체에 대한 봉사가 절대시되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낡은 옛 율법이 아니라, ‘사랑’이라 불리는 새로운
율법이 어울립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 없이는 아무리 단식을 한다 해도,
아무리 기도를 한다 해도 그 율법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 알려 주신 바로 그 사랑,
이 새 율법이 새 포도주로 우리 안에 담길 때에만, 우리는 참사랑을
실천하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봉사, 그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새 부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시고 담아야 할 새 포도주입니다.
◎ 우리가 아직도 고통받는 이웃들의 아픔을,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이들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개인적인 신심에만 몰두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옛 포도주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 합니다.
- 민경일 아우구스티노 신부(재단법인 바보의나눔 사무총장) -
◈ [청주] 미래 지향적인 삶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7월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마태9,14-17)
제1독서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7,1-5.15-29
복음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미래지향적인 삶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 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열려있는 새로운 마음
어렸을 때 저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
저였고, 그래서 피아노를 장난감처럼 생각하면서 무턱대고 건반을
누르면서 아무 노래나 신나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분께서 제 손가락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너는 손가락이 짧아서 피아노를 잘 칠 손은 아니구나.”
이 말씀이 당시 제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고는 싶었지만 이 말이 떠올리면서 ‘나는 손가락이 짧아서
피아노를 잘 칠 수가 없어.’라는 생각으로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지금 피아노를 전혀 다루지 못합니다.
몇 년 전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가 한 피아니스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의 첫 모습에 ‘피아니스트일까?’라는 의구심이 저절로 들었지요.
왜냐하면 그에게는 피아노 건반을 누를 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손이 아닌 발가락으로 대신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손가락이 짧아서 피아노를 잘 칠 수 없다고
포기했는데, 누구는 손이 없음에도 발이 있다면서 피아노로 아름다운
연주를 전해 줍니다.
이 피아니스트를 보면서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으로 일찌감치 포기했던
제 모습을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런
고정관념을 내세워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사실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내세워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시대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자신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율법 체제 전부를 부정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헌 옷과 헌 가죽부대로 상징되는 과거의 율법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새로운 삶,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지요. 율법을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이유들을 내세워서 반대로 주님을 버리고 부정하는 이유들을 찾게 된
것입니다.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로 비유될 수 있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열려있는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도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하게 됩니다.
남을 돕는다고 하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남을 도울 때 가장 덕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최고의 행복을 얻는
것도 자신이다(달라이 라마).
은경축 미사를 마치고 김현수 신부님과의 인증샷!
올바른 판단을 위해...
달팽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참 빠르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아니, 달팽이가 뭐가 빨라요? 너무나도 느리죠.”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지상에 사는 연체동물 중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 바로 달팽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비록 시속 0.03마일에
불과하지만, 연체동물 중에서는 제일 빠른 속도를 자랑한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달팽이를 느리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바로 빠른 속도를
내는 다른 동물들과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판단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스스로 내린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판단을 그 대상의 입장에 맞춰서 해 보십시오. 훨씬 더
공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정관념은 나의 기준에서 나온 판단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준에서
나온 판단이라면 어떨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오늘까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단식기도회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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