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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7월21일 수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청주]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아가 3,1-4ㄴ<또는 2코린 5,14-17>
† 복음 요한 20,1-2.11-18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했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 아가의 여인은 밤새 사랑하는 이를 찾아 성읍을 돌아다닌다. 여인이
밤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이 여인은 사랑하는
이만을 찾는다. 그를 찾고 나면 놓지 않을 것이다(제1독서).
★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막달레나의 모습은
아가의 여인을 닮았다. 막달레나는 주님의 시신이라도 자신이 모셔 가려고
애쓰면서 무덤에 머물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주님을 사랑한
막달레나는 부활의 증인이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연인이 곁에 있지 않기에 밤새도록 성읍을 돌아다니며 야경꾼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하고 묻는 여인은 분명 사랑에 눈먼
여인입니다. 아가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렇게 길을 돌아다니며 연인을
찾던 여인이 야경꾼들에게 매를 맞고 파수꾼들에게 겉옷을 빼앗기기도
합니다(5,7 참조). 창녀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인은 개의치
않습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막달레나 역시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안식일이
지나고 무덤에 찾아갈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에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요한 20,9 참조). 이미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으니,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분이시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재하시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서 한번 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이라도
곁에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 물에 빠진 사람이 공기를 찾고, 목이
타는 사람이 물을 찾는 간절한 마음. 자식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 이것이 아직 어두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이 있었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누구보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막달레나가
당신을 스승님이라 부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간절히 찾은
그녀를 부활의 증인으로 선택하셨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7월22일 수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요한 20,18)
여러분은 주님을 뵌 적이 있나요? 없다구요?
그럼 주님을 뵙기 위해 찾아 돌아 헤맨 적은 있나요?
그런 노력도 없었다면 그분을 만나뵙지 못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주님을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었는데도
그분을 못 만났다면 왜 그럴까요.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게 애타게 주님을 찾았는데
그분이 나타났는데도 처음엔 그분이 누구신지 못알아 보았지요.
그러니 우리에게도 그분이 나타나셨는데
우리가 못알아보았을 가능성이 높답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때론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야겠지요.
오늘 내가 만나게 될 사람중에 주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보물찾기 하듯이 한사람 한사람을 대해 봅시다.
분명 그 누군가의 모습으로 주님은 나에게 다가오실지도 모릅니다.
오늘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을 내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뵙는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7월22일 수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 20,1-2.11-18
아름다운 사랑을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통해 오늘 다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찾는 절실한 사랑의 모습에서 나태해지는 우리자신을 반성해봅니다.
먼저 찾아야 할 사랑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마리아야!"
사랑보다 더 깊은 기쁨과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라뿌니!"
사랑이란 무덤을 막았던 바윗돌조차 치울 수 있는 놀라운 힘입니다.
사랑이신 주님 앞에서 우리모두는 진정한 사랑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헤아려줍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랑보다 더 큰 신비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사랑보다 더 아프고 더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이 있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고 빛나는 천사가 있고
올라갈 수 있는 하늘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무덤과 하늘까지도 믿음이 되게하는 가장 아름다운 부활입니다.
눈부신 부활은 간절한 주님의 사랑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2015년 나해 7월22일 수요일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성들을 따뜻하게 대하셨고, 잘못한 여인들은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남성들에 대해서는 야단도 치시고, 그들의 교만과 질투,
허세를 지적하셨지만, 여성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자와 죄인들에 대해서 무척 관대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여성들을 만난 일들을 기억해 봅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고, 그 여인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이방인이면서 예수님께 병에 걸린 자신의 딸을
치유시켜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는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명한 탁자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강아지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고쳐주었습니다.
열 두해 동안 하혈을 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부정한 행위를
했던 여인이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 앞에 끌려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단죄하지 않았고, 먼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고,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과부의 헌금도 칭찬하였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를 무척 사랑하셨으며, 두 자매의 오빠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려 주기도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죽음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향유를 발라서 발을 씻겨 주었던 마리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골고타의 언덕을 오를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뒤를 따라오던
이스라엘 여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말을 합니다. 백조의 우아한 모습을 위해서 수면아래 백조의 발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명동거리는 늘 깨끗해 보입니다. 각종 쓰레기들을 치우시는
환경미화원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공존의 그늘’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고도성장의 바탕에는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시골의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우리의 누님들은
버스 안내원을 하였고, 공단에서 미싱을 돌렸고, 쪽방에서 잠을
자야했습니다. 며칠 전입니다. 더운 날씨에 경찰이 고가도로에서
차량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 복장만 아니면 아주 젊은 청년이었을
것입니다. 차문을 열고 시원한 물 한잔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원활한 차량 소통을 위해서 땀을 흘리는 경찰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작년에 있었던 교항님의 한국 방문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통역을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성체분배 안내를 해 주셨고,
어떤 분들은 새벽에 나오셔서 자리 안내를 해 주셨습니다. 봉사자들이
없었다면 교황님의 방한 준비는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 주일 신자들을 위해서 점심을 마련했습니다. 맛있는 점심을
먹기까지 많은 분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커다란 솥에 육수를
내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전날 장을 보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먹고
난 그릇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몇 년 동안 기쁜
마음으로 봉사해 주시던 자매님은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공존의 그늘에서 땀을 흘리시는 모든 분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감정보다 우선 이렇게 전하라.
2015년 나해 7월22일 수요일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감정보다 우선 이렇게 전하라.
인생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 모르는 사람들 천지인 것 같습니다.
일반 사회의 모든 매스컴이 시대를 끌어가는 주역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감정보다 우선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가톨릭은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점을 깊이 명심해야 됩니다.
인류 모두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자신의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하느님께 올라가셨다;고 전하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7월22일 수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기구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요, 죄로 얼룩진 상처의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 런지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2015년 나해 7월22일 수요일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취업도 하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는 등, 재물을 스스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거나 재물에
중요성을 두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왜 나는 부자가 되지 못할까?’라고 하면서
재물이 내게 오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그에 대한
노력이 없다는 것은 재물을 쓸 권리도 없기 때문에 착각 속에 살고 있거나
이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 행복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권리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절로 모든 것이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소위 ‘운(運)’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운으로 많은 것을 획득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자신 역시 그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피정 중에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꿈속에서 어떤 분이 내게 “착하게
살았으니 선물을 하나 주겠다. 내가 불러 주는 숫자 6개를 가지고 내일
로또 복권을 구입하면 1등에 당첨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잠에서
깨어 보니 그 숫자 6개가 모두 기억나서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침에 로또 복권을 구입하시겠습니까?”
이제까지 구입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들 복권을 사시겠다고 하지요. 물론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불행하게 산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
운을 그냥 걷어차고 싶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 없이 주어진
것은 너무 쉽게 내게서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다가서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 역시 스스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오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마리아 막달레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녀는 ‘아직도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지요.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무덤에 처음 왔을
때의 그녀 믿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부활을 알지 못하는 그래서 아직 어두운 이른 아침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어두운 마음을 간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렵고 힘들어하는 우리들을 향해,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마리아야!”
라고 말하듯이 끊임없이 불러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찾아가야
만날 수 있으며 주님의 목소리 역시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갔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듯이, 우리 역시 주님이 계시는 곳을 찾아 가야 합니다.
그런 노력 없이 과연 주님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잃어버린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무척 힘들다. 그러나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에 매달리다 보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 내가 의미 있게 써야 할
시간, 내가 더 사랑해야 할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에리히 프롬).
마리아 막달레나 성화
용기가 필요할 때.
올 초에 읽었던 소설책에서 남자 주인공은 스쿠버 다이빙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여자 주인공을 바닷가로 데리고 가지요. 그러나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스쿠버 다이빙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서 바다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입니다. 결국 주인공 남자로부터 용기를 얻어
마침내 바다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신비롭고 푸른 세상을 만나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감을 느끼게 되지요. 바다에서 나와 남자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빨리 스쿠버 다이빙을 하게 해주지 않았어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지요.
“모르겠어요. 그런데 아무리 말해 줘도 안 듣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이 말이 마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때로는 커다란 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두려움의 대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써 얻는 행복이 얼마나 크던지요. 분명히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도 그 말을 듣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말해 줘도 안 듣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태리 라 베르나의 성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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