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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8월29일 토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청주] 잘못되었으면 고쳐라. -
왜관 베네딕도 수도회 고진석 이사악 신부 -
◎ 제1독서 예레 1,17-19
+ 복음 마르 6,17-29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 오늘의 묵상
평소에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싫어하였지만, 진리 편에서 말하는
그에게 강렬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딸과 무모한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쏟아질 비난과 비웃음이 두려워
요한의 목을 베도록 지시한 뒤, 괴로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불의를 질타하는 요한을 죽이려고 자기 딸마저
이용합니다. 목적을 달성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여인!
세상에서 요한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언자를 대하는 인간의 양면적인
태도를 보는 듯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예언자가 전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를, 또는 그의 말을 가두어 두기는 하지만
죽이기까지는 두렵습니다. 가두어 두는 것, 그저 진실을 꼭 덮어 두려는
시도겠지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없애야 할 것 같습니다.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도 되겠지만,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없애 버려야 끝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의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되어 그에게 덫을 놓으려
하고(지혜 2,12-14 참조), 그럴 듯한 핑계나 이유로 포장하고 과장해서
상대방을 제거하기도 하는데,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헤로데처럼 다른 사람의 비웃음이 두려워서 진리보다는 거짓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오늘도 옷깃을 여며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8월29일 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마르 6,23)
우리는 가끔 기분에 따라 좋으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까지
덜렁 해버리곤 합니다.
또 마음에 안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등
너무 과장된 표현을 하지요.
나름대로 지혜롭게 왕노릇을 하던 헤로데도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매혹되어 그만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있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이 헛말 때문에 헤로데는 2천년 역사 안에 악인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나도 가끔 그렇게 헛말을 내뱉지는 않는지 돌아 볼 일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은 허풍이나 과장이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하며 내뱉읍시다.
그 헛말이 천추의 한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 - 나의 신앙고백의 자리는 어디인가
2015년 나해 8월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 토 마르 6,17-29
“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9)
나의 신앙고백의 자리는 어디인가
매순간이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의 갈림길이다.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순간들,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처신과 선택들에 과연
하느님께서 숨쉬도록 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의 대목에는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6,20)의 억울한 죽음과 헤로데 일가의 잔인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나는 일상의 삶에서 어떤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가?
오늘의 복음의 배경은 벌써 기원전 1세기경부터 있었던 하스모니아
왕가의 처절한 왕위 쟁탈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곧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고 로마제국의 힘을 빌어야 할 만큼 국력도 약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은 추종자가 약 6천여 명에 이르는
대단한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다. 따라서 정치권은 긴장하였고 그를 처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유대고사, 18권 116-119항 참조).
더구나 헤로데 임금은 여덟 번이나 결혼하여 열 명의 부인을 거느렸음에도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6,17) 유대교법으로
어겼다(레위 20,21). 요한은 그의 불륜을 고발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를 선포하였다. 이런 그의 처신이 그들의 미움을 사게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피를 흘려 주님께 대한 최상의 증거를 드러냈다.
요한 세례자의 전 생애는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 자체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준비해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 드리고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사라졌다. 나아가 그는 고행과 순교라는
성덕의 두 유형을 몸소 보여 주었다.
요한은 참으로 인간적인 명예를 누릴 처지에 있었으나 하느님의 일에
몰두하였고 겸손하게 자신의 분수를 지길 줄 알았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말했으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들꿀을 먹으며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고행과 극기의 삶을
살았으며 결국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던 그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여기서 정치와 종교의 충돌,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신앙의 진리가
충돌할 때 나의 ‘신앙고백의 자리’는 어디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신앙고백은 세례자 요한이 목숨을 바쳐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는 요한 세례자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결국 딸의 청을 받아들여 요한의 목을 쳐서 죽인
헤로데는 오늘도 나와 우리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출현한다.
매순간 나는 요한 세례자처럼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두려움 없이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헤로데 임금이나 빌라도 총독처럼
현실과 이권, 편의와 물질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으며 참 행복을 거부하며
사는 것임을 알아차려야 하리라! 내 몸과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곧
신앙고백의 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세례자 요한의 황홀한 일몰
2015년 나해 8월 29일 토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7-19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세례자 요한의 황홀한 일몰
구약 시대의 마지막 대예언자로서 구세주 오심을 지극정성으로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의 황홀한 일몰을 묵상합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잘 차려놓은
무대를 지체 없이 예수님께 넘겨드리고 자신은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은 참으로 을씨년스럽고 신산(辛酸)하기
그지없습니다. 사악한 복수의 화신 헤로디아의 희생양이 됩니다. 어둡고
깊은 감옥에 갇혀 있다가 목이 잘려져 쟁반 위에 담겨집니다. 그리고 그
쟁반 위에 담겨진 세례자 요한의 머리는 헤로디아 앞으로 배달됩니다.
그 머리를 보고 깔깔대며 희희낙락했을 헤로디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의인 중에 의인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이 끔찍하고 고통스런 최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억울한 죽음은 어쩌면 곧 뒤따라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안에는 더 억울하고 더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땅을 거쳐 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고통, 가장 큰 슬픔, 가장 큰
좌절을 느꼈던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분은 세례자 요한이 당했던 참수의
고통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처참한 십자가형의 고통을 겪으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고통을 겪으신 분, 고통의 가장 극점에 가면 거기에
누군가가 한 분이 서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고통의 인간,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슬픔을 치유해주기 위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수난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와 고통, 십자가와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예수님이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 먼저 밑바닥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을 직접 짊어지셨고,
고난과 저주의 쓴잔을 기꺼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무게가 너무 무거워 죽을 지경인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조금만
참아. 힘내!” 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우리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선택하셔서 직접 지고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굳이 당신이 겪지
않으셔도 될 고통조차도 함께 겪으신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시면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십니다.
결국 세상살이가 힘들 때 마다, 고통이 너무 커서 포기하고 싶을 때 마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자비의 표시인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만이 우리는 참 위로와 참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일부러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청했습니다. “아버지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십자가가
있습니다. 백번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사건, 난 데 없이 다가온
정말 원치 않은 불행, 이유가 없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런 신비로서의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긍정적 수용과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리기 이 두 가지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예언자의 피 값
고진석 신부(왜관베네딕도수도회)<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8월29일 토요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마르코 복음 6장 17-29절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언자의 피 값
순교자의 피가 교회를 자라게 하고 의인들의 피가 역사를 진보시킵니다.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핍박받기 일쑤입니다.
취객들의 여흥을 돋운 요염한 춤의 대가로 예언자의 목이 달아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앗아간 권세가들은 종내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매달아 버립니다.
하느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거늘 어째서 불의가 판을 치고 의로운
이들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인간의 역사가 추악해지는 이유는 악의 세력에 동조하는 무리들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악을 저지르는 소수의 행태에 침묵하는 다수의
대중들입니다.
시민이 주권을 가지는 오늘날에도 대중들은 여전히 침묵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의한 편에 서서 예언자를 매도하고 모욕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사회의 비복음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용기 있는 교회의
목소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납니다.
세상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소리가 왜 그렇게 불편하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일부 신자들은 사회교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주교와
성직자들을 공개적으로 폄훼하기까지 합니다.
훗날 심판의 날에 치르게 될 예언자의 피 값이 두렵지도 않은 것인지
안타까워집니다.
○ 우리 사회를 향해 쏟아지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 고진석 이사악 신부(왜관베네딕도수도회) -
◈ [인천] 보상은 하늘 나라에서의 큰 영광으로 주어집니다.
2015년 나해 8월 29일 토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7-19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첫 항해를 시작한 이후 대서양에서 116개의 암초와 충돌했고 138개의
빙산에 부딪혔으며 13차례의 화재를 겪었습니다. 또 폭풍을 만나 돛대가
부러진 횟수는 무려 207번에 달했지요. 이런 배라면 과연 몇 번이나
침몰했을까요? 글쎄 1894년에 처음을 출항을 한 뒤, 단 한 번도 침몰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영국 선박박물관에 전시가
되어있습니다.
인생이라는 바다에서도 역시 온전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분명히 침몰의 위기를 겪을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거친 파도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순조로운 인생, 편하고 쉬운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조그마한 파도에도 지래 겁을 먹고
주저앉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내게 왜 이런 고통과 시련이
찾아 오냐면서 불평불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상처로 가득한 인생이 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목적지인 항구에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면서
들어가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이겨낸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지금 내가 겪은
것들을 이미 다른 이들도 다 겪은 일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어려움은 없다. 다만 어려움에 맞설 자신감이 부족한
것일 뿐.”
앙드레 지드의 이런 말도 생각나네요.
“아주 오랫동안 육지를 보지 못한다는 각오가 없이는 새로운 땅을 발견할
수 없다.”
오늘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이 땅에 와셔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평생을 힘들고 어려운
광야에 살면서 주님의 길을 닦았고, 그의 마지막 역시 헤로데의 아내인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편하고 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세상의
부귀영화가 주어지는 삶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은
불평불만을 간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늘 기억하면서 자신의
어렵고 힘든 삶을 신경 쓰기보다는 그 사명에 맞게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원하십니까? 제발 이런 삶을 주시지 말라고 주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으로 얼룩진 삶을 어떠한 불평불만 없이
받아들였던 세례자 요한이 있었음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하늘 나라에서의 큰 영광으로 주어집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력이었다. 오래 버티고 서 있으면 앉을
자리가 생긴다(애니 프루).
책을 읽읍시다.
프랑스 역사학자인 토크빌은 150년 전 미국을 여행한 후에 이런 기술을
했습니다.
“이렇게 철학적이지 않은 나라는 처음이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너무 실용성만 따지다보니, 활발하고
적극적인 면은 있지만 생각하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대사회를 바라봅니다. 토크빌이 지금의 시대를 본다면
150년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무척이나 철학적인 나라였다 라고 하지
않을까요?
지금의 시대는 정말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혹시
전화번호를 몇 개나 외우고 계십니까?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기
휴대전화 번호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마트폰에
주소록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전화번호를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길을 찾아갈 때에도 그렇지요. 예전에는 지도를 펼쳐서 어떤 길로 갈 지를
미리 살펴보고 그 길을 외워서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행길이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알아서 척척 길을 가르쳐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3년 국민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 독서율(1년 동안 정기 간행물, 만화, 잡지 등을 제외한 일반
도서를 1권이라도 읽은 사람 비율)은 71.4%였습니다. 매우 높은 것
같지요?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참으로 초라합니다. 글쎄 성인 1인당
연평균 독서시간은 9.2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1년 365일 동안에 책
읽는 시간이 9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정답이겠지요.
영상매체를 통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고 있을 때에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 영상이 의도하는 대로 이끌려 갈 뿐인 것이지요. 하지만
책은 보는 내내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그냥 편한 것만
쫓고, 쉬운 길만을 향하려는 마음을 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하게 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래서 보다
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책을 좀
읽어보면 어떨까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텔레비전을 조금 멀리하고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서울]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
2015년 나해 8월 29일 토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7-19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란은 조그만 충격에도
깨지기 쉽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위는 웬만한 충격에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더러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적자생존, 승자독식, 빈익빈과 부익부’의
질서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의 90%는 엄연한
생존의 경쟁에서 견디지 못하고 멸종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의 부는 상위
10%의 사람이 9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욱 가난하게 되고, 부유한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의 세계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려는 사람을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렇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셈법이 그렇습니다. 작은 돌팔매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무너트린 다윗이 그렇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이
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려고 하신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일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
병원을 시작하셨던 요셉의원의 선우경식 선생님이 그렇습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하였던 꽃동네의 오 웅진 신부님이
그렇습니다. 고난의 현장에 늘 함께하는 분들이 그렇습니다. ‘팽목항,
강정마을, 밀양, 평택, 용산’에서는 지금도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발, 발전, 경제, 자본이라는 커다란 산에 드리워진
그늘에는 소외된 이들의 가녀린 신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번 주 복음 말씀은 ‘위선, 편견, 가식,
교만, 욕망’의 껍질을 깨야한다는 예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시작된 ‘하느님 나라’ 운동 역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큰일을 앞둔 사람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믿으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세례자 요한은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의 역할을
충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을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제자가 되었고, 세례자 요한을 오시기로 한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앞으로
오실분의 길을 준비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하고, 저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의자’를 생각합니다. 성당에 와도, 식당에 가도,
차를 타도, 집에 가도 우리는 의자를 볼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습니다. 의자들은 우리들의 지친 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비워줍니다. 의자가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의자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의자’가 되어준 세례자 요한을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기꺼이 남을 위한 ‘의자’가 되어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본당의 많은 봉사들은 가족들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사랑의 의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잘못되었으면 고쳐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8월 29일 토요일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잘못되었으면 고쳐라.
매일 정답만 얘기하지 마시고 다른 얘기 할 수 없나요? 참 답답합니다.
정답은 저도 알고 있는데 실천하려고 하니까 왜 나만 손해보고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다른 것을 요구하면 어찌합니까?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리로 가야하지 않나요. 그래서 말이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에서 해답을 얻어야 명확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으면 그리 사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가슴이 아프고 억울해도 인내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천상에 보화를 쌓고 위로를 받아야지요.
헤로데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요한은 결국 목이 베어지는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육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의로움은 끊임없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에 머물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까지 하였고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요한의
머리를 갖다 달라’는 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한마디 약속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취중에 한마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얼마나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모한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었으면 거두어 들여야지, 위신 체면 때문에 덮어버리면
결국은 파멸을 만나게 됩니다. 의인의 삶은 영광스럽게 기억되고, 자기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 급급해 하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사실 일상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밑지고
손해를 보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승리자로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헛된 장담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좋지 못한 감정들을 몰아내고 나로 말미암아 상처 받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처럼 어떤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는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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