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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8월30일 주일 [(녹) 연중 제22주일]
[청주] 마음을 다스려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신명 4,1-2.6-8
○ 제2독서 야고 1,17-18.21ㄴ-22.27
+ 복음 마르 7,1-8.14-15.21-23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입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뜨거운 햇볕과 이를
식혀 주는 빗물을 받아 가며 나무들이 자라고 곡식과 과일이 익어
가듯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자라납니다.
그 말씀이 지닌 힘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정성껏 합시다.
◈ 오늘의 묵상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두둔하신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전통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거기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거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셨습니다.
독서 말씀도, 모세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한
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실천할 때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간청을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는 구원 능력이
있으니,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면서, 그 사람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말로 많은 일을 합니다. 설득하고 위로하고 위협하고 강요하는
등 많은 일이 인간의 말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받는 말은
빈말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정과 법규, 명령을 포함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더욱이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도 않고, 인간의 힘에 꺾이지도 않습니다. 그 말씀에는 지혜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세상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계속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또한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본디 우리가 창조된 목적대로 완성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야고 1,21).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22주일
☆ 2015년 8월30일 주일 [(녹)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는 안 된다. 주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1-2.6-8
제2독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1,17-18.21ㄴ-22.27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8.14-15.21-23
공무원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모 정당의 모임에서
현직의 장관이 총선 승리를 다짐하는 건배를 하였다고 합니다. 야당에서는
공무원의 정치적인 중립의무를 위반했다고 비판을 합니다. 여당에서는
단순히 덕담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장관이 자신이 속한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현명한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팠는지 손을 씻지도 않고 음식을 먹었나
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은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비난을 합니다. 사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꼭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도 위생과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비난에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망각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이 영혼의 자유로움을 구속하는 굴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단식을 하는 것이 건강과 미모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하고, 단식을 통해서 얻어진 것들을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 단식의 진정한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요한금구로 알려진 성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참된 신앙의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우리가 참된 신앙의 길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고, 고백했습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나이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사람이 없나이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으니 더더욱 주님을
섬기라 하시나이다.’ 베드로 사도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철면피’라고 부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참된 신앙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자비하셔서 나를 용서해 주셨으니, 이제 나도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힘을
강조하십니다. 용서는 죽은 아들을 살리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커다란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원망과 분노가 생기고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따라서 용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해서 꼭 필요한 행위입니다.
셋째, 참된 신앙의 길은 나의 힘으로는 부족하기에 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늘 싱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의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도 기도의 힘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차를 잠시
세우고 묵주를 꺼내는 순간 제 앞에 큰 트럭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묵주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커다란 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걱정, 근심, 두려움, 욕망의 불꽃을 잠재우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안에 새로운 불꽃이 타오르게 합니다. 희망, 사랑, 믿음의
불꽃입니다.
넷째, 참된 신앙의 길은 ‘자선과 나눔’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기침을 한다면 누가 감기약을 사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낀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 사람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기꺼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게 됩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들은
잠시 나를 거쳐 가는 것이지, 하느님의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학자와 예수님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다섯째, 참된 신앙인은 ‘겸손’합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낸다고
하였습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였습니다. ‘상선약수’라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물은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지 않습니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지만 결국 가장
깊고 넓은 바다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늘
겸손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겸손의 ‘극치’입니다.
어느덧 팔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곧 자연은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험난한 내 삶에 ‘회개, 용서, 기도, 나눔, 겸손’의
거름을 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랑, 희망,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인천] 내 마음에 거울을...
2015년 나해 8월30일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신명 4,1-2.6-8
제2독서 야고 1,17-18.21ㄴ-22.27
복음 마르 7,1-8.14-15.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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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든 거울을 보기가 쉽습니다. 옷가게에는 당연히 거울이 있으며,
화장실 세면대 앞에도 거울이 있습니다. 음식점의 계산대 옆에도 거울이
있고, 승강기 안에도 거울이 붙어 있습니다. 여성들의 가방에는 이 거울
하나쯤은 담겨 있지요. 그리고 어린이 동화 중에서도 거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일상 삶 가운데에
거울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거울이 없는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습니다. 왜 이곳은 없을까요?
도박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거울을 보는 순간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박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지요. 카지노
입장에서는 손님들이 오랫동안 머물러서 도박하기를 원하는데, 멈추려고
하는 이 거울을 놓아둘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거울이란 바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합니다. 지금의 자세가
바른지를 볼 수 있게 하고,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지금의 자기 모습을 봄으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깨닫게 합니다.
이 거울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 안에도 이 거울을 장착해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즉,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보다 더 바르게살기 위해서, 보다 더 나은 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거울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남의 잘못된 모습만을 바라보고, 그 잘못을
꼬집어 판단하고 단죄하려고 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의 잘못된 모습은 절대로 바꾸지 못하면서 남에 대해서만
이러쿵저러쿵 말하는데 바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너무나 싫어하셨습니다. 특히 지도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좋은 모범보다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몇이 조상들의 전통을 내세우면서 제자들이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면서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더러운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사랑에 있습니다. 이 사랑은 잊어버리고 사람의 전통만을
내세우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이제 자기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내 마음에 거울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의 잘못된 부분만을
단죄하려는 위선의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계명 실천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바위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빵처럼 늘 새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어슬러 K. 르귄).
무임승차
유럽 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급하게 트램을 타야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티켓을 구입할 곳도 몰랐고 또 방금 온 트램을 타지 않으면
곤란을 겪을 것 같아서 일행과 함께 우선 탔습니다. 우리나라처럼 탈 때
기사님께 낼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누구도 기사님께 요금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무임승차가 되었습니다.
트램을 타고 있으면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경찰이 승차해서 갑작스럽게 티켓 검사를 할 때가
있는데, 이때 티켓이 없으면 요금의 10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임승차를 해서 이렇게 낭패를 당한 여행객들이
많다는 것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많이 나오더군요. 다행히 벌금은 내지
않았지만 트램을 타고 있으면서 느꼈던 불안감을 생각해보면 공짜가
결코 좋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공짜를 좋아합니다. 길거리에서 공짜로 사은품을 나눠줄
때 받으면 기분이 괜히 좋아지지요. 마트에서도 원플러스원 행사 물품이
더 많이 팔리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공짜인 것처럼
보이지만 물건을 더 팔기 위한 상술 중의 하나이지 실상은 절대 공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그냥 무임승차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이득을 보고 싶고, 어떤 행동 없이도 저절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바라는 것 모두가 무임승차하려는 마음이며 공짜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세상은 공짜로 얻어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임승차도
잘 하는데 나는 왜 그렇지 못하냐며 불평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공짜로 얻는 것은 금방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땀 흘려
노력하고 정성을 다해서 얻는 것만이 진짜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무임승차를 하지 마세요.
무임승차를 하지 마세요.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8월30일 연중 제22주일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1-22)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편인가요?
사실 어떤 사람의 말이라도 귀기울여 듣게 되면
나에게 유익한 양식이 됩니다.
사람의 말이 그럴진대 하느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게 되면
얼마나 큰 축복이 따를까요?
야고보 사도는 그리하면 영혼이 구원받게 된다고 하네요.
다만 듣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말씀을 실행하라네요.
말씀을 전해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만 바쁘진 않으세요!
말씀을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말씀을 좋다고만 생각하고
생활 안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오늘 말씀도 공손히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른 사람의 말을 더욱 귀담아 들으려 노력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삶 안에서 실천하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오늘 되십시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 - 온 몸으로 말씀을 실행하는 삶
2015년 나해 8월30일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14-15.21-23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1,22)
온 몸으로 말씀을 실행하는 삶
인간은 말을 통해 자신의 정서와 욕구와 정보를 주고받으며 자아를
실현해간다. 말을 통해 온갖 것을 교류하고 소통하며 살아가지만 문제는
말과 행동이 다를 때, 말이 담고 있는 내용과 실제가 다를 때, 말뿐일
때이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말뿐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한다.
제1독서 신명기의 말씀을 보자.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4,1)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4,6)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임을 가르치고 있다.
제2독서 야고보서는 말씀의 실천을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강조한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1,21-22)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등한시 한
채 조상들의 전통을 준수하는 데 몰두하였다. 다시 말해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더렵혀진 속마음을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깨끗이
하기보다는 인간이 정해놓은 틀과 관습을 중시했던 것이다.
우리 삶을 돌아보자. 매일 수 없이 많은 말을 쏟아놓으면서도 삶에 변화는
꾀하지 않는 말뿐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입에서 나오는
주님 찬미, 성경 지식, 영성생활에 관한 진리가 실제 삶으로 실천되지
않는다면 선거 때에 후보들이 오직 당선되겠다는 욕심으로 내쏟는 공약
(空約)과 무엇이 다를까?
말씀의 육화는 내 삶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을 듣고 공손히
받아들이며 받아들인 바를 간직하며, 간직한 바를 실천할 때 말씀의
육화가 이루어지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말씀을 낳는 어머니들이 되는
것이다. 말씀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행동에는 하느님의 마음과
진리가 스며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내 자아는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영성생활은 입만 가지고 하는 것도 머리만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느님께서는 입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전 존재를 통째로
창조하신 것이다. 말씀과 무관한 삶, 실천 없는 말,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하지만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것, 이 모두가 자아의 분열을 가져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암초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행 불일치, 언행 분리, 실천 없는 말과 같은 어긋남을 통해 자아는
분열되고 영혼은 죽음을 향해 치닫게 됨을 가슴 깊이 되새기도록 하자.
나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말을 하고 있으며 말한 바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실행하고 있는가? 더는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힘쓰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전통과 인습
고진석 신부(왜관베네딕도수도회)<연중 제22주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8월30일 주일 연중 제22주일
마르코 복음 7장 1-8.14-15.21-23절
전통과 인습
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 실린 ‘민족문화의 전통과 계승’이라는 글이
기억납니다.
내용을 보면 전통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인습因襲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습’ 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익힐 ‘습習’이 아니어서 시험문제로 자주
출제되곤 했습니다.
과거가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지닐 때 전통이 됩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이 있듯이 옛것이라도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어야 전통이 됩니다.
옛날부터 지켜져 내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답습된다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고 인습입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려는 자세(보수保守)와 변화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태의연함을 버리지 않으려는 자세(수구守舊)는 엄연히 다릅니다.
유연함과 너그러움을 잃어버린 전통은 인습으로 전락합니다.
인습은 시대의 진보를 가로막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올가미일
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조상 전통을 들어 시비를 겁니다.
아마도 더러운 손을 가진 천박한 부류들이 어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신들을 논박할 자격이 있느냐는 빈정거림일 것입니다.
하느님 계명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세속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아들로서 대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조상 전통을 핑계로 예수님의 자유로운
행보에 딴지를 겁니다.
예수님은 깨끗한 삶을 사는 것과 조상 전통을 지키는 일이 별개의
문제라고 천명합니다.
몸을 청결히 한다고 삶이 정결해 지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야만 우리의 행위가
맑고 향기로워집니다.
그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의 삶이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전통과 버려야 할 인습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습니까?
- 고진석 이사악 신부(왜관베네딕도수도회) -
◈ [수도회]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한상우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8월30일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14-15.21-23)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주님의 말씀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십니다.
고통과 죄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이 자라나야 주님과 함께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정화는 시작됩니다.
주님 말씀은 먼저 우리의 마음을 안아주십니다.
마음이 깨어나야 삶이 깨어납니다.
삶이 허약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허약한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 주길 원하십니다.
주님께 마음을 드릴 때 마음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저마다 마음을 더듬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핵심은 언제나 봉헌입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을 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신뢰해야 마음은 중심을 되잡을 수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적과의 동침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8월30일 연중 제22주일
<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으로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있다 >
복음: 마르 1-8.14-15.21-23
< 적과의 동침 >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인간이 더러워지는 이유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은 기껏해야 인간의
껍질인 육체를 더럽힐 수 있을 지라도 인간의 핵심인 마음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부정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마음의 방 안에 더러운 독을
뿜어내는 무언가가 들어가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적과의 동침’이란
영화는 이런 진실을 상징적으로 매우 잘 표현한 영화입니다.
미모의 여인 로라(줄리아 로버츠)는 부자에다 미남인 남편 마틴(패트릭
버긴)이 극도의 결벽증에다 심한 의처증까지 있는지 모르고 결혼합니다.
그는 화장실 수건들이 비뚤게 걸려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부엌 통조림까지
모두 높이와 종류를 맞추어 놓아야 식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마틴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다른 남자와 이야기했다고
구타까지 당합니다.
어느 날 남편과 이웃집 의사가 함께 요트를 타고 밤에 바다로 나가게
되는데 일기예보와는 달리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로라는 실종되고
나중에 로라가 수영을 못하여 물을 무서워하는지 알았던 마틴은 로라가
입었던 구명조끼만 해변에서 발견하고 로라가 죽은 것으로 믿고 장례를
치릅니다. 그러나 로라는 마틴 몰래 수영을 배우러 다녔고 이미 굉장한
수준에 올라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로라는 집으로 돌아와 준비해
두었던 소지품을 챙긴 뒤 결혼반지를 변기에 버리고 도망칩니다. 그러나
로라와 함께 수영을 배운 사람의 전화를 받고 변기에서 반지도 발견하고는
로라의 어머니가 있는 양로원을 단서로 추적을 시작합니다.
한편 로라는 낮선 지방에서 이름을 사라로 바꾸고 머리도 검게 물들인
다음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처음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곳 대학 연극
교수 벤(케빈 앤드슨)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은 로라가 어머니를 찾아가면서 종말을 맞게 됩니다. 마틴이
로라 어머니 주변의 간호사들을 포섭해 두어 면회를 오면 바로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로라는 집안의 이상한
분위기에 다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수건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통조림통도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게다가
무심히 누른 오디오에서는 남편이 그녀와 잠자리에 들 때면 틀던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 흘러나옵니다. 두려움에 떨며 울음을
터뜨리자 마틴이 어둠 속에서 음흉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행히
남자친구인 벤이 찾아오지만 마틴에게는 역부족입니다. 그는 마틴과
결투 끝에 기절하고 맙니다.
벼랑 끝에 선 로라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집어들이 마틴의 심장을
향합니다. 마틴은 로라가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길 용기가 없다고 믿고
그녀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다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고는 자신이 침입자를 죽였노라고 경찰에 통고하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전에 생 계란에 간장을 넣고 함께 밥을 비벼먹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전과 다름없는 계란이었는데 깨서 밥에 뿌렸더니
이미 부화되기 시작하여 피가 가득한 계란이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밥도
못 먹고 계란도 못 먹고 다 버려야 했습니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신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 외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다가는 평생 적이 누구인지도 찾아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적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자아라고도 하고 뱀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뿜어냅니다. 이 자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다른 주인인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만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자아라는 뱀과 참 주인인 하느님과 동시에 한 방을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깨끗해지는 방법은 외적인 깨끗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럽히는 원인인 자아를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한 어떤 노력을 해도 내가 정결해 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뱀을 죽여 우리를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히브 9,13 부정한 사람들에게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도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14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
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미국 3대 유통업체인 페니(JC Penney)의 창업자는 아버지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일개 잡화상 주인이나 되었을 뿐 식료품 연쇄점 주인이자
국내 제일의 상인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페니는 십대의 소년이었을
때 미조리 주 해밀톤 시에 있는 한 잡화상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일을 좋아했고, 그 방면에 경력을 쌓고자 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잡화상 주인의 여우같은 교활함에 대해
신나게 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상점주인은 고가의 품질 좋은 커피에
값싼 커피를 섞어 팔아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녁 식탁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마구 웃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런
잡화상 주인의 교활한 짓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금도 재미있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묻겠는데, 만일 누군가가 저급상품을 그에게 최상품의 가격으로
속여서 팔아 넘겼고 그 사실을 그 고객이 알게 된다면, 속여 판 이들을
단지 여우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겠니?”
페니는 아버지가 자기에 대해 실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니라고 생각해요.”
페니의 아버지는 페니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내일 아침 상점에 가서 네가 일한 만큼의 돈을 받은 후, 잡화상 주인에게
더 이상 그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해라.”
당시 해밀톤 시에서는 일자리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페니씨는 그의 아들이 차라리 실직이 될지언정 마음이 비뚤어진
사업가와 함께 일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내 안의 자아를 죽이기 위한 용기는 누군가의 격려로 생깁니다.
로라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주는 벤이
없었다면 마틴을 향해 총을 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 격려가
바로 그리스도의 ‘피’인 것입니다. 그 피의 격려로 자아가 죽으면 전체가
깨끗해집니다. 겉만 씻는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양심을 씻어 두려움 없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깨끗하고 거룩해 진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마음을 다스려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8월30일 연중 제22주일 (마르코7,1-8.14-15.21-23)
마음을 다스려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았는데 손 잘린 사람이 발가락을 사용하여
노름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손이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죄짓고 벌 받으러 가는 사람이
부끄럽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죄를 지었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마음이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손 버릇 나쁘다’,‘손 크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손은 거친 손이 아닙니다.
사실 겉모양도 좋지만 마음 관리를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잠언에 보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마음이 편안 하면 몸에 생기가 돌고 마음이 타면 뼛속이
썩는다)(14,30)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무엘 상권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주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으로
성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이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용모나 신장을 보지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코린4장 5절에서도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7장9절에서 10절에는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말씀입니다. 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르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질문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6-7)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당시 조상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온 음식, 시장에 다녀온 몸, 그리고 그릇들을 씻었습니다.
오늘날 생각하면 위생상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밖에서
부정탈 수 있었던 것을 씻기 위한 정결례였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에 손을 대거나 부정한 사람, 즉 나병환자를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이런 부정은 물로 씻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신에게 잘 보이려면 그에 합당한 정결함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어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대전에
들어서면서 온갖 악한 생각을 빼어 버리고 거룩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나갈 때는 거룩해 져 나가기 때문에 성수를 찍지 않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보면 피해야 할 금기사항, 부정을 탓을 때 회복하기
위한 속죄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민수기5장.9장.19장).
그런데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자신들을 반성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정,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을 저질러서 재앙을 겪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정한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20,7)는 율법의 요구에 따른 정결법은 점점 확산 되었습니다.
그런 추세를 주도한 사람이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알맹이는 빼 놓고
껍데기에 매달린 것입니다. 마음의 정화는 소홀히 하고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형식에 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외적인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내면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근본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멋지게 하느님
앞에 나왔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겉은 예쁘게
단장했지만 그 속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답고 예쁜 모습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에 용서를 받고 주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시편에 보면 ‘겉꾸민 우리 위선 흉측하오니 당신의 은총으로
벗겨 주소서…..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
하고 노래합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지만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얼짱’,‘몸짱’이라는 외면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마음짱’, 속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 합니다. 아니 방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 천국문을 지키는 베드로 사도가 요즘 어려움을 겪으신 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가 가지고 있는 원본사진과 실물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젊은이들은 ‘너 방학했니? 너 방학 좀 해라!’ 한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방학동안 ‘고칠 것 뜯어 고쳐라’는 얘기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숨을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에 인간이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음을 고치면 얼굴도 달라지는데
마음을 고치지 않고 얼굴만 고치니 우습잖아요?
정말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혹 도금이 되었거들랑
하루라도 빨리 벗겨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히브 12,14).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무시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쇄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쇄신 이라고 다 옳지는 않습니다. 행해야 할 바른
쇄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 가르침, 다시 말하면 알맹이를 찾는
것입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지혜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을 바라보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자비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월요일은 월래 웃는 날, 화요일은 화사하게, 수요일은 수수하게
그리고 목요일은 목을 숙여 웃고, 금요일은 금새 웃고 또 웃고, 토요일은
토실 토실 웃고, 주일(일요일)은 주님과 함께 (일을 만들어) 웃으시길
바랍니다. @@@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나무위로 올라가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위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좋은 곳에 두어야 한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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