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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9월2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청주] 때를 알아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콜로 1,1-8
+ 복음 루카 4,38-44
◈ 오늘의 묵상
카파르나움에서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외딴곳에 계신 그분을
발견하고서는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 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른 고을로 가십니다.
군중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권위를 보았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
가 이미 벌써 도래했구나 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평가가 주님께는 적절하지도 않고 커다란 결례가 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아주 출중하게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시쳇말로 인기 짱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머물려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한 장소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매이는 것을
거부하십니다. 그들만의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그들만을 당신의
지지자로 만들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홀연 떠나서 다른 이들에게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정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선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곧 기쁜 소식이 아닌
‘나’를 중심에 세우고 내 주위에 세력을 형성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복음을 전하려고 파견된 사람은 카파르나움에만 남아 있으려 해도 안
되고, 어디를 가든지 늘 카파르나움 사람만 데리고 다녀도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심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선전이 아니라,
치유받은 시몬의 장모처럼 조용히 봉사함으로써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2015년 나해 9월2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다라,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시작입니다. 1,1-8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저는 요즘 기분이 좋습니다. 성소국에 온지 2년 만에 함께 일할 신부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비 신학생, 담임 부제님, 조 담임 신학생들을
주로 만났습니다. 나름 열심히 하지만 소통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젊으신 신부님이 오셨으니, 더 많은 소통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신부님을 보내 주신 주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뜻밖에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가 생기는 것도 기쁨입니다.
자녀가 취업을 한 것도 기쁨입니다.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갔는데 아무
이상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도 기쁨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최근에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인지요?
신앙 안에서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뜻밖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읽는 성서를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과연 성서는
무엇을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 할까요?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만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돈, 명예, 권력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 믿음, 희망으로 갈
수 있는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목마른 이들의 영혼에게 샘물과 같았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표징은
어둠 속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세 번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분입니다. 가장 허망하게 죽으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난 사건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러한
은혜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나의 업적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마음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는 성당에 열심히 다니던 사람이
사업이 잘 되고 부유해지면 오히려 성당에 안 나오는 경우를 볼 때도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세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그분들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복음을
통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박해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순교자의 성월인 9월에 복음을 통한 희망으로 갈등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몬의 장모처럼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봉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만인 평등사상과 한 가족사상
만인 평등사상을 그리스도교도라면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가져야합니다.
국가나 민족이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어린애까지 모두 한 가족이거든요.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사랑으로 일치하여 한 가족이 되는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전세계 어느 명문대도 안 다니셨지만 어디서 이걸 아셨을까요?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지식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사고방식을 이루기 위해 신앙을 덤이라 생각하면 하늘은 분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몸 안에 가득했던 열이 사라졌습니다.
2015년 나해 9월2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다라,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시작입니다. 1,1-8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지난 8월에 여행을 다녀온 뒤에 저는 미장원에 가서 파마를 했습니다.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픈 상태에서 좀 더 편안한 머리 손질을 찾던 중에
파마를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머리가 워낙 뻣뻣한 머리카락이라서
조금만 길면 지저분해져서 잘라야 하거든요. 또한 아침마다 지저분한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드라이기로 꾹꾹 눌러주는 것도 아픈 상태에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파마한다는 것이 너무나 쑥스러웠지요. 파마머리는 남자가 아닌
여자만의 전유물로 생각했고, 또 장시간 머리에 무엇인가를 싸매고 있는
모습의 당사자가 내가 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거든요. 그러나 안식년에
파마도 해 보자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파마를 해달라고 이야기를 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파마를 하고나서 가장 좋은 것은 머리손질이 정말로 편해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드라이기로도 머리가 쭈뼛쭈뼛 서서 어쩔 수 없이 젤이나 왁스
같은 헤어 스타일링 제품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드라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제 모자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뻣뻣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저로써는 그전까지 모자는 쓸 수 없는 도구였습니다.
왜냐하면 쓰고서 벗을 때의 모습이 아주 이상히 변하게 하거든요. 모자에
눌린 곳은 절대로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막 자고 일어나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자를 쓰고 벗은 뒤에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주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전에는 잘 몰랐던 파마, 아니 오히려 피하려고만 했던 파마.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까 이렇게 편한 것을 왜 안 했을까 라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사실 우리 삶 안에서도 이렇게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피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해보지도 않고서 말이지요. 남들이 그렇다고 하더라,
그렇게 보기 좋아 보이지 않더라, 비슷한 것을 해보니 별 볼 일 없더라
등등의 말들을 내세우면서 하지도 않은 것들을 거절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해봐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습니다. 어쩌면 이
열병은 화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위가 있는데 집안은 신경
쓰지 않고 ‘예수’만을 쫓아다닌다고 하니 어떻게 화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위도 보기 싫고, 특히 사위가 쫓아다니는 ‘예수’ 역시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만나봐야 뭐하냐면서 부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장모를 찾아와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몸 안에 가득했던 열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밉기만 했었던 그들을 위해 시중을 들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옳다면 화낼 필요가 없고, 당신이 틀렸다면 화낼 자격이 없다(간디).
인터뷰를 보면서(‘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중에서, 박광수)
TV 어느 한 프로그램에서 수십만 마리의 닭을 키우며 양계 사업으로
성공한 이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전 이 사업을 위해 안 먹어 본 닭 사료가 없습니다.”
양계사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그분의 열정은 인정하지만 인터뷰를
듣던 나는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의문이 샘솟았다. 왜 닭 사료를 먹은 걸까?
자신의 입맛과 닭의 입맛이 같다고 생각한 걸까? 자신이 맛있다고 생각한
사료를 닭에게 주면 닭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물론 사료까지 먹은 그 열정이 그분이 양계 사업을 성공에 이르게 한
부분임을 인정하지만 나는 앞에 나열한 의문점 때문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고 그 의문은 뜻밖에도 우리의 아이들에게로 옮겨 갔다.
혹시 나는 내 입맛대로 아이들을 대하지는 않나? 내 입맛에 맞으니
아이들의 입맛에도 맞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내 그러한 모습을
보며 나처럼 웃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그러면서 양계장 주인이 병아들에게
모이를 주며 간절히 바랐던 처음 그 원초적인 바람만 아이들에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 아닌가 싶어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지요? 나의 행동 자체를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입으로만 말하면서, 정작은 나만을 위해서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시몬의 집터 위에 세워진 가파르나움 성당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9월2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콜로 1,3-4)
신부님, 목사님, 스님, 교무님이 신도들 때문에
하느님께 참으로 감사드릴 때는 언제일까요?
재정적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해 줄 때 일까요?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 바치고
이런저런 행사에 적극 동참해 줄 때 일까요?
강론이나 설교, 법문을 듣고 고맙다고 인사할 때 일까요?
물론 감사할 일이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수많은 삶의 애환에도 불구하고
믿음 때문에 희망과 기쁨을 잃지 않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볼 때 가장 감사드리지 않을까요?
나의 종교가 무엇이든 그 종교를 통해 올바른 믿음과
다른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직자들과 가깝다하더라도
별 볼 일 없는 신앙인입니다.
여러분은 참 신앙인이요 참 종교인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사람이고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시기에 축하드립니다.
내가 아는 분들 중에 많은 이들이 그런 분들이기에
오늘 하느님께 더 깊이 감사드리는 날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군종] 카드라 통신
김홍석 요나 신부(군종교구 해성대성당) <연중 제 22주간 수요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9월2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루카 복음 4장 38-44절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카드라 통신
카드라 통신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AP 통신이나 로이터 통신 같은 뉴스 관련 통신회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경상도에서는 남의 이야기를 전할 때 “누가 뭐라 뭐라 카드라!”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카드라’는 ‘하더라’의 사투리입니다.
역사에는 각각 사관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가 그 역사를 기록했냐에 따라
내용이 많이 달라지곤 합니다.
싸움이 나서 누군가의 중재를 맡게 되더라도 누구의 말을 먼저 듣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이라는 것은 누구를 통해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보수적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보수가 맞는 것 같고 진보적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진보가 맞는 것처럼 들리니 말입니다.
어떤 친구를 사귀느냐도 중요합니다.
거짓말만 듣게 되느냐 참말만 듣게 되느냐가 갈라지니까요.
예수님께서 마귀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마귀들마저도 그분을 찬미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내버려둬도
좋을 듯한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마귀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그들의 고백이 거짓인 증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들의 거짓 고백을, 마귀가 전하는 카드라 통신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으셔서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와서! 보시오!”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귀 얇은
우리들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카드라 통신이 아닌 당신의 중앙방송만을
듣게 하소서!
- 김홍석 요나 신부(군종교구 제5공비단 해성대성당)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 -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2015년 나해 9월2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루카 4,38-44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셨다.”(루카 4,40)
Jesus other healings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은 인간의 본질이자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르고, 자기 유익이나 출세를 위한 가장된 사랑,
육신의 감각에 집중한 쾌락적 사랑, 왜곡된 사랑, 무지한 사랑, 피상적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물질과 이성, 그리고 정보가 사람 위에서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선교 근거지로 삼았던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에 가셨다. 그 집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침으로써 해방시켜주신다. 그분은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신다.
사랑의 치유는 해방을 불러오고 바로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 사랑이신 분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사랑만이 사랑을 낳는데 사랑을 받아보지도 주어보지도 못한
이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모른다. 사랑하는 방법은 기술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 하느님을 닮아가는 불가결한 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을 본받도록 하자.
먼저 그분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셨다. 남녀, 정신병자와 육신의 병고에
시달리는 이, 가난한 이와 부자, 권력자와 힘없는 이, 이스라엘 사람과
이교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치유해주셨다. 나아가 어디서든 함께하면서
치유와 해방을 불러일으키셨다. 이스라엘 땅과 이교인의 땅, 길가와 집안,
회당 안과 밖, 호숫가와 내륙 할 것 없이 어디서든 사랑을 보여주셨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든 평일이든 가리지 않고 사랑을
행하셨다.
또한 그분은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실 때처럼 치유와 해방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4,39) 상대방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사랑의 열정을 품고 자발적으로 다가가신 것이다.
그분은 관망자가 아니라 사랑을 발생시키는데 걸림돌이 되는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신 것이다.
치유를 베푸실 때에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얹으시어 고쳐주셨다.”(4,40)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에 마음을 집중하고 각 사람을 친밀하고 따뜻한
애정으로 환대하고 정성을 다해 사랑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섬세하고
친밀한 하느님의 마음으로 해방을 가져다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안식일법이나 정결례의 관습에 비할 수 없이
중요함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그분은 인간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때와 장소, 대상을 뛰어넘는 지고의 가치임을
실행하시고 가르쳐주셨다.
나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은 할 일이 많고 바빠서 ‘다음에’
라고 말하며 사랑하기를 미루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없어져야 사랑할
수 있는데 나를 비우고 버리고, 낮추기가 싫어서 관념 속에서만 맴도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의 지름길은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바보가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얼마나 자주 나는 때를 가리고 장소를 가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가까운 이들에게만 잘해주는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랑’을 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울타리 없는 사랑’,
‘차별 없는 사랑’, ‘인간의 조건에 상관없는 사랑’, ‘다가가는 사랑’,
‘친밀하고 섬세하며 속깊은 사랑, 온 존재로 하는 사랑’을 혼에 새기고
기쁘게 사랑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악령의 또 다른 얼굴
2015년 나해 9월2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다라,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시작입니다. 1,1-8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악령의 또 다른 얼굴
언젠가 아마도 악령에 들린 것으로 추측되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정말 온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서 머리칼이 저절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악령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모욕하고 거스르는 존재. 인간의 구원을 가로막는 존재, 결국
인간을 파괴시키고 타락시키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한 가련한 사람 안에 들어가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한 가련한 인간 안에 들어가, 그의 영혼은 물론, 육체와, 정신, 품위를
완전히 훼손시킨 악령, 그 악령의 활동으로 인해 죽음 문턱까지 도달한
한 가련한 인간의 고통 앞에 사람들은 다들 서둘러 피해갔습니다. 다들
두려워 떨었습니다. 다들 악령이 자신에게 옮겨 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다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분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구원의 손을
펼치십니다. 본래의 고귀한 성품을 되찾아주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시켜주십니다.
보십시오. 고뇌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한 인간, 그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악령의 활동으로 심신이 지쳤다면,
오늘 우리가 심각한 죄와 깊은 상처로 힘들다면, 오늘 우리가 비참으로
흐려진 눈을 들 수 없다면, 꼭 기억하십시오. 치유자이신 하느님께서 환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올 순간이 가까웠습니다.
‘오늘 내게 있어 악령은 무엇이겠는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악령입니다.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이웃을 향한
분노가 악령입니다. 공동체 일치를 가로막는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악령입니다. 영적 생활을 파괴하는 악습들이 악령입니다. 하느님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활동주의가 악령입니다.
오늘 내 안의 악령이 무엇인가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악령으로 인해
우리 공동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권능의 팔을 펼치셔서 그 악령들을 쫒아내 주시도록 합심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여러 모습의 얼굴로 변장한 악령 들린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를
찾아옵니다. 악령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여기저기 다 찾아다니다가
포기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환대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대신 우리가 치유의 손길을 펼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청주] 때를 알아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2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다다라, 온 세상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시작입니다. 1,1-8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8-44
때를 안다는 것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임을 잊지 맙시다. 정치인도 기업인도
성직자도 자기 좋아하는 것에 매이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
(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는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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