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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9월10일 목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청주] 간 쓸개 다 빼줘라.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콜로 3,12-17
+ 복음 루카 6,27-38
◈ 오늘의 묵상
콜로새서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거룩한 사람들은 위엄이나 권위를
갖추어야 하거나, 더욱이 그들이 무슨 벼슬을 받은 사람처럼 위세를
부리거나 세상 사람들에게서 당연히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콜로새서가 권면하는 덕목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면
한결같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등 어쩌면
약하게만 보이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늘 굴복해야 하는 듯한
태도들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보복하지 말며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고, 하느님처럼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정말로 힘들기 때문에 의지가 따라야만
가능하겠지요.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헐뜯는 사람, 곧 원수 같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를 위해 축복을 기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동태 복수법을 예수님께서는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계명으로 대치시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소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하는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죄인들도 자기들이 원하는 반대급부가 분명하면 다른 사람을 돌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만족해서는 안 되는데,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선하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강조하십니다. 미운 사람, 원수 같은 사람의 행복을 기원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요. 그러니 그저
결단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2015년 나해 9월10일 목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17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지난 월요일에 교구청에는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교구장이신
추기경님의 초청으로 2015년 새 사제들과 은퇴하신 원로사목자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달릴 길을 다 달리신 원로사목자들은 새 사제들을
바라보면서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새
사제들은 원로사목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또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을 받으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의 노력과 땀은
방황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와 용기가 될 것입니다.
원로사목자들께서는 손자 같은 새 사제들에게 사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덕담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새 사제들은 원로사목자들에게
스마트 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카톡은 어떻게 이용하는지,
애플리케이션은 어떻게 다운 받는지 알려드렸을 것입니다. 꽃밭이 ‘장미,
채송화, 코스모스, 나팔꽃’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듯이,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컴퓨터 전문가가 가상의 세상에서 가장 성공하고, 번성하는 방법을
찾아내었다고 합니다. 폭력과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방법, 시기와 모함을
전문으로 하는 방법, 남의 것은 빼앗고 괴롭히는 방법 그리고 평화와
화합, 용서를 전문으로 하는 방법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수백 번 게임을 했는데 늘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폭력과
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성공하고 이기는 것 같았지만 최후의
승리는 언제나 ‘평화, 화합, 용서’를 하는 프로그램이 차지하였습니다.
어떤 상황을 만들어도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생명체를 유지할 수 없는 생물과 미생물의 경계선에
있는 개체하고 합니다. 생명체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면 살아갈 수
있지만, 숙주인 생명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인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다행히도 많이 전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는
바이러스가 ‘너죽고 나죽자’라는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이러스를 전파할 숙주인 생명체가 바이러스에 의해서 죽어버리기
때문에 널리 퍼질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숙주인 생명체에 살면서
피해를 거의 주지 않는 바이러스는 널리 퍼지게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숙주인 생명체에 도움을 주는 바이러스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갈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공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궁극적인
인생의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 길이 나와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했던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결국 그 방법만이 하느님의 모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독서도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베푸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행동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원망, 분노, 미움은 사라지게 될 거라고 합니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지체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제일 아름답고도 무섭네요.
태양과 녹색 그리고 흙과 물을 보면서 자연의 어우러짐에 감탄합니다.
모두가 흙과 물처럼 어울리고 빛의 도움으로 녹색 세상을 펴야합니다.
이 어울림 속에 사는 동물들이 문제이고 특히 사람들이 문제 많아요.
생각하고 사랑과 영원을 노래하는 인간들이 제일 아름답고도 무섭네요.
태양은 세상의 모든 것에게 빛도 주고 열도 주고 물도 공평하게 줍니다.
수 십 억년 동안 지구를 지키며 세상을 돌봐 왔어요. 인자하게요.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루카 6,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사랑을 쏟아 부어 줄 나의 이웃을 찾아보는
2015년 나해 9월10일 목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17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어느 카페에 갔는데 그곳에 흔들의자가 야외에 설치되어 있더군요. 이
의자에 앉아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편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너무
편안하고 약간씩 흔들리는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제 일행이 깨우지 않았으면 아마 한참을 이 의자에 앉아 잠을 자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이 카페에서의 모임을 마친 뒤에 지인의 차를 타고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길이 너무 막히는 것입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조금씩밖에 앞으로 전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차
안에서 또 졸았습니다.
이 지인께서는 “신부님, 정말로 피곤하신가봐요. 카페의 흔들의자에서도
주무시고, 이 차 안에서도 꾸벅꾸벅 조시는 것을 보니 말이에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운전하시는 분에게 죄송스런
마음도 생겼지요.
사실 저는 평소에 낮잠을 잘 자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잠이 왔던 것은 무엇일까요?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지요.
제자리에서 흔들거리는 흔들의자, 조금씩만 앞으로 가는 차. 모두가
진행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기 때문에 몸의 긴장이 풀어지고 졸음이
온 것입니다.
목표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의 자리에만
머물려는 나태한 마음, 편한 것만 찾으려는 안일한 마음. 결국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면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하십니다. 더군다나 남을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말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입니까?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모습, 이렇게 살아서는 험난한 이 세상을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께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보다는 지금의 자리에 머물려는 나태하고
안일한 마음으로 자기 사랑만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하느님 나라라는 특별한 목표 의식 없이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전 세계에 생명의 소중함과 국가적ㆍ사회적으로 증가되고 있는
자살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위해 제정한
세계자살예방의 날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이 자살 문제가 아주
심각하지요. 그만큼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쏟아 부어 줄 나의
이웃을 찾아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안위만을 추구하고 폐쇄적이며 병든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나는 더 좋아합니다. 나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옥죄이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통장
몇 달 전에 통장 두 개를 개설했습니다. 요즘에는 대포 통장이 많아서
통장 개설하는 것이 좀 까다롭더군요. 그런데 은행 직원이 제게 이 통장의
이름을 적어달라고 합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 적으면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제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하나는 ‘기쁨 통장’, 다른 하나는
‘절망 통장’이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사실 교구에서 받는 활동비 외에도 저에게는 약간의 수입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강의료, 방송출연료, 원고료 등등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저를
위해서 이 수입들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덕에
강의도 하고 방송 출연도 하는 것인데, 마치 제 능력이 뛰어나서 얻는
수입으로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인 것 같더군요. 그래서 이러한 수입들을
입금하는 통장은 ‘기쁨 통장’입니다. 이 통장은 내가 아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이런 나눔을 통해서 기쁨을 얻게 되니
‘기쁨 통장’인 것입니다.
또 다른 통장은 ‘절망 통장’입니다. 이 통장은 교구로부터 받은 활동비
중에서 남은 액수를 입금하는 것입니다. 절약이 많이 필요하지요. 적자가
될 때도 참 많거든요. 아무튼 이 절망 통장은 제 스스로가 정말로 어렵고
힘들 때, 즉 절망에 빠졌을 때 이 통장을 가지고 어디든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일명 여행 통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요즘에 이 통장 채우는 재미로 삽니다. 굳이 어디를 가지 않아도 그냥
집에 하루 종일 있어도 남들에게 사랑을 전달 할 수 있음에, 또한 내가
어렵고 힘들면 어디든 튈 수 있는 통장이 있음에 희망을 갖고 살고 있지요.
통장, 잘 만든 것 같지요? 여러분도 한번 만들어보세요. 사는 재미가
솔솔하네요. ㅋㅋㅋ
저의 기쁨 통장과 절망 통장이랍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콜로 3,13)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았지만
열심한 신자가 된 콜로새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새길 만하지만 오늘 말씀 중에는 이 구절이 눈에 띄네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서로 불평할 일이 참 많지요.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면서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라"고 하시네요.
사실 서로 불평해 봤자 짜증만 나고 사이만 안 좋아질 뿐인데
어리석게도 그게 정상인 양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오늘 사랑 때문에
혹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생기더라도 참아주고 용서해 주면 어떨까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비로소 알게되는 우리 인생의 참된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인생의 신비입니다.
자아에 갇혀있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서로를 축복하는 축복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두려움을 멈추게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용서와 화해 치유와 감사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 하려했던 이 어리석음을 이제야 내려놓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참된 사랑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믿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참된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의 힘을 진실로 진실로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 - 예수님의 사랑법
2015년 나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루카 6,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예수님의 사랑법
수없이 사랑에 대해 말하고 사랑의 존재가 되려고 애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후회를 하게 마련이지만 가장 후회스런
것은 마음껏 사랑 하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또 사랑을 받아야 할 때 사랑
받지 못하는 것만큼 외롭고 허전한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사랑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오늘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서로 건네주고 나누어줌으로써 사랑의 존재가
되는 길을 가르쳐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사랑에서 제외되었거나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그런 대상들을 사랑의 우선적인 대상으로
언급하신다. 나의 원수,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학대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쏠림 현상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6,32)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정체성은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데 있다.
예수님의 사랑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에 있다. 원수가 지닌
나에 대한 적대감과 반감, 나를 미워하는 이 안에 있는 미움의 감정, 나를
저주하는 이 안에 있는 남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결여, 나를 학대하는 이
안에 있는 폭력성과 사랑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다.
곧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자비로 그들을 품어 미움과 폭력, 생명 경시
등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으라는 것이다.
나아가 말씀하신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6,29-30)
그들을 끌어안기 위해 그 악과 폭력과 잔인함과 미움이 사라질 만큼의
여백과 기다림을 지니라는 말씀이리라.
악에 악으로 맞서고,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며, 미움을 또 다른 미움으로
되돌린다면 폭력의 악순환만 계속될 뿐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악은 선으로 이겨야 한다. ‘오히려’ 원수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며(6,35), 남을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말아한다(6,37).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상대방이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지 그 사람을 있는 그 자체로 사랑하도록 힘쓰자. 내 중심에서 벗어나
뭔가를 받으려 말고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도록’(6,31) 하자.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처럼 오직 “하느님 때문에”
(propter Dei) 원수를 사랑하고 그 안의 악이 선으로 바뀌고 그의 영혼이
사랑으로 치유되기를 바라고 기도해야겠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려면 먼저 악을 이기고도 남을 만큼의, 원수를
사랑하고도 넘칠 만큼의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말과
생각과 표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남이 미워질 때,
사람들이 싫어질 때, 내 뜻대로 하고 싶을 때 내 안에 사랑이 고갈되었음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민감성이다. 이런 민감성이
우리를 우리답게 하고 우아하게 하는 것이 아닐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와
온유와 인내를 입고, 서로 참아주고 용서해주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음으로써”(콜로 3,12-14)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지나가는 이 세상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 6,27-38
지나가는 이 세상
어찌 보면 모순과 절망,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 차 보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세상!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세월과 더불어 젊음도 가고 사랑도 가고, 끔찍스런
고통의 시절도 가고 혹독한 겨울도 다 지나갑니다.
견디기 정말 힘든 비참함도, 캄캄한 어둠의 날도, 죄도 부끄러움도
견디다보면 시간조차 지배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과 더불어 다
지나갑니다.
세월의 힘이 참 큰 것 같습니다. 그리도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며
흔들어 대던 현세적인 것들, 욕정, 나쁜 욕망, 탐욕 등 악의 세력들도
시간과 더불어 점차 우리 안에서 힘을 잃어갑니다. 그토록 통제하기
힘들었던 분노, 격분, 악의 중상, 악담, 거짓말도 차츰 우리 안에서
소멸되어 갑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불림 받았다는 것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한번 둘러보십시오. 서로
헐뜯고 서로 깊은 생채기를 내며 들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 잠시 소풍 나온 이 세상인데, 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양,
이 세상이 끝인 것처럼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진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갖은 시련과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한 가지 불멸의
진리를 머릿속에 담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잘 견디고
잘 극복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세상은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큰 세상이며, 아름다운 세상이며, 축복으로 가득 찬 세상이라는
진리 말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감내하기 힘들다 할지라도 끝까지
이겨낸 우리가 그날 받을 상급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모든 속박과
사슬에서 벗어날 그날, 우리의 모든 기대가 충족되는 그날 우리는 너무
기뻐서 뛰놀 것입니다. 오랜 세월 갈구해왔던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는
그날 우리는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토록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옛 인간의 행실과 악습도 헌 옷
갈아입듯 던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 인간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고
당당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하느님 나라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관건은 기다림입니다. 오늘의 내 이 비참함도 견뎌내야겠습니다.
이 부끄러운 죄도 견뎌내야겠습니다. 부당하고 부족하기가 하늘을
찌르더라도 더 크신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며 인내심을
발휘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간 쓸개 다 빼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10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6.27-38)
간 쓸개 다 빼줘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든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결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납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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