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자사 진의 묘 덕흥리고분에서 발견
신도현 도향 중감리출신
석가불문제자인 00진은 벼슬하여 지위가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 국소대형은 고구려 관직명으로 보인다.
요양장군 요동태수사.
지절 동이 교위 유주자사인.
진은 77세로 죽었다. 영락 18년 (AD 408 戊申)
유주자사 관할하에 있는 13명의 태수들이 정무보고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 아랫 쪽에 무릅꿇고 있는 두 사람이 있으며 이 두 사람을 통사리라고 하는데 통역관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주축으로 선문대 이덕일교수는 아래의 지도에 나타난 지명들이 13태수의 지역으로 이곳이 유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다른자료 들을 보면 이곳은 고구려가 아니라 연나라라는 주장도 있다. 북경근처가 전통적으로 연나라였다는 친일학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유주자사 진이 고구려인이며 그가 고향땅인 북한에 묻힌 것이다. 즉 당시의 한반도는 신적인 존재들이 사는 곳이었고 이곳사람들이 외지로 나가서 모두 큰 벼슬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는 그토록 많은 고인돌이 있는 것이다.
즉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고향이 되는 중심세력이 있었고 그들이 각지에 식민지를 세워 통치했다고 하는 수도를 국내성과 국외성 두 개씩을 두었다는 설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로마시대를 상상해 보라. 세계 곳곳에 로마의 식민지를 두고 로마사람들이 각 지역에 나가서 통치를 한 후 죽은 후 고향땅에 묻힌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구려의 지방관제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없다. 현재 5부족이 각기 전국을 나누어 다스렸다는 것과 3경을 두었다는 것 이외엔 없다. 즉 지방을 ‘주’라는 이름으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안 보이는 것이다. ‘주’라는 지방으로 나눈 것은 오히려 신라밖에는 없다. 신라는 전국을 5주2소경으로 나누었고 나중에 통일신라에 가서 옛3국영토를 일부회복하여 각각3주씩을 설치 9주5소경으로 편재했다. 그리고 발해는 5경 15부 62주로 하였으며 각부에 도독을 두었고 62개주에 자사를 두었다.
즉 유주자 사진은 유주라는 명칭과 관직명인 자사라는 이름에서 신라 또는 발해의 지방관제와 일치되고 있다. 만약 하나의 주의 크기가 위의 그림과 같다면 발해라는 나라는 위 그림이 나타난 지역의 62배나 넓은 땅을 가진 나라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영락이라는 연호는 광개토왕시기의 연호이고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에서 대형은 분명히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관직 명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지방 관제 역시 ‘주’로 나누었고 주의 장관인 ‘자사’라는 관직을 두었던 것 일까? 만약 발해라는 나라가 고구려 땅의 거의 전부를 회복하였다면 발해는 62주나 있었음므로 위 지역의 62배나 되는 넓은 땅을 가진 나라였던가?
고구려의 지방관제에서 주와 현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는 멸망 당시 5부 176성이었는데 그것을 9도독부 42주 100개 현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유주와 같은주가 42개나있었으므로 고구려의 땅의 넓이는 위 지역의 42배 정도로 넓어져야하지 않을까?
첫댓글 고구려 최강성기는 고구려 기마군단으로 티벳(토욕혼)까지 정벌했던 광개토태왕시절이죠. 유자자사 진은 광개토태왕시절에 죽은 인물이고. 이런 고구려도 말기로 접어들어서는 고구려을 노리는 수.당나라 시절에는 수도성을 북한 평양성(장안성:북한 평양성보다도 훨씬 규모가 작은 당나라 장안성은 장안성이 아니라는 것을 비꼬기 위해서 장안성이라 불렀을 것임)으로 천도하고 요하지역을 경계로 고구려 운명을 거는 싸움을 하게 되지요. 민족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이러한 당시 지나대륙의 상황을 전제로 역사논리를 전개해야 객관성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유주는 지방행정조직명이 아니라 그냥 지명입니다..[周禮]「東北曰幽州。」주례에는 동북지역을 유주라고 하였다. 광개토태왕 당시 유주지역에 자리한 국가는 모용선비족의 후연이다. 후연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407년 고구려계인 모용운(고구려 이름 고운)이 왕에 오르는데, 이 때 고운은 광개토태왕에게 편지를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했다고 사서는 적고 있다.
유주지역은 동서로 약 3백여리, 남북 약 4백여리의 지역을 통칭하며, 우공(禹貢)시대의 기주(冀州)지역을 말하며 주(周)나라때의 유주(幽州)지역을 말하며,전국시대 연국의 땅이었고,진[(秦:시황제 진= 秦韓(진한)]시대의 상곡군(上谷郡)의 땅이었고, 漢나라 초에 연국을 복치(復置)한 지역이며,후에 광양군이 되었고 후한시대에는 유주자사가 다스렸던 곳이며,삼국시절 魏나라 때에는 연국을 다시 복치했으며,晉(진)이 쇠퇴한 후, 석륵의 후조가 할거 했던 곳이며,저족 출신의 부견의 전진(前秦)이 차지했던 지역이며, 모용수의 후연이 자리잡았던 지역이었으며,후위 및 수,당 그리고 5대시 후당시대까지도 유주의 땅이었다.
요(遼)나라 때에는 남경유도부가 설치되었고, 다시 이름을 바꿔 연경절진부가 된 지역이며, 송나라때에는 연산부가 설치되고,금나라시에는 연경절진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며, 정원초에 연경을 중도(中都)로 하였던 곳이다.
고구려가 신라를 100년간 신하국으로 삼았다. 신라는 광개토태왕을 천자로 삼고 제사까지 지냈다는 사실이 경주지역 광개토태왕을 위한 제기솥의 출토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신라왕실은 유지시켜 주었다. 마찬가지로 광개토태왕 당시 복속한 국가들에 대한 통치방식은 고구려를 천자국으로 삼고 신하국이 되는 나라들은 보호했지만 부정하면 정벌하고 응징하였다. 따라서 당시 북위.후연 등 선비족이 판치는 5호16국 시대는 고구려가 완전히 복속하고 고구려가 통제감시를 위한 관리들을 파견했다고 볼 수 있다. 유주자사 진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본다.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그야말로 유라시아 초원과 지나대륙,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고구려 세상이였다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대마도에 일본열도을 통제관리하는 임나연정까지 개설하고 왜의 정사를 보고 받았으니까요.임나는 대마도를 의미합니다. 임나연정은 고구려가 설치한 관청입니다.광개토태왕비문에 나오는 임나가라 종발성은 당시 한반도남부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가야세력의 중심지역인 대마도에 있었던 성을 말합니다.가야세력의 최후보루까지 정벌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쉽게 단정 지을 일이 아닙니다. 고구려와 고운이 친족관계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지요. 즉 같은 고씨 였거든요. 그런데 연이망하고 고구려일부의땅을 얻어서 살았다는 '연왕망사거 요동'이라는 기록이있지요. 연나라의 위치는 고대사연구에서 매우 중요하지요. 연의동쪽에 조선이있었다. 라는기록이나, 치우와 황제헌원이 싸운 탁록이 엤 연나라의 읍이었다는기록 등입니다. 즉 연의 위치를 찾지못하면 고대사를 제대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약3년전 우루무치를 여행하다가 그곳에서 연북(북연)이라고 쓰여진 도로 표지판을 보았습니다. 즉 윤복현님이주장하시는내용은 일제시대의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 역사논리를 지향하는 나의 주장을 일제시대의 주장이라 매도하지 마시요.고조선을 침략하여 2천리땅을 차지했던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의 국호를 따른 나라가 모용선비족의 전연인 것이요, 고구려(고려)와 왕건의 고려도 구분못하고 고구려의 고려를 왕건의 고려의 기록인양 호돌갑을 떠는 역사논리가 코메디인 것이요.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에서는 각 고분마다 8자병풍이 있었는데 그 병풍 폭마다 제비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틀림없는 북연입니다. 연나라와 고구려는 동서국경을 대고 있었는데 그 국경에 안시성이 있었습니다. 둔황옆에 과주라는 도시가 있고 그곳이 엤날에 안시라는 지명이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치우와으이전쟁때 탁록전투가 있기 전에 먼저 판천 전투가 있습니다. 판천은 투루판임이틀림없습니다. '판'은 들판의뜻이고 '천'은우물을뜻한느데 투루판에는현제 '캐레즈'라고부르는 지하수로가 3000미터나 깔려있습니다. 사막지역의전투에서 가장중요한것이 먼저 우물인 지하수로를 점령하는것이
다음 '탁록'의 뜻을 봅시다. '탁'은 '색' '고'와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그냥 성城이라는 뜻입니다. 록鹿은 녹綠과같은 뜻으로 사막에있는 오아시스도시를 녹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즉 탁록성인 녹성은 우루무치를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북연의 지명이 오늘날도 남아 있습니다. 즉 연나라는 그쪽에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이렇게 옮겨버린것입니다.
즉 연나라는 북연(투루판)지방에 있다가 망하고, 고구려가 그땅을 일부를 내주어 오늘날 북경근처로 옮겨온다. 따라서 사서에 등장하는 조선은 연나라의 우측에 있었다.는 기록이나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 등의 기록에서의 연나라는북연을 말하는것으로 투루판근처의 땅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왜'는 그들이 주장하듯 백제계열이라고주장하는데 백제는 고구려와 뿌리가같다. 따라서 고구려의 위치와 왜의 위치는 같아야 하는데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의 기록에서의 연나라는 투루판지역에있던 북연으로 보아야 옳다.
윤복현씨 갑자기 고려와 고구려를 혼동한다는 말은 웬 뚱딴지 같은 말인가요? 원래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는 북연을 말하며 북연은 진나라에게 멸망합니다. 즉 사어에 기록된 연나라는 북연을 말하는데 일본학자들이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을 마치 북연 인것처럼 주장한다는 말입니다. 고운은 같은고씨였기에 진나라멸망후에 망한연나라에게 고구려땅일부를내주고 그곳에서 나라를세워 살게 했던 것이지요. 지금 티벳이 망하고 인도정부에서 달라이라마에게 '다람살라'라는 곳을 내주어 티벳 망명정부를 이끌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모용선비족이세운 전연이라는 나라는 북연이있던원래 연나라으위치와는 매우 다른 곳이라는 주장입니다.
발로 뛰고 눈으로 확인한 생생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역사서를 접할때 누구에 의해 어떻게 씌어졌는지를 살펴야 왜곡된 사관으로 치우쳐지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학교에서 밑줄치고 외워대며 머리에 주입된것이 식민사관 한국사 아닙니까? 중국사서를 공부하거나 접하고 인용할때는 특히 조심해야할 것 같습니다^^ 사마천 사기부터 지금까지도 읽히는 삼국사까지 왜곡시킨 지나들이 아닙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