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5년 나해 10월 2일 금요일[(백) 수호천사 기념일]
[수도회] 땅의 모든 창조물에 이르는 하느님의 손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탈출 23,20-23
+ 복음 마태 18,1-5. 10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천사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 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의 안내자, 동반자, 보호자, 친구로 천사를 보내
주셨는데, 특히 각 개인의 일생의 여정 전체를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도록 지정하신 영적 존재를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도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서 신기하게 보호를
받거나 구출되었음을 종종 체험하곤 하는데, 특별히 순박한 어린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늘 독서는 시나이 산을 떠나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하는 이스라엘을 천사가 인도하였음을 전하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라는 개념과 연결시켜
묵상한다면 논리적인 비약일까요?
우리는 사람의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세상, 하느님을 애써 잊으려고
할 뿐 아니라, 아예 외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수십
명,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건 사고들이 빈번하기 때문인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인권의 고귀함은 실종된 것 같습니다. 사소한
일이나 다툼으로 살인이 벌어지는가 하면, 대중 매체를 통하여 고독사는
물론 엄청난 숫자의 자살률을 접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노숙인을 비롯하여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듯한 열악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업신여기는 천한 사람들에게도 천사들이 함께 있고, 그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명을 받아 그들을 돌보는 것이니,
결국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는 것이지요.
남들이 업신여기는 작은 이들을 천사들을 통하여 돌보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도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위험에서 보호해 주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천사들처럼 우리도, 우리
곁에서 이 세상 순례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지켜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수호천사 기념일
2015년 나해 10월2일 금요일 [(백) 수호천사 기념일]
제1독서
<나의 천사가 앞장설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3,20-23
복음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
오늘은 수호천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제게는 성소후원회 회원
여러분들이 ‘수호천사’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여러분들의 관심이
있기 때문에 ‘성소국’은 모든 일들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
올해는 여러분들께서 열심히 기도해 주셔서 ‘차장 신부님’께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저를 기억해 주시고,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들이 제게는 수호천사입니다.
예전에 캐나다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셔서 사과 밭에 갔었습니다. 우리 돈으로 5000원을
주면 원하는 만큼 사과를 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바구니를 들고
사과가 달린 나무로 향했습니다. 사과를 따면서 더 크고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발견하면 지금 가지고 있는 사과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모두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바구니에 가득 담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외국 사람들의 바구니를 보니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그분들은 큰
사과도 있었지만, 작고 볼품없는 사과도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저는
우리의 바구니를 보여 주면서 우리는 이렇게 좋은 사과를 많이 담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의 대답은 저의 자랑을 무색하게
하였습니다. 오히려 제가 가지고 있던 바구니를 뒤로 감추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모두 따버리면 다음에 오는
사람은 작고 볼품없는 사과만 바구니에 담을 것 아닙니까?’ 사과를
바구니에 담으면서도 뒤에 오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저 자신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름 행사에 필요한 ‘생수’를 사기 위해서 시골의
마트에 들렸습니다. 저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게 주인에게 주문을
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생수 전부 주세요.’ 당연히 가게 주인은 고맙다고
인사를 할 줄 알았습니다. 물건을 다 팔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우리에게 생수를 전부 팔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지금 생수를 다 팔면 나중에 생수를 사러오는 손님들에게 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의 이익보다는 가게를 찾아올 손님을 먼저
생각하는 주인의 마음이, 저를 다시 한 번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은 비록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의상을
입었어도 결코 수호천사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수호천사는 하얀색
피부에 달개가 달린 여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이웃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시겠는지요? 배려와 나눔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웃들에게
수호천사가 되셨을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어른들이 창조주 하느님을 아빠라 불러야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하듯 어른들이 어릴 적 생각 못하더군요.
아빠엄마들이 어린이에게 실망주고 권력자들이 국민에게 실망 주잖아요.
하늘이 심어준 하늘심성이 세상에서 살며 적응한 게 천차 만 차고요.
어린이는 창조주 하느님을 잘 몰라서 그저 아빠와 엄마로 대신합니다.
그러니 아빠와 엄마는 아이에게 창조주 하느님과 같아야 된다는 거지요.
그럼 어른들이 창조주 하느님을 알아 아빠라 부르며 사랑받아야 되는데.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오 18,4~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주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2015년 나해 10월2일 금요일 [(백) 수호천사 기념일]
제1독서
<나의 천사가 앞장설 것이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3,20-23
복음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
저는 커피를 아주 좋아합니다. 사실 어렸을 때에도 커피를 마시기는
했지만, 그때는 완전히 설탕 맛에 마셨던 것 같습니다. 둘, 둘, 둘이라고
하지요?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둘. 환상의 조합이라고 하는데, 어렸을
때는 커피는 아까워서 하나, 프림은 둘, 그리고 설탕은 많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누나는 설탕을 넣지 않는 것입니다. 설탕을 넣지
않아야 개운하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호기심에 마셔보았지만 이 쓴
커피를 왜 마시나 싶었습니다. 역시 커피에는 설탕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난다고 하면서 누나가 커피 맛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여전히 커피를 즐겨 마십니다. 그런데 어렸을 마셨던 달달한
커피는 전혀 마시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쓴 것을 왜 먹냐고 할 정도로
진한 커피를 많이 마십니다. 어제도 커피를 진하게 한 잔 내려 마시면서
문득 어렸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그때의 입맛과 지금의 입맛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얼굴도 변하고,
목소리도 변하고, 또 입맛도 변합니다. 하긴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는
영원하지 않고 계속 벗겨지고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이전의
세포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약 11개월이랍니다. 따라서
11개월만 지나면 우리는 11개월 전과 전혀 다른 세포를 구성하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만큼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우리들을 구성하는 세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지만, 우리들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사랑 역시 변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저 사람이 변했어.”
라고 말하면서 변화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변하는 것을
‘그럴 수도 있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처도 덜 받게 됩니다.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한 분, 주님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한결
같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우리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기념하는 수호천사 기념일도 주님의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고 하지요. 그 천사가 바로
수호천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께 불평불만을 자주 던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심하고 그 사랑이 변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호천사까지 보내주셔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유지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나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가 있음을 잊지 마세요.
지금 교회의 모습
교회의 모습이 성 토요일은 아닐까요? 제자들은 모두 다락방에 벌벌 떨며
숨어 있으면서 예수님 제자의 몫을 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그래. 무슨 메시아야. 그냥 저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리는데...” 하면서 “호산나”라고 큰소리로 환호했던 목소리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해야 할 몫을 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모습이 바로 현재 교회의 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는 것은 당연히 하지 않으며, 주님이 어디
있냐면서 성당 나가는 것을 커다란 시간 낭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 젊은 사람들을 찾기란 정말로 힘들어 졌으며, 주일미사 참석율도
점점 줄어들어서 교적 상 신자 수의 30% 아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늙은 교회, 침묵하는 교회, 작아지는 교회의 모습에서 주님이
묻혀계신 성 토요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 세상의 가치 앞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 신앙이 먼저가 아니라 세상 삶이 먼저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말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본당신부 탓에 신앙생활을 못하겠다고 말하고, 본당에
나가는 어떤 신자 탓에 도저히 성당에 못 나나겠다고 합니다. 교회의
딱딱하고 권위적인 모습이 싫다면서 성당을 안 나간다고 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성 토요일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듯이, 우리 교회 역시 다시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모두가 서로를 위해 사랑을 쏟는 공동체로 새롭게 분명히
부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 역시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마치 청소년이 혼란과 반항의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 가는
것처럼, 우리 교회 역시 분명히 주님의 보호 아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새롭게 부활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이 계신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0월2일 수호천사 기념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 18,10)
내가 보기에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참 맘에 안들고 무시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이든 저런 사람이든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기에 돌보고 길러주십니다.
특히 좀 모자라고 장애가 있는 자녀들이라면
더 마음 쓰시고 지켜보시며 보살펴주십니다.
우리가 나의 자녀들에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그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일수록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보호하고 계시니까요.
오늘 나를 온갖 위험에서 늘 지켜주고 돌보아주는
나의 수호천사에게 감사를 표합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들 주위에 있는 하느님의 천사를 볼 눈이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의 수호친사여 고맙습니다.
- 구속주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0월2일 금요일 수호 천사 기념일.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1-5. 10)
삶이 아름다운 건 천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함께하는 눈물겨운 고마운 세상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천사들이 있습니다.
걸어온 모든 시간이 천사와 함께 한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에서부터 단풍의 펄럭임에 이르기까지 천사는
우리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힘으로 괴로움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수호천사와 함께 이 시간을 견디는 것입니다.
정성어린 삶의 기쁨을 수호천사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소중한 꿈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줍니다.
일상의 희노애락을 함께 할 수호천사가 있어 행복합니다.
멀리 있는 천사가 아니라 함께하는 우리의 수호천사가 중요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가까이 있는
이들을 통해 당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삶이 아름다운 건 하느님의 수호천사들이
우리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 또한 수호천사처럼 받는 사랑에서
사랑하는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땅의 모든 창조물에 이르는 하느님의 손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0월2일 금요일 수호천사 기념
마태 18,1-5.10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땅의 모든 창조물에 이르는 하느님의 손길
사람마다 인생관과 가치관, 경제관과 사회의식 등이 다릅니다. 신앙인들의
하느님관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초월세계에 머물러
계시고 내가 필요할 때 힘을 주시는 전능하신 분으로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 창공 위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에서 살아계시며 끊임없는 손길로 돌봐주시고 사랑해주십니다.
탈출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탈출 23,20-21)
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고
말씀하십니다.
다양한 영성을 구분할 때 ‘하늘의 영성’과 ‘땅의 영성’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늘의 영성이란 초월성과 신비를 강조하면서 하느님을 전능하신
권능을 지닌 지극히 높으시고 지엄하신 분으로 보는 하느님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관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을 늘 우리를 지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수직 관계에서 바라봅니다. 여기에 사로잡힐 때
따뜻한 사랑보다는 냉철한 이성만이 남게 됩니다.
이와 달리 ‘땅의 영성’은 하느님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 목숨을 바치는 벗이 되어오신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수평관계, 동등한 형제관계이며 어머니처럼 품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초월적이고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신 분으로
받아들이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거기에만 매이게 될 때 하늘과
땅 사이에는 대화도 사랑도 없는 절벽과 같은 공간이 자리 잡게 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길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당신이
원하신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시며,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다시 말해 천사의 존재와 천사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은 하늘과 땅의 공백을 없애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다른
피조물에게까지 미칩니다.
천사의 존재는 넓게 보면 하느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랑의 언어요, 자신을
건네주는 사랑의 몸짓이며, 정의와 평화를 가로막고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사랑의 소통’인 셈입니다. 하느님의 따뜻하고
한없는 자비심, 울타리 없는 사랑, 모두를 재창조하는 생명의 숨결이
되살아나도록 돕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바로 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요한 3,16)
그 까닭을 회상합니다. 나아가 “하늘에는 우리를 돌보는 이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존재가 하나도 없도록 보내주신”(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 천사가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천사를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존재로만 바라보는 감상적 신앙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가 되고, 사랑이
메마르고 정의가 무너지고 인권이 짓밟히는 곳에서 사랑의 혼을
되살리는 소통과 창조의 도구가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청주]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0월2일 금요일 [(백) 수호천사 기념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마태오 18,1-5.10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사탄과의 사움을 계속합니다(묵시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각
개인의 인생여정을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도록 지정하신
영적존재를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수호천사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마르10,21).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19,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수
배우시기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해 봅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처리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 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