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5년 나해 10월10일 토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수도회] 참 행복의 정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요엘 4,12-21
+ 복음 루카 11,27-28
◈ 오늘의 묵상
요엘 예언서의 말씀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하늘과 땅이 뒤흔들린다는 등, 생경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상징들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주제에만 머물러 보겠습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 안에서
종말에 대한 관심은 주로 유배 이후 늦은 시기에 나타납니다. 요엘서뿐만
아니라 즈카르야서, 제3이사야서 등 여러 예언서에서, 종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인데, 서로 병행되는 본문인 미카서 4장과 이사야서 2장에서도,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는 시온에 자리하십니다.
물론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고 성전 안에는 하느님의 옥좌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이 예언서들이 그려 보이는 종말의 장면은 첫 번째로
심판입니다. 우선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시는 하느님께서 불의를
심판하시고 세상을 정화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시온으로부터 구원이
세상으로 전해집니다. 에제키엘서도,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나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쳐 나리라고 이미
예언했지요(에제 47장). 요엘서도 시온 산을 중심으로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고 예고합니다. 이와 같이
심판 뒤에는 구원이 있을 것인데, 지상에서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장소인
예루살렘이 그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써 이러한 예언들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세상 구원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나의 역할에 충실한 오늘
2015년 나해 10월10일 토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 11,27-28
초등학교 1학년 때, 학예회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 반에서 몇 명이 뽑혀
연극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맡은 역은 대사 한 마디 없는 지나가는
행인 3이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반 친구들이 함께 연습하면서 학예회
준비를 했지요. 드디어 학예회 날이었습니다. 연습한 대로 친구들은
연극에 집중하면서 대사를 외웠고, 또한 대본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친구가 대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었지요. 무대 밑에서 선생님께서 대사를 조그맣게 말을 해줘도 이
친구는 선생님의 말씀해주시는 대사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거의 울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다 못했는지 한 친구가 그 친구의 대사를 자기 대사인 것처럼
대신 말했습니다. 문제는 말한 친구는 선한 역할이었고,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던 친구는 나쁜 사람 역할이라는 것이지요. 즉, 착한 사람이
나쁜 말을 한 것입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연극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냥 우왕좌왕 하다가 끝내버렸지요.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역할에 얼마나 충실한가에 따라서 연극의 성공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연극의 배우가 자기 역할이 아닌 다른 사람 역할을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연극의 자기 역할과 상관없이 아무 행동이나 해서도 안 됩니다. 극의
흐름에 맞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지만 훌륭한 연극을 할 수가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맡겨진 역할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기타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맡겨진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하려고 하면 어떨까요? 또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아무렇게 말하고 행동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신 역할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역할에 충실한 사람은
육신으로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안에 사랑이 가득차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욕심을 내면서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탐냈을 때도 많았으며, 되는 것이 없다면서 또 능력과 재주 없음을
한탄하면서 아무렇게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집중을 해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나의 분명한
역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나의 역할에 충실한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은 바로 꿈꿔 오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
예쁜 꽃.
오해가 아닌 이해를....
해외여행을 가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호텔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면
미소를 짓는 외국인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과 달리 웃음에
매우 인색하지요. 사실 저 역시 처음 해외를 나가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가식적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그런 생활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고, 평소의 행동이 나온 것뿐이었지요.
물론 모든 외국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랍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의 미소를 아주 불쾌하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비웃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미소를 보게 되면 얼른
화장실로 향한답니다. 혹시 얼굴에 무엇이 묻어서 웃는 것이 아닐까
해서이지요.
미소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이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물며 복잡하고 다양한 만남 안에서 어떻게 오해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오해를 가져오는 이유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오해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요. 또한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떻게 상대방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하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오해를 하다 보니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나 혼자 멋대로 살아가야 편한 세상이 되고
맙니다.
미소 하나만으로도 많은 오해를 가져올 수 있는 세상에서 이제는
오해보다는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쁜 꽃 하나 더.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8)
여러분은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나요? 누가 그렇게 부러우세요?
돈많은 누군가가 부럽고 멋진 남편 아리따운 부인을 가진 이가 부럽고
잘 난 자식 둔 부모가 부럽고 신앙심이 두터워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많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 교우를 보면 부럽지요?
그런데 부러우면 지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
남 부러워하지 않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하시네요.
그래요. 오늘은 괜시리 남 부러워하며 내 신세타령 하지 말고
하느님 말씀듣고 지키며 나만큼 행복한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봐 하며 가을하늘처럼 맑고 깨끗하게 한번 웃어봅시다.
화이팅!
- 구속주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과 행복은 진정 하나입니다.
말씀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은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말씀 안에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행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말씀을 나누는 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여정이 행복의 참된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머물러야 생명은 충만합니다.
인간적인 것은 수시로 변하지만 말씀은 영원합니다.
말씀이 중심을 잡아주어야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하느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안에 있음을 진정 믿는
묵주기도 성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참 행복의 정원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참 행복의 정원
가을이 깊어갑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벌써 단풍이 예쁘게 들어가는
나무들이 있는가 하면 상록수가 아닌데도 바로 잎이 말라가거나 파란색
그대로인 나무들도 봅니다. 그것은 그곳에 햇빛이 잘 드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환경, 하느님과의 관계 형성과 그 질에 따라 행복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오늘복음의 상황어는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성모님께서 예수님과의 혈연관계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들이 복되다는 뜻으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와 달리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아 기르신 분이기에
복되시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신앙인이셨기에 복되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과 영으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다음
군중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군중 가운데 한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성모님을 칭송합니다. 여기서 신체 일부로 인격 전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법에 따라 모태와 가슴은 ‘어머니’를 가리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복되신 분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어떤 현세적 이유가 아니라 구세주요 메시아이신
예수님, 곧 사랑을 잉태하고 낳으신 것만으로도 모두의 칭송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덧붙여“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품고 예수님과 내적으로 일치를 이루는 것도 칭송받을만한 일이지만 더
나아가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신 말씀을 끊임없이 듣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더욱 축복받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행복과 생명의 뿌리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의 영을 향하여 자신의 전 인격을 향하여 들어 그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말씀과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그분과 함께하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는 이 말씀의
들음이 곧 성사(聖事)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말씀을 들어 마음에 새긴 그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사랑이요 행복의 길인 말씀을 들어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마치 천국 가는 입장권을 받은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귀로만 듣고, 홀로 말씀에 대한 감성적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참 행복이 아님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말씀과의 관계 속에 살아가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참 행복의 정원입니다. 이 정원은 로맨틱한 곳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주변에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소외된 이들, 버려진 이들,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이들, 권력과 자본에 의해 생존의 위협과 핍박을 받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말씀을 실행하는 행복한 이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청주] 하늘을 차지한 사람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0월10일 토요일 [(녹)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낫을 대어라. 수확 철이 무르익었다.>
○ 요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12-21
복음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7-28
하늘을 차지한 사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 상황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주변 환경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내면에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멀리
부산에서 청주라는 곳까지 올라온 여자 친구에게 ‘힘들었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올라오는
동안 너무도 설레고 기뻤습니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 안에 있음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된 행복은 말씀을 행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채워져서 행복하기 보다는 행하는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시다는 것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젖을 먹여서가 아니라 말씀대로 순명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고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고와 땀도 기쁨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이 곧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양보와 배려, 희생을 하고 있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을 행하고 있다면 복됩니다. 혹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그치지 않는 한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내 놓으면서도 행복했습니다.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