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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0월14일 수요일[(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수도회] 진실한 탈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로마 2,1-11
+ 복음 루카 11,42-46
◈ 오늘의 묵상
주일에는 미사에 참례해야 하고, 주일 미사에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강조하다 보니, 적지 않은 신자들이 종교적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살다가 주일 미사에 빠지게 되면 고해소에 가서 이 내용만
가지고 성사를 보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으면 판공성사 때까지 내내 성사를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면 달리 고백할 죄가 없고, 주일 미사
빠지는 것이 내가 범할 수 있는 유일한 죄인 듯이 …….
말씀을 드리자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도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칠하여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그들의 죄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언급하는 “남을 심판하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어떤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겉과 속을 만드신 분, 곧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잔과 접시에 담긴 음식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훈계하십니다. 신앙과 수계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삶이
그것을 뒤따르지 않는다면 바리사이적인 형식적 종교 생활에 불과할
것입니다.
겉과 안이 일치하는 삶, 정직하고 진솔한 삶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소수의
정직한 사람이 다수의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키고 살려낼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받은 것에 대해 감사
2015년 나해 10월14일 수요일[(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모든 이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2,1-11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안식년에 머물고 있는 저의 집에 손님들이 자주 방문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직접 요리를 해서 손님들을 맞이합니다. 밖으로 나가서 음식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사람들에게 음식을
차려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직접 요리를 합니다. 솔직히 그다지
맛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성을 기울여서 하나하나 준비를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음식을 차려주면 기분이 아주 좋아질 때가 있습니다. 과연
언제일까요? 단순히 음식을 만들었다는 즐거움일까요? 아니면 손님이
떠나고 모든 정리를 끝냈을 때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이 음식을 먹고서
기뻐하며 “잘 먹었다.”라고 말해줄 때입니다. 제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을
즐거워하면 할수록 저의 기쁨은 더욱 더 커집니다. 그리고 무엇이라도
하나 더 주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떠올리면서 주님께서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의식주 문제를 물론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생각해도, 또한
이 세상 안에서 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베풀어주시고 계신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것들에 대해
어떤 응답을 하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서 ‘이게 뭐에요. 아직도 부족해요.’라고 계속 무엇인가만을
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어린 아이가 음식 투정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불평불만을 던지는 모습에 주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과연
기쁘게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계실까요?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 불행 선언이 먼저 나옵니다.
십일조는 중요하게 여기면서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생각하지 않는 바리사이,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교만과 허세가 가득한 바리사이,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겉과 속이 다른 바리사이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한
율법교사가 항의를 하자, 편한 것만을 쫓고 있었던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도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의 가장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종교지도자들이지만 그들은
자신이 받아야 할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정작 주님의 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었기에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도 행복을 전해 줄
리가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바리사이와
율법교사의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능력들이 세상에 잘 펼쳐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더 주시려고 할 것입니다.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생각보다는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우리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그 일을 얼마나 빨리했는가는 잊어도 얼마나 잘했는지는
기억한다(하워드 뉴튼).
이런 된장찌개는 기본이 되었지요. ㅋㅋㅋ
용서
어느 연구소에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피험자들을 모집한 뒤에 먼저
그들의 심장박동수, 혈압,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합니다. 그 뒤 자신을
속인 사람, 모욕을 준 사람, 자신을 거부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하지요.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방법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제안합니다.
첫째는 원한의 감정을 계속 유지하는 것, 둘째는 용서해주는 것을 마음에
그리는 것입니다. 실험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먼저 두 번째 방법인 용서를 선택한 사람의 경우는 평온함과 자신 통제를
하게 되면서 심장박동수와 혈압이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방법인
미움을 선택한 사람은 육체적 긴장, 분노, 슬픔을 더 강하게 체험하게
되면서 심장박동수와 혈압이 상승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또한 암,
우울증, 심장마비, 만성요통이 생길 확률이 높아지며 기억력이나 올바른
판단도 약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용서에 실패하면 건강 뿐 아니라 인간관계까지도 단절된다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분노를 통해서 혼자라는 고립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술안주로는 이런 것?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로마 2,10)
내가 종교인이라는 사실이 면죄부일 수는 없으며
구원의 티켓이 될 수는 없습니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비구원의 상태에 있고
같은 믿음의 성도들이라고 구원의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종교인은 비종교인보다 오히려 더 선인이 되어야하고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선을 행하는 사람이면 구원을 얻게 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면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비신앙인보다 더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지 않으면 비신앙인보다 구원이 더 멀어집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선을 베푸는 것이
공정한 하느님의 셈법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입니까? 종교인입니까?
그렇다면 더 선업을 쌓고 악을 더 멀리하십시오.
그만큼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으니까요.
- 구속주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지를 알지 못한다."
(루카 11,42-46)
입은 하느님을 말하지만 삶은 오히려 무덤가에서
살고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했던 지난 시간을 반성해봅니다.
무엇을 위해 이리도 분주하게 살았는지를 알게되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보다는 인간을 향한 갈망이 많았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을 향하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 머물수 없기에 사람에게도 머물수 없었습니다.
모순과 착각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사랑으로 기다려주시며 진정한 행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실은 몰랐던 영적무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바리사이같은 우리의 모습을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순과 착각을 내려놓는 거기에서 신앙은
참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위선과 가면을 벗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진실한 탈피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0월14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루카 11,42-46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루카 11,42. 46)
진실한 탈피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입니다. 푸른 나뭇잎도 가을이 되면 땅으로
향합니다. 자연도 세상살이도 낮은 곳으로 향할 때 제 모습을 찾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임에도 늘 자신이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을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껍질이나 가죽을 벗는 것을 탈피(脫皮)라 합니다. 우리도 이
탈피의 계절에 묵은 생각, 위선의 껍질을 벗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11,42)
바리사이들과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11,46)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불행하다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세부 항목을 빈틈없이 지켰으나
본질적인 면에서 그 율법을 거슬렀습니다. 그들은 이웃에게 정의를
실천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을 실행하지는 않으면서
의인인양 처신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명예와 권력은 추구하면서도
사람을 경시했습니다(11,43).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도록 불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삶의 주인이심을 잊고 나눔과 베푸는 일은 등한시하면서
자신의 영광만을 챙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법인 율법에서
사랑의 혼을 빼버린 채 그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을
구속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우리도 자신이 주인인양 착각하고,
자기만의 틀로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사랑의
도구인 각종 규범뿐 아니라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자기 이익을
위해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거저 주신 달란트를 자기 것인 양 여기며 그것을 통해
인정과 존경을 받으려 하고 명예를 누리려 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을 통해 다른 이를 섬기도록 불림 받은 근원적인 우리의 성소를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 이 가을에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거짓의 틀을 벗어버리게
하소서! 보잘것없는 자신을 마치 주인인양 여기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소서! 제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유연함을 허락하소서!
나만 아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형제들과 이웃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진실, 온유, 절제의 마음과 인내, 선행, 친절로 대할 줄 아는 거룩한
관대함을 주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 기쁨, 평화 안에
머무는 축복을 허락하소서! 제가 만든 껍질과 가면을 벗어버리고 당신
얼로 거듭 나게 하소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청주] 꾸중을 감당하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0월14일 수요일[(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꾸중을 감당하라.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2015년 나해 10월14일 수요일[(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지난 연휴에 복음화 학교 분들과 여수엘 다녀왔습니다. 경치도 좋았고,
음식도 맛있었습니다. 식당 주인께서 저의 복장을 보시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이라고 말씀하신 자매님께서는 음식 값도 깎아
주셨고, 전화를 주시면 맛있는 ‘갓김치’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친절과 맛을 선물해 주신 자매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날, 가지고 간 봉고차의 바퀴가 펑크 났었습니다. 하지만 모두들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만일 운전 중에 펑크가 났다면 위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이어를 갈았고, 정비도 받았습니다. 봉고차는
스페어타이어가 바닥에 붙어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5년 동안 한 번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스페어타이어는 이번에 잠시
자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바퀴로 갈았고, 스페어타이어는
다시금 차의 바닥으로 자리를 옮길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의 가지와 몸체를 보기 마련입니다. 예쁘고 화사한 꽃과
맛있는 열매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무는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찾아내는 뿌리가 있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가 바람도 견디기
마련입니다. 가뭄도 이겨내기 마련입니다. 스페어타이어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식당 종업원이 화재를 진압하고 식사를 하러 온 소방관에게 고맙다는
쪽지를 주었고, 음식 값은 자신이 대신 냈다고 합니다. 그 종업원의 작은
선행이 알려져서 식당에는 많은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종업원은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버님을 위한 장애인 전용 차량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종업원의 어려움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그전에
선행을 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선행을 보시고 평가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선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는
바람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씨앗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행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용기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절망과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외모를 위아래 훑어보는 세상
1/10조 헌금을 잘 내기만 하면 하느님 앞에 괜찮다는 게 아닙니다.
세상도 법만 지키면 좋은 사람 아니고 사람 됨됨이가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외모 점수 위치 같은 형식상의 조건으로 사람을 평하는 세상이지요.
차린 외모를 위아래 훑어보고 그 사람 괜찮다 별로다고 흔히 말합니다.
하늘은 그 사람을 썩어 냄새나는 시체라고 말 할런지 모르잖습니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
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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