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일본을 분석하는 가장 지배적인 틀은 '제국주의'이다. 우리는 일본을 타자로 삼아, 우리의 잠재적 침략자이자 영원한 적으로 삼아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고 하지만(관련글) 아무리 생각해도 그닥 생산적이지 않다. 전에도 언급했던대로 일본이라는 거울에 급급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게 첫번째 문제, 그리고 '일본'이라는 존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게 두 번째 문제다. 하지만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그리고 국민들의 일상생활까지 모두 '제국주의와 대외침략'이란 명제 하나로 조직된 나라가 과연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제국주의 색안경은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가리지 않는다. 막말메이지시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에서 제국주의적 메세지를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학자& 비평가들은 이를 넘어서서, 벚꽃부터, 락그룹 X-Japan의 기타리스트에게까지 제국주의와 침략적 기질을 읽어냈다.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꽃 사쿠라(벚꽃). 어떤 문인은 한꺼번에 폈다 한꺼번에 지는 벚꽃에서 일본의 사무라이적 기질을 읽어내고, 윤중로와 진해의 벚꽃에도 히스테리를 부린다. 비틀즈나 마이클잭슨이 한국음반계를 평정하는 것에는 관대했던 나라에서, 일본대중문화개방을 앞두고 일본의 기타리스트들을 '기타를 차고 몰려오는 사무라이'라 평한 바 있다.(이규형, J.J가 온다.) 비틀즈와 마이클잭슨은 괜찮았지만, 일본의 가수들은 음악성은 둘째치고, '왜색'으로 청소년들의 의식을 점령하여 민족혼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축구스타 미우라와 나카타, 가부키, 사무라이 문화, 벚꽃문화, 검도, 스모, 꽃꽃이...일본의 모든 것은 제국주의라는 이름 아래 있다.
만화를 분석하는 틀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소년 점프>는 그 답을 보여준다. <소년점프>가 70년대 욱일승천하며 일본 주류만화를 대표하는 매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잡지의 편집 방향 덕분이었다. <소년점프> 연재 만화들은 한결같이 ‘노력’ ‘협동’ ‘승리’ 등 3가지를 주제로 다룬다. 만화의 내용이나 소재가 무엇이든 이 3대 주제를 충실히 따른다. 주인공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기가 하려는 것에 끝없이 도전한다. 그리고 그런 도전정신으로 친구들을 감동시킨다. 적도 감동해 동료가 된다. 그리고 팀을 이뤄 함께 도전하고, 마침내 승리해 꿈을 이룬다. 그 꿈이 야구든, 축구든, 무술이든, 아니면 심지어 라면 요리든 마찬가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노력하고, 협동하고, 승리한다는 것은 일본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부응하는 내용이다. 이는 ‘자기가 맡은 한 가지에 목숨을 거는’ 일본인들의 전통 관념 ‘잇쇼겐메이’(一生懸命) 사상이 그대로 만화가 된 것이다. 자기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 그 과정에 목숨을 잃어도 도전하는 것. 그것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만화는 당연히 일본 사회가 국민에게 주입하는 가치관을 대변한다.
노력하고 협동해서 승리하라. 일본만화가 주는 메시지이자, 이것이 일본 국민들에게 전해졌을 때, '제국주의 및 타국에 대한 승리'의 열망으로 사회가 끓어오른다는 것이다. '노력,협동,승리라는 키워드는 잘 파악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제국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동의하기 어렵다. '노력,협동,승리'는 인간의 도전과 모험을 다루는 상상물에서 아주 보편적인 컨셉이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주인공들도 노력하고 협동해서 승리한다. 수천년의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과 황금양털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숱한 할리우드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일본만화의 노력,협동,승리의 컨셉이 두렵다면 그것은 그저 '일본이니까'라는 이유에서 비롯된다.
일본에 대한 편견때문에, 저자는 일본 만화에 담긴 내용들을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 만화계의 치열한 경쟁 탓인지, 전공투 세대의 영향인지 몰라도, 단순한 '승리의 기쁨'만으로 일본 만화계에서 대작으로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나키즘(원피스),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미야자키 하야오), 인간존재에 대한 물음(공각기동대,에반겔리온), 자신의 내면 한계의 극복(슬램덩크, 고스트 바둑왕) 등 이렇게 다양한 주제의식들이 있는데, 일본 만화가 주는 노력,협동,승리의 메시지가 굳이 제국주의로 해석될 이유는 없다.
반지의 제왕 주인공들은 절대권력의 상징인 절대반지를 '버리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이 와중에 인간의 본성과 절대권력에 대한 물음들이 소설 속 곳곳에 녹아나고 있다. 반면 원피스 주인공들은 '원피스'를 '얻기'위해 떠난다며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만 본 것이다. 원피스 멤버들은 해적왕이 되기 위해(루피), 친구와의 약속을 지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가 되기 위해(조로), 학문적 호기심으로 세계지도를 그리기 위해(나미), 용감한 바다의 전사가 되기 위해(우솝), 요리사로서 도전해보고 싶은 오올 블루를 찾기 위해(상디) 즉 서로 다른 목적으로 항해를 떠난다. 각각의 목표는 제각기 다르며, 대부분 '자기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이행하기 위함이다. 나미,우솝,상디와 달리 조로와 루피는 '타자와의 대결' 속에서 얻어지는 지위지만, 일본 전통문화의 특성상 작가는 자기 내면의 공포, 패배감과 싸우는 과정을 충실하게 조명한다. '너도 정말 강했지만, 나는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짐을 지고 있거든'이란 조로의 대사(40권 T본 대령과의 싸움)는 이를 반영한다.
요컨대, 일본만화에서 '승리'는 철저한 자기 자신의 완성이라는 맥락속에서 빛을 발휘한다. 일본만화에서 '노력'이 유독 강조되는 게 이 탓이다. 미국만화 슈퍼맨이 태어날때부터 고민없이 그냥 슈퍼맨이라면, 슬램덩크의 서태웅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에도 부단하게 노력하며 성장한다. 조로는 미호크에게 대패한 이후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는다. 오히려 개인의 천재성에 의존하는 미국 만화의 히어로보다 일본의 노력하는 영웅들에게서 더 인간적인 면과 삶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승리가 결국은 '제국주의와 침략'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게 한국인들의 공포다. 하지만 편견을 제거하고 작품을 감상해보면 어떨까. 슬램덩크의 북산고는 전국제패를 하지 못 했다. 전국최강 산왕과의 경기에서 온 힘을 다하고 다음 경기를 내리 져서 4위에 머문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산왕 전에서, 좋아하는 여자애 부탁이니까 생각없이 농구를 시작했던 강백호는 선수생명의 위기 앞에서, 자신이 진짜 농구를 좋아한다고 깨닫는다.("정말로 좋아합니다...) 노력하는 천재 플레이어지만 독선적이고 남에게 어지간해서 패스하지 않던 서태웅은 강적 정우성을 이기기 위해-즉 더 뛰어난 선수가 되기 위해- '패스란 걸' 한다. 그는 승리를 위한 경기에서 남과 함께 한다는 걸 배운다. 서로 으르렁대던(...그렇다기 보다 강백호가 시비걸고, 서태웅이 무시하고, 강백호 혼자 마구 열내던) 사이인 서태웅과 강백호가 막판 2초만에 두 번의 패스로 만들어 성공시킨 최후의 골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슬램덩크에서 승리는 단순히 남을 이긴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아와 관계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고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의 반지원정대가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절대반지를 버리려고 했다면, 원피스의 루피 일당들은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세계정부와 맞대결하고 있댜. 절대반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은 고대 병기 플루톤의 설계도이다. 설계도를 갖고 있던 프랑키는 '절대권력을 위한 대항마로서 존재하던 고대병기를 절대권력이 소유하려 한다면 없애버리는 게 낫다'(원피스 41권)며 프랑키는 불태워버린다. 반지의 제왕과 무엇이 다른가? (반지의 제왕도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 할리우드, 제국주의의 첨병. 요렇게 묶이지는 않는다.)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전통적 관념은 저자도 인정했듯이 잇쇼겐메이(일생을 걸고 목숨을 바칠만큼 열심히 한다.) 정신이다. 한국사회의 담론적 지형아래, 잇쇼겐메이는 목숨걸고 국가에 충성하여 타국에 전쟁일으키는 이념으로 비추어지고 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진인사 대천명(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과 뭐가 다를까. 직업에 대한 편견이 심하고 관존민비 현상이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잇쇼겐메이와 비슷한 장인정신이나 직업정신은 오히려 필요하지 않을까. 만화 속에서 구현된 잇쇼겐메이 정신들은 대체로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곳이다'로 귀결된다. (지금 정대만을 지탱해주는 것은 채치수가 자신을 위해 스크린을 걸어주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송태섭이 송곳패스를 찔러주고 설사 안 들어가더라도 강백호가 리바운드를 잡아내 준다는 것. 그는 지금 어린아이 같이 자기편을 완전히 의지함으로써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슬램덩크 28권) 이 점을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로 확대시키는 생각은 해 볼 수 없을까란 의문이 도리어 필요하지 않을까.
다른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욕망이 움틀거리는 곳이다. '배를 갈라 사죄하라!'가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는가 하면, '눈물과 인정에 약한 일본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원피스 주인공들은 물론, 김전일의 살인범들조차 애처로운 사연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반면 쿠니미츠의 정치에서는, 부패정치인의 눈물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본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팀과 동료가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일본만화의 세계이지만, 정작 일본에는 사회생활을 거부하는 오타쿠, 니트족들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어쩌면 원피스와 슬램덩크의 메시지들은 이런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교과서를 뜯어고치는 우익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우리가 국민교육헌장 외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반대하는 교사들이 꿋꿋이 나오고 있다. 일본 만화들은 이런 복잡한 지형과 맥락 아래서 등장하는 것들이지, 천편일률적으로 제국건설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일본만화에 대한 편견은 '일본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큰 문제다. 일본은 협력의 상대이든, 경쟁상대이든, 꼬인 역사적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대상이든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의 아마테라스 신화부터 제국주의적으로 인식해 들어가고서는, 일본의 고대천황제와 근대천황제의 다른 점을 파악하지 못해, 근대 일본 천황제에 결정적 비판은 날릴 수가 없게 된다. 일본인에게 신사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왜 주변국들이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분노하는지 모르는 일본인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 극우파가 아니라, 아예 자신과 상관없는 역사적 문제를 제기하는데 짜증이 난 니트 족들에게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일본인의 혼네(본마음)와 다떼마에(겉으로의 내색)를 '솔직하지 못한 섬나라 근성'으로 파악하는 경영진이 일본 기업과 제대로 파트너를 맺을 수 있을까. 제국주의 깔때기즘을 집어던져야 하는 여러가지 이유들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이 서평은 만화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비판하고자 한다. '왜 일본 사람들은 <소년점프>로 대표되는 청소년 만화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만화가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만화가 핍박받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청소년은 물론 어른까지 만화에 우호적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뭘까.' 필자는 이처럼 만화는 당연히 이렇게 인기가 있으면 안 되는데, 높은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보아 '정권에 도움될 만한' 무언가가 있다라는 문제의식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렇기에 일본 만화 속에 담긴 메시지들을 진지하게 읽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깔때기로만 분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왜 영화를 좋아할까? 결국 영화속에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잠복해 있어서다!란 결론을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화에 대한 편견과 제국주의 색안경을 벗었다면 일본 만화에 대한 보다 많은 진실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비판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많은 일본만화 가운데, 여성을 타자화하고 남성중심적 성 관계를 은연중 강조하는 작품들이 꽤나 많다. 일본만화가 단지 '왜색적이고 야해서'가 아니라 이런 부분들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걸 비판하는 일본의 여성-지식인 단체도 있다. 자민당의 당 강령이 남녀평등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다.(시사저널 지난주 호;;) 가부장제에 기초한 천황질서가 일본사회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제국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만화나 벚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제안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유연성을 키우려면 지식인들이여 색안경을 이젠 벗어라.
덧1. 또 길어졌다.ㅠ_ㅠ 어떡하면 핵심내용 다 담고 이 길이의 1/2로 글을 쓸 수가 있을까.ㅠ_ㅠ 덧2. 나루토는 안 봤고, 드래곤볼도 애니매이션은 몇 번 봤어도 거의 안 봤고, 다 본 것이 슬램덩크, 원피스이기 때문에 그 만화들 중점으로 예를 들었다. 덧3. 이샤님...이건 부탁한 걸 제대로 하기 위한 워밍업^^;; 봐 주세용;;;(...혹시 원고 안 쓰고 블로그 하냐고 할까봐^^;;) 덧4. 저 책에 대항(?)하기 위해 원피스를 분석한 시리즈 포스팅을 할 계획이나...일단 지쳐서 휴식; 할 건 하고 해야.ㅠㅠ
첫댓글 구구절절히 옳은 말씀이네요. 우리 사회에는 상업반일주의라고나 할까요? 뭐 그런게 있지 않을까도 싶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