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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0월21일 수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청주]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낫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로마 6,12-18
+ 복음 루카 12,39-48
◈ 오늘의 묵상
우리가 위령 미사에서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면서 “그는 세례를 통하여
성자의 죽음에 동참하였으니 그 부활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하고 올리는
기도문은 로마서 6장 앞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성자의 죽음에 동참했을까요? 그래서 그분의 부활도 함께 누리게
되리라고 바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에 순종하고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 세상에 드러나는
나의 모습을 지키려고 불의를 저지르거나 거짓을 감춘다면, 아마도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죽지 못하였기 때문이겠지요. 커다란 죄악을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순간마다 해야 하는 수많은 선택에서
“죽을 몸”의 욕구에 좌우된다면, 아직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죄의
종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려면 그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잊은 셈이지요.
도둑처럼 들이닥치는 주님의 날, 또는 개인의 삶에서 마지막 날은 예기치
않은 결산의 날이 될 텐데, 주인이 떠나고 없는 동안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요. 더욱이 주인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완전히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며,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라는
격언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오늘도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랑을 실천하는
2015년 나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9-48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타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이를 우리는 일상 삶
안에서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이기게
되면 선수 못지않게 우리나라 국민들도 기뻐하게 됩니다. 솔직히 선수
당사자들에게는 많은 이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돈이 생기는 것도 또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기뻐하면 나도 함께 기뻐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결국은 ‘스스로 쓸모없다는
생각, 버림받았다는 생각,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타적인
존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홀로 남았다는 생각 때문에 이 세상의 삶에
미련을 접게 된다는 것이지요.
언젠가 한 겨울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강물로 뛰어 든 청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기자들이 무섭지 않았냐는 질문을 던졌지요.
그러자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무서웠죠. 하지만 그렇게 해야 제 마음이 편하니까요.”
언젠가 급하게 길을 가고 있는데 서로 다투는 두 아저씨를 보게
되었답니다. 말려야 할 것만 같은데 그냥 말싸움만 하고 있는 것이라서
나서서 말리면 ‘오지랖 넓다.’라는 말만 들을 것 같았지요. 더군다나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문제는 약속 장소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타적인 마음이 우리의 본성이 아닐까요? 그런데 점점 이타적인
마음이 아닌, 이기적인 마음이 본성이고 정답인 것처럼 행동하는 우리인
것 같습니다. ‘남을 도왔다고 뭐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도와야 할 순간에 외면하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이익이 없으면
행동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려고만 합니다.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동인 것이지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무에 충실했을 때 나를 만족시키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받은 것이 많은
만큼 이웃을 향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마지막
순간에 내려지는 심판이 가혹할 것이라는 경고이십니다.
특별히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주님과 멀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내가 얻을
행복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덕행으로, 부자는 선행으로 이름을 떨쳐야 한다(주베르).
떨어진 낙엽. 이제 가을입니다.
내가 조금만 더 들어주자.
딸만 6명인 어느 행복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친구로부터
예쁜 인형 하나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는
6명이고 인형은 하나라서 누구에게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고민 끝에 말했습니다.
"오늘 제일 말 잘 듣는 사람에게 이 인형 줄게"
그 말을 듣자 여섯 딸이 한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에이~ 그럼 아빠 거잖아"
아이들 보기에 아빠가 엄마 말을 제일 잘 듣는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아이들의 눈에 그렇게 비칠 정도면 행복한 가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말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들어주기를 힘쓰는 삶’이고,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추한
삶은 ‘들어 달라고 떼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말을 더 많이
하기 보다는 남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을 통해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힘든 삶을 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어떨까요? 온
가족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듣고 계십니까?
학업이나 직장 생활로 힘들어하는 자녀의 말을 얼마나 들었습니까?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친구의 말은 들어보셨습니까?
들어야 할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말들을 통해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을 행복으로 가득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가족입니다.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루카 12,47-48)
여러분은 아는 것이 많습니까?
법도 잘 알고 윤리와 사람의 도리도 잘 아시지요?
교리도 많이 알고 성경도 꽤 많이 알지요?
이렇게 많이 알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하느님께서 더 이뻐하셔서 내가 좀 잘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더잘 봐주시겠지요?
천만에요!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더 잘 알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매를 맞는다네요.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고도 지은 죄가 더 무거운 법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모르고 성경과 교리지식이 짧았을 때는
내가 잘못할 수 있지만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이미 알고있다면
그분의 뜻을 모르는 체하며 하느님 자녀답지 않게 살 수는 없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신앙인보다 못 사는 사람은 더 큰 벌을 받게 됨을 명심하는
오늘 되십시오.
- 구속주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39-48)
수도원 근처의 가을 들판이 하나 둘 비어져 갑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마치 우리의 삶처럼 감사와 아쉬움으로
진하게 다가옵니다.
많이 주신 것을 제대로 간직하지 못해 낭비했던 어리석은 우리의 시간과
많이 맡기신 것을 더 나누지 못해 게을러서 불충실했던
우리의 시간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첫 번째 길은 늘 준비하며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늘 준비하며 사는 삶이란 우리모두가 하느님께로 돌아갈
가난한 순례자들임을 명심, 또 명심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모든 것은 잠시 우리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충실함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더 깨어있음을 우리에게 청구하십니다.
사랑과 감사의 책임에 더욱 충실한 신앙인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주님을 향한 충실성과 사랑의 책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나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루카 12,39-48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루카 12,48)
주님을 향한 충실성과 사랑의 책임
오늘날 사라져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장인(匠人) 정신입니다. 장인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변함없이 헌신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며 충실히
몰두하는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한 충실성과 헌신의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편의주의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빨리 변하는 현상 때문인지
신앙생활마저도 ‘대충주의’에 젖어가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루카 복음사가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12,42-46)를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시켜 전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주님의 뜻을 잘 알아
합당한 준비를 하고 하느님 백성을 잘 돌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은 일시적으로 흉내만 내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늦어질 수도 있지만, ‘생각지도 않은 때’(12,4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12,46)에 오실 수도 있기에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책임을 맡은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12,42-44) 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하느님 백성을 충실히 돌보는
교회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되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한편, 주님이 늦게 오시는구나 하며 하느님 백성을 잘 돌보지 않는 불충한
지도자는 ‘절단을 내버리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12,46).
나아가 교회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준비를 하지 않거나
주인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몰라서 행하지 못한 평신도들보다 더한
책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12,46-47). 예수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12,48) 하고 말씀하시며 지도자들의 책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의 영혼을 돌볼 책무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요
그분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이 책무는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책무로서 그 어떤
핑계나 다른 일 때문에 미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시는 주님을 맞을 합당한 준비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무가
교회지도자들만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축성과 사제 축성, 수도 축성 등을 통하여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고,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 주님께 되돌리며, 오직
하느님의 일에만 마음을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자발적인
봉헌과 하느님의 축성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기 시작되고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면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항구함과 깨어있음, 충실성,
책임을 지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온갖
현상들에 휘둘리지 말고 변함없이 주님을 의식하고, 깨어 주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항구함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매를 맞을 것입니다.
또한 충실함은 주님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입니다. 세상일도 집중하고
몰입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는데 하물며 영혼 구원이야 얼마나한
충실함이 필요하겠습니까. 충실함은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깃든 인내야말로 충실함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대충주의와 편의주의, 그리고 변덕과 현상적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는 충실한 종으로서 사랑의 책임을
다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청주]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낫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9-48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낫다.
어린시절 기억입니다. 시골에는 ‘아이스께끼’ 장사가 있었습니다. 일주에
한두 번 고물 자전거를 타고 와서는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비료포대, 고무신발, 구리철사 등 그야말로 돈 되는 고물은 무엇이든
받아 챙기고 어름을 채운 나무통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씩 내어
주었습니다. 비료포대하나도 귀했으니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모였지만 먹지 못한 채 구경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저도 너무 먹고 싶었는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고 있다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1원짜리 동전 하나였습니다. 1원이면 아이스크림 두개입니다.
신이 나서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습니다. 옆에 아이들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쫓아 오신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며 놀랬습니다. 그 뒤는
상상에 맡깁니다. 저는 그날 아이스크림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돈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서 얘기하지만 전에는 작은집 울타리를 엮어놓은
구리철사를 풀어다가 엿을 사먹은 일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하신다”(히브12,6)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히브12,10). 우리의
부모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꾸짖음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12,47-48). 따라서
지금 매를 맞는 것이 다행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매를 맞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관리인입니다. 그리고 관리인은
주인이 바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충성스러움이 요구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의 것을 내 것 인양 남용하여 멋대로 쓴다면 주인은 더 이상
그에게 관리를 맡길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그것을 관리하도록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과 능력, 재물 등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써야 합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
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12,48)고
하셨으니 누군가 나에게 요구한다면 많이 받은 줄로 생각하고 또
주님께서 많이 맡겨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기 바랍니다.
교회의 일을 돌봄에 있어 그 직책이 높은 이는 편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어려운 일을 하게 됩니다. 책임이 무거울수록 더 하느님께
바쳐야 할 필요와 요청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지만 다른 이들을 영적으로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걸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2015년 나해 10월21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제1독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12-18
복음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9-48
지난 토요일에는 복음화 학교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단체이기에 참석을 했습니다. 인사말을 하고, 5시간
동안 심포지엄의 진행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인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학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고, 플라톤은 현실의 세계와 이상의 세계를
구분하였습니다. 현실의 세계는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속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희생하셨고,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관념의 세계를 따르기 보다는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삶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대교회는 연대와 소통의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또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고백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민족, 사상의 벽을 넘어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자연과 생명과 연대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테이야르드 샤르댕, 메튜 폭스,
토마스 베리, 토마스 쿤과 같은 분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을 넘어서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물이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도다.’라는
아름다운 시를 남겨 주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신 기적을 표현한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던 것처럼,
오늘의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나눔 정신으로 함께 사는 예수님의 길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하는 말처럼 하늘에도 공짜가 없다고 합니다.
세상엔 공짜가 있을지 몰라도 하늘에는 정말 공짜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의 공평하지 못한 분배까지를 하늘은 정확히 다 청구 한답니다.
위의 말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므로 신앙인은 믿고 따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예수님과 수호 천사가 다 체크하지요.
하늘 뜻 따라 나눔 정신으로 함께 사는 것이 예수님의 길 맞거든요.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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